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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 간의 간격을 좁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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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의 일곱 계명 중에 나온다. 하지만 예외적인 동물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절대적인 주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고 동시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시시각각 육식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광우병(狂牛病)이 그렇고 조류 인플루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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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의 일곱 계명 중에 나온다. 하지만 예외적인 동물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절대적인 주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고 동시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시시각각 육식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광우병(狂牛病)이 그렇고 조류 인플루엔자(AI)가 그렇다. 육식에 대한 두려움이 지구를 숨 막히게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후대책이라는 것이 놀랍게도 잔인하다. 발생농장은 물론 반경 몇 미터이내의 동물들이 매장을 당한다.

수많은 동물들의 떼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철저한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보았듯 인간은 생존을 위협하는 동물에 대해 비윤리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더구나 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을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좀 더 부연하자면 인간이 동물에게서 멀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사육과 육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불리엣은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사육이다. 그는 사육을 중심으로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그리고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전기사육시대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이 불분명하여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나들 수 있는 샤면을 숭배했다. 동물을 숭배하고 상상 속에서 동물과 함께 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 들어오면서 ‘동물의 왕국’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복잡한 인간 사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 이해관계에 따라 동물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풍부하게 소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사육화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에는 사육동물이 유용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물의 유용성을 물질적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물질적 용도 중에서도 1차적 용도인 고기(meat)를 중요시하고 있다. 예전에는 2차적 용도 즉 양털이나 노동을 얻기 위해 사육화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기 때문에 사육화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저자는 사육화에 따른 인간과 동물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사육시대에는 동물과 접촉하면서 죽음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과 분리되면서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과 행동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었다. 결국 사육화가 산업적으로 소비되면서 동물에 대한 양심은 그만큼 멀어져버렸다. 그리고 종(種) 차별주의를 내세우며 공격한다.

 

가령, 저자는 당나귀를 예를 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육화가 되는 과정에서 당나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제시하고 있다. 전기사육시대에는 당나귀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는 정력의 상징으로 바뀐다. 더 나아가 후기사육시대에는 가장 멍청한 동물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토대로 예전의 멀쩡한 소를 오늘날 광우(狂牛)라고 말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미친 소(牛)라니!

 

일찍이 피터 싱어는『동물 해방』에서 ‘유인원 계획’(Great Ape Project)을 말한바 있다. 이 계획을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간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본적인 권리를 보다 많은 존재(인간이 아닌 동물)에게 부여하려는 것이다.

 

후기사육시대에 인간의 고통은 곧 동물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동물이 진정으로 해방된다고 한다면 인간 또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이 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느낌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p******0 2008.05.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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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우리의 관계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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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난 후, 궁금해졌다. 무슨 책이길래 그런 것일까?   책을 봤다. 인간과 동물의 동거에 관한 내용. 책은 묻는다. 인간과 동물의 동거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동물을 사육하는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왜?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우연히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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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난 후, 궁금해졌다. 무슨 책이길래 그런 것일까?

 

책을 봤다. 인간과 동물의 동거에 관한 내용. 책은 묻는다. 인간과 동물의 동거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동물을 사육하는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왜?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우연히 동물을 먹었는데, 그것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 아닐까?

 

치킨을 ‘고기’로 먹으면서 닭을 죽이지 말자고 외치는 것과 같은 이중적인 모습을 떠올린다.

 

글쓴이는 사육을 중심으로 전기사육시대/사육시대/후기사육시대, 라는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들의 차이를 따라가는 것은, 기대 이상으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전기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 중 어디에서 인간은 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는가. 그것을 사육에 관한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흥미를 넘어서 하나의 충격이었다. 반인반수가 존경받는 시대가 도널드 덕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란.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 이건 정말, 놀, 라, 운, 이, 야, 기, 다.

 

두꺼웠지만 글쓴이의 말을 듣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생각할 것이 많아져서 그것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거야 좋은 책 만나면 으레 있는 일이니 문제가 아니다.

