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프랑스 보통문화에 대한 감수성 높은 사색적 성찰! “어떠한 곳에나 고유한 정신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항상 밖에 머물려 하며 끝없는 비교를 통해서 어떤 장소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돼버렸다.”고 작가는 자신이 ‘지독히 우울한 배타주의자’로 변함을 즐기듯이 그의 일상을 사색적으로 그린 파리 체류기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파리를 상상케 한다. 보편적으로 파리하면 떠올리는 에펠탑, 루브르, 생제르맹거리, 국립도서관, 그리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식당들, 패션과 문학 등 예술의 도시가 분명 이야기 속에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외형을 비현실적인 사진 담기식 관광자의 식견이 아니라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깊숙이 침잠하여 그네들의 의식의 뿌리와 사고, 습관, 그리고 문화, 사회로의 발현에 이르는 결과로서 그 내재하는 본질을 성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답지않은 음울한 철학자적 사유와 시선이 저작물의 전편을 장악하고 있지만, 참았던 웃음이 푸~아 하고 터져나올 정도의 위트로 프랑스인의 설명방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말의 프랑스식 주석은 프랑스인의 이해를 명료하게 해학적으로 풀어낸다. “파리에서 무언가 설명되어야 한다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순서대로 설명된다. 먼저 낭만적이고 독특한 개인의 관점에서 설명되고, 그 후로 이데올로기가 더해진 절대적 관점의 설명이 뒤따른다. 그리곤 모든 설명이 헛된 것이란 철학적 설명으로 마무리 된다.” 이 대목을 찾아 읽어보고 배를 치며 웃지 않을 독자가 없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울상을 짓겠지만 말이다. 저자의 파리에 대한 단상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파리에 대한, 그리고 프랑스인, 프랑스에 대한 애정은 우울할 정도로 깊고 사무치다. 그래서 그의 프랑스인과 프랑스에 비판적 시선들이 거북하지만은 않다. 일례로서 프랑스인의 오만한 자세는“즉흥적이고 겉만 번지르르한 정중한 자세”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네들의 “은근한 확신, 호기심의 부족, 비판적 자기반성의 결여”를 BHV(베-아-쉬-베)백화점 판매원들의 “소비자는 언제나 잘못됐다고 우겨대는 이상한 차이”, 그리고 “파리에서는 은행이 비밀번호를 일방적으로 정해주었다!”고 미국식 합리주의, 시장주의에 빗대어 생산자 중심주의 프랑스 사회의 안일한 낭만주의를 꼬집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던적 문화의 그늘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는 파리의 문명”의 우직스러울 정도의 세계화와 변화에 대한 저항적 고집을 비판하면서, “국가는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되지만 사업적 거래는 결코 찬양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바로 프랑스”라고 까지 사회주의적 관념으로 인한 불편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배경 인식으로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와 모두에게 듬직한 연금을 안겨주는 비밀정부기관이 있다는 믿음”에 의존하는 ‘비비안 포레스테’의 논문 『경제적 공포』를 빗대어 “하얀 헬리콥터적”사고방식이라 평하며, “프랑스적 낭만적 사고방식에 고리대금과 매관매직을 가톨릭적 편견으로 바라본 책”이라고 거품을 물어대기도 한다. 또한, “사색적인 관찰은 프랑스적 감수성의 핵심이며, 좋은면과 나쁜면 모두에서 프랑스적 무관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어떤 위기를 맞으면 피하려 하지 않고, 아예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신하기 때문이다.” 라고 프랑스인의 낭만적 무관심과 철학적 습성을 사르트르, 피카소의 독일 점령 하에서의 태도나 ‘콜레트’, ‘앙투완 블롱뎅’, ‘모파상’을 통한 프랑스적 기질에 깊이 동화되어 있는 자신의 감상으로 멋지게 풀어내기도 한다. 이 성찰적인 파리 스케치는 ‘장 보르리야르’, 로렌스 스턴, 쥐페, 오든, 버들레르, 마티스, 마네 등 문학, 미술, 철학적 대가들의 스치는 듯 지나는 일상의 에피소드와 저작들을 종횡무진 드나들며, 사색의 맛을 더욱 고급스럽게 치장해준다. 더구나 “사물로 배우는 강의, ‘르숑 데 쇼즈’”에서 ‘요리와 섹스의 비교’, ‘글쓰기와 요리의 비교’는 그 어느 철학적 사유에도 손색이 없는 명문장들이 수를 놓는다. 