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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은 순간 약간 당황했다. 시집을 주문했나.. 문장은 흐느끼듯 줄 사이에서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져 배치되어 있었다. 시처럼 말이다. 지난 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렉세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눈물을 하지 않는다>에는 유독 말줄임표가 많았다. 작가는 이제 여명의 끝에서 먼 기억 속 상처를 보듬어 안은 여성 참전 군인들을 한 명씩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생각한 것들, 녹취한 것들을 글로 옮기면서 문장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완결된 문장을 쓰는 것은 문학이라는 장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생략된 문장들이 말줄임표로 이어 붙여진 글조각들은 무엇때문에 까다롭게 완결된 문장들로 직조된 문학보다 깊은 울림을 줄까. 말줄임표는 인간의 언어로서는 결코 전달하지 못하는 참상의 감정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샬로테>에서는 말줄임표 대신 끊임없이 행을 바꾸는 일이 격앙된 감정의 흐름의 속도를 조절한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자 뛰어난 예술가였고, 우울한 광기의 유전자가 언제 발현될 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핏줄까지 더해져 삶 자체가 거센 물살 위에 떠있는 살얼음 길이었던 한 여성의 자취를 따라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예술가의 격정적 삶에 압도당한 작가는 단어들을 긴 호흡을 가진 문장과 문단으로 연결시킬 수 없었다. 작가는 짧게 짧게 숨을 쉬어야 했다. 공백을 넣어야 했다. 끊임없이 행을 바꾸어야 했다. 시인의 언어처럼 때로 종결형 어미 없이 찍혀진 마침표. 그것이 샬로테에 대한 자취를 더듬으며 만들어진 한 예술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까.
엄마가 거기 가면 편지로 다 말해줄께. '저 너머'는 하나의 집착이 된다. 27
유대인인 이유로 어렵게 입학한 예술대학교에서 그림자같은 존재로 살아가던 그녀에게 드디어 기회가 생긴다. 익명으로 심사한 전교 시합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우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대인, 그 곳 선생들은 수상식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처해질 위험을 걱정하고, 수상식의 영광의 자리는 친구에게 돌아가게 된다. 절망한 샬로테는 어렵게 입학한 학교를 그만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 때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때는 크리스탈나하트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던 때다. 파리에서 강제 추방중이던 유대계 폴란드인인 그리슈판이 나치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고 이를 계기로 나치 민병대의 무차별 유대인 학살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독일 인구의 3%를 차지하던 유대인은 전체 국부의 1/4을 차지했다. 집단적 질시가 광기를 확산시켰음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까. 그들은 유대인의 공동묘지를 훼손하고, 상점과 상품을 비롯한 사유재산을 약탈한다. 조국 독일을 위해 싸웠던 알프렛도, 최고의 명의에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도, 독일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사랑받던 새엄마도 모두 직업을 잃고, 침묵한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새엄마의 팬 덕택에 가까스로 수용소를 빠져나온 아버지와 새엄마는 여권이 필요없는 아이를 조부모가 피신해 있는 프랑스로 보낸다.
나치의 광기와 유대인의 공포, 그 중간 지대에 예술이라는 이름의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다. 학살의 공간적 경계는 나치의 승승장구와 함께 끝없이 넓어지고 추방과 도망과 공포,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도 예술은 피어난다. 악몽은 유럽의 구석 구석까지 확산된다. 홀로코스트는 도망가는 유대인들을 지옥의 사자처럼 쫓아다닌다. 혈통을 흐르는 비극의 유전자도 샬로테의 운명을 함께 쫓아다닌다. 두 딸과 거의 모든 가족을 잃은 할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할아버지의 성추행과 폭력적 언행 속에서 그녀는 그 모든 죽음의 이유, 스스로의 핏속에서도 흐르는 죽음의 유전자에 대해 알게 되고 절망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거짓말, 모든 연극을 알게 되면서 나치와 자살충동 유전자라는 서로다른 방향에서 경쟁하듯 죄어오는 운명을 광기와도 같은 예술로 승화시키는 샬로테의 한줌 남은 숨을 잡아삼킨 것은 전자다. 알프렛에 대한 열정적 사랑과 비극적 삶을 이야기하듯 시리즈로 남긴 엄청난 양의 작품을 뒤로 하고,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벌거벗겨진 채 이제껏 살아남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가스실로 보내진 것이다.
