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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정의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오랜 공부를 통해 특정 분야에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일까. 그런 사람은 그저 지식 기술자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바로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넘어 국제적인 문제 등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아닌 자신의 실존에 관계된 문제로 파악하고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을 하는 사람.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에 지식인이 있기는 한걸까. 이 책은 단호히 지식인은 죽었다고 말한다. 과거 그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옳은 길을 갔던 지식인은 이제 없다. 그저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 지식을 무기로 각종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보다 조금 아첨을 잘하면 그 자신은 스스로 권력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자신의 소신을 실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가 되어벼렸다. 여기에는 진보, 보수도 좌,우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운하가 부정적인 것이라는 학자적 견해는 권력의 힘압에 대운하 찬성으로 쉽게 돌아서 버린다. 유력시민단체의 대표는 환경파괴를 자행하는 기업의 사외이사로 들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교수는 돈벌이를 위해 학문적 양심에 스스로 재갈을 물리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죽음과 관련된 논의의 하나로 '대중지성'도 거론된다. 지식인의 죽음이 비단 자식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더이상 아카데미즘 안의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중이 지식인이 되는 대중지성이 도래했기 때문이라는 논의가 이어진다. 지식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의미있는 담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대중지성'의 정의를 만약 '대중들의 논의가 지성인들의 논의보다 의미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게 된다면 개인적으로는 대중지성에 유려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지난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디워 논쟁을 대중지성과 아카데미즘 지성의 논란으로 이야기한다면 대중지성은 한낱 바보스러운 대중들의 억지 정도로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지성'을 '아카데미즘의 지성을 갖춘 지식인들이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대중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대중들도 공개된 지식을 토대로 지식인과 함께 토론이 가능한 열린 지성'으로 이해한다면 대중지성은 분명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책은 지난해 출간된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에 이은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의 성과를 엮은 책이다. 일간지 언론이 이런 깊이있는 주제를 다루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게다가 언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취재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터뷰와 분석을 시도한 것도 긍정적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지식인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한번쯤 읽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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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디 실천적 개념이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고, 가야할 길을 묻는한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박현호 / 성균관대 연구교수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무서운일이다. 그것은 이미 권력이라는 구체화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이러한 권력에서 벗어난 지극히 독립적인 개인일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조선시대에 사간원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홍문관(왕 정치 자문기구), 사헌부(관릭감찰등)와 더불어 왕권과 신권의 견제 역할이다. 그들은 독립되어있었고 말한마디에 목이 왔다갔다했다. 후에, 세도정치의 나팔수로 변질되어 버렸지만, 어째든, 목숨을 걸고 정언(正言)을 펼치는 이른바 언론기관이다. 그들의 선발기준을 보면 재미있다. "학식이 높고 우직한 사람" 한마디로 앞뒤가 꽉 막힌 바른생활 사나이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참 정직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우직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우직한 사람, 곰처럼 미련하다는 게 아니다.ㅋㅋ 적어도 지혜와 지식이라는 스스로의 덫에 걸려 쓰러지 일은 없다는 게지요. 언듯 대학시절 들었던 시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내 한몸의 평화를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결코 철들지 않겠다." 우직한 사람은 아직 철이 덜들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20년전의 지식인들의 우직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겠다. 어짜피 그 엄혹했던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으니, 막 말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눈에 보이는 적들이 있었다는 건 안다. 그 적들은 눈에 보이는 탄압을 자행했다. 쥐도새도 모르게 잡아가 협박하고 고문하고, 법을 지키기 위해 공권력을 남용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지혜로움은 우직함과도 어느 정도 일맥 상통 했으리라..그 우직함을 지키기에 주변의 시선도 역사로부터의 평가도 엄격헀다.
지금의 지혜로움은 어쩌면 세파에 찌들어 장애물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는게 아닐까 조심스레 이야기 해본다. 획일적인 지식인 줄세우기에 학진이 앞장선다던가, 특정기업의 공화국이라는 오명의 대한민국도, 폴리페서들의 조악함도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의 작품이 아닐까?