 

이 여행의 끝에서 숨을 고르며 생각을 더 해봐야겠다. 누구, 나랑 생각 같이 해볼래?

b****n 2008.04.1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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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는 것이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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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식동물이오,라고 말하고 다닌다. 물론 <사육과 육식>을 읽기 전에도 나는 그랬다. 나는 잡식동물, 그 가운데도 육식동물이라 밝힌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했던가, 죽을 때까지 몸뚱이 살아갈 동안은 어쩔 수 없어라 나는 고기를 어금니로 꽉 깨물어 뜯어먹고 살고 싶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리.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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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잡식동물이오,라고 말하고 다닌다. 물론 <사육과 육식>을 읽기 전에도 나는 그랬다. 나는 잡식동물, 그 가운데도 육식동물이라 밝힌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했던가, 죽을 때까지 몸뚱이 살아갈 동안은 어쩔 수 없어라 나는 고기를 어금니로 꽉 깨물어 뜯어먹고 살고 싶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리. 그것이 현실이라 말을 한다. <사육과 육식> 나의 육신은 내것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렇게 합리화할까, 자본주의가 즐겨 품안던 논리를 나는 편승한다. 시류에 편승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만족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아 실현이라고 한다. 즉 자존심이라 한다. 충격이다. <사육과 육식>은 단순히 '채식주의' 권장의 의미를 넘어서서 '나'의 위치에 대한 통시적 고찰이다. 그 노정 뒤에 나는 변할 수 있을까. 확신하라, 장담하라, 약속하라... 아니 <사육과 육식>은 강요하지 않는다. 두꺼운 책술 그 속 가득 담긴 이야기는 논리적이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식을 만들고 그 틀에서, 프레임에서 역사를 말한다. 단순한 인간의 역사, 침범과 약탈과 자멸의 역사가 아니라 대자대비 자연과의 공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하고 만족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아실현이라 하던데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금니에는 닭 살코기가 걸려 있다. 나는 육식동물이다. 그리고 나는 괴로워한다. 사육되는 생명의 처절함과 불편한 현실에 대해서 나는 지독히도 괴로워하면서 육식 부드러운 살코기를 뜯어갈기며 야금야금 저작활동을 열댓 번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삼킨다. 그리고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때때로 채식주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사육과 육식>에서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난다. 여태 역사는 인간의 것이었다. 그리고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합리성에 나는 철저히 '새'가 되었다만 새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지 않다는 사실. 그들의 고통을 느낄 새가 없다. 그리하여 <사육과 육식>을 읽는 동안 무심한 듯,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육과 육식>은 하늘 아래 같은 생명을 지닌 동물, 그러나 밥상에 오를 운명을 지닌 그들을 가볍게 동정하는 수준을 벗어나 있다. 사육시대 전후로 역사를 구분하면서 새로운 관점의 열어주고 있다. 굵직한 뼈대 아래에서 우리는 협소한 사고에 벗어나 진정한 생명사상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끝날 이야기 아니다. <사육과 육식>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다진다. 나는 갈대가 아니다. 생각하는 갈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하늘 아래에 생명 얻어 살아가고 있는 개체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러한 생각에 심도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사육과 육식>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해답을 쉽사리 도출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연한 살코기를 씹어갈기면서 '채식'을 주장하고 있다.  

k****t 2008.05.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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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도메스틱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프리 도메스틱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 내용보기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고 하고 한동안 광우병에 관한 괴담들이 인터넷화두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곡류등 작물뿐 아니라 육류제품역시 대규모 축산업으로 생산될 것이고, 철창속에서 갖은 항생제와 영양제(스테로이드?)를 주입당하며 오로지 육질만을 위해 비인간적인(아니 비동물적인, 아니 부당한) 방법으로 사육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나 있었다. 최
"프리 도메스틱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 내용보기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고 하고 한동안 광우병에 관한 괴담들이 인터넷화두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곡류등 작물뿐 아니라 육류제품역시 대규모 축산업으로 생산될 것이고, 철창속에서 갖은 항생제와 영양제(스테로이드?)를 주입당하며 오로지 육질만을 위해 비인간적인(아니 비동물적인, 아니 부당한) 방법으로 사육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나 있었다. 최근에 읽은 미국인 가정의학 전문의가 쓴 남자아이 바로 기르기를 다룬 한 책에서는 미국에선 이미 30년전부터 소에게 스테로이드를 먹여왔다고 되어 있었다. 광우병은 둘째치더라도 스테로이드 먹인 소고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게되는 것 아닌가 염려스럽다. 미국국내 소비되는 육우에게도 스테로이드를 마구 먹이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수출용에만 그런 건 아닐지. 푸에르토리코의 여아들이 7-8세에 벌써 초경을 하는 등 신체적 조숙이 나타나자 스테로이드 먹인 소고기( 이 나라에 수출된)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나 의심해보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최근에 로하스를 사표로 삼은 한 식품기업은 자사가 운영하는 친환경매장에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이념에 호응하며 자사의 매대에서 판매되는 육류는 동물 권익 보호의 규울을 지키고 있노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야생동물보호니 자연환경보존의 차원에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을 살리자라는 구호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축으로서의 동물, 우리가 식용하는 사육동물의 권익에 대해 생각하자는 주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적어도 국내의 사람들에게는) 약간 낯설게 다가오는 점도 없지 않다.

