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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에 대한 딜레마는 모두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장로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예정해 두신 거라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것도 다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고 , 그러므로 가롯 유다는 불쌍한 신의 희생자에 불과한 것 아닐까?
아니면, 외경인 [유다복음]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이 친히 가롯 유다에게 그 역할을 좀 감당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에 역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믿음직한 제자였을까?
이런 생각들은 지식인이라면 한번 쯤 해볼만 하다..
이 책은 박학다식하신 김기현 목사님의 데뷔작과 같은 책으로서, 목사님은 이 책을 출간한 이후로 다방면에서 '기독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계시다. ('싸이 클럽에' 이 분의 클럽도 있는데 얻을 내용들이 꽤 많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이 쪽 세계에 매료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상당히 '지적'인 책이다. 성경의 근거와 이성 논증의 방법론을 잘 살려서 합리적으로 납득될 만한 전개를 보여준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깔끔하고 꽉 찬 느낌을 부여해 준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결론은 '가룟 유다는 확실히 죄가 있다" 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물욕" , "정치욕" 등이 분명히 영향을 미쳐서 결국 마귀에게 틈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올바른 사유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 이외의 생각은 차마 상상을 할 수 없다. '죄' 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건 뿌리부터 흔들리는 문제가 생겨 버린다.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 그리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고려해 볼 때, 그와 같은 설명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 책은 참 읽어볼 만 하다.
가룟 유다 이야기만 나오면 , 적당히 둘러대고 흐지브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매우 빈번한데, 이 정도까지 고민하고 , 사유한 뒤에 쓰여진 '독자적인 책' 은 처음 본 것 같다.(제가 모르는 더욱 나은 서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에서 파생되는 영지주의 이야기라던지 , '자살' 에 대한 논증도 한번 거쳐갈 만한 쏠쏠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목사님 스스로가 이러한 '지적 논증' 의 중요성을 제대로 간파하시고 , 열심히 활동을 하고 계시기에, 그 열정과 깊이를 체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논증을 펼쳤음에도 , 해결될 수 없는 영역들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위 '신비의 영역'에 집어 넣어야 할 영역들.... 인간의 힘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들) (가령 , 누군가는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논의의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럴 때는 [이사야 55장]을 읊조리며, 하늘과 땅의 지적 차이가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gap를 되내이며 마무리를 짓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아마 '가룟 유다 논증'은 이 정도가 거의 한계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난 이 책을 통해 이 목사님이 지니신 "사역의 마인드" 를 사람들이 배웠으면 싶다.(워낙 복음주의 지성이 천대시 여김을 받다 보니, 무너진 영역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꼭 정통신학을 지지하는 특정 분파의 '복음주의 지식'만을 익히지 말고, 다방면에서 능통하며 실제 삶에도 '실존적'으로 잘 적용되는 지식과 경험을 무장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 주려는 그 분의 모습이 이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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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가롯유다"
- [가롯유다 딜레마](김기현, 2008;IVP)를 읽고 -
'예수를 판 유다는 구속사의 완성을 위한 필요 도구인가?'
'자살한 유다는 지옥에 가는가?'
김기현의 [가롯 유다 딜레마]는 예수를 판 가롯 유다에 대한 수많은 논란거리에서 문제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옮겨 놓는다. 오히려 시비거리들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확보'의 기회로 삼기를 촉구한다.
이 책을 통해 가롯 유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시선집중을 하게 되고, 내 안의 가롯 유다를 보게 된다. 적어도 내 수준이 가롯 유다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유다는 예수를 공회에 팔아넘기기로 작정한다. 은 30냥을 받고.
예수는 피할 수 있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신다.
유다는 사랑의 권면과 기회를 귀담아듣지 않고, 악한 행동을 자행한다.
예수는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수용하신다.
유다는 잘못에 대한 뉘우침은 있지만, 돌이키지 않는다.
예수는 우정을 배신으로 갚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내 안의 유다는, 돈의 유혹이 얼마나 거센지 하나님께 항변해 본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은 당신께만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 안의 유다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저앉는다.
하나님은 마음먹기에 따라, 결국은 승리할 수 있다고 용기 주신다.
내 안의 유다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범한 죄도 실수인 냥 넘어가려 한다.
하나님은 진정하고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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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유다, 이 이름은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이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그 이름을 비난하고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내면에는 가룟유다를 숨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밤의 사람이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밤에 예수를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를 통해 조국의 해방을 꿈꾸었지만, 결국 정의감에 투철한 애국자인 자신도 돈이란 유혹에 쉽사리 무너져 버리는 노예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를 노예 한 사람의 값인 은30냥에 팔아 넘겼지만, 결과는 자신이 노예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유다는 우리 모습입니다. 열두 사도였던 그가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특권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유다가 배반자 유다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유다처럼 말입니다"(30쪽).
이 날은 유월절 직전이었다. 유월절은 해방의 날이다. 400년간 이집트 바로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를 얻은 날이다. 양의 피를 통해 죽음을 면하고 홍해를 건너 생명과 자유를 얻은 날이다. 예수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기꺼이 유월절 양이 되어 해방의 피를 흘리기로 결단했다. 하지만 유다는 이 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자신이 죽음, 즉 그의 피와 살이 인류를 위한 죽음이요 희생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물론 모든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숙하고도 진지한 만찬식 자리에서 그들은 또다시 '누가 크냐?'고 쌈박질을 했다. 예수는 자신을 드려 인류를 구원하려 했지만 제자들은 남을 희생시킴으로, 짓밟고 올라섬으로 구원을 이루려 했다. "유다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제물 삼았습니다...이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성취입니다. 이기적인 자아에 그가 굴복한 것입니다...예수를 희생제물 삼아 정치적, 경제적 욕심을 채우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61쪽).