문제는 나조차도 몇 안되는 우직한 이들을 인정하고 추종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우직해지고 싶지 않은데 있지 않을까?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군사독재라는 실제하는 적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마음속 물질만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적과의 싸움이 힘겨워서는 아닐까?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누가 말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이 시대 언론인의 자세를 한 마디로 표현한 글귀가 생각난다. " From Head TO Heart" 머리로 바라본 세상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게 진정한 언론인에 자세라는 것. 이처럼, 우직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 이 시대 지식인의 참 모습이 아닐까?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디 실천적 개념이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고, 가야할 길을 묻는한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다시한번 되뇌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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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00분토론에 재별 개혁에 대한 패널로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만이 계속 나오고 왜 디워 또는 민족주의 같은 민감한 문제에 관한 비판패널로는 진중권 교수만이 계속 나오는것일까? 시간이 남아돌아서 일까? 방송에 나와 뜨고싶어서? 이 질문에 대해 난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꼐 여쭤보았고 그 답은 명쾌했다.
"그 두 선생을 대신할 대타가 없어서" 이것이 교수님의 답변이었다. 그렇다 자신의 물질적 이해타산과 안락한 연구를 조금은 포기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 할말 다하는 그런 지식인이 한국사회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고있다. 그런 위기의 지식인의 사회에 부딪쳐 경향신문이 참으로 위험할수도 씁슬할수도 있는 지식인 사회의 껍질을 송두리채 드러냈다.
이 책은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김종목,손제민,장관순 기자) 수개월동안의 인터뷰와 조사 그리고 자료발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국 지식인 '생태보고서'이다. 어떤 지식인은 악어의 눈믈을 흘리고 있는 정부와 미국에 이를 골라주고 있기도 하고(8장 지식인 생산공장 미국 그리고 학술진흥재단) 어떤 지식인은 꾀꼬리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회를 현혹한다.(6장 문화 권력과 지식인) 또 다른 지식인은 호랑이와 사자가 먹다남은 찌꺼기를 기다리는 하이에나로서 존재한다.(5장 경제권력과 지식인) 다만 이런 여러 형태를 가진 지식인들은 모두 상당히 건망증이 심하다.(4장 정치권력과 지식인)
이런 참으로 험란하고 어지러운 생태계를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철저히 파헤치고 '발굴'했다. 15명의 지식인 다운 지식인의 외부기고와 174명의 교수로부터 얻은 인터뷰 자료 1개월이 걸쳐 만들어졌다는 한국 지식인의 지도, 또한 한국 지식인을 키워냈다는 금서의 종류와 지식인들의 출신대학과 학벌주의에 연결고리까지 정말 취재노력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 책은 나에게 한국지식인에 대한 모든생태계를 하눈에 파악하게 한다. 그리고 절망하게 한다. 한국 지식인의 죽음을.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참으로 '변절'했던 옛 지식인들과 열정이 가득찬 미래지식인들 그리고 지금 거리에 나와 촛불로 표상된 다중지성 모두가 다시 한번 자신들에 대해 성찰할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다면 수개월동안 밤을 지새우며 이 책을 펴낸 경향신문 기자들의 노력은 헛된것이 아닐것이다.
다시한번 깅종목 손제민 장관순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에게 박수를 그리고 살아도 사는것이 아닌 한국의 짜가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하이킥으로 이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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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눈을 뜨다! '낯섦'을 경험하다! 한국 지식인의 실체와 위기 '경향신문'을 눈비비고 다시보다! 일독의 가치가 충분한 멋진책! 아싸! 일목요연한 분류,통계자료들 자본,시장,서구 편향 학진 다중지성 한국사회를 관통해 흘러온 어떤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눈'이 생긴다. 와~ 책 볼수록 맘에 드네. ㅋㅋ 오~ 경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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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知識人)'이란 '지식'을 통해 시대의 담론을 제기하고 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들을 말할 것이다. 한완상 교수는 <민중과 지식인>에서 지식인을 '민중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의식화되지 못한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민중'이라고 정의했고, 차병직 교수는 '사색과 탐구의 결과를 인간의 삶의을 향상시키는데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군사독재자와 기득권자에게 날카롭게 비판한 이들을 지식인이라 불렀다. 지난 70~80년대에 '지식인'이란 단어에는 소명의식과 도덕성, 날카로운 지성, 민중에 대한 따뜻한 감성, 대나무 같은 절개를 느낄 수 있었다.