 

컬럼비아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리처드 불리엣이 쓴 이 책은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한 역사학자의 답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야생에 있던 동물이 사육화되어 오늘날에 이른 과정을 자세하고 방대한 자료를 통해 역사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우리가 잊고 있던 인간과 동물의 본래적 관계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포스트 도메스틱 post- domestic(역자는 '후기사육시대' 라고 옮김) 시기이며 이 시기는 이전의 사육시기와 그 이전의 프리 도메스틱 pre- domestic('전기사육시대'라고 옮김)의 단계를 거친 후에 도래한 단계로 설명한다. 즉 사육시기란 마치 지금 성인들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형태인 가축을 기르고 잔치때 소나 돼지를 직접 잡아 육식하던 행위가 당연시되었던 시기이다. 반면 포스트도메스틱의 시기(내 생각에는 이 말은 사육시대 다음시대라는 느낌이 강해 후기사육시대라고 할 때 연상되는 사육시대안의 후반부를 가리키는 의미와는 다르다고 본다)는 실제 사육동물의 도살을 목격하지 않으며 제품하되어나온 육류를 통해 사육동물에 관한 정서나 이미지를 연상하지 못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고기, 동물가죽, 실험동물을 완전히 거부하지 못하면서 이것이 제공하는 제품들과 문화적 서비스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부적인 일들을 알게되면서 반발도 히게 된다. 그리고 프리 도메스틱은 사육시대 이전의 시기로 동물과 자신을 어렴풋이 구별하게 된 호미니드 조상들이 인간/동물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생활 형태에 눈뜨고 동물과 관련된 미적 감수성을 보여주거나 영적 명상(제의)을 실행에 옮기던 시기였다.

 

저자는 현재 포스트도메스틱의 시기가 프리도메스틱시기의 정서를 재연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 정서란 수천년의 사육시대 동안 억눌려왔던 정서, 즉 인간에게 이익을 주지만 인간화할 수 없는 동물들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거나 멸종위기의 야생동물과 다시 접촉하고싶은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정서들이다.

 

사육이전 시기에서 사육화가 진행된 과정은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라고 보통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저자 불리엣은 이 과정이 반드시 의도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것을 자연스럽게 발생된 공생관계로 취급하고 싶어한다. 돼지의  사육화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자신의 정착지에서 돼지가 음식쓰레기를 처치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새끼돼지를 애완용으로 받아들여 사람들이 먹는것과 같은 식물뿌리와 덩이줄기를 주었을 것이고 몇십세대를 거듭하면서 돼지들은 자발적으로 사람사는 마을로 찾아들어 음식물 찌거기를 먹어치우면서 가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집돼지가 된 돼지들은 희생동물로서 종교적 제의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불리엣은 사육시대로 이행하면서도 살아남았던 상상적이고 영적인 용도로서의, 인간/동물 관계가  가축화가 보다 더 진전됨으로써 마침내 쇠퇴의 길을 걷는 과정을  제 8장 정서적 상징의 추락이란 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장은 마치 당나귀에 관한 재미있는 책속의 책같은 느낌을 자아내었다. 저자는 자신이 낙타이용 경제에서 당나귀가 담당한 역할에 관한 연구를 하던 중에 알게된 당나귀에 대한 신적인, 악마적인, 멍청한 바보같은 모습을 많은 실제 인용 이야기들을 통해 들려주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당나귀로 변한 멍청한 닉 바텀의 이야기를 읽어가다보니 자꾸 영화<슈렉>의 똑똑한 당나귀가 생각났다. 포스트 도메스틱 시기의 인간화된 동물모습의 하나인......