그리고 ‘모리스 파퐁의 재판’, ‘원격 오류(프랑스탓이 아니라 외국, 외국인등 외부의 탓)를 부르짖는 프랑스 철학자 필립 솔레르에 대한 비판’, ‘극복하거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 역점을 두지 않고 편하고 일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세 노르말(c' est normal)’을 외치는 프랑스인에 대한 편협하고 옹색한 습성의 이야기들까지 화려하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는 프랑스에 대한 통찰력이 지면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사치와 평온과 쾌락’이 교묘히 어울리는 “프랑스적 전통은 ‘평온’이란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네의 꽃 그림에서 풍기는 평온함, 콜레트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평온함, 오후 3시경 고맙게도 삶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팔레 루아얄의 평온함, 해가 저물고 식사를 마무리 짓는 시간에 마시는 마지막 커피도 프랑스적 평온함을 더해준다”는 작가의 감상적 파리가 한 없이 멋지게 펼쳐진다. |
|
책의 환상적인 표지와 제목에서 풍기는 좋은 뉘앙스는 읽기 전부터 이 책에 호감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가치는 그런 겉포장이 아니다. 좀 애매하게 표현하자면, '냉소적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냉소적이지는 않은, 유쾌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유쾌하지는 않은, 감상적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감상적이지는 않은', 뭐 이 정도 될 듯싶다. 애덤 고프닉은 어느 것 하나 과하지 않게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과하지 않은 '적당함'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발을 담글 수 있는 다양한 공간과 가능성을 제공한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낄낄대고 어느 순간에는 진지해지고 또 어느 순간에는 감정이 충만해지는, 그런 복잡한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책 한 권을 읽으며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이 책의 가치고, 그 가치는 몇몇 오타를 만회하고도 남는다. <파리에서 달까지>의 큰 줄기는 아주 간단하다. 뉴요커와 그 가족의 5년간의 파리 체류기다. 색다른 게 있다면, 그 뉴요커는 뉴욕을 대표하는 잡지 중 하나인 <뉴요커>에서 20년 이상 칼럼을 연재하는 데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미국 문화 파트를 썼을 정도로 뉴욕과 미국에 빠삭한 사람이란 점이다. 근데, 이 인간은 파리지앵이 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다. 여덟 살 때부터 파리에서 살고 싶었다는 애덤 고프닉의 욕망은 그의 글 쓰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미국의 대표 칼럼니스트이면서도 명확하고 경제적인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문장이든 적당히 꼬여있고, 어떤 지역을 소개할 때조차 은유를 사용하는 데 안달을 낸다. 그는 문장 하나에서조차 프랑스인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 <파리에서 달까지>는 아주 쉽게 읽히는 책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과 머리를 굴려가며 되새길 수 있는, 진한 여운이 남는 책이기도 하다. 맥도날드와 프랑스 요리의 차이라고나 할까(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차이를 좀 더 단박에 알 수 있을 테다). 어쨌든, 뉴욕과 파리라는, 온갖 세계인의 욕망을 고스란히 받는 두 도시의 감수성을 모두 간직한 고프닉의 파리 체류기는 흥미롭다. 그 흥미로움은 다른 문화권에서 헤매고 길을 찾는 한 인간과 가족의 모습에서 기인한다. 고프닉은 파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미국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도처에서 마주한다. 고프닉에게 파리는 변화를 싫어하는 데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쟁이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엄청나게 권위적인 데다 관료주의적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뉴욕과 파리를 비교하며 이죽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책의 몇몇 에피소드들은 고프닉이 파리를 파리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는 뉴욕의 야구를 한없이 그리워하며 파리의 축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다 어느 순간 축구에 황홀감을 느끼고, 프랑스 파업을 빈정거리다 어느 순간 그 파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지지를 보낸다. 