[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에 복무한 지식인 통계 ]
그런 현실은 참여정부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현실은 자본의 지식인 통제라 할 수 있다. [ 재벌과 관계 맺은 지식인 ]
대학이 어떻게 권력과 재벌에 무력하게 되고 '지성의 전당'에서 권력과 재벌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는 20대 초반이던 대학생 김예슬양의 <김예슬 선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김예슬 선언> 이후에도 대학과 교수집단과 학생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에도 정치권, 정부, 지식인, 언론들은 잠시 관심을 기울이다가 내내 잠잠해졌다. 대학의 문제는 권력과 재벌 뿐 아니라 학문의 편향, 서구(특히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 현실이 많은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모두 미국식이라면 비판의식 없이 무조건 추앙하고 받아들이려고만 하는 한국사회의 정치권, 관료, 재벌, 학계, 언론계의 행태가 교수 구성원과 박사학위 현황과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시민단체 역시 정치권력에 참여했으나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경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올바르게 지식을 생산하여 그 지식을 사회와 99%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시대의 담론을 제기하고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그런 방식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김동춘, 최장집, 김용옥, 박원순, 정태인, 김종철, 박홍규 등도 있고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조국, 장하준, 감광수, 선대인 등도 있다.
다만, 21세기 지식인은 20세기와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과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대중들은 집단지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지성은 일방적으로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서로 공개하고 소통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원한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블로그, SNS는 새로운 지식 소통방식과 체계로 진화하고 있다. [ 2012년 2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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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할때만큼 평화로움을 주는 것은 없다. 응당, 그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학생이 있어야 할 곳은 술집이나 유흥주점이 아니라, 도서관이나 학교다. 학생은 도서관에서 책을 볼때나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제 자리에 있는 것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요즘 졸업식장에서 교복을 찢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한동안 자신들을 규율이라는 통제속에서 감금했던 것이 교복이라고 상상했기에, 그것을 찢는 행위는 해방이고 자유인으로서의 권리선언쯤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이런 학생들이 3년이란 시간동안 학교 생활을 제대로 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배우는 것을 직분으로 알고 감사히 배우고, 깨닫는 과정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자신의 직분을 상징했던 교복을 찢어발기는 것이다. 이들의 몇년후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문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귀중한 인생의 한 순간을 허비했다는 증거다. 이들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들의 불성실이다. 학생시절때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대개 사회속에서도 성실하지 않다.
지식인이란 단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는가? 이상적인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 단어가 내포하는 함의는 무엇인가? 박학다식, 교수, 박사, 오피니언 리더, 출세, 성공, 돈, 관직. 대개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것이다. 내가 지식인이란 단어에서 꺼내들 수 있는 고정관념은 그들의 기상(氣像)이고 의기(義氣)다. 즉, 사람의 타고난 마음씨, 혹은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은 정의로워야 했고, 또 선견지명이 있어야 했고, 앞서 말달리는 용맹함과 기세가 있어야 했고, 명석해야 했다. 즉, 나는 지식인의 정의를 이렇게 마음속에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지식인의 정의는 좀 다른가 보다. 아니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의 정의는 좀 달라져야 한다. 일단, 학벌이 좋아야 한다. 반드시 미국에서 박사를 받아와야 한다. 이것이 첫째다. 더불어, 유명 대학의 교수가 되어야 하며, 교수로서 연구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반드시 정계에 입문해야 한다. 즉 폴리페서가 되어야 한다. 즉, 교수라는 것은 정계나 재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나 다름 없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것은 선거때 줄을 잘 서야 한다. 소신?가치관? 이런 것들은 내다버려라. 폴리페서에게 소신이나 가치관을 구한다는 것은 사창가의 여인에게 순결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허무맹랑한 일이다. 많은 교수들이 선거철이면 특정 후보의 선거캠프에 들어가려고 안달이다. 소신이나 가치관은 개한테나 줘라. 먹고 사는데 소신이나 가치관이 무슨 상관인가 ? 세상이 요구하는 맞춤형 지식을 팔아먹어라. 이들 폴리페서 교수들이 갖고 있는 의미심장한 가치관이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시리즈는 21세기 한국 지성인의 현주소를 명확히 고발하고 있는 기획물이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쿠테타 정권에서 민주 정권으로 이양된지 20년 가까이 우리 국민은 순진하게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5년 임기의 대통령제는 안착되었고, 국민의 자유선거로 우리는 정부권력과 의회권력을 선출해 왔다. 군사정권 아래서 자행된 숱한 반민주적인 행태들은 이 사회에서 사라졌으며, 언론통제와 반공이데올로기의 기만은 중지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쿠테타 권력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앞에 철저히 포위당했고, 그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교묘한 체제의 착각속에서, 사람들을 신자유주의의 가장 무섭고, 엄혹한 권력앞에 줄세우도록 강요했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초로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이 어떻게 민주화 된 20년간 , 지성을 변질시켰으며 스스로 지식을 내다파는 싸구려 잡상인으로 전락했는지, 지식인의 현상과 본질을 여실히 추적하고 있는 보고서라 할 만 하다.