 

저자가 제시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지적은 동물을 바라보는 미국식 정서에 관한 것이다. 강력한 종교적 뿌리를 가진 농업국가로서 과학적 연구및 보호단체가 이제 막 싹트려고 하는 미국에서는 픽션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을 인간화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했다는 점이다. 무수한 동물 종 중 인간을 오직 한가지 종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교리가 암시하듯, 인간을 동물화하기(이것은 다윈의 영향을 받은 영국과 유럽 풍토에서 나타난 경향)보다는 " 동물을 인간화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것이다. 피터 래빗과 도널드 덕의 성격을 비교해봐도 짐작이 간다.

 

불리엣은 애드리언 프랭클린이 <동물과 현대문화>에서  해리엇 리트보와 키스 테스터의 입장을 비교하고 있는 것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리트보의 편에 서 있음을 시사했다. 역사적 문화적 변동의 의미를 인정하면서 사회인류학과 푸코에 기초한 테스터의 분석을 더 예리하다고 평가한 프랭클린은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 부르디외, 푸코, 엘리아스 보드리야르를 언급했지만 이들 중 누구도 동물 문제에 몰두한 사람은 없었다고  불리엣은 강조한다. 따라서 자신은 "변화가 지닌 지역적이고 문화적인 우연한 성격을 가까이서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가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리트보의 입장이 호소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다양하고 방대한 지역적 문화적 자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일본인의 동물에 대한 생각을 통해 사육이전 시기의 정서를 찾아내고자 했는데 어떤 기회에 어떤 연유로 일본의 자료와 접하여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내었는지 좀더 개인적인 고백이 필요해 보였다. 일본에 대한 단순한 반감이라기보다, 혹여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 그는 맹자와 공자의 사상도 언급한다)- 신비화하기에는 너무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중국인들을 포기하고나니 남은 것이 일본의 음식문화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 동양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도 있어 보이는 걸 어쩌랴. 미야지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둘러싼 모험>은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 문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저자가 찾은 "행복한"-적어도 저자에게는 그럴 듯 싶어 붙여본다- 상상력의 미래는, 다시 말해 동물의 정령화를 보여주는 상상력의 산물은 서구에서는 아직까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전 TV에서 구마모토 지방의 한 말농장 주인은 잘 팔리는 말고기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농장(이는 곧 공장이었는데)의 한 곳에 말의 영혼을 위로하는 비석을 세우고 매일 직원들과 함께 기도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있었으며 집에 돌아와서도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켜준 말들의 영혼을 위해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육시기의 잔상과 정령에 대한 감성을 깨우지 못한 포스트도메스틱 시기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독특한 행동이긴 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동물에 대한 감수성이라기 보다 사업에 대한 일본인들의 꼼꼼한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불리엣은 구마모토 말고기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이 내용을 알았다면 하야오나 하루키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 전체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과격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포스트 도메스틱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육가공품으로만 만나는 사육동물의 격하된 위치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상상의 영역에서 퇴출당한 산업상품으로 변질되어 버린 그들을 창조적 심성으로 되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불리엣은 진정한 천재가 나타나 프리 도메스틱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해 주길 원한다.  "동물이 신과 교감하고 반인반수가 존경받던 시대, 동물을 죽이는 것이 경외감과 죄의식이 들게 만들었던 시대의 마법을 재발견하려면 진정한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f****e 2008.05.29.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인간과 동물의 관계 재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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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가 우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일찌기 한 가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개고기 논쟁과 관련해서 했던말인데,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고기는 쇠고기 이지 개고기가 아니다. 잘사는 나라는 엄청나게 쇠고기를 먹고 못사는 나라들 땅을 차지하고 풀을 길러 소를 키워내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나머지는 버려 그걸 다시 소에게 먹이고, 그렇게 해서 광우병이 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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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가 우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일찌기 한 가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개고기 논쟁과 관련해서 했던말인데, 세상에서 문제가 되는 고기는 쇠고기

이지 개고기가 아니다. 잘사는 나라는 엄청나게 쇠고기를 먹고 못사는 나라들 땅을

차지하고 풀을 길러 소를 키워내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나머지는 버려 그걸 다시

소에게 먹이고, 그렇게 해서 광우병이 걸리고...그걸 못사는 나라에 억지로 수출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는 이랬다. 마왕의 예언이라는 말로 네티즌들 사이에

넘쳐나는 말이다. 섹스와 피, 폭력으로 물들어버린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이해

하는데 <사육과 육식>만큼 좋은 책은 없을 것 같다.