반대로, 야구도 '바니'도 모른 채 파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던 고프닉의 어린 아들 루크가 자연스럽게 야구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고 '바니'를 보여달라 조르는 모습은, 한 문화권의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좇게 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집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유치원에서 불어를 사용해야 하는 어린 루크의 갈등은 '전지구화(globalization)'라는 간편한 말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당연한 진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책 말미에 나오는 고프닉의 아내 마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파리에서 즐겁게 살고 있지만 충만한 삶이라 할 수는 없어요. 뉴욕에서는 충만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어요." - p. 355 <파리에서 달까지>는 그런 문화적 충돌과 인간의 문화적 배경을 흥미롭게, 그리고 애정을 가득 담아 위트 넘치게 펼쳐낸다. 책 속의 파리는 '도시' 파리가 아니라, 한 가족이 온갖 문화가 충돌하는 사이사이를 지나치는 '문화적 여행지' 파리로 드러난다. 어린 고프닉은 파리가 마냥 달나라행 기차표를 파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어른 고프닉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도처에서 마주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파리에서 달까지>에서 묘사되는 파리는 그 어떤 파리보다도 매력적이다. 이 책 속의 파리는 때로는 지독히도 평범하지만 때로는 놀랍게도 이국적이다. 때로는 지독히도 짜증나지만 때로는 놀랍게도 황홀하다. 그래서 <파리에서 달까지>의 파리는 말 그대로 '온갖 매력'을 뿜어낸다. 파리를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포장된 좀 재수 없는 곳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어느 순간 파리가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고 만만하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파리를 침침함과 답답함이 덧칠된 음습한 곳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어느 순간 파리가 놀랍도록 활기 넘치고 자극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다채로움은 뉴요커로서 파리지앵을 꿈꾼 애덤 고프닉이라는 한 인간의 애매한 위치에서 기인하는 당연한 시선과 사고의 반영일 테다. 파리를 사랑하지만 이방인의 시선과 사고를 결코 버리지 못한 채 파리를 대하는. 그래서 고프닉은 조금은 우울하게 이런 말을 던진다.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약간 자기만족에 취한 보편주의자에 가까웠지만, 파리를 떠날 쯤에는 지독히 우울한 배타주의자로 변했다. 달리 말하면, 어떤 곳에나 고유한 정신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항상 밖에 머물려 하며 끝없는 비교를 통해서만 어떤 장소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 - p. 343 기본적으로, <파리에서 달까지>는 무척 지적인 책이다. 때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현란한 수사와 알아먹을 수 없는 예를 들먹일 때 이 책은 마치 재수 없는 파리 같다. 반대로, 레스토랑이나 음식 하나를 소개할 때조차 덧붙는 미려한 수사와 다채로운 문화적 지식은 마치 세련되고 황홀한 파리 같다. 그런 면에서 <파리에서 달까지>는 책 자체가 파리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까칠하지만 유연하고 유연하지만 고집불통인, 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리고 그건 이 책에 대한 평으로도 고스란히 쓸 수 있다. 어쨌든, 이 재미있는 책을 미워하기란 파리를 미워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으니까.
* 분명 <파리에서 달까지>는 여행서가 아니지만, 여행서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여행을 충동질 하는 게 여행서의 가치라 친다면). 이 책은 평범하지만 매력적인 파리의 공간을 근사하게 포장해 여행을 충동질 한다. 또한, 이 책을 읽는 내내 뤽상부르 공원이나 발자르 레스토랑 같은 파리의 명소에 대한 호기심 역시 끝없이 솟아올랐다.
** 허 샤오시엔은 <빨간 풍선>을 만들기 전에 이 책을 보고 몇몇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반가워할 만한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루크가 카페에서 핀볼을 하는 모습은 영화 속 시몽이 누나와 카페에서 핀볼을 하는 모습과 정확히 겹친다. 고프닉이 '7시간 동안 천천히 익히는 양 다릿살 요리'를 하는 모습은 수잔(줄리엣 비노쉬)의 개념 없는 이웃이 요리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외에도 <빨간 풍선>을 다시 보면 흐뭇하게 연상할 수 있는 장면들이 더 있을 듯.
