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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라. <베풂과 용서, 미로슬라브 볼프> 계속해서 쪼들리는 생계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몇 해 전 지출 리스트를 작성했다. 씀씀이의 진원지를 찾아 정리하면 계속 늘어나는 마이너스 통장을 다소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헌금(십일조, 감사, 주일, 선교, 건축, 장학, 구제헌금, 당시 내가 섬겼던 교회는 헌금 종류가 참 많았다), 주유비, 관리비, 학원비, 생활비... 쭉 목록을 적어 가는데 도무지 줄일 것이 없었다. 이미 좌우에 날선 카드(?)로 막 긁는 것이 몸에 익은 나에게 몸집을 줄이는 것은 다이어트만큼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항목이 있었다. 유레카! 드디어 찾았다. 신학대학원을 포함한 복지단체의 후원금이었다. 금액을 다 합쳐봐야 한 끼 식사 정도였지만 내게는 삭제 목록 0순위였다. 이 정도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이는 이 가난한 목회자라고, 매달 드리는 헌금에 구제와 선교의 비용이 다 포함되어있다고, 더 이상 이중 구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런 내적 속삭임과 자기합리화로 결국 그렇게 베풂이 끊겼다. ‘처음’의 여운은 길다. 내게는 교회 첫 사역의 기억도 그렇다. 처음의 설렘과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잊지 못할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분은 주일학교 부장집사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장이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도 경험이 미천하여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부장 교사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기에 내가 중심이 되어 부서를 이끌었다. 교회 규모가 워낙에 작았기에 나 혼자 1인 다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배 후의 프로그램도 내가 이끄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그 날도 예배를 마치고 한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부장 교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마이크를 확~ 낚아채더니 자기가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논의한 내용을 알 리 없고, 본인의 필대로 진행을 하다 보니 행사가 엉망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어린 전도사라도 그렇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마이크를 뺏기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느꼈던 모멸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더 가관은 그런 작자(표현을 이해하시라)가 담임목사에게는 정말 잘했다. 이런 것을 두고 입에 혀처럼 한다고 할게다. 결국 그는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 기막힌 현실 앞에 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역을 하다보면 그런 사람 한 둘은 꼭 있다. 혹자는 그런 이들이 있기에 목회자가 더 긴장하고, 기도하게 된다면 좋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백번 옳다. 허나 머리는 끄덕여지지만 가슴은 여전히 냉랭하다. 그럼 나는 그를 용서했나? 글쎄.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한 것을 보니 미용서인 듯 하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마따나 베푸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누가 베풀며 살려고 할까? 미국만이 아니라 소송하기 좋아하는 한국 문화 속에서 사는 그래서 도무지 용서를 모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334p) 볼프는 바로 이런 물음을 갖고 인색하며, 잔뜩 화가 난 우리에게 얼마든지 베풂과 용서가 가능하다고 소리친다. 자! 그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볼프는 그것을 “닮음”으로 풀었다. 베풂의 당위를 설명하는 볼프의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똑같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닮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똑같이 베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과 비슷하게 베풀 수 있고, 의당 그래야 한다.”(97p) 용서의 당위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닮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과 비슷하게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263p) 따라서 하나님을 닮음이 관건이다. 그는 계속 말한다. 하나님은 베푸시고 용서하신다. 그러니 우리도 베풀고 용서해야 한다고. 어떻게 베풀고 용서해야 하는가?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처럼 하면 된다고. 어떻게 베풀고 용서할 수 있는가?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 된다고. 그러고 보면 그렇게 인색했던 것은 계속 내 지갑만 보았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가 가득했던 건 내가 입은 피해만 곱씹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유사하게 베풂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니 한결 가볍다. 사실 우리는 닮음을 같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냐고 처음부터 포기했다. 그러한 수준은 이 땅에서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일로 간주했다. 시도해 볼 엄두도 못낸 것이 사실이다. 허나 비슷하게라도 해 보라고 하니 해 볼 만하다. 하나님을 닮은 내가 먼저 베풂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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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는 1장부터 3장에 걸쳐 베푸는 삶에 대하여 말한다. 1장에서 그는 우리가 만든 그릇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실재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과 한계, 욕망에 따라 대체되어진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실제 모습과는 별개로 하나님을 흥정꾼으로 혹은 산타클로스로 대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인 것이다. 볼프는 선물에는 답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에 상응하는 것을 드릴 수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가 믿음으로 수용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가? 2장에서 볼프는 우리의 베풂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주신 하나님을 본받아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흔쾌히 베푸신다. 그것은 자발적인 베풂이다. 우리 또한 다른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서로 베푸는 가운데 기쁨을 공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베푸는 삶을 통해 기뻐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베풀어야 하는가? 신세진 것보다 더 많이 베풀되,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나 우리의 도덕적 청렴으로 덕을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선물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다. 우리 안에 이기심과 교만과 게으름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있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베풀 수 있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다함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작은 행동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모든 것을 다 채워주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혜의 방편을 통해 후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또한 우리는 나누는 삶을 통해 물질과 타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뀜을 알 수 있다. 