 

리처드 블리엣은 역사학자로서 인간이 생각해온 동물의 사육에 대한 생각을 전면

부인하고 동물의 입장에서 사육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 한다. 과거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현재와 미래,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인간/동물의 경계분리가 아니라 동물 자체에 부여된

역사와 이야기의 추적을 통해서 사육이라는 개념을 통한 인간/동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이야기하고 있다. 블리엣은 사육을 전기 사육시대, 사육시대, 후기 사육시대

로 구분하면서 각 시대별로 특징지어지는 사육의 개념을 말한다. 전기 사육시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하고 동물에 대한 신성한 상징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동물의 얼굴을 한 신의 모습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있다. 이후 사육시대에 들어서면

서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동물이 대상화되고 축산물 소비에 양심의 가책은 없어

지게 된다. 후기 사육시대에는 인간의 곁에 애완견 처럼 동물은 식구가 되어버리고

의도적으로 축산물을 위한 동물들은 사람의 눈에서 사라져버린다. 이런 사육화의

과정은 영국, 미국, 호주 등 영어권 세계에 국한된 현상이며, 사육 자체도 인간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지극히 우연한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알아오던 사육에 대한 상식이 무너진다. 정착생활과 물질적인 용도로 인해

사육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블리엣에 의해 조금씩 변화한다. 인간들이 가졌던

물질적인 용도에 맞춘 사육의 의미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우유, 달걀, 모피, 운반...

등이 목적이 아닌 희생제의, 신성한 제사를 거행하고 제물을 바치며 서로 나누는

형태에서 사육이 발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제품의 사용이 불필요하다는 내용을 역설한 책이 있었다. 다 자란 포유동물은

정상적으로는 젖을 자신들의 식량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들 또한

더이상 유제품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소를 가두고 유제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비참한 사육을 할 필요성이 더이상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소에게 소의 잔해를

먹이고 미친소를 다른 나라 국민에게 떠 넘기는 힘의 논리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젖으로 버터, 치즈, 요구르트를 만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제품이 필요하다면 그런 야만적인 방법까지 동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하지 않는 이유는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에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둘러싼 모험]은 전기사육시대에 가지고 있던 동물의 정령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육과 육식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한 시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사육과 육식으로 인한 많은 문제점들이 표면화 되고 있는

시기이다. 애완동물과 야생동물에는 호의적이지만 축산물을 만들어내는 사육

동물에 많은 반감이 나타나고 있다.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 여러가지 문제점이 내재된 상황에서 과거 전기사육시대에 가졌던 동물에

대한 신성함과 동물을 죽이는데 대한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게끔 어떤 커다란

상상력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저자는 기대하는 것 같다. 동물과 인간의 새로운

패러다임 정립. 이 책이 바라보는 사육과 육식은, 동물의 시각에서 역사적 관점

으로, 그리고 미래 변화하고 새롭게 정립될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있다. 적절한 시기, 적절한 주제로

많은 이들에게 관심 받고 새로운 사고로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길 바란다.

e****e 2008.05.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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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 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사육 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내용보기
'사육과 육식'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동물에 관한 윤리적인 태도와 접근이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기원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라는 추천평 한마디에 이 책을 덥석 집어들었다.하지만 이리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물론 이 책이 형편없다는 평가의 말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나의 후회는 단지 내가 이 책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독자이기 때문에
"사육 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내용보기

'사육과 육식'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동물에 관한 윤리적인 태도와 접근이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기원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라는 추천평 한마디에 이 책을 덥석 집어들었다.
하지만 이리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물론 이 책이 형편없다는 평가의 말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나의 후회는 단지 내가 이 책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독자이기 때문에 후회가 된다는 뜻일뿐인 것이다.