전반부는 우울증이 확산되는 과정이 음울하고 후반부는 끝도 없이 나치에 쫓기는 생활이 우울하다. 그러나 중심에는 작가인 '나'가 나타나 소설의 취재 과정을 독자에게 들려주듯 이야기해주기에 사실감을 높여준다. 저자가 실제로 샬로테의 삶을 취재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먹먹한 감정을 그대로 싣고 있다는 점에서 알렉세예비치의 목소리 문학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보여지지만, 주인공 샬로테의 삶을 따라서 급격한 서사를 진행하는 소설적 구성은 한 개인의 삶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무차별한 학살의 역사, 부끄러운 인류 역사의 한 단면에서 소용돌이치던 역사 속에 스러져간 한 개인의 정열과 예술과 사랑과 삶 말이다.
문장의 배치가 시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번역이라 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는 않았고, 문장을 짧게 잘라서 시를 읽을 때에 길게 공백의 여운을 함께 읽는 느낌으로 읽었다. 시어로 쓰여졌다면 아무래도 불어를 한국말로 옮기면서 어순이라든가 라임이라든가 하는 시적 표현은 많이 희석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이런 방식의 글이 주는 이점은 자주 숨을 쉬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명료하게 읽게 된다는 거다. 문장이 휘감긴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천히 공백이 주는 먹먹함을 길게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데, 특히 서사가 주는 먹먹함 때문에 어울리는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유려한 혹은 설명적 문장으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이 공백으로 전달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되는 글이었다. 붙여써도 상관없는 문장을 도치해서 중간에 끊고 끊고 줄바꾸기를 하는 등의 표현에 서서히 적응해가면서 더욱 천천히 읽게 되고, 그 행간 사이, 글로 쓰지 않은 부분들이 흐느낌같은 감성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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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 피의 절반은 죽음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그녀를 두고 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어머니의 단 하나밖에 없었던 여동생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런 식으로 그녀의 외가 쪽 사람들은 외할머니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그녀가 거한 시대는 온전히 죽음의 것이었다. 나치가 유태인 인종 청소를 단행하던 시절. 그녀는 독일인이면서 유태인이었다. 절반의 피가 또 그녀를 사지로 몰아갔다. ![]() 그녀의 혈통은 이중으로 그녀의 목에 올가미를 씌웠다. 의학 연구에만 몰두했던 아버지. 그래서 그녀는 어릴 때부터 고독의 수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벗은 그림뿐이었다. 그녀는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그녀의 그림을 본 자들은 누구나 하나같이 매혹되어 그녀가 화가로 대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피가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독일은 그녀가 유태인이란 이유로 마땅히 그녀에게 가야 할 상을 다른 이에게 줘버린다. 어디를 보아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이 있었으나 그 역시 접어야했다. 결국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로 끌려가 죽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샬로테 잘로몬.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어두운 삶을 살았던 이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발굴되고 기억되어 이제는 살아있을 때보다 더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그녀가 남긴 그림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닌, 그녀의 삶 전부를 기록한 그림. 그녀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나치를 피해 내려와 있던 남프랑스에서 한 의사에게 가방을 맡겼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이 모두 들어있는 가방을. 맡기면서 그녀는 말했다. "이 그림들을 부탁해요. 제 삶의 전부예요." 그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거기엔 모든 것이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일에만 몰두하는 아버지, 자신의 고독, 그림으로 인한 행복, 할머니의 절망과 자살 그리고 사랑했던 알프렛 볼프존. 그렇게 그녀 삶을 스쳐갔던 모든 것이. 그림들은 하나의 제목 아래 연속되고 있었다. '삶인가? 연극인가?' ![]() 그녀에게 삶이란 켜켜이 놓인 절망의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그녀의 몸을 감돌고 있는 피는 죽음의 유혹에 쉽게 응했다. 시대는 그것을 더욱 부추겼다. 소망은 좌절되고 사랑은 상처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삶을 그만둘 수 있었다. 어떤 때는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싸웠다. 