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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사회의 면모를 조금은 앞서서 볼 수 있다고나 할까? 노인 문제, 주거 문제, 출산 문제, 취업 문제 등, 눈으로 가린다고 가려질 것들이 아닌 문제들이 사회 이면에서 그리고 소설의 주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면 더욱 깊이 공감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보다.
특히 내 또래의 여성들이 겪는 사회 생활, 사람 사이의 갈등 그리고 본인의 꿈의 갈망, 이 모든 것들이 녹여 잔잔히 가슴에 여린 감동은 준 일본 소설이자 제 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라임포토스의 배>는 실제 작가인 쓰무라 기쿠코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녹아든 소설이다.
'라임포토스'라는 단어가 조금은 생소할 수 있지만, 사실 화초를 가꾸는 이라면 라임포토스라는 이름은 몰라도 이 식물의 존재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라임스킨답서스, 혹은 스킨답서스라 불리우는 이 식물은 공기정화식물로 사랑을 받는 식물 중 하나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유년 시절, 군인 관사에 살던 나에게 이 식물의 이미지는 '거실 천장을 다 뒤엎은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로 각인이 되어 있다. 조그맣던 화분에 심겨져 있던 라임포토스는 지치지 않는 생명력과 끈기로 줄기를 뻗어 나갔고, 그렇게 오래된 시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차지하고는 결국 거실 천장까지 뻗어나가 핀셋으로 고정을 시켜 온 집안을 화원으로 만들 뿐 아니라, 제 기능과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소설 <라임포토스의 배>는 이 식물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주인공의 삶에 빗대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나가세 유키코라는 여성으로 29세, 계약직, 공장에서 일하며 연봉은 163만엔 (우리나라로 치면 연봉 2000만원 정도라 생각하면 용이하겠다)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엄친딸도, 금수저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딸, 경제 불황 속 어쩌다 운좋게 구한 직장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며 당장 어떻게 살까? 라는 장기적인 고민보다 먹고 살 걱정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눈이 보인 건 바로 회사 사무실에 부착된 세계일주 크루즈 광고. 딱 자신의 연봉만큼 여행비용으로 온 세계를 누리며 탐험하라는 광고 문구가 허항된 꿈 같지만, 사실 이 공허하고도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목표이자 삶의 이유가 된다. 딱 1년만, 돈을 아껴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을 모아보자. 그렇게 악착 같이 살아가며 자신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에 읽은 일본소설 하야마 아마리의 <스물아홉 생일, 1년후 죽기로 결심했다>가 떠올랐다.
자살 전, 라스베가스의 한 몫을 건져올리려고 돈을 모으는 구성이 왠지 <라임포토스의 배>의 주인공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일까? 퇴직금을 모아 유럽여행을 가겠다고 악착 같이 돈을 모으던 지난 내 20대가 떠올랐었기 때문일까? 읽는 내내 가슴이 짠했던 <라임포토스의 배>는 일본 문학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에서 묻어난 29세 여성의 삶을 무던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담아 내었다.
특히 친구들과의 우정, (예전에는 친했지만 이제는 이도저도 아닌, 사실 직장 동료가 더 친구 같다고나 할까?) 어머니와의 관계, 독립, 직장 생활의 갈등, 동료와의 관계 등, 우리가 흔히 고민하는 일들을 소설에 담아낸 작가의 이야기는 어느 하나 덧나지 않고 소소하게 담아낸 것이 쓰무라 기쿠코 작가의 매력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실제 취업빙하기를 거쳐 첫 회사에 들어가 혹독한 상사의 괴롭힘 속에 9개월만에 퇴사를 하고, 재취업 교육 후 타 회사에 재입사하여 2012년까지 직장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히 글작업을 하며 문학상을 수상, 문단에 데뷔하며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글을 쓰며 탄탄히 자신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한다. 내가 딱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자니, 내공이 깊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 라는 존경심이 우러 나왔다.
소설 <라임포토스의 배>는 식물 라임포토스처럼 자신의 뿌리를 꿋꿋하게 내리며 본래 역할과 기능을 성실히 해내며 묵묵하게 뻗어 나가는 그녀의 삶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 책은 총 2편의 단편 소설로 후반부에는 <12월의 창가>가 실려 있는데 실제 그녀의 혹독했던 회사 생활이 소재가 되서인지 직장인의 애환을 잘 담아놓아 어렵지 않게 읽었다. (어디든 이상한 직장상사는 존재한다는 물리 시간에 배운 질량 보존의 법칙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이 책을 만나게 된 기대평에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잔잔하면서도 일상 속 공감을 자아내는 일본 소설은 언제나 옳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주택청약과 함께 환갑 크루즈여행을 위한 적금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꽤 모았는데 세계 크루즈 여행하려면 앞으로 몇 십년을 더 모아야겠네요) 이미 전 7년차의 직장인이고,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계약직은 아니지만, 졸업 후 막막했던 심정으로 먹먹했던 가슴을 부여잡고 일했던 기억이 나네요. 즐겁게 읽고 싶습니다.