*** 고프닉은 이 책의 후속편 비스무리한 것을 최근에 출간했다고 한다. 한국에도 조만간 번역 출간 되길. ^^ |
|
여행자로서 바라 본 파리와 생활인으로 느끼게 될 파리는 분명 다를 것이다. 달랑 한달동안 다녀온 파리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 몇년은 살다 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 후배는 나를 보면 파리가 자동으로 떠 오른다고까지 말했었다. 내가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말해서가 아니라 나는 파리를 생활인처럼 여행을 했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파리를 사랑한다. 그리고 똘레랑스라는 말도 좋아한다. 그런데 생각 해 보면 여행자가 보는 파리와 생활인으로 겪게 될 파리는 다를 거란 사실을 책을 통해서도 느꼈지만 실제 그럴 것이란 것이 내 경험에서도 묻어 나 있긴 하다.
파리에 살고 있던 선배의 방을 같이 이용하 던 어느날 열쇠를 경비실에 맡겨두고 내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경비 역시 이민자였던 탓에, 불어는 능숙하나. 영어는 나와 비슷하게 짧아 아무리 바디랭귀즈를 해도 알아 보지를 못했다, 외면하는 것인지, 정말 몰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프랑스인이 와서 내 바디랭귀지를 불어로 설명해 주고 열쇠를 받았다. 내가 생활인이었다면 파리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았겠지만, 여행자에겐 그것 역시 돌이키고 싶지 않는 그러나 재미난 에피소드정도로 기억을 하게 되지 않을까? 파리에 대한 나의 추억들은 대 부분은 이런 것들이었다.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하고,거리를 걸으면서 빵을 먹어도 쳐다 보는 시선을 의식 할 필요가 없는 길거리에서 입맞춤을 해도 관심 밖일 수 있는 나라 ... 거리 곳곳엔 예술적 향기가 가득한 나라 길거리의 더러움도 용서가 되는 나라, 그래서 영화 속에 파리가 조금이라도 나올라 치면 고향을 보듯 반가운 곳이 파리다. 얼마전 읽었던 도시의 기억이란 책 속에서도 파리에 대한 느낌을 공유했지만 이 책 역시 파리에 대한 느낌을 다양하게 경험 할 수 있어 좋았다.
환상으로만 파리를 바라 보지 않아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좀 아쉬웠던 건 파리를 뉴요커가 담아냈었음을 너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했던 탓인지, 문고판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너무 작은 글씨체, 그로 인해 발생한 오타들이 책 읽기의 불편함을 조금 주었던 것 같다. 이것 역시 똘레랑스적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도 있겠지만...^^ 고흐의 이야기도 다양하게 전개 되어 지듯.. 이 책역시 파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혹은 좋아하고 싶어 다양하게 읽고 싶어 하는 이들에겐 분명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거란 생각이다.
(오타만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
|
이러다 아예 blacklist에 오를까 불안하긴 하지만, 46쪽 읽다가 도저히 짜증나서 한마디 일단 씁니다. 도대체 45쪽에 한자로 글씨 깨진 것을 보고도 책을 내는 출판사는 도대체 제대로 된 출판사입니까? 1#01 chapter (아파트 구하기)에서 시라크은, 시라크이, 시라크과 와 같은 일괄 바꾸기 하면서 제대로 조사 안바꾼 것은 참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46쪽에서 시라크과 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때는 완전 열받아서 견딜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요즘 세상에 이렇게 일괄 바꾸기 하면서 조사 확인도 안하는 출판사(편집자)가 있다니, 완전 짜증 납니다. 책 바꿔 주세요. 주소 보내드리면 되나요?
|
|
알라딘 독자가 짠 편이던지 yes24 독자들이 후한 것인지 평점 차이가 꽤 났다. Yes24 에서는 "파본입니다, 환불바랍니다" 라고 짧은 서평을 남긴 분이 한 분 계셨는데, 절대 동감이다.