나날이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과. 남프랑스의 피난처에서 만난 할머니가 그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자살자들로 얼룩진 무서운 가문의 비밀을 밝혔을 때도, 할머니의 자살에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할아버지가 자신을 침대로 유혹할 때도, 프랑스까지 집어삼킨 나치가 그녀에게로 점점 손길을 뻗어왔을 때도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 싸웠다. 그런 그녀의 무기는 오직 하나, 그림뿐이었다. 이제 샬로테의 차례다. 끝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 사내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묻는다. 이름과 성을 대! 생년월일은? 그다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답한다; 화가요. 그제야 사내는 샬로테를 올려다 본다, 경멸의 눈길로. 무슨 말이야, 화가라고? 그림을 그려요, 그녀가 말한다.(p. 273 ~ 274,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것은 아주 작은 불빛이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삶을 둘러싼 절망의 암흑에다 비교하자면 말이다. 그래도 그것은 그녀가 오르는 계단을 왜소하나마 조용히 밝혀주었다. 비록 바로 코 앞만 볼 수 있었다 해도, 그녀는 만족했다. 이미 그녀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다. 삶이란 어디에 이른다거나 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매일 죽음과 싸워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는 것 자체가 바로 삶의 의미라는 것을. 삶은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피로 주어진 삶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으로 직접 삶을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아마도 그녀가 '삶인가? 연극인가?'를 제목으로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 삶은 수동이고, 연극의 연기는 능동이다. 삶은, 샬로테에게 숙명으로 주어진 자살을 부르는 피처럼 상황에 자신을 결박시키지만 연극의 연기는 나의 의지로 상황을 만들어나간다. 그림이 바로 연기였다. 그녀는 그림으로 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켰다. 그것이 그녀에겐 진짜 삶이었다. 그래서 최후을 앞둔 그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저렇게 확실히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화가라고. 설령 마지막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절벽이었다고 해도,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추락뿐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담담했다. 이미 여기에 있는 것은 진짜 나의 삶이 아니었으니까. 진정한 삶은 거기에 있으므로. 의사 모리디스의 가방 안에. 안전히. 이 책을 쓴 작가 다비드 포앙키노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한 것을 보면. 다른 여자들에 둘러싸인 그녀는 꼼짝도 않는다. 그녀는 이 순간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거기에 있기 위해서.(p. 276, 가스실에서의 샬로테) 여기서 거기란 아마도 모리디스의 가방일 것이다. 그녀는 죽지만 사라지는 것은 이제 허상인 육신 뿐이다. 그녀도 자신의 작품을 건네며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삶의 전부라고. 나뉘었던 육신은 죽음으로 비로소 하나가 된다. 죽음은 완성인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작품으로 불멸이 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위협했던 죽음에게 최종 승리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 샬로테 잘로몬의 이야기는 예전에 영화로 본 적이 있다. 프란스 바이스가 1981년에 감독한 영화로 그녀가 '삶인가? 연극인가?'를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는 남프랑스의 피난 시절을 다루었다. 다비스 포앙키노스도 이 책에서 자신보다 먼저 샬로테의 매력에 빠져 방문한 네델란드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가 바로 프란스 바이스다. 그녀의 이야기도 참으로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단단히 각인되었던 것은 그녀의 그림이었다. 분명 그녀의 그림은 감정을 끌어당기는 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소설로 다시 만나니 느낌이 새롭다.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특이하게도 시를 쓰는 것처럼 썼는데 노래처럼 읽을 수 있어서 그런가 한층 더 흠뻑 그녀의 삶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 몰입의 결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실은 승리라는 것을. 그렇게 삶은 매순간의 충실로 완성된다는 것을. 그것을 널리 밝히고 싶다는 충동이 샘솟았다. 그래서 그만 리뷰가 이런 모습이 되고 말았다. 다비드 포앙키노스가 샬로테에 너무 매혹된 나머지 소설의 문장이 시가 되어버렸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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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테초판한정부록 : 샬로테 잘로몬 그림엽서 4종 (랩핑)