기대평처럼, 나는 먹먹했던 가슴을 부여 잡았던 옛 기억을 이제는 훌훌 털어 버리고 조금은 더 성장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즐겁게 읽었다. 라임포토스처럼, 그렇게 '나'라는 뿌리와 잎사귀를 찬찬히 세상에 내리면서 말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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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갖는다고 거창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계를 위해서다. 먹고살기 위해 지긋지긋한 직장에 나가고 적게나마 저축을 한다. 꿈꾸는 미래는커녕 당장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러니 사직서를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직장에 대한 고민과 불만은 복에 겨운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들다고 말하고 부당하다는 건 부당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된 것일까.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를 읽다 보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나쁜 말을 하게 된다. 반면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었기에 힘들었지만 즐겁게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지루할 만큼 반복된 일상에서 휴가나 여행은 보상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공장일이 끝나면 친구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컴퓨터 강의를 하고 밤에는 데이터 입력을 하며 돈을 모으는 스물아홉의 나가세는 그저 살아간다. 그저 물만 주면 잘 자라는 라임포토스를 키우는 게 유일한 나가세의 취미라 할 수 있다. 일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 대신 도구처럼 사용되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하기만 하다.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라임포토스의 배」, 14~15쪽 그러다 휴게실에서 세계일주 광고 포스터를 통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일 년 치 월급과 맞먹는 163만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50년 된 낡은 집도 수리해야 한다. 우선은 실현 가능한 지 모르지만 목표를 세운다. 나가세는 점점 더 돈을 아낀다.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친구가 함께 놀러 가자는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가지만 머릿속으로 돈 계산에 바쁘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친구가 남편과 별거를 하면서 아이와 나가세의 집으로 들어오고 생활은 더 쪼들리게 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어머니와 친구 모녀가 가깝게 지내는 모습에 서운한 마음도 든다.
‘돈 때문에, 돈을 쓰지 않으려고, 무익한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열심을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 집에 갈 여유조차 없다. 세계일주 비용은 순조롭게 쌓여갔지만 나가세는 왠지 모르게 허무함을 느꼈다.’ 「라임포토스의 배」, 81~82쪽 「라임포토스의 배」는 나가세와 친구를 통해 스물아홉의 삶을 보여준다. 여행이라는 목표를 세운 나가세, 직장을 그만두고 카페를 차린 친구,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친구, 남편과 이혼을 결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친구. 저마다의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네 그것과 닮아 무척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힘든 시간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그 안에서 소소한 일상의 감사를 누리는 삶.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직장생활을 다룬 「라임포토스의 배」에 비해 「12월의 창가」는 직장 내의 따돌림의 이야기다. 출판 인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은 폭언을 일삼는 직장 상사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계속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결국 사표를 낸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소설이라 그런지 지위를 이용한 직장 내 여성 따돌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직장인의 비애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황당한 실수를 저질러도 일은 계속해야만 하니까요. 머나먼 하늘 밑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도 회사원은 일을 해야죠.”’ 「12월의 창가」, 130쪽
두 편의 소설을 통해 일과 일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일, 연애, 결혼, 육아로 확장된다. 직장 여성이라면, 위킹맘이라면 더욱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을 잔잔하게 그렸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닮은 듯 다른 감성,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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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0회 아쿠타가와 수상작 『라임포토스의 배』 는 직장인의 일상과 심리를 그린 소설과 에세이로 공감 작가로 유명해진 쓰무라 기쿠코의 작품이다. '취업빙하기'라고 불리우는 시기에 취직했으나 상사에게 심한 정신적 괴롭힘을 당했던 전적이 있어서인지 직장인들에게 유독 공감 가는 내용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에 출간된 『라임포토스의 배』를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라임포토스의 배』는 두 가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차고 셔터를 힘차게 내리고 나가세는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포는 사라져갔다. 대신 163만엔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에 아로새겨지려 했다.
싱그러운 표지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안쓰러운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그탓인지 더욱 소설 내용에 공감을 하고 지금 내 상황에 견주어 나는 어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라임포토스의 배>는 주중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친구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집에선 데이트 입력 부업, 주말엔 컴퓨터 수업 강의를 하며 살고 있는 나가세가 우연히 163만엔으로 세계여행을 할 수 있다는 포스터를 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163만엔이 공장에서 받는 연봉과 거의 같은 금액이라는 것을 알게된 그녀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고스란히 저축하여 1년 동안 163만엔을 모아보기로 한다. 조금만 아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여러 일이 있게 되고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을 소비하게 된 나가세.
아사오카가 자신과 같은 조건에서 쓰라린 차별을 당한 게 아님을 깨닫고 겨우 그만둘 마음이 들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는 당연히 이곳과는 다를 것이다. 그곳에는 천차만별의 고통과 또 다른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쓰가와는 깨달았다.