이 책은 프랑스 답고, 낭만적이며, 통속적이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파리에서의 삶을 기대하고 살아 보는 기자이며 부모인 작가의 경험담이다. 자연스레 두 문화의 차이를 즐기고 또 음미하면서 써 내려간 이야기이다. 한국 번역판의 파리 문화 관광 안내서 분위기가 절대 아닌데, 그 잘못된 기획 탓인지, 엄청난 오자,탈자는 머리가 아플지경이다. (17쪽과 45쪽에는 깨진 활자까지 나오니 말다했다) 프랑스어에 쓰이는 accent 이 빠지는 것 말고도, 한국어 조사 (은/는) 구별도 안하고 (35쪽)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130쪽). celine 을 cline 으로 (229쪽), Fremiet 를 frmiet 으로(234쪽), 1908년을 1980년으로 (250쪽), 등등 무수한 오자를 거쳐 책 뒤쪽 칼라 지도에는 아예 Rue du Seime (Rue de Seine 겠지)라고 찍혀있다. (읽다보면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기분도 든다.)
그렇다고 오자 너머의 작가와 완전 동감하는 것은 아니다. 오르세 미술관이 19세기 아카데미 미술 공식화의 성전이라는데는 이견이다. 마네는 아카데미의 공식 전시회 살롱전에서 낙선한 반항미술가였고 지금 전시되 있는 그림들은 비 아카데미 회원들이 더 많다. (142쪽). Fragonard 의 살짝 틀린 스펠링 이름과 함께 "풍속화가"라는 설명을 덧붙인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니다 싶다.(179쪽)
엉터리 포장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다 읽은 것은, 그나마 건질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218쪽, 거슬리는 목소리의 바니와 당시 추문에 시달리던 클린턴을 이렇게 같이 놓고 볼 생각을 그전까지는 못해봤다. 그리고, 불편한 진실이겠지만, "해외에서 사는 아이는 두 문화권에서 성장한다기보다, 하나의 문화권에서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337쪽)"는 작가의 경험이 남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 갔을 것이다. |
|
자기만을 사랑하는 까다로운 도시인 파리가 좋아 무작정 뉴욕에서 파리로 간 한 가족의 파리예찬론이 담긴 책이다. 1994년 아들 루크가 태어나자, 다섯살만 되면 텔레비젼에 빠져들고 게임과 비디오테이프를 보내며 시간을 보내는 뉴욕의 아이들 문화에서 루크를 떼어놓고자 파리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한다. <파리에서 달까지>라는 책의 제목은 저자가 파리로 이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쉴피스 거리의 한 상점에서 보았던 19세기 판화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파리의 우안에서 달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묘사한 판화였다. 시대적 배경상 여러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으나, 간단하게 생각하면 달 아래의 도시와 천상의 나라를 곧장 이어주는 길이 파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요즘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여행에세이들의 작가들이 애덤 고프닉의 이 책을 한번쯤이나 읽어봤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꼭 여행에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장소를 사랑하여 무작정 떠난 이야기를 담은 책을 여행에세이의 범주에 넣는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과장되고 피상적이고 모호하고 애매한 감성을 담은 글이 아닌 내가 왜 파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 파리가 지닌 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왜 파리에서 살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파리 일상의 모든 것이 꼼꼼하고 확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파리에서 아파트 구하기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기후, 프랑스의 요리, 프랑스의 카페, 프랑스의 월드컵, 프랑스의 파업, 프랑스의 크리스마스, 프랑스의 문화 등등 파리의 세밀화가 그대로 머릿 속에 그려질만큼의 멋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추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여름을 제외한 다른 계절들의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에 파리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특히 파리의 소소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강추하고픈 책이다. |
|
나는 이런 책이 좋다. 크기는 작은 편이고 두께는 두꺼운 편이며 글자도 작아서 읽을 게 아주 많아 보이는 책. 읽기에만 너무 지루할까 하여 사진도 몇 장 넣어둔 책.(오타 때문에 신경질이 좀 났지만, 연필로 동그라미를 쳐 가면서 어느 쪽까지 실수를 했는지 두고 보자 하기는 했지만, 이내 그런 마음까지 사그러들게 해 준 책)
'쉽게 다녀오다'라고 제목을 쓰기는 했지만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었다. 외국인이 쓴 책에서 자주 느끼는 바인데, 어느 순간 집중력을 잃고 나면 기억이 생생한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읽어야 한다. 대충 넘겨가면서 읽어도 좋을 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읽어서 안된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에 드는 부분만 읽을 수도 있고, 고리타분하다 싶어지면 훌쩍 넘겨도 그것은 모두 개별 독자의 몫이니까, 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묘하게 도전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거다. '어느 한쪽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런 마음.
