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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라는 행위 또는 창조 그 자체와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것 같은 닷컴의 세계에, 또한 닷컴의 세계와는 다르게 조급하지 않게, 오프라인적으로 "창조 " 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책, 롤로 메이의 " 창조와 용기 " 를 다시 읽기 시작한지도 벌써 달포가 가까웠다.우연히 집의 서가에서 이 책을 다시 발견한 순간, 내가 잊고 있었지만, 서점의 층별 코너별 구석구석을 뒤진 끝에 뭔가 아주 남이 알아서는 안돼는 보물을 주운 사람처럼 비밀이 새어 나갈새라 입을 꼭 다물고 돌아오던 날의 기억과 함께, 나는 이 책 저자의 머리말 첫 구절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다시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는 창조성이라고 하는 매력적인 문제에 매달려 왔다."라는.
대부분의 창작물들이 이미 창조적 행위의 산물인 것에 반해 이 책은 창조라는 그것에 대해. 창조 그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창조성이라는 것은 오직 행위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보여지는 것이라는, 의식세계에서든 무의식세계에서든 게으른 사람에게는 섬뜩한 구절에서 쉽사리 간과하기 쉬운, 재능보다는 행위의 중함을 느낀다.따라서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슬쩍슬쩍 내비치는,미국은 행동의 나라라는 말 또한 예사롭지 않게 와 닿는다.
때때로 같은 구절을 이튿날 그 이튿날까지도 다시 읽으면서 여느 책 한권에 버금가는 정서적 포만감과 읽는 사람의 감정을 어떤 정점으로 몰아 가는 듯한 긴장감이 유별난 이 책은 그것이 창조와 용기를 넘어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랜 시간 들려 주었음을 알게 된다.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몇 잔째인가의 커피를 마시고, 그만큼 자주 멍하니 뒷산을 올려다보게 만들고, 그러고서는 늘 그림자처럼 뒤따라다니는 어쩔 수 없는 생의 불안에서 벗어나, "사는 것 그 까짓 것!"하며 일순 만용을 부리게도 하는, 일테면 감정의 고양을 한껏 맛보게 하는 책이다.
현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따라서 자기애가 넘치는 세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자기해체 자기방기의 세계에 다름아닌 것도 같다.따라서 어딘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마땅히 되돌아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이런 책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소중하다고 여겨진다. 선뜻 읽혀지지는 않으나 정적 속에 더위를 숨긴, 그 치열함에서 여름과 어울리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당신의 창조에 의해서 획득되는 특정한 형상을 당신이 찾아낼 때에는, 기이함과 예민한 즐거움의 감각, 또는 아마도 보다 좋은 표현을 한다면 온화한 희열의 감각이 나오는 것이다...... 우주창조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질서는 무질서에서, 형상은 혼돈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기쁨의 감각은 그것이 얼마나 적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들이 존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이 역설은, 그 순간에 우리들이 보다 생생하게 우리들 자신의 한계까지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니체가 쓴 운명애, 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희열의 감각을 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