두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나가세와 쓰가와는 힘들고 괴로워보인다. 회사 생활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분명 이 둘처럼 괴로움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목표를 갖게 된 나가세와 쓰가와의 이후의 삶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아마 그들은 이전처럼 힘들고 챗바퀴 도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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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세는 스물아홉 살로 로션 공장 라인에서 일한다.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본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 포스터에 마음을 뺏긴다. 163만 엔. 세계 일주에 드는 비용이다. 그날부터 나가세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모두 모으기로 결심한다. 생활은 친구 가게에서 일해서 받는 돈과 컴퓨터 강사 일에서 받는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한다. 전에 일하던 곳에서 힘든 일을 당해 겨우 공장에서 다정한 오카다 씨 덕분에 적응 중이다. 세계 일주 포스터를 보기 전에 그녀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살지만 각자의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한다. 친구들과 어색한 만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썼던 돈들을 정리하면서 하루치의 일당이 날아간 것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집에서 기르는 라임포토스는 물만 잘 갈아주면 별 탈 없이 잘 자란다.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 빠듯하게 돈을 모으면서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라임포토스를 먹어볼까도 생각한다. 친구 중에 리쓰코가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그녀의 낡은데 크기만 한 집으로 딸과 함께 들어온다. 에나라는 딸아이는 도감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가세는 친구 리쓰코가 신혼 초에 남편에게 맡겼던 저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친구의 독립을 지지해주고 쉬는 날 없이 쉬는 날이어도 쉬어도 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은 그녀에게 세계 일주에 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생긴다. 그녀는 세계 일주를 떠나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해 아우트리거 카누를 탈 수 있을까. 나가세라는 이름에 나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 이야기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나가세의 세계 일주를 응원한다.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가세는 나의 이야기다. 월급 통장을 비우고 앞으로 일 년, 그 일 년 동안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오로지 돈만을 보고 시간을 버틴다. 다가올 일 년을 위해. 독립한 친구의 집에 찾아갈 때 차비가 걱정되어 자전거를 타고 갈까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걱정은 생활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것에 한심해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바라보고 휴일이 하루쯤은 생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수 있는 일들을 꿈꾸는 것이다. 지금 벌지 않으면 어제는 관리비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어두울 때는 불을 밝히고 더울 때는 에어컨을 틀고 겨울에는 가습기 정도 틀 수 있으려면 일해야 한다. 눈치도 보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동료를 보고 그 동료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과 함께 일을 그만두는 걸 보는 걸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것도 생활을 위해서다. 지난달에 연말이라 들뜬 마음에 생각 없이 긁은 카드 이용 내역을 훑어보다가 많이 썼다고 주는 포인트를 발견해서 왕 깍두기 2kg을 주문했다, 오예! 돈을 더 보태긴 했지만 왕 깍두기를 사서 신이 난다. 쓰무라 기쿠코의 소설을 읽으면 힘이 난다. 주인공들의 삶은 힘들고 희망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소설을 읽는 나는 힘이 난다.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지만 일 년을 열심히 살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작년에 얻어온 다이어리에 좋아하는 캐릭터 스티커를 붙이고 고정 지출들을 적었다. 보험료와 핸드폰비, 교통비, 가스비들을 적고 나자 숫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제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잊어버려,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다음 달 월급 날짜를 생각해. 고마압다. 『라임포토스의 배』에는 다른 소설도 한 편 더 있다. 쓰무라 기쿠코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12월의 창가」는 회사에서 무차별적인 폭언과 스트레스를 겪는 쓰가와가 있다. 그녀는 인쇄 회사의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본사가 아닌 지사라 회사 안에는 인근 고졸 출신의 여직원들이 대부분이다. 파견 근무까지 다녀온 그녀는 이미 관계가 형성돼 그 안으로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상사도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들이라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혼자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맞은편 도가노 타워 안을 바라보는 것으로 회사 생활을 보낸다. 일을 주지 않고 V 계장의 폭언에도 나서 주지 않는 선배와 동료들. 필름 한 장이 없어진 사실로 쓰가와를 몰아세우고 사무실 곳곳을 뒤지게 하는 V 계장. 쓰가와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녹아버리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12월의 창가에서 본 장면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업무의 피로를 날려버릴 수도 없고 동료들의 이야기에 끼지도 못한다. 무언가를 얘기해도 표정 변화가 없는 선배.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후배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함까지. 생활을 위해서 매일 빠져나가는 숫자들을 위해 숨을 죽이고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말해야 한다. 나가세와 쓰가와의 내일을 조심스럽게 지지한다. 그녀들의 내일은 곧 나의 내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만난 그녀들은 현실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라임포토스의 배 위에 올라 세계를 여행하고 꾸깃꾸깃 접은 사직서를 부장에게 건넨다. 최선이 아니라도 묵묵히. 오늘 쓴 돈을 적으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쓰고. 이 생에서 아쿠타가와상은 받을 수 없지만 캐릭터 스티커로 꾸민 노트북으로 책 이야기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오늘이 있어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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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라는 말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택(Choice)은 개인이 아니라 돈에 의해 이루어질 때가 많다. 친구나 지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면 축하하는 마음보다도 축의금과 결혼식에 입고 갈 옷 걱정이 앞서고, 월급이 나오면 전부터 눈여겨 본 스커트를 사거나 목돈이 생기면 여행을 떠나려고 만든 통장에 돈을 넣는 대신 월세와 공과금과 보험료와 치과 할부금부터 낸다. 이렇게 계속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 하는' 일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는 사실이 무섭다. 제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의 주인공 나가세 유키코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 가까스로 첫 직장에 입사했으나 상사의 괴롭힘 때문에 그만두고 공장 계약직 사원으로 재취업한 나가세는 카페 아르바이트와 노인 대상 컴퓨터 강사 일을 겸업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유행하는 스타일로 파마나 염색을 하긴커녕 머리할 돈이 없어 스스로 머리를 자른 지도 오래되었고, 친구 집에 가고 싶어도 교통비가 아까워 엄두를 못내는 그녀의 눈에 어느 날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을 선전하는 포스터가 들어온다. 세계 일주라니. 현재 그녀의 경제 사정을 생각하면 꿈같은 일이지만 1년치 연봉 163만 엔을 고스란히 쏟아부으면 못할 일도 아니다. 딱 1년 동안만 생활비는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충당하고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모아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정한 그녀. 과연 그녀는 세계 일주를 떠날 수 있을까.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단편 <12월의 창가>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작품의 분위기가 <라임포토스의 배>보다 무겁다. 주인공 쓰가와 역시 번듯한 대학을 나와 겨우 첫 직장에 입사했으나 또래 여직원들한테는 따돌림을 당하고 상사한테는 견디기 힘든 폭언을 당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쓰가와를 괴롭히는 V 계장은 처음엔 사소한 업무 미스를 지적하는 정도였지만 갈수록 인신공격에 가까운 폭언을 퍼부으며 쓰가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낸다. 쓰가와 역시 처음엔 자기가 잘못해서 상사가 질책하는 것이라고 자책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하소연을 하며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나중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 아무리 밥벌이가 중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누굴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일까. 그만큼 나란 존재는 미약하고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것일까.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온 쓰가와는 아마도 <라임포토스의 배>에 나오는 나가세처럼 살게 될 텐데, 그 삶이 썩 유복하고 편안하지는 않아도 스스로 선택하고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이란 점에서는 더 나아 보인다.