사실 얼마 전에 '도덕적 암살자'라는 소설책을 읽었기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이 책 역서 그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하고 읽어볼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설의 내용은 도살되고 사육되는 가축 - 우리가 식용으로 사육하고 있는 동물에 대한 끔찍한 보고서라고 한다면 이 책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이 담겨있다.
'동물 종들과 인간이 맺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에 대한 불경스럽고 유쾌한 사색'이라고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 책을 유쾌하게 읽을 수 없었다.
인류문명이 시작되고서부터 이뤄졌던 '문화'라는 것에 대한 다른 시각이 낯설음을 넘어서 혐오감을 일으키고,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던 가축의 사육이라는 것을 뒤엎어 버리는 이야기들이 끔찍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랄까... 뭔가 불편한 진실을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는 순간에도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책을 읽는 내내 농담처럼 - 물론 진담이었지만 - 기억나는 내용이 하나도 없고 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 역시 그렇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고, 목축에서 농경사회로 발전하였고, 불의 사용이 인류문명을 발전시켰다... 따위의 단순도식화되고 유아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었기에 이 책이 더 어렵다고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역사와 문화속에 드러나는 당나귀에 대한 상징과 비유의 이야기는 놀라울수밖에 없었고, 이해가 안되는 이 책을 읽는 와중에도 '인간의 동물화'와 '동물의 인간화'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니 어쩌면 그리 나쁜 책읽기는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후기 사육시대에 들어와서 도살되는 가축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은 외면하고 한편으로는 애완동물의 인간화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모순은 바로 지금 당장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회식자리에 가게 되었고, 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열심히 고기를 먹어댔다.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의 적나라한 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저자 리처드 불리엣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정부분 동감하는 부분도 있고 뭔가 딱히 꼬집어 정리할 수는 없지만 - 후기 사육시대의 잔인함이든, 동물의 인간화든 그 무엇이든간에 - 분명한 것은 '동물학대'라는 것은 단지 애완동물의 학대만을 지칭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있을지라도 말이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해서 쓸데없이 한마디 더 붙이자면, 인간의 동물화와 동물의 인간화에 대해 아주 쉽게 생각했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엉키고 있는 중이다....


 