주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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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테 글: 다비드 포앙키노스 / 출판사: 베가북스 All rights reserved Ashely
http://www.yes24.com/24/goods/24463619?scode=032&OzSrank=1 현재 YES24에서 체험판을 제공하고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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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국적 유대인 여류화가 샬로테 잘로몬의 일생. 다소 기이한 가족사를 가진 그녀. 죽음의 길로 뛰어드는 엄마의 가족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자기와 같은 이름을 새긴 묘비 앞에서, 그녀는 엄마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봅니다. 샬로테의 엄마, 프란치스카는 쌍둥이 동생 샬로테를 자살로 잃습니다. 어떤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로 말이죠. 너무나 아끼는 동생을 잃고, 후에 딸을 낳아 그 딸을 샬로테로 이름짓죠. 감성적이고 희생적이던 프란치스카, 샬로테의 엄마는 동생과 같은 이름을 가진 샬로테에게 피아노를 치며 노래도 불러주고, 따뜻한 포옹으로 행복하게 키우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런데 어느날, 우울증에 시달리던 프란치스카도 동생처럼 자살을 선택하고 맙니다. 어린 샬로테는 엄마가 그저 몸이 안좋아서 돌아가셨으리 알고 자랍니다. 그녀가 사춘기가 되며, 그녀의 아버지 알베어트는 파올라라는 가수와 결혼을 합니다. 파올라는 알베어트를, 그리고 샬로테를 잘 보살피는 든든한 새엄마가 되었지요. 뛰어난 가수이고, 팬층도 두터운 파올라였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유태인을 차별하기 시작할 때, 파올라도 더이상 무대에 서기 힘들어집니다. ![]()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독일 전반에 퍼지기 시작하죠. 예사롭지 않은 그림 재능의 샬로테가 예술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두각을 보여도 공개적인 상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슬픔도 함께 하며 말이죠. 예술학교에서 알프렛 교수의 애제자가 되었습니다. 독특하고 기이하고 시적이고 그리고 뜨거운 샬로테의 작품은 그를 매료시키게 됩니다. 독단적인 알프렛 교수, 대학생이 된 샬로테는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이라 새겨둔 알프렛. 그런데 알프렛은 그녀의 이름을 달콤하게 불러주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죠. ![]() 크리스탈나하트 비극이 시작되며, 독일군이 점령해나가기 시작합니다. (크리스탈나아트: 1983년 11월 9일 나치 대원들이 독일 내 수만 개의 유대인 가게와 유대교 사원을 약탈하고 불태워버린 날을 가르킴p.149)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국경이 폐쇄되며 독일 내 유태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됩니다. 그리하여 샬로테의 부모님들은 프랑스로 피신시킬 계획을 생각하지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프랑스 남부의 오틸리에게 도움을 받고 있으니 그쪽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정신착란을 겪고 있는 외할머니, 샬로테는 오틸리에게서 이제 독립을 해야겠다 싶습니다. 오틸리는 은근한 사랑을 보여주던 자산가였습니다. 그녀는 비록 샬로테의 이사를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응원합니다. 잊지마, 너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거. 나 자신을 위해서... 샬로테는 머릿속으로 그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프랑스도 이제 예전같지 않아집니다. 게다가 독일 출신 유태인이건만 독일국적이라 하여 프랑스가 잡아들이기도 하죠. 전쟁, '인간'이 아닌 '소속'이 중요해지는 암담한 시기. 샬로테는 가족사의 짐과 더불어 전쟁의 시기에 어느 나라가 장악하느냐에 따른 부담도 무겁습니다. 이제 보살펴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만이 함께 하고 그런데 그 와중에 또 할머니는 가족사의 한 켠을 또 장식하고 맙니다. 할아버지에 의해 알게되는 엄마의 사인 - 자살. 그리고 자살의 가족사에 지치는 할아버지에 의한 폭언들. 그녀는 버거운 삶을 살면서도 그림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임신한 상태로 유태인의 학살을 맞게 된 샬로테. 아우슈비츠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과의사 모리디스에게 오틸리에게 전해줄 물건을 맡깁니다. "이 그림들을 부탁해요. 제 삶의 전부니까요!" 저자에 의해 밝혀지는 에필로그. 독일의 패전으로 다시 생명의 위협이 사라지고, 파올라와 알베어트는 딸을 찾습니다. 모르디스와 오틸리에게서 그녀의 소식을 듣지요. 그리고, 그녀의 삶 전부인 그림도 만납니다. 예술로 표현된 진실. 그리고, 천재화가 샬로테의 회고전은 성황리에 끝나지요. 그리고 전해지는 그녀의 유일한 사랑, 알프렛의 소식. 달콤하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을 때, 파악하기 쉽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알게 되며 소설 샬로테는 마무리됩니다. 무거운 시대, 우울한 가족사. 