"민주화라는 기만적 주술로부터 풀려났으면 좋겠습니다. 민주화된적이 없잖아요. 민주화라는 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기만 중에 가장 나쁜 기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적 정당 경쟁이 도입된 건 사실이고, 군사 집단이 물러나서 숨겨져 있는 자본 독재 체제로 접어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민주화는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경제 부문에서는 기초적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유럽 대다수 기업의 운영위원회를 보면, 노동자들이 대표의 3분의 1을 차지하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경영 참여가 있습니까?" p.86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박노자
"언제부터인가 지식인에게 앎과 삶의 불일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지 오래고, "낮엔 진보, 밤엔 보수로 사는 것이 생활의 지혜가 된 지 오래되었다" 라고 21세형 한국 지식인의 현 주소를 이 책은 서문에서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식인상은 이렇게 추잡스러운 행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 이었던 것이다. 즉, 오늘날 대중지성, 다중지성이란 이름으로 지식인을 새롭게 정의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통적 지식인이 변절, 변질되어 죽은 후에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네르바는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의 이상과 모범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학벌과 권위만 내세우면서, 현실적으로 사회와 대중일반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정권과 자본, 시류에 휩쓸려 지식을 팔고 있는 노점지식인들은 구속된 미네르바가 이 사회를 위해 무슨 기여를 했는가? 곰곰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지식인이 변질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국책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소신이나 국가의 거시적인 장래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당대 정권의 입맛에 맞게 연구 논문을 생산해 내고 월급을 받는 것이 그들의 소임으로 전락했다. 최고 지성들이 모인 국책연구원이 대기업 연구소보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대학교수들은 대기업의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재벌을 비판하는 것을 회피하고 학생들을 기업의 효용에 맞게 교육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자본에 종속된 것은 대학 사회뿐만은 아니다. 시민단체에 이름을 올린 지식인들은 단체의 이념에 수긍하기에 그 자리를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정계나 재계로의 출구로서 시민단체를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단체의 임원들이 대기업의 사외 이사로서 활동하면서 활동비를 지원받고 있는 것은 자본과 지식인의 친숙한 결합이라 불릴 만 하다. 그 어디를 찾아봐도, 올곧은 지식인의 가치관과 이념 소신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매판 자본과 매판 지식이 판치는 세상이다.