r***2 2008.05.16.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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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인간과 동물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내용보기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광경이 있다. 너무 어린 날에 본 광경이라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분명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이른바 공장지대였고, 주택가는 그 공장지대를 피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 주택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낯선 장소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꼈지만 돌아
"인간과 동물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내용보기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광경이 있다. 너무 어린 날에 본 광경이라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분명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이른바 공장지대였고, 주택가는 그 공장지대를 피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 주택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낯선 장소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꼈지만 돌아갈 궁리를 하기 보단 이상한 기계음으로 시끄러운 그 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거기서 보게 되었다. 닭털로 보이는 수북한 뭉치들이 벨트 위에서 어디론가 올라가고 있고, 한쪽에서는 털이 뽑힌 닭들이 어떤 창고 같은 장소로 옮겨지고 있었다. 충격을 받기보다는 어린 마음에 신기하고 놀라웠다. '쟤들이 이런 곳에서 저렇게 되고 있구나!'하는 다소 무감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그런 광경을 봤다면 어떨까? 그때 내가 봤던 것보다도 훨씬 청결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고기화'되고 있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그 때의 나처럼 무감각하게 반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지금의 아이들은 나의 경우처럼 우연히 라도 그런 장면을 보게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사육과 육식>의 저자 불리엣이 구분한 사육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사육시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적어도 그 경험을 할 당신엔) 그렇다면 앞선 언급한 경험에서 '무감각한' 반응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게다가 난 그 때 보다도 더 어렸을 때, 돼지를 살육해서 고기를 발라내는 과정을 지켜봤었고, 거기서 나온 간과 피를 맛본 경험도 있다.(어렸을 때 유난히 눈이 나빴는데 그래서 돼지 간을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저자가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는 사육시대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전기사육시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로 때로는 동물이 신성시되기도 했던 때다. 이는 원시 토템신앙이나 신화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사육시대'. 이 시대는 인간의 이해에 따라 동물들이 철저하게 대상화된 때이다. 그래서 동물의 위상을 땅에 떨어졌고, 동물의 가치는 필요에 따라 돈으로 지불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후기사육시대'. 이제 인간들은 동물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식탁 위에 오르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사육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논하고, 시체로서의 육식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 왜 인간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더 나아가 윤리적 불안까지 느끼게 되는 걸까? 저자는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력이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주장하며 약자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이 의문에 답한다. 그리고 이런 '후기사육시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와 의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상력'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전기사육시대'의 동물이 인간과의 관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인간과 동물 공존하기 위해선 서로가 동등하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하며 높아진 인간의 위상을 낮추고, 낮아진 동물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나는 '사육시대'적인 사고를 지녔다고 했다. 그러나 닭목을 비틀고, 돼지 배를 가르는 일상이 계속 되지 않는 이상 나의 그런 사고는 그 당시에만 한정될 뿐이다. 지금의 나는 정말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육식에 있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진 않지만, 이따금씩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인간의 먹이로만 키워져야 하는 동물들의 현실을 볼 때는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 말이다. 언젠가 강호동씨가 나오는 TV프로에서 별안간 '동물도 고통을 느낄까?'라는 내용으로 엉뚱한 내기를 벌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정답은 거의 모든 동물이 고통을 느낀 다는 것.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적어도 이 작은 사실만이라도 잊지 않는 다면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불편한 동거'는 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l****i 2008.05.2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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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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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과 육식이라는 주제로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니 정말 놀랍고도 재미난 책이다.예로 등장하는 책과 저자들을 하나하나 알고 싶어졌다.동물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기 보다는 지나간 나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의 생활에 변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를 겪었거나 진행중이다.오리 목을 비틀어 자르고 피를 대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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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과 육식이라는 주제로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니 정말 놀랍고도 재미난 책이다.예로 등장하는 책과 저자들을 하나하나 알고 싶어졌다.동물들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기 보다는 지나간 나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의 생활에 변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를 겪었거나 진행중이다.오리 목을 비틀어 자르고 피를 대접래 따라 마시던 할머니,달아나는 똥개를 끝까지 따라가 쇠막대기로 뒤통수를 가격하여 눈알이 튀어나오게 한 할아버지,개와 돼지의 도살 장면은 수도 없이 봤엇다.내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김이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니...저자 말대로 무감각이 하늘을 찌르는 결과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근간이 된 것일수도 있겠다.동물들이 온 천지에 깔려있는 환경에서 살다시피한 사육시대인들이 어떻게 성과 폭력에 반응하고 대처하는지 유심히 읽어보았다.실제 나와는 다르지만 내면의 화는 분명히 관련이 있어보였다.전혀 나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고는 부정하지 못하겠다.도살 장면을 보지 못하고 자라온 세대들인 후기 사육시대인들도 역시 전면긍정 또는 부정은 할수 없지만 1/4이상은 찬성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감정이라는 것이 동물들을 통해 단련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좀 섬뜩했다.아무리 애를 써도 잃엇던 감각을 찾기란 어려울것 같다.그 전의 과정을 똑같이 반대로 경험한다고 해도 말이다.윤리적인 관점에서 전체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폭력,섹스는 제외시킬수 없는 아주 기본적인 본능이라서 더욱 더 자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변태냐 동성애자이냐가 곧 인간과 동물과의 연관성에서 찾아볼수 있다니 놀랍지않은가?인간과 동물의 역사속에서 발견한 진리가 숨어잇었다.미래를 예측하기란 쉬웠다.후기사육시대로 들어오면서 동물에 감정은 그저 식량인 것이다.전기사육시대부터 지금까지 동물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였다.윤리의식을 고취시킨다는 것보다는문화사적인 측면으로 봐야 하는 책같다.
n******7 2008.05.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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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동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사육동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내용보기
최근의 사건들, 광우병 안전 논란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AI로 인한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닭의 살처분등 온나라가 사육동물로 인해 시끄럽다. 현대의 사육시스템은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공장화 되었고 효울과 생산성을 극대화 하는 것이 주요한 경쟁력이 되었다. 그로인해 저렴한 비용으로 고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공장이라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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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사건들, 광우병 안전 논란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AI로 인한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닭의 살처분등 온나라가 사육동물로 인해 시끄럽다. 현대의 사육시스템은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공장화 되었고 효울과 생산성을 극대화 하는 것이 주요한 경쟁력이 되었다. 그로인해 저렴한 비용으로 고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일종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은 높은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광우병과 조류독감 같은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기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인 결과는 광우병으로, 작은 공간에 빽빽하게 갇혀 있는 닭들은 그 위생상태로 인해 더욱 질병에 취약해진다.
이런 문제로 먹거리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며 먹거리 산업에 대한 반성과 인식의 전환이 일부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육동물과 사육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은 여전히 산업화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사육동물에 대한 역사를 추적하고 재구성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잊혀지고 있는 동물과의 정서적 관계와 가치를 다시 살려내려 시도하고 있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 시작되는 사육화의 역사적, 고고학적 고찰과 철학적 성찰, 사회적 상징을 탐구하는 광범위한 시도는 다양한 이론과 관념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언젠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균,쇠>에서는 사육화 할 수 있는 주요한 종들과 근접해서 살아가는 역사적, 지리적 사건에 의해 인간사회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주장을 했다. 저자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독특하고 개연성있는 논리로 다이아몬드 교수와 다른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또다른  멋진 통찰을 보여준다.

