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세이아 1권>에서 트로이 전쟁 후 기나긴 모험을 마치고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몰살시킨다. 자신의 제위를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물려주고 믿음직한 동료를 모아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데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스파르테였다. 그곳에서 메넬라오스와 해후하지만 나태한 삶에 안주한 그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다. 트로이 전쟁의 시발점이자,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꼬셔 그녀를 납치하고 크레타로 향한다. 크레타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이도메네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도메네우스는 자신과 귀족들의 탐욕을 채우고 향략을 영위하기 위해 서민과 노예를 억압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에 반한 이도메네우스와 크레타의 귀족들을 벌하고 난 후 자신의 동료인 강돌과 헬레네에게 크레타를 맡기고 섬을 떠난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아프리카였다. 그곳에서 오디세우스는 귀족들의 나태와 사치, 그리고 오만을 목격하고 서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알게 된다.
<오디세이아 2권>은 아프리카(이집트)에서 오디세우스가 핍박받는 서민과 노예를 선동해 파라오와 귀족들을 몰아내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반란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오디세우스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다. 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고된 과정을 거쳐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부족 마을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습을 접하고 또 다시 오디세우스는 기존의 부패한 혹은 파렴치한 것들을 벌한다.
<오디세이아 1권>을 읽을 때는 무법자 같은 오디세우스의 행보가 재미있고 황당하기는 했지만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2권에 이르러 보니 <오디세이아>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이 니체의 철학,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됐다. <오디세이아>에서 보이는 오디세우스의 생각과 행동이 실은 기존의 질서에 회의하고 안주하는 삶을 거부하고 영혼과 이성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수행임을 느꼈다. 이런 깨달음이 있은 후 읽어가다 보니 <오디세이아> 전체가 니체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집트를 뒤짚어 놓은 오디세우스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자 할 때 그와 동행하고자 모인 이들에게 오디세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말은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하는 철인(위버멘쉬)의 삶과 범인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영혼의 중요성을 역설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고통과 고뇌를 통해 진정한 영혼을 마주할 수 있음을 주장했지만 많은 도시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 듯 보였지만 체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세상의 노예로 안주하길 바라는 자들이다.
오디세우스는 사막으로 나가고 선지자에 이끌리 듯 그의 동료와 추종자들은 오디세우스를 따른다. 사막을 행군하는 것은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오디세우스에게 사막이 주는 고통과 고독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이며 수행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를 따라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고 맹세한 자들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힘든 여정에서 식욕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충족되지 않자 불평하고 고통 앞에 자유가 무슨 소용이냐며 떠든다. 이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마지막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차라투스트라가 철인의 조건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디세우스는 이러한 마지막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미개한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을 담아 그들을 바라 볼 뿐이다.
사막의 황폐하고 적막한 환경에서 자라난 푸른 풀잎을 보며 오디세우스는 말한다.
오디세우스가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황량한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의지로 푸른 잎을 틔운 풀의 결단과 용기는 고독과 고통을 이겨내고 의지를 관철시킨 존재의 위대함을 담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교화시키려 자유와 영혼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인간의 본능에 휘둘리는 보통의 사람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오디세우스가 이성에 기반한 진정한 자유와 영혼을 얻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상에 새로운 이성을 세우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리라 선언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니체가 언급한 바를 답습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외에도 <오디세이아> 전체적인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 문장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영원회귀가 역설적 사상이지만 정의대로 어떤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했을 때 모든 찰나의 순간은 영겁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매 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고 현재를 허투로 보낼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한다.
고독한 오디세우스가 결전을 앞두고 산에 올라 신에게 말하긴 처음에는 <오, 신이여, 나를 신으로 만들어 주소서!>라고 소리치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신이여, 나를 신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부활시키는 이성의 숨결 속에서 어느새 싹튼 '젖먹이 아이'를 뱃속에서 느낀다. 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낙타, 사자, 그리고 갓난 아이를 상징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디세이아> 1권을 펼쳐 들었을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감흥을 얻길 기대했었지만 예상과 다른 전개에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오디세이아>의 내용이 다채롭고 서사적인 문장이 싫지 않아 어렵움이 있었지만 읽어 나갔다. <오디세이아 1권>을 다 읽었을 때조차 (아둔한 나는) 니체와 <오디세이아>를 연관짓지 못했는데 <오디세이아 2권>, 특히 사막을 건너는 부분에 니체의 사상이 극명하게 베어있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오디세이아>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오디세이아>라는 고전을 기틀로 니체의 사상을 담아내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오디세이아>의 중구난방처럼 보이던 전개가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으며 남은 <오디세이아 3권>까지 읽으면 좀 더 명확한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오디세이아>가 쉬운 책도 아니고 가벼운 책도 아니지만 한번쯤 니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PS) 아둔한 나는 2권에 이르러서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가 논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고 이전의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돌아보게 됐지만 다른 독자들은 더 일찍 본질을 알고 접근하는 것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