글쎄, 파리 혹은 유럽 문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 내지는 자격지심, 그런 것일까. 가서 살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미국 뉴욕에서 살았던 사람이 너무나 좋아한다는 파리에 가서 살면서 보고 듣고 생각한 바를 적어 놓은 글이라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멋있게 보이고 대단하게 여겨지고 그저 부럽고 호기심 샘솟는 마음.
칼럼니스트라는 직업 또한 얼마나 매력적인가. 가족이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을 받지 않을 만큼 후원을 받고 파리에서 살면서 파리에 대한 글을 쓰는 직업. 어쩌면 나는 그게 정말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그 자체를 글로 옮기기만 해도 살아있을 수 있게 해 주는 칼럼니스트의 세계.
여행과 삶은 어디에서 달라지는 것일까.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주저앉아 둘러보는 것과 주저앉아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둘러보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는 이 땅을 떠나 살아본 적은 없으므로 그 차이를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파리를 여행하면서 쓴 글과 파리에 살면서 쓴 글에는 무언가가 다른 것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이다.(물론 이 책의 작가도 5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여행과 사는 일은 아무래도 다른 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자의 글을 읽으면 훌쩍 지나치면서 보더라도 괜찮은데, 살고 있는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좋아서 좋은 것도 있고, 좋기 때문에 싫은 것도 생기고, 왜 이러고 사는가 분노도 생기고,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체념도 들고, 유리창 밖에서 보는 것과 유리창 안으로 들어선 것의 차이 같은 것일까.
호텔을 얻고 잠시 쉬면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를 구해 사는 일이라면, 그리고 파리 시민이 되는 일이라면,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닐 것이다. 또 파리에 살기는 하지만 굳이 파리 시민이 되려고 하지 않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쓴 글과 미국 뉴요커이면서도 파리가 좋아 기꺼이 파리 시민이 되어 쓴 사람의 글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차이였던가, 우리 나라 사람이 파리에 사는 동안 있었던 일을 썼던 책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 낯선 무엇은. 나 자신은 빼 놓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시점과 나를 그 안에 담아 둔 채로 모든 것을 그리고자 하는 시점의 차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오타 몇 개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고, '파리'를 더없이 동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만한 책이다.
|
|
아직 학생일 시절에 나의 꿈은 '세계 여행'이었다.
|
|
파리에 중독된 뉴요커의 유쾌한 파리 스케치.
'최근 수년 동안 나온 프랑스에 관한 책 중 가장 멋진 책' - 알랭 드 보통
에펠탑을 휘감으며 달나라를 향해 은하철도 처럼 달려가는 기차의 모습.
'파리에서 달까지'의 책 제목 위에 달린 부제와 아래 달린 추천글, 표지 그림이다.
'패션, 트렌드의 쿨한 도시 뉴욕에 사는 뉴요커가 낭만과 사랑의 도시 파리를 그린 사랑스런 책'의 이미지가 느껴지지 않는가.
역시 이 책의 저자도 여덟살 때부터 파리에서 살고 싶어했고, 십대 초반에 실제로 파리에서 한 해를 보내고는 파리와 사랑에 빠지고 만 사람이다.