그리고 천재화가 샬로테의 굴곡진 인생이라는 요소가 시를 읽듯 구성된 문장으로 더 매혹적으로 다가옵니다. 실존 인물에 관한 소설, 그리하여 전해짐이 더해지는, 소설 샬로테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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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까? 소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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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왜 과거에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이 계속 이어지는 걸까? 어차피 할 잘못과 실수, 고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걸까? 그렇다면 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린 시절 고민했던 많은 질문들.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부정적으로만 보았던 인간의 삶과 어리석음을 이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어딘가 둥글둥글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이야기에 더 마음이 쓰인다. 반드시 기억해야 하기에.... 샬로테.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화가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를 여류화가. 그녀에게는 2중의 고통이 있었다. 하나는 가족사적 비극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시작된 ‘자살’에 대한 강박이고, 나머지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시대의 유대인이라는 시대적인 비극이다. 그런 그녀의 삶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있게 담아간다. 특이한 서술방식이다. 소설임에도 문단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 문장씩 마치 시처럼 진행된다. 이에 대해 책 뒷표지의 안쪽으로 접힌 부분에 적혀있다. 샬로테의 작가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스물여섯의 나이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사라진 그녀의 이 짧막한 삶을 장황하고 치렁치렁한 산문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책을 다 읽고 있은 이 말에 정말 공감했다. 한 문장씩 끊어지는 이 서술방식은 소설을 다 읽은 후 더 큰 여운을 남겼다. 어차피 반복될 실수이기에 이런 삶과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을까? 아니다. 기억하지 않아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전혀 기억되지 않는다면 그 강도는 지금과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일 수도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당신에게 샬로테와 같은 비극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 비극이 닥쳤을 때, 말도 안되는 잔혹한 상황에 관심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신에게 원망할 수 있는 자격은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당당하게 가질 수 있다. “이 그림을 부탁해요, 제 삶의 전부니까요!”라고 외치며 사라진 샬로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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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테] 망자를 되살리는 장엄한 추모
돌아오는 길에 샬로테는 심호흡을 한다. 바로 오늘, 그녀의 걸작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가 태어난다.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지난 세월의 이미지들을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내 역사를 그려야 해. 중요한 건 그것뿐이야. 샬로테는 그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그 숱한 죽음이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야 해. 바로 그 대목에서 샬로테는 걸음을 멈춘다. 그 숱한 죽음이 다시 살아나도록… 고독의 한가운데로 한층 더 깊이 들어가야 해! - p.223(제7부 6장 中)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 명의 미친 정치가에게 책임을 돌리기엔 유서 깊은 증오와 광기가 전 유럽적으로 폭발한 참극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비극을 쇼아(Shoah대재앙) 혹은 홀로코스트(Holocaust번제)라 명명하며 깊게 의미를 부여하였다. 샬로테 잘로몬이라는 어린 독일계 유대인 화가도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절정이던 1917년에 태어나 제 2차 세계대전의 절정이던 1943년에 죽은 화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0대부터 격리와 차별을 경험하였고 예술대학교에 진학해 졸업 작품이 최우수로 뽑히지만 상을 받을 수 없었다. 열렬한 사랑 끝에 아기를 품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임신한 채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여섯이었다.