아무튼 사람은 돈에서 자유하기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복음서, 특히 누가복음은 제자됨을 물질 포기로, 의로운 청지기의 삶으로 묘사한다. 아울러 성령 받는 것을 희년의 성취, 나눔이 진정한 코이노이나요 공동체의 회복임을 강조한다. 때문에 유다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제자가 되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늘 예수를 팔아 밥벌어 먹는 천박한 크리스천이 우리가 아니던가! 돈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자 걸작품까지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현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명령하신 세상을 '다스리라'는 말은 '제대로 관리'하고 노예가 아닌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었다. 즉 청지기의 삶으로의 초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다는 그 삶을 포기했다. 해방의 날인 유월절에, 유대라는 나라의 이름을 가진 그가, 유대가 자유의 나라가 되길 소망했던 그가, 결국 돈의 노예로, 주인의 것을 탈취하는 자로 전락한 것이다. 사실 우리도 장담할 수 없다. 예수의 제자라고 떠벌리지만 어느 순간 맘몬의 제자, 노예가 될 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돈에 환장하여서 돈 때문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도 남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돈은 강력하고, 인간은 무력하고 탐욕스럽습니다"(38쪽). 그러니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 유다의 배반에 대해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던 것 아닌가? 유다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예수를 배반한 것이고, 그 결과 유다는 위대한 순교자요, 희생양이지 않은가? 그는 악역을 기꺼이 감당한 참 제자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배신자의 변명에 불과하다. 한 때 그를 동정한 것은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입으론 전폭적인 헌신을 부르짖는 제자였으나, 속으론 매순간 그를 부인하고, 팔아 넘길 기회를 엿보던 배신자였다. 그 얼마나 성령님은 우리에게 신의 성품을 닮아가라고 속삭이는가?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결국은 죄의 유혹 앞에 처참히 무너지고, 어느 덧 그런 경험을 당연한 것으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고 통곡하였으므로 회복의 기회를 얻었으나 유다는 통곡 대신 죄책감을 선택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뒤늦게나마 바로보았습니다...하지만 여기서 멈추었습니다. 그는 후회를 하고 있지, 회개하지는 않은 것입니다"(87쪽).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마련이다. 그 일로 인해 가슴 아파하며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밤을 지새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 차원에서 머물지 말고 다음 단계, 즉 회개로 나아가길 원하는 것이다. 회개란 무엇인가? 돌이키는 것이다. 돌이키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리면 그에겐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반복적인 범죄는 어느 순간 그것이 삶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단계에 다다른다. 자기 파괴든, 타자 파괴든 모두가 죄이다.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유다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실패에 대한 인간의 선택, 베드로가 될 것인가, 유다가 될 것인가? 성경은 베드로가 되길 요청하는 것이다. "유다의 배반은 그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충돌질하지 않으십니다... 유다는 정녕 자유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는 밤과 어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죽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다 자신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갈 길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 아담의 길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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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으로 읽으면 만나게 된다. 김유민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언뜻 한적한 산속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아버지~!'하고 외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니면, 웅장한 부흥 집회의 뜨거운 열기가 생각난다. 이런 방법들로 좋지만,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성경을 전심으로 읽는 것이다. 성경에게 묻고(Ask) , 답을 찾고(Seek),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것(Knock)이다. 이 책 <가룟 유다 딜레마>(김기현,IVP)는 전심으로 성경을 A.S.K하는 것의 좋은 예다. 이 책은 가룟 유다와 유다복음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김기현 목사는 자신의 질문들 혹은 누구나 가져볼 만한 질문들에 대하여 성경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답을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종교철학과 신학을 연구한 박사답게 종교, 철학, 신학을 넘나들며 진리의 문을 두드린다. 이런 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진리의 문이 열리고 마주하게 되는 것이 있다. 하나는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있는 가룟 유다이다. 이 책은 가룟 유다라는 인물을 11가지 질문을 통해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저자의 프리즘을 통과한 유다의 스펙트럼들은 다름아닌 나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는 은화 30냥에 친구이자 스승인 예수를 팔아 넘겼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건만, 그는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했다. 나 역시 구호단체에 기부할 때는 3만원과 5만원 사이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도, 정작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살 때는 돈 아까운 줄 모른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내 몸을 더 사랑하는 나는 가룟 유다를 닮았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배신한 유다와 그를 닮은 나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줄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다가 가증스러운 인사를 건네며 배신의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그를 거절하거나 내치지 않으셨다. 대신, 유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불행히도 유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도 전에 자살하였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다면, 자살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베드로 역시 죽음 직전에 있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 척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미리 아시고, 그 죄를 지고 십자게 못 박히신 예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과 용서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부인할 것을 미리 다 아시고, 죄인인 그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으셨으며, 그들의 속죄를 위해서 부활하셨다. 그것을 깨달은 제자 베드로는 기독교의 반석이 되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유다는 비참하게 죽었다. 저자는 가룟 유다의 삶을 연구하면서, 우리 역시 유다와 베드로를 닮은 죄인이지만, 유다가 되지 말고 베드로가 되자고 한다. 저자의 다른 책 <10대와 함께 빠지는 성경독서법>(성서유니온)에서는 성경을 읽을 때 건전한 경건서적의 도움을 받기를 권한다. 이 책 <가룟 유다 딜레마>을 성경 옆에 두고 함께 읽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크리스찬들에게는 우리가 믿는 진리를 다른 이들 앞에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며, 크리스찬이 아닌 이들에게는 교회의 부패와 오만에 얼룩지지 않은 진짜 기독교 진리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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