절대적 영향으로 자리 잡았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내면적인 풍성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으면서, 우리의 존재까지도 부요하게 되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미 풍성하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기꺼이 즐겁게 나누면, 그 나눔을 통해 우리 또한 풍성하게 되어질 것이다. 명제적이거나 추상적인 앎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이 베푸는 삶이 될 수 있는 과정들이 조금 더 기술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볼프는 4장부터 6장에 걸쳐 용서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악행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용서’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전에 잘못한 행동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잘못을 행한 사람은 죄책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볼프는 용서가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의 잘못이 없다고 하는 행위가 아님을 말한다. 용서는 철저하게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고 규정하고 명명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용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용서의 더 적극적인 의미는 가해자에게 선물을 베푸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이 그릇되었다고 명명하지만, 그 행위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용서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악행을 그저 두지 않으셨다.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꾸짖으셨다.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가? 바로 성부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위해서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희 의로우시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를 베푸심으로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는 우리의 모든 빚을 갚아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의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져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손을 활짝 펼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 또한 우리는 회개를 통해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가 있기 전부터 용서를 베풀어 주시지만,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에게 용서하라고 강권하신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철회하신다고 볼프는 강력하게 권고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악으로 악을 이기려고 한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은, 우리에게 가해한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게 만든다. 실제로 용서는 너무나 힘겹다. 우리를 가해한 사람들이 행한 그 잘못된 행동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왜 용서해야하는가하는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볼프의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게 된다. 볼프는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과 권한까지 주어졌다고 말한다.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그릇된 기억 혹은 해석으로 가해자에게 또 다른 가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를 철저한 피해자로 위장하고,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잘못 다룰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또한 실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볼프는 이 책을 통해 용서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들, 우리의 실제적인 고민에 세밀하게 응답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용서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공동체를 통해 용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조금 더 많이 다루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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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고난주간이 되면 예수님이 담당하셨던 십자가의 고난을 재현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뜻은 가상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왜곡이다. 예수님이 처형당하실 때 두 명의 죄수 역시 십자가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훨씬 더 깊고 풍요로운 뜻이 담겨있다. 사순절 동안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날 위해 피 흘리며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죄송스러워하고 눈물짓는 것으로 사순절을 보내는 것 또한 십자가를 호도할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고난당해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의미가 중요하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것을 ‘베풂과 용서’로 명명한다. ‘베풂과 용서’야 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말이다. 십자가를 통해 베풂과 용서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우리와 ‘흥정하시는 분’ 혹은 ‘산타클로스’와 같이 우리를 한없이 안아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흥정해야 하는 분도, 산타클로스처럼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더라도 용서에 대한 우리의 왜곡 역시 존재한다. 흔히 우리는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볼프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죄를 잊어버리셨으며 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그의 설명은 복음의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왜 풍성히 누리지 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회개와 뉘우침은 용서에 대한 반응이고 뉘우침이 없는 것은 용서의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이다. 계속해서 볼프는 용서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용서의 참된 의미를 주지시킨다. 예를 들어 용서는 용서하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는 용서가 자신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해를 끼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때 교정되어야 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구호도 용서가 잊는 것이고 죄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용서의 완성이라는 것에 비추어보면 용서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심어주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고 감사하기가 어렵다. 여기에는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땅의 문화가 한 몫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프가 베풂과 용서에 대한 공동체의 역할을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 것은 매우 중요하다. 베풂과 용서를 왜곡시키고 베풂과 용서가 설 곳이 없도록 만드는 이 땅의 문화에 저항하는 새로운 공동체와 문화 즉 교회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교회의 현실을 보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다. 볼프가 이 책에서 루터를 많이 인용한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다. 