<라임포토스의 배>와 <12월의 창가>는 둘 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이 삶을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라 폭력이자 저주로 인식한다는 점이 그렇고,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 동물로 진화하는 대신 그 무엇도 잡아먹지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 식물로 살기를 택한다는 점이 그렇다. 육식 동물에 비하면 식물의 삶은 무기력하고 위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육식 동물이 며칠이라도 포식하지 못하면 죽는 것과 달리 식물은 비가 안 와도 땅속으로 길게 뿌리를 뻗어 물을 찾아내고 밟히거나 뽑혀도 다시 살아나거나 또 다른 존재로 금방 화(化) 한다. 어차피 철저하게 육식 동물이 될 수 없다면, 먹이사슬의 정점에 오를 수 없다면, 자기 삶을 스스로 택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돈이 선택의 주체인 삶은 돈생이지 인생이 아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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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률이 17년만에 최고치라던 지난 5월, 공무원을 그만 뒀다. 4년 전엔 채용 경쟁률이 100대 1이 넘는다는 은행에 사표를 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주된 이유는 같았다. 내 젊음을 팔아서 번 돈으로 의미 없는 소비 생활만 하는 데 질렸기 때문이다. 더욱 끔찍했던 건 이런 생활이 내일도, 내년에도, 10년 뒤에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을 오늘이었다. 평생 일정한 반경 내에서 예측가능한 삶을 살아온 내게 반경 밖의 삶은 어려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물질적 여유를 포기하고, 주변의 시선을 견디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전 직장에서 받던 급여 절반의 절반 정도 되는 곳까지 지원서를 내봤지만, 1년도 채 안되는 경력을 가진 서른 중반의 여성을 선뜻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이런 고민을 남들에게 꺼내보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 보라”며 기다렸다는 듯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간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당차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여성을 볼 때마다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화가 났다. 직장을 나오기 전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우연히 나와 비슷한 결정을 한 여성을 만났다. 일본 작가 쓰무라 기쿠코가 펴낸 자전적 소설 <라임포토스의 배>의 주인공 나가세는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때문에 삶에 환멸을 느낀다. 그는 일본 나라(奈良)에서 로션 공장에 다니는 스물 아홉살 여성이다. 앞으로도 지금 같은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불안함에 속이 울렁거릴 때마다 팔에 문신 새기는 상상을 하며 겨우 버틴다. 사실 소설의 주인공은 나가세가 아니라 나가세의 꿈이다. 우연히 시작돼서, 우연히 구체화되고, 우연히 현실이 된다. 회사 게시판에 붙은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 포스터를 보면서 조금씩 싹이 튼 꿈은 어느날 차 사고가 날 뻔했던 계기로 구체적인 계획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낀다. 물론 이 계획이 순탄하게 뻗어나간 것은 아니다. 예상치도 못한 지출이 생겨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고, 갖고 싶은 물건을 볼 때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차비 때문에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 꺼려지는 자신을 보며, 평범한 가정을 꾸리길 기대하는 어머니를 보며 죄책감을 가진다. 급기야 과로로 쓰러져 출근을 못한 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자 세계일주 여행 신청 마감일까지 계획했던 돈을 모으지 못한다. 그녀는 1년간 계획했던 꿈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비싼 물탱크를 사기도 한다. 1년 간의 꿈을 포기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난다. 동료직원에게 돈을 갚기 위해 통장 잔고를 확인하니 회사에서 지난 2년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보너스와 친구가 예전에 빌려간 돈이 입금돼 세계일주 여행 경비가 겨우 마련된 것이다. 그녀의 꿈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내 고민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행원과 공무원이란 직업을 덮어쓰고 사는 것이 그리도 숨막혔던 나는 또다른 직업으로 나를 덮어씌우려 했다. 애초에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된 시작이었다. 나가세 꿈이 실현되는 여정을 기록한 <라임포토스의 배>는 질문과 동시에 확신을 주었다. 번듯한 포장 같은 직업을 구하는 것이 제 2의 인생이라는 착각 속에서 숨막혀하는 내게 ‘그것이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잘못된 강박관념에서만 벗어난다면 두 달 전에, 4년 전에 내린 결정이 절대 틀리지 않았고, 앞으로의 삶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1년 후 한 달 간 라오스를 여행할 계획이다. 여행 경비를 계산하고 그만큼 돈을 모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보니 이전에 비해 선택지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틀 전 지원서를 냈던 한 회사로부터 함께 일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나는 선택당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 것이다. 계획이 차례차례 고개를 드는 게 즐거웠다. 오랜만에 살아있는 기분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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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바탕의 표지는 참으로 이쁘다. 푸릇푸릇한 포토스가 전체적으로 덮고 있고, 오피스룩을 입은 여성이 파란 모형배를 안고 미소를 머금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은 왠지 가볍고 명랑한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바라본 표지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다. #라임포토스의 배,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 낮시간은 화장품 공장의 계약직 사원으로, 퇴근 후에는 까페 아르바이트, 주말엔 상공회의소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컴퓨터 강사, 그리고 밤에는 자료입력 재택 아르바이트까지... 