"한국의 지식인처럼 명예와 돈과 권력을 모두 갖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 그 자체가 이미 권력이다." p.7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그러나 저항형 지식인 김수영이나 참여형 지식인 사르트르처럼, 우리는 이상적인 지식인을 상상하는것을 멈출 순 없다. 자본이나 권력욕에 물들지 않고, 사회의 바른 방향을 지시하고, 그른 방향을 질타할 줄 아는 지식인은 도처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은 그러나 대중의 감시안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요즘 국회에선 미디어법 상정 문제로 말들이 많다. 그러나 다수 국민은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도 모른다. 미디어법이 이 정권이 설명하는 것처럼, 국민경제에 보탬이 될 거고 경제 살리고 일자리 넓히는데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회에서 쌈박질이나 한다고 싸잡아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변질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양심적인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반대편에는 머리좋은 사기꾼도 존재하는게 이 세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양심적인 사람이고 누가 사기꾼인가를 판별할 줄 아는가 하는 문제다. 이 책은 지식인의 변절적인 몰락을 비판하고, 진단하지만 나는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각자가 지식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좋은 지식 사기꾼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밀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쭉정이를 감별하기 위해선 국민이 똑똑해져야 한다. 20세기 초 히틀러의 독일이 가능했던 것은 멍청한 국민들 때문이지 히틀러의 비열한 인간성 때문이 아니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꽃보다 남자>의 재벌2세 구준표나 보면서 침을 흘리며 희희낙락 할 때가 아니다. 국회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감시하자. 매일 저녁 9시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뉴스가 있으니 뉴스도 골라서 시청하자. 요즘 대학생들 졸업시즌이다. 졸업하면 바로 백수다. 정부가 청년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청년 인턴제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인턴근무의 메리트가 없다고 한다. 인턴기간을 경력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하니, 그 짓을 왜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언발에 오줌누기처방이다. 정권 5년간 인턴이란 이름으로 백수들의 불만을 좀 달래주는거 빼고는 없다. 5년간만 욕 안먹으면 장땡이다. 경제가 어려워 정규직도 뽑질 않는데 이미 기업들은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친절히 미리 깍아놓고 있다. 기존 직원과 월급체계가 다르다고 하니, 한마디로 IMF시절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보다 처지가 더 곤란할 일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정부가 잘못했는가? 아니다. 이 정권은 선거철 자신들을 뽑아준 계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들의 기대에 백십프로의 정책으로 보답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신에 충실한 정권이다. 조중동이 무슨 불만을 제기하는걸 본적이 있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애독하는 계층을 위해, 이 정권이 외교,남북,경제 정책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요즘 불만가득한 세력인 미네르바류나 졸업 백수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선거날은 놀러가는날, 하루 쉬는 날, 개념없이 사람 찍는 날로, 아님 충실히 하루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날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요전날 인터넷 기사를 보니 미네르바와 그의 가족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을 믿고, 그에게 몰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 정권은 역사상 가장 많은 지지표를 안고 정권을 잡은 민주 정부인 것이다.
그러니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잘하자. 잘난 지식인들, 그들의 생산도구는 그들이 몇십년간 공들여 획득한 학위, 즉 지식이다. 그들이 지식을 어떻게 팔아먹던지 그것은 그들 맘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하자면 지식인은 선구자이고,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는 초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당신이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없듯이 그들도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들도 성공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한다. 이제 세상은 똑똑한 국민이 만들어 가야 한다. 변질된 지식인의 선동이나 언론 매체의 왜곡에 속았다고 비난하지 말자. 속아넘어간 바로 당신이 문제의 본질이니까. 죽어야 할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인 것이다. 우리 시대 지식인은 죄가 없다. 바로 당신이 죄인이다.
200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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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사르트르가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한 지식인에 대한 명제는 아직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식인이란 진리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 편에 서서 권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자를 뜻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 사회에 진리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 편에서 서서 권력-정치, 경제, 언론-에 저항하는 지식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에서 저항하는 지식인은 '죽었다'고 선언 한 책이 나왔다. 물론 이 책은 지식인의 죽음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진리와 불의에 저항하는 지식인이 다시 부활을 고민한다. 2007년 4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변론문을 모은 <경향신문>이 펴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다.
사르트르 말처럼 지식인이란 태생적으로 저항하는 자이다. 하지만 민주화 20년 동안 우리 사회 지식인은 “이제 사회는 외세에 억눌린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이끄는 안내자, 민중 이익의 수호자, 위대한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서 지식인을 원하지 않는다”가 되었다.
도도한 역사 물결에 저항적인 지식은 휩쓸려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지식인이 아니기에 오히려 권력을 위하고, 권력 체제를 지키는 수호자일 뿐이다. 권력 수호 전위대로 초라하게 전락해버린 지식인 사회라고 통렬히 비판한다.