 

첫장에서 섹스와 피(폭력)에 관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는 대중 매체와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후기사육시대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육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그 이면에 깃든 깊은 정서적 의미를 추적해 나간다.

 

사육의 역사를 단계별로 구성하고 그 전개과정을 제시하고 있는데 '모더니즘'을 두고 전기(pre)와 후기(post)를 두어 구분하듯  사육시대를 전후해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대의 사이를 이행기로 정의 하고 있다. 이 단계적 이행의 초점은 동물이 어떻게 인간에 의해 사육화 되었는지, 사육화 과정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현대에 이르러 그 과정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기존의 가설들을 인용하고 때론 반박하면서 심도있게 조망하고 있다.

전기사육시대의 시작은 인간의 문명에 중요한 발화(언어의 사용)시점을 확정할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 것처럼 사육화도  여전히 추측의 영역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존의 가설들이 사육화의 과정을 사냥꾼의 관점에서, 그리고 물리적인 용도 (고기, 유제품등)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에 회의를 품고 다른 시각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인류의 조상이 뛰어난 사냥꾼으로 대부분의 식량을 사냥에 의존했다는 기존의 주장을 벗어나 채집자로서, 씨를 뿌리는 농부로서 주변의 동물들과 공존했으며 우연히 또는 우발적으로 이들 중의 일부가 가축화 또는 애완동물화 할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사육동물의 용도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기존의 가설들은 주로 물리적용도(Material use)를 강조해 동물에서 얻을 수 있는 고기, 제품, 노동, 능력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했다면 저자는 정서적인 용도(Affective use)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애정, 미적인 감상, 영적인 고양등 감수성과 관련이 깊다. 사육화가 동물의 기능(고기, 유제품등)을 사전에 인지하고 의도된 목적을 실행한 것이 아닌 정서적인 접근이 먼저 이루어진 다음 사육화가 진행되면서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희생제의' 또는 '제사'라고 불리는 행위의 중요성을 여러 고대 사회의 사례를 들어 강조하는데  전기사육시대엔 이러한 제의를 통해 물리적 용도(고기)와 정서적 용도(영적 고양)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사육시대에까지 지속되었으나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사육동물의 물리적 용도가 훨씬 다양해지고 중요해지면서 정서적인 용도는 점차 추락하다 후기사육시대에 이르러선 거의 소멸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사육동물과의 정서적인 상호교환 없는  육류의 대량 소비와 동물에 대한 감정사이에서 모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물이 정서적으로 추락해 가는 과정은 당나귀의 예를 집중 분석하고 있는데 이 부분만 따로 분리해도 한권의 멋진 책이 될만하다. 예술, 신화, 민담은 인간/동물 관계의 원형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창이고 이 풍부한 은유적 함의에 접근해 상징을 풀어나가면서 당나귀가 예언자로서의 신성한 역할에서 어떻게 멍청하고 유머러스한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내려가는지 그 궤적을 따라간다.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장이었다.

 

마지막 장에선 후기사육시대의 대안으로 일본문화의 독특한 전통을 소개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에서의 독특하게 전개되는 동물과 인간관계를 살펴본다. 인간/동물 관계에 대한 정서적이고 영적인 관계을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적 분석은 상당히 독창적이고 야심찬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일본이라는 문화가 갖는 독특한 인간/동물의 상징체계가 과연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선 흥미롭긴 하지만 회의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한국인으로서 일본문화에 대한 편견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영미권에서 두드러진다는 후기사육시대의 특징들이 이미 우리 사회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점은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고기는 더 이상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소 같은 정서적 의미로 다가 오지 않는 그저 공장에서 나오는 대량 소비재에 불과하다는 인식, 미래를 위해선 이런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듯 하다.

z***a 2008.05.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