쉼없이 일을 하는 29세 여성, 나가세. 나가세는 대학 졸업 후, 상사의 심한 괴롭힘에 첫직장을 몇 개월만에 그만두고, 지금은 5년째 화장품 공장에서 라인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다. 비록 박봉이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첫 직장에서 너무나 끔찍한 일이였다), 아무런 생각없이 컨베이어를 따라 밀려 나오는 뚜껑을 살펴보고 닫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인지라, 그저 열심히 다니고 있을 뿐이다. 나가세의 유일한 취미는 포토스(우리에겐 '스킨답서스' 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관엽식물이다)를 키우는 것이다. 물에 꽂아두기만 해도 잘 자라나는 -그다지 정성을 쏟지 않아도 되는- 포토스와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장 월급날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며 늘 마찬가지인 박봉 명세서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이상해진 모양이다.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 14~15쪽 '라임포토스의 배'에서 가장 내 심장을 찌르는 문장이였다. 아직도 맞벌이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들 또는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는 한달에 한번씩 맞는 마약", "현대 사회의 노비문서를 목에 달고 다니는" 등의 말은 요즘엔 더 이상 유머러스하지 않은, 그저 자조적인 표현이 되어버린게 사실이다. 그리고 급여가 꽤 좋은 현재의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지, 좀 더 여유 있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지가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이기에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 이란 문구가 정말 훅~ 들어와 버렸다. 어차피 '나의 시간을 파는 일' 이라면, 돈을 많이 주는 곳이 나은 것인지, 내 시간을 조금 적게 팔고 마음 편한 곳이 나을지, 아니면 정말 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쫓아야 하는지.. 정말 선택하기 힘든 질문이다. 휴~ #라임포토스의 배, 나가세는 크루즈 세계여행을 갈 것인가.
나가세는 우연히 회사 휴게실에 붙어 있는 크루즈 세계여행 포스터를 보게 되는데, 비용이 화장품 공장에서 본인이 받고 있는 연봉과 비슷한 금액인 163만엔임을 알게된다. 한달에 한번 나오는 월급과 세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나가세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파퓨아뉴기니에서 아우트리거 카누를 타는 것을 꿈꾼다. 공장에서 받는 월급은 그대로 여행 비용으로 저금하고, 세개의 아르바이트로 버는 수입으로 생활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매일 매일 지출 내역과 다짐을 수첩에 적으며
초 절약 모드로 생활하기 시작한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 이 순간 부터 서른 살이 될 내년 오늘까지 꼬박 들여 세계일주라. 왠지 동화 같은 느낌도 들어. 그 1년 사이에는 나이를 먹지 않게 해주다거나 다른 세계에 다녀왔더니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느낌이랄까. 설명을 제대로 못하겠네. 뭐, 나이야 말하는 사람 마음이잖아. 사실 스물아홉이나 서른이나 구체적인 차이도 없으니까." - 26~27쪽 화장품 공장의 단순 계약직 노동자로 지내고 있는 나가세, 5년간 직장생활을 하고 번 돈을 모아 차린 까페가 일주일에 한번 정기 휴일을 가질 수 있는게 꿈인 요시카, 이혼과 독립을 위해 딸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리쓰고, 졸업과 동시에 유복한 시댁으로 시집을 갔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소요노. 4명의 동갑내기 대학 친구들은 스물 아홉살이라는 각자의 현실에 발을 딛고,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서른은 어떻게 느껴지게 될까. 나가세의 말마따나 스물아홉이나 서른이나 구체적인 차이도 없을 텐데.. 예상하지 않았던 보너스가 입금이 되면서 생각보다 빨리 163만엔이 모인다. 리쓰고도 다시 취업을 하게 되고, 요시카도 2주에 한번씩 정기휴일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포토스도 장마비를 흠뻑 머금으며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큰 차이는 없을 지라도, 그들의 서른, 잔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포토스가 잘 자라나듯, 그녀들 마음 속에도 희망이 움트길 바래 본다. 페달에 발을 얹고 내리막길을 달리면서 목표 금액을 모은 기념으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비에 발이 묶이기 전에 역 앞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몸이 이 정도로 움직이는 감각은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중략) 나가세는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에 넣어둔 수첩을 펼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다시 안장에 걸터앉아, 달렸다. 또 만나. 누구에게랄 것 없이 나가세는 중얼거렸다. 아우트리거 카누를 탄 포스터 속 소년이 나가세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 110 ~ 111 쪽
#12월의 창가, 누구나 무차별 폭행범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라임포토스의 배"의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다. 쓰가와는 대학 졸업 후, '취업 빙하기' 라고 하는 취업난 속에 어렵게 인쇄회사에 취업을 했으나, 항상 직속 상관인 V계장의 폭언에 시달리고, 그리고 동료들에게서 철저히 왕따를 당하고 있다. 업무 자체로 혹사당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회사가 그런 곳이라는 것은 늘 각오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의혹이 풀린 뒤에도 거기서 쌓인 울분을 어디에도 풀 수 없다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쓰가와가 한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된 듯한 상황은 쓰가와의 의욕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동료들은 애정을 담은 손짓이나 기운 내라는 말로 그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그런 일이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되리라 생각하니 쓰가와는 잠자코 앉아 있기 조차 힘들었다.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어요." - 154 ~ 155쪽 할 마음이 없으면 그만둬도 돼. 