저항하는 지식인에서 권력에 순응하는 지식인, 자본에 순응하는 지식인으로서 지식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독재권력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과 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평생 민주주의를 위하여 힘썼던 김대중 정부 시절 학문과 지성을 통하여 권력에 저항했던 지식인을 '신지식인상'을 대처하여 결국 지식인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일 뿐,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었다는 비판은 마음을 아프게한다.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지식인은 '경제권력'과 어울리게 된다. 경제권력에 순응하는 지식인은 결국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 중이며 대기업 연구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23쪽)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저항했다. 시대정신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 김현의 비평 의식. 이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저항했다. 그 저항은 사라졌고, 자본 권력의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버린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양극화되고,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가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없는 데도 지식인은 저항하지 않는다. 신분제 사회로까지 나아가는 현실이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지식인은 죽은 자이다.
"한국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상 중 상류층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 고착화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 박사가 최고곡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 괄호를 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야할 화두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라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56쪽)
지식인들은 ‘지식인의 죽음’을 부른 요인을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 ‘자본종속과 시장논리지배’ ‘서구 학문 중심주의 및 의존’이라고 말하다. 서구학문 중심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과 교수 34명 중 31명, 정치학과 11명 중 10명, 외교학교 11명 중 10명, 사회학과 14명 중 9명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지적은 우리대학 현실이 얼마나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인지 알게 한다. 보수와 진보가 별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양성한 지식인이 없다. 우리를 말하고, 우리 사회를 말할 수 있는 지적 풍토는 없고, 껍데기라도 미국에서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자생적 지식인의 학문 성과가 더 탁월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지식인사대주의'도 보수와 진보할 것 없이 팽배해 있다는 비판은 진보지식인들이 새겨할 내용들이다.
특히 5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제권력과 지식인'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지식인들이 이제는 자기 신념을 자본에 팔아버렸다는 강한 비판은 경제권력이 정치 권력 우위에 자리잡았음을 알게 한다.
“심각한 문제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인의 신념을 팔아 버린다는 데에 있다. 기억 프로젝트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버리면서 무리한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다.” 128쪽)
이는 지식인 개인문제가 아니라 ‘기업문화’의 변화에 기인함을 지적하고 있다. 기업은 이제 돈만 버는 조직이 아니다. 돈만 버는 조직으로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사회적인 사업을 통하여 기업이 이윤을 남기는 시대이다. 물론 궁극적 목적은 이윤이다.
기업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만 이윤은 사회와 나눔으로 말미암아 이윤만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사회와 공익을 위한 기업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기업 발전이 우리 사회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이데올리기를 심어줌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가 먹혀 들어가고 있다.
“기업의 영역이 정부는 물론 전 사회로 확장되고 있고, 기업 없이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불가능하다는 담론이 확고해진 상황에서 지식인 개인으로서 택할 수 있는 길은 기업에 속하든지, 아니면 척을 지든지 둘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재벌에 좋은 것이 한국에 좋은 것이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로 들어섰기에 지식인은 이제 재벌에 좋은 것이 한국에 좋은 것이라는 이 이데올로기적 지배장치의 생산 기술자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충격이다.
하지만 비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지식인은 죽었지만 대중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은 대중 지식인들이 지식을 나누는 공간이며, 지식인들이 독점했던 지성을 논쟁과 물음을 통하여 대중지성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으로 통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성공간인 인터넷을 통하여 우리는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고, 선(善)의지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면 된다. 그 중 하나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제도도 대중지식인을 통한 대중지성을 만들어가는 귀중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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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언론에서는 한국사회에는 원로가 없다고 했다.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우르며 존경을 받는 그런 인물이 없다는 말인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원로가 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떠나서 대중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왜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강한 신념과 철학으로 어딘가의 대표 또는 어느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그것이 이념과 성향에 상관없는 이들에게 받아들이기는 힘드나 보다. 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과 동시에 정치적 성향을 배제하고 시민사회를 위한 봉사를 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지금 한국 사회의 원로가 되었을 텐데…... 권력을 달콤함에 중독되어 버려서인지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엘 고어 전 부통령처럼 환경이나 다른 시민사회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정치권과 멀리했다면 우리의 전임 대통령들 중에도 대중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회의 원로로 인정 받았을 인물들이 있었을 텐데……