루터가 십자가의 은혜를 그 누구보다도 더 깊게 깨달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바로 여기로부터 왔다.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우리는 루터에서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책에 소개된 루터의 말이 생소한 것을 보면 루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그렇게 잘 전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책을 덮으면서 루터를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뿐 아닐 것 같다. 십자가는 베풂과 용서의 결정체다. 교회는 그 어는 곳보다 베풂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묵상하면서 우리가 깨닫고 품어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사순절 묵상용으로 기획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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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그러나 아직도 먼 그 길 미로슬라브 볼프, 『 베풂과 용서 』(복 있는 사람, 2014)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저자가 인용한 크로아티아의 속담이다. 우리가 “베풂과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그만큼 그것에 멀다는 반증이다. 역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회의 각박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세상이 미치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매일 반복한다. ‘법대로’ 하는 것은 양반이요, 법 위에 군림하고 법을 조롱하는 사람과 엮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니 베풂과 용서는 이 시대의 천연기념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베풂과 용서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초대한다. 크로아티아에서 오순절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30년 이상을 공산주의 치하에서 뼈아픈 차별을 견디며 성장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복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인다. 자신의 아들과 형에 대한 이야기 등 베풂과 용서라는 주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자 자신을 위한 신학적 통찰과 사색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베풂과 용서”의 모델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하나님처럼 베풀고 용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또 그와 같은 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신학자적 꼼꼼함으로 매우 세밀한 분석을 제공한다. 더욱이 바울 서신과 마틴 루터의 저작을 통해 저자가 제시한 길이 이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관된 방향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특별히 저자는 베풀고 용서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했다고 자부하는 것들이 실상은 우리가 속해있는 문화와 집단의 영향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베풀고 용서하는 공동체일수록 우리는 보다 쉽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다시 한번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베풂과 용서의 길은 마땅하지만 현재로서는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함께 가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길이 조금은 덜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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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일어나는 변화의 삶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를 읽고 봄이 오는 소리와 함께 건네진 감동적인 책이다. 증오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내고, 블랙홀 같은 극단의 자기중심으로 움켜쥔 이기적인 손을 펴게 하는 놀라운 편지다. 무덤덤하게 읽어갈 수 없는 책이다. 본서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머무는 성도의 삶의 존재론적 본질을 다루고 있다. 삼위하나님과 교제는 우리로 형언할 수 없는 부요함에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는 흥정꾼이 아니며, 산타할아버지마냥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선물을 주는 분은 더더욱 아니라고 현대적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비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존재적으로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강조한다. 삼위하나님은 깊은 사귐 속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분이시고 나누시는 분이심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모든 것을 공급받으며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선물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드리는 어떤 것도 받지 않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볼프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귐에 동참하는 삶이라 말한다. 베풂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이지만 받은 선물을 이웃에게 나누는 통로이며 매개의 삶으로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삶을 이끄는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하는데, 첫째는 탈취하는 삶 둘째는 획득하는 인생, 마지막으로 베푸는 삶이다. 용서하는 세 가지 방식 역시 소개한다. 첫째가 복수의 방법이고, 다음이 정의의 태도이며, 마지막으로 용서의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베풂 속에 살아가고 용서를 먹고 마신다. 성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공급과 용서 속에서라야 생존하고 죄책감에서 자유 할 수 있다. 저자는 성도의 삶의 핵심으로 베풂과 용서를 잔잔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과 사귐 속에 들어간 성도들은 베풂과 용서 안에 호흡하고 생존한다. 우리는 이기심과 증오의 독기품은 마음을 십자가에서 자신을 허비하며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중화시킨다. 수평선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너와 나를 나누고, 그들과 우리를 절편 하여 경계 짓는다. 배제의 땅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포용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정의와 정의의 쟁투 속에 부서지고 갈라진 틈을 그리스도 안에서 메운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교회도 공동체도 하나님을 닮게 한다. 그의 책 <삼위일체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서방과 동방의 교회질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베풂과 용서>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머무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큰 변화를 주는 능력인지를 강변한다. 우리는 나누고 용서하는 원천이 될 수는 없지만 받은 것으로 나눌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그의 책들은 뜨거운 온기를 남은 글들이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삶을 떠나 말하지 않는다. 형의 머리가 으깨어져 죽어간 끔찍한 사건을 용서로 지워내는 부모의 삶을 반추하며, 질퍽한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한 복판으로 파고든다. 읽어내는 내내 공감과 함께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있는 성도로서의 부요함을 묵상하느라 중간 중간 읽기를 멈추어야 했다. 읽어가는 내내 독자 된 나의 마음을 밝히고, 어둡고 습진 이기심과 증오를 드러낸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함께 성도의 의무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