쓰가와보다 몇 센티미터는 더 큰 키에 힐까지 신고 높은 곳에서 쓰가와를 굽어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너 같은 건 다른 데선 절대로 못 버텨, 절대로. - 163~164쪽 'V계장의 차가운 시선과 P선배의 멍한 표정' 사이에서 항상 '죄송합니다'만 입에 달고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된 채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쓰가와는 8개월의 직장생활을 견디다 못해 사표를 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의 쓰가와의 감정 변화를 참으로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사표를 내기로 결심한 이 후, 동료 직원들이 키우는 유산균을 다 죽여버리고 사표를 V계장 눈앞에서 흔드는 쓰가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져 올랐다. 나이쓰~ 쓰가와, 힘내!!!!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은 그래도 나보다 나을 줄 알았어요. 분명 그렇지 않았던 거죠. (중략) 그런다고 마음을 짓누르는 후회를 떨쳐낼 수야 없겠지만, 다음에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나가토와 대화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의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190쪽 쓰가와가 유일하게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같은 빌딩에 근무하는 나가토 뿐이다. 그런데, 나가토의 상사인 Z부장이 무차별 폭행범에 의해 부상을 당해 입원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상사로 부터 인정 받고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가토 역시 결고 쉽지만은 않았음을 쓰가와는 알게 되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다. 그런 마음이 퇴사를 결심한 신입사원 쓰가와 자신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두 편의 단편은 어찌보면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지는데, 그만큼 나가세와 쓰가와 두 인물을 감정선을 동일 선상에서 아주 현실적이고도 세밀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인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오죽하면 다 읽고 나서 두개의 스토리가 마구 뒤섞이기 까지 했으니 말이다. ㅎ 오랫만에 잔잔한 일본 단편 드라마를 한 편 본 느낌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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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을 앞두고 학과 선택에 많은 시간과 고민을 들였다. 그때 나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꼭 내가 배운 것과 연관되는 일을 할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그것을 활용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내가 꿈꿔온 삶이었다. 물론 가능할 줄 알았다, 내가 원하는 학과에만 들어가면. 요즘은 취업 고민을 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고 많이 배우는 일을 많은 일을 할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고 칼퇴와 주말이 보장되는 일을 할지 잘 고민해봐.”
그리고 요즘은 내가 배운 것으로 돈을 벌면서도 점점 웃음을 잃어가는 나를 보며 스스로를 이렇게 합리화한다.
“뭐든 일이 되면 다 힘들지, 뭐.”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에는,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이 세계일주 여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분투하는 짠내 나는 일상을 담은 동명의 소설과, 상사의 괜한 트집과 심한 언어어폭력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직장 생활을 그린 소설 <12월의 창가>로 구성되어 있다. 두 편을 읽으면서 나는 열렬한 공감과 분노를 담아 나의 짧은 직장 생활을 돌아보았다. 특히 <라임포토스의 배>의 주인공은 나처럼 같은 직장을 4년 동안 다니고 있는, 그렇지만 아직도 그 연차에 한참 못 미친다고 여기는 동갑내기 친구이기에 나의 더더욱 특별한 애정을 샀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우리는 고만고만한 일상을 지루한 듯 이어가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 알맞게 길들여져 푼돈과 비생산적인 시간에 벌벌 떨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혐오하며 이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도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건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끔 떠올랐지만, 이제는 무엇을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꾸려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대학만 들어가면 나만의 배를 저을 거라는 포부는, 아니 공상이라 해도, 이제는 없다. 그만큼 나는 겁을 먹었고, 움츠러들었다. 꿈은 꿈, 일은 일이고, 남의 돈을 번다는 것은 그만큼의 나의 무언가를 내줘야 하는 일임을 안다.
우리는 왜 일을 할까 자아실현, 소명 의식, 이런 교과서적인 답은 차치하더라도 우선 지금의 이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일 텐데, 육체적인 건강만이 건강의 전부가 아니고, 내일의 행복이 오늘의 행복보다 더 값지다는 확신은 없으며, 행복이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편안하고 유쾌한 관계가 아니겠느냐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가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일을 때려치운다고 행복할까? 혼자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면? 혹은 딱 먹고 살 만큼만 벌고 남은 시간은 나를 위해 쓴다면? 물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행복을 맛볼 수는 있겠지만,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자만의 고통이 다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지금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 지금 행복한 것.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이지만 어차피 계속 풀어야 하는 거라면 매일의 고통보다는 매일의 행복을 쌓아가는 편이 더 낫겠지 싶다. 답은 심플하다. 그걸 몰라서 우리는 내내 괴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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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몸이 굳었다. 일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시간을