이번에 누군가 우리사회의 지식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돈과 권력에 결탁하면서 지식인의 사명이나 소명은 엿으로 바꿔 먹으시고 박쥐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철학이요 이념이자 신념이다. 그것만 있으면 변심에 대한 지식인의 양심은 보상받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박쥐 같은 군상들은 우리 사회의 일부의 지식인들이다. 민주화 이전에 지식인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검열했던 권력과 정권에 대해서 비판의 날을 서슴없이 날리던 이들이 민주화 이후에 권력 뿐만 아니라 돈에 굴복해서 침묵하는 다수가 되어버린 것이 서글프다. 권력 위에 서 있는 삼성이라는 재벌의 불법과 비리에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수는 점점 들어가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더 활개치는 현상은 지식인들의 죽음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지식인들의 죽음에 대한 경향신문의 심층취재로 탄생한 이 책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현주소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지금의 지식인들의 정의 or 위치에 대해서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경제라는 것이 모든 국민의 관심사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서글픔이 지식인들에게서도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뒷장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부른 3가지 요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지식인의 죽음'을 부른 요인이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 '자본 종속과 시장 논리 지배' '서구 학문 중심주의 및 의존'라고 한다. 미국 중심의 학연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학문의 획일화를 불러일으킴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학연이라는 지독한 카르텔의 장벽으로 장하준교수 같은 사람이 한국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영국에서 활동하는 현실을 개탄하게 만든다.
그 뿐인가 정치와 돈가 만들어는 막강한 파워와 거기에 굴복하거나 결탁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사회에 지식인들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지성의 전당이던 대학이 언제부터인가 직업훈련소가 되어버리고, 거대자본들은 대학의 편의시설에 하나 둘 잠입하면서 비판적인 지성인을 만들고 탄생시켜야 할 곳에서 돈과 권력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을 가르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지식인들은 돈과 권력에 결탁하거나 스스로 몰락했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인류와 세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결국에 자신의 입신과 영달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사명인 '비판'을 포기한 채 스스로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을 대신하는 다중지성으로부터.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많들어낸 다중지성이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대체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중지성을 지식인들의 대안으로 꼽고 있다. 문제는 다중지성이 과연 얼마만큼 신뢰성과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가진 권위나 지위만으로 많은 대중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는데, 지식인은 죽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권위나 지위는 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다중지성과 몰락한 지식인을 같이 놓고 봤을 때 여전히 몰락한 지식인이 더 신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들의 비판의식이 아닐까? 비판은 지식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모임으로서 다중지성은 몰락한 지식인들을 대체할 강력한 힘과 신뢰를 갖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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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칼 마르크스도 "지식인의 의무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넘어 '변혁'에 있다"고 피력했다. 만약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사르트르와 마르크스가 역설한 지식인의 의무에 제대로 복무했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http://blog.naver.com/gilsa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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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된 한국사회의 20년 뒤. 200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지식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책은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특별기획기사로 소개한다. 그렇다고 신문기사를 단순히 모아 편집한 글은 아니다. 맥락에 맞게 손을 보고 더욱 심도있는 깊이를 보여주며 표와 사진이 적절하게 들어갔다. 독자로서 신문으로 매일매일 토막난 것 같은 기사를 읽는것보다 한 권으로 모아놓은 이 책이 더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백미는 49쪽의 <2007년 한국 지식인 이념 분포도> 그림이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식인들의 이념성향을 좌/우, 민족/탈민족주의의 4개 축으로 분석해 다이어그램으로 나타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식인, 내가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지식인이 누가 있는지 한눈으로 보고 싶던 이 독자는 이 그림을 보고 무릎을 탁 치치 않을 수 없었다!!! 강준만 교수님, 최장집 교수님 등이 어떤 성향을 가진 것인지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해서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지식인이 뽑은 <1987년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설문조사도 흥미로웠다. 이 설문조사르 보고 하루빨리 리영희 선생님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3년 전에 한터에 다닐 때 선생님께서 논술 주제로 우상과 이성을 주셨었는데...아마 그 선생님은 리영희 쌤의 그 책에서 모티브를 타오신 게 아닐까??)
2008년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사회를 지탱한 지식인층.
아울러 현재 지식인층의 정치인화, 정체성 혼란, 규격화 된 지식, 미국 중심주의 지식 등의 내용을 읽고 지식인으로서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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