저자가 파리의 한 상점에서 발견한, 기차가 그려진 19세기 판화의 모습은 대다수의 미국인들, 아니 우리를 포함한 외부인들이 파리에 대해서 가진 환상이 아닐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파리를 '천상의 도시'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고 헨리 제임스가 말했다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파리의 이미지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가 아내와 아들 루크와 함께 파리에서 보낸 5년 간의 삶을 기록한 이 책의 내용은 '감상적 감정'과 파리에 대한 사랑을 바닥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무조건적인 예찬과 낭만적 포장, 핫 스팟에 대한 소개가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으로서, 같은 서구이지만 영미권과 유럽권의 문화적 차이와 프랑스, 파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잡은 특징들을 풍부한 상식과 저널리스트 특유의 위트와 비꼬기로 날카롭게 파헤친 비평서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아파트에서 사회적 기득권을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이면을 읽어내고, 톨레랑스라는 이름으로 파업에 동조하는 부르조아의 모습에서 세계화라는 개혁에 저항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기질과 함께, '지금 상태를 영원히'라는 파업의 속물적 구호를 읽어내고, 모리스 파퐁의 재판 과정에서 프랑스라는 국가가 가진 종교적 숭배와 그에 따른 추상적 관념론, 비현실적 추상화의 습관들을 읽어 낸다. 공원, 카페, 살롱 같은 독특한 문화 공간의 탄생 원인을 다양한 사회 계급과 집단의 중립적인 공간에 대한 필요에서 찾아내고, 카페나 공원이 오픈된 공간이 아니라 실제로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다는 지적을 한다.
물론 이렇게 무거운 소재들만이 아니라 팩스기나 플러그, 헬스 클럽, 크리스마스 트리, 핀볼 게임 등 생활 속의 소소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더 많이 있긴 하지만.
저자는 유럽 지식인의 풍부한 감성과 인문학적 지식과 더불어, 미국식 저널리즘이 가진 풍자와 위트, 촌철살인의 글솜씨를 동시에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알랭 드 보통이 '프랑스에 관한 멋진 책'이라고 칭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나 출장의 안 좋은 점은 그 도시가 익숙해 질만 하면 떠나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볼 것이 있는 것을 보러 가서 보고 온' 것, 이방인으로서 파리의 변두리를 걷다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저자처럼 '머릿 속으로 어떤 상상을 한 후에 그 상상을 실현해 보려고 가는 여행,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과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진지한 파리 여행, 아니 파리 체험을 원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번역투의 짧은 문장들이 읽기에 약간 거북하다는 점과 교정이 제대로 안 되어 오탈자가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리뷰어 클럽 선정 도서)
|
|
얼마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대출한 후, 이 책을 약 한달간 정독했습니다.
우선 저는 이 책의 제목이 책의 내용과 그다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에세이집이기 때문에, 순전히 제목은 작가의 마음이지요.
미국인이 바라본 파리라기보다는 작가가 파리에서 기거하며 느꼈던 바, 에피소드, 정치/스포츠에 대한 시선을 매우 개인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책입니다.
저 역시 파리에서 체류한 바 있으며, 책을 읽는 동안, 당시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어느정도 "침투" 했던 작가의 경험이 부럽기도 하고, 여러가지 통찰력, 신랄한 묘사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글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서 고프닉이 사용하는 비유는 먼지묻은 듯 상투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적절하고, 약간의 변형을 통해 기분좋게 상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래 리뷰를 적은 어떤 분이 지적하신 것처럼, 책은 오역과 잘못된 인명표기 투성이입니다.
에세이집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 또한 프랑스의 문화에 굉장히 정통해야 정확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번역가는 너무나 자주 실수를 저질러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쟈크 랑을 미국식으로 잭 랑이라고 적는다던지, 카렌 뮐러를 카렌 머틀러라고 적어서 당황스럽기도 했고, 달로와요라는 과저점을 달라요라고 적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외의 작은 실수들 의외에도 국어 문법상으로도 주어부와 술어부가 영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 급한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했고, 원문과 대조를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과연 작가가 이렇게 썼을까하고 의심되는 영 알 수 없는 표현들로 글이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편집 또한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가는 파이널 교정을 본 것 같지 않더군요. 악상이 달린 e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아예 표기되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내용상으로만 보자면, 정치와 스포츠는 제 관심밖의 이야기라 대충 훑어보았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은 없고.
요리에 대한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요리를 "사물강의"에 빗대어서 이야기하고, 요리와 문화, 요리와 성욕 등에 대한 이야기가 구태의연하면서도 이야기의 구도가 흥미롭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이 책의 소장가치에 대해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으며, 책을 사고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과 편집상의 많은 실수들이 저를 계속 망설이게 하네요.
뭐.. 유치한 표지야... 포장지로 덮어버릴 수 있지만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