팔아 번 돈으로 음식물과 전기, 가스와 같은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신의 불안한
삶이.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14,15p)
소풍보다 설레는 시간이 소풍 가기 전날이라고 하지 않는가? 화장품
공장에서 단조롭기 그지없는 라인 작업을 하며 어느 순간 그냥 자신이 라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나가세 유키코는 공장에서 보내는 1년의 시간을 그렇게 변화시키려 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쉬는
시간 우연히 보게 된 광고전단지에서 그녀는 자신의 1년치 연봉과 세계일주 크루즈 여행 비용이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시간을 돈에 파는 듯한 기분’이 아니라, ‘크루즈 여행을 위한
1년’을 만들기로 결심을 한다. 공장에서 주는
돈은 오롯이 저축을 하고, 알바로 버는 돈으로 생활하기로 결심하고, 어느새
수첩을 꺼내 그날의 지출을 하나하나 기록해나가는 나가세에게는 세명의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친구가 있다. 잠시지만
자신의 딸과 함께 나가세와 살아가게 되는 리쓰코도 있고, 나가세가 알바로 일하는 가게의 주인인 요시카도
있는데, 이상하게 내 눈길을 끈 것은 소요노이다. 큰 이유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선택했던, 그리고 어느새 함께 어울리던 무리와 멀어졌던 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꼈던 불만은 나가세나 요시카의 감정과 닮아 있었지만, 그 친구의 마음은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결국 크게 보자면 다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소요노는 자기가 먼저 집이나 이웃 이야기를 한다.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나가세나 요시카에게 그때그때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만,
결국 시어머니를 따라 연극을 보러 갔지만 눈치를 보느라 피곤했다느니 인테리어를 바꾸었는데 커튼 색을 잘못 골라 우울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빠진다. (36p)
소요노에게 ‘라임포토스’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잎을 보며 즐기는 관엽식물인데, 물만
있으면 잘 자라나서 그녀가 즐기는 몇 안 되는 오락거리나 마찬가지다. 생활비를 아껴야 해서인지 혹시
먹을 수 없을까 고심했지만, 독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여 잠시 멀리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키워나가기 위해 빗물을 모을 수 있는 물탱크를 구입하는 것을 보면 참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런 그녀였기에, 전에 다니는
회사에서 상사의 괴롭힘을 받고 퇴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녀가 그때 사귀었던, 도움은 안되었던 남자친구의 말처럼 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라임포토스의 배’ 뿐 아니라 ‘12월의 창가’라는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둘 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을 소재로 쓰여지는 ‘사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녀가 목표한 돈을 다 모았다고 해서 마치 드라마처럼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부쩍 마음이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페달에 발을 얹고 내리막길을 달리면서 목표 금액을 모은 기념으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비에 발이 묶이기 전에 역 앞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 했다. 몸이
이 정도로 움직이는 감각은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1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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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포토스의 배> 버킷리스트를 딱히 작성해 본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 어렴풋이 자리한 내 버킷리스트에는 '두세 달 동안 크루즈 여행하기'가 있다. 어쩐지 호화로운 배 위에서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걱정 없이 여유를 누리고 그저 즐겁게 '살아가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긴 일정의 크루즈는 내 상상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마음 졸이며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공간이다. 무얼하든 반드시 목적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 시스템에서 제외된, 아니 제외되었다기 보다는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된 보이지 않는 틈새 같다. 배 안은 즐길 것으로 가득하고, 배 바깥은 새파란 망망대해이거나 낯선 항구도시일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나를 잊고 무한에 몸을 던지기에 완벽한 공간이며, 기항지인 낯선 도시를 둘러볼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 도시를 목표로 여행갔을 경우 의무처럼 보아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없는 애매한 시간이다. 그저 유유자적하게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어슬렁거리는 태평스러운 여행자가 되기에 적절한 시간일 터다. 그래, 나는 태평스럽게 살고 싶다. <라임포토스의 배>의 주인공 나가세는 크루즈 여행 포스터를 본 뒤 여행을 목표로 돈을 모으기로 결심한다. 모아야 할 금액은 공장에서 받는 연봉과 비슷한 금액.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친구 리쓰코가 제 딸을 데리고 와 있었다. 이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가세는 돈을 모으고 있었지만 리쓰코에게 돈을 빌려준다. 리쓰코가 당분간 함께 살게 되어 지출은 더 는다. 나가세는 돈을 모으기 위해 일거리를 더 늘린다. 서른 살 생일을 맞은 나가세는 심하게 기침을 하다가 급기야는 쓰러지다시피 한다. 오랜만의 휴식을 맞지만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만 했다. 생각보다 길어진 병가에 나가세의 몸과 마음이 점차 낫는다. 나가세는 라임포토스에 대한 꿈을 꾸고, 물탱크를 구입해 집에 설치하고, 수많은 라임포토스 병의 물을 갈아주고, 은행에 들렀다가 목표 금액에 도달한 잔고를 확인한다.
나가세는 엄청나게 부지런한 사람이다. 평일 낮에는 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일하고 밤에는 아홉 시까지 친구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집에 돌아가서 데이터 입력 부업을 한 뒤 잠자리에 들고, 토요일에는 컴퓨터 강사 노릇까지 한다. 나같은 사람은 꿈꾸기도 싫을 만큼 바쁜 생활을 하는데, 그런데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을 목표로 삼기 전, 나가세가 문신을 하려 했던 것은 무료함을 달래는 동시에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서였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끔찍하기까지 한 '지금이 부지런히 일할 때'라는 글귀를 팔에 새겨넣는 것이다. (다행히도) 문신에 대한 생각은 크루즈 여행 때문에 잊힌다. 그리고 크루즈 여행은 나가세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 준다. 꿈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가세는 또 다시 스스로를 다그친다. 마치 일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겁내는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나가세는 그렇게 일에 매여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을 정도로 현재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뿐더러, 아픈 와중에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빈다.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며들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박봉으로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야만 하는 소시민이자 '사축(社畜)'이다. 어쩌다 시간이 생겨도 어떻게 해야 '웰빙'할 수 있는지 모르는. 라임포토스(형광 스킨답서스)는 수경재배만으로도 잘 자라는 식물이라 나가세는 그 줄기를 잘라 계속해서 개체를 늘려나간다. 라임포토스를 보다가 나가세는 꿈까지 꾼다. 라임포토스를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 먹고 가계부에 -0을 기록하며 싱글벙글하는 꿈이었다. 나가세는 리쓰코의 딸 에나에게 가지치기한 라임포토스를 나눠주면서 빗물을 병에 채운다. 살기 위해 많은 것들이 필요한 우리와 달리 라임포토스는 소박하게도 빗물만으로 충분했다. 나가세는 80리터들이 물탱크를 구입해 집에 설치한다. 그 정도의 빗물이면 라임포토스가 숲을 이루고도 남을 양이다. 나가세는 라임포토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생명력에 감복하고, 자신의 꿈과 미래를 투사한다. 물탱크가 빗물로 가득 차면 나가세의 에너지도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임포토스가 풍성해지는 만큼 나가세의 마음도 풍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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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창가>
이 책은 두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라임포토스의 배>이고, 두 번째는 <12월의 창가>라는 작품이다. <12월의 창가> 역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가씨 쓰가와가 주인공이다. 작가 자신이 회사에서 심한 정신적인 괴롭힘을 당한 경험을 이야기로 그려냈는데, <라임포토스의 배> 주인공 나가세가 들어간 첫 회사에서 겪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에게 있어 그 경험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고통이었는지 엿보이는 작품이다. V계장은 쓰가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태클을 건다. 주변 다른 직원들은 막말을 못 들은 척 모니터만 바라보고, 태클의 대상이 되는 쓰가와는 점점 자기 안으로 침잠한다. 거래처에 넘어갔어야 할 필름이 없어졌다고 해서 한참동안 V계장의 삿대질을 당하고 필름을 찾아 헤매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알고 보니 거래처 측의 실수였는데, V계장은 사과 한 마디 없이 그저 '이런 일로 그만두기만 해봐'하며 윽박을 지르기만 한다. 같은 건물의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여직원 나가토와 점심을 먹던 쓰가와는 근처의 도가노 타워 안에 있는 회사는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말을 듣는다. 타워 안의 고용환경촉진공단에 면접을 보러 간 일이 있던 쓰가와는 이후 도가노 타워의 고용환경촉진공단을 눈여겨본다. 그런 어느 날, 쓰가와는 공단의 인쇄실에서 상주하는 직원이 한 남자에게 서류철로 얻어맞는 장면을 목격한다. 쓰가와는 공단에 전화를 걸어 목격한 사실을 전한다. 얼마 뒤 찾아간 공단의 인쇄실 직원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고 그곳의 회사 생활에 대해 전해 듣고 나서야 사직서를 낸다.
문득,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영혜는 말했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 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의외로 사람에겐 무척 많은 무기가 있었다. 벗겨놓으면 아무것도 없는 게 인간인 줄 알았는데. <12월의 창가>의 V계장은 세치 혀로 쓰가와를 말려죽일 듯 괴롭힌다. 처음엔 마음속으로나마 반발하고 분노하던 쓰가와도 계속되는 V계장의 막말에 스스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다른 회사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벌어질 텐데 지금 이 회사를 뛰쳐나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사표도 내지 못하고 품고만 다닌다. 결국 고용촉진공단 인쇄실 직원이 겪은 일을 폭로하면서 쓰가와는 바깥에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깨닫는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확인한 뒤에야 용기가 난 것이었다. 그 직원의 일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쓰가와는 어떻게 됐을까? 끝끝내는 생각이 극단적인 데로 치닫지 않았을까? 정말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많다. 특히 그것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게 바로 회사 생활인 것 같다. 그저 되는 데까지 부려먹으려고 직원을 뽑아대는 회사 사장들에, 이기적이고 부당한 처사가 일상인 상사들이 넘쳐나고, 딱히 무슨 이유도 없이 옆사람을 괴롭히는 동료들도 많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 다 어디서 기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운 좋게도 V계장처럼 인격모독을 일삼는 이상한 동료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느 회사에서든 동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다들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역겨운 사장들이나 상사는 많이 보았다. 그런 이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혐오감이 점점 차올라 끝내는 견딜 수 없게 됐다. 특정치를 넘어선 다음에는 절이 싫어 떠나는 중이 되는 것뿐이었다. 내가 쓰가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는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얼마 안 가서 울음을 터뜨려 버렸을 테고, 며칠 뒤에는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사직서를 내밀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도 끈덕지게 버텨낸 쓰가와가 대단하다 싶었다. 나는 진짜 죄송하지 않으면 죄송하다고 하지 못한다. 그저 억울한 마음에 눈물부터 터져 버리고 만다. 회사 생활이 그런 게 아닌데도. 쓰가와가 그렇게 버텨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너덜거리는 마음을 알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사실 <라임포토스의 배>나 <12월의 창가> 모두 씁쓸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다. <라임포토스의 배>의 나가세는 크루즈 여행을 떠나게 될 테지만, 그렇게 하기까지 일에 매여야 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리고 슬펐다. 우리 모두 '에너지를 고만고만하게 사들여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시간을 돈에 파는' 것도 마찬가지다. <12월의 창가>는 모두가 겪는 일은 아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부당한 일을 참아내야 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해서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두 편 모두 나름대로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저 그들이 맞닥뜨린 그 현실에서 돌아나갈 뿐이다.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울적해진다. 그저 넘치는 생명력으로 끈덕지게 살아나가는 라임포토스처럼 견뎌내야 하는 걸까? 엉뚱한 소리가 되겠으나, 현실이 이러하니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를 잘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터무니없는 박봉 때문에 죽어라 일해야 하지 않는 세상, 부당한 처사에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의할 수 있는 시스템......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세상을 가꾸도록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라임포토스가 더욱 풍성히 자랄 수 있도록 물을 갈아주고, 비료를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