혼례는 유대교 회당에서 거행된다. / 랍비인 아버지 아래 자란 파울라는 유대교 신자. / 하지만 샬로테의 삶에서 유대교는 썩 중요하지 않았다. / 아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의 어린 시절은 유대인 성향의 부재 위에 이루어졌으니까. /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자면 말이다. / 부모도 종교를 떠나 세속의 삶을 영위해왔다. / 그리고 엄마는 기독교 성가를 사랑했다. - p.49(제 2부 6장 中)
1933년 1월, 그 증오는 권력을 잡게 된다, // 파울라는 더 이상 대중 앞에서 노래할 수가 없다. / 알베어트에게도 마찬가지로 직업의 몰락이 뒤따른다. / 이제 유대인은 의술을 펼쳐도 대가를 받을 수 없다. / 그리고는 교사자격증까지 반납하게 된다. / 이제 막 중요한 발견을 성취한 그가 말이다. / 폭력은 일상이 되고 저들은 책을 불태운다. - p.66(제3부 2장 中)
소설, 시나리오, 음악 등을 종횡무진하며 프랑스 예술계의 촉망 받는 문제 작가인 다비드 포앙키노스. 그는 이 샬로테 잘로몬의 일생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특히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 LEBEN? ODER THEATER?(1941-1942)>라는 샬로테 잘로몬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역작인 작품을 주 모티브로 그의 삶을 문학으로 되살리는 소설을 썼다. 제목은 <샬로테>, 8부에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소설은 서사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소설이라 주장하고 있는 독특한 책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며 장엄한 추모 의식을 벌이고 있다. 21세기의 살아 있는 프랑스 작가가 문학으로 되살린 20세기의 죽은 독일 화가. 프랑스 문단은 그 가치를 높이 사 2014년 <샬로테>에 르노도 상과 공쿠르 데 리세앙 상을 수여하였다.
타인의 취재에 의해 구현되었긴 하지만 온 삶으로 증명하는 나치 고발이란 점에서 2005년 르노도 상 수상작인 이렌 네미로프스키의 <프랑스 조곡>이 떠올랐다.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지난한 피난 생활 속에서 없는 종이에 최대한 작게 글씨를 쓰며 소설을 쓰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고, 친딸이 출판 편집자가 되어 수십 년 동안 악착 같이 자신의 명망과 입지를 쌓아 출간하고 다시 그래픽노블과 영화로까지 만들고 만 책이었다. 문단의 주목 받던 작가였으나 전쟁으로 오랫동안 묻혔던 이렌 네미로프스키와 달리 정식 데뷔도 하지 못했던 샬로테 잘로몬은 남다른 인복으로 1961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전시, 출판, 오페라, 발레, 다큐멘터리, 영화를 촉발하며 수없이 조명 받았다. 그런데도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이번 오마주가 크게 호평 받은 걸 보면 <샬로테>의 진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해외의 유명세와 달리 샬로테 잘로몬이 우리나라에는 낯선 편이다. 그래서 권기대의 번역으로 베가북스에서 올 2월 출간한 <샬로테>는 샬로테 잘로몬을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좋은 안내자로 기능한다. 자랑하고픈, 형식적으로 독특한 실험적 소설작품이라는 점에서 프랑스문학진흥국은 이번 번역본에 출판 번역 지원하였다. 이 책의 모티브가 된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라는 작품은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색만 써서 그린 1325개의 수채화를 다시 784개의 수채화를 추려내고 3부로 나눠 3가지 다른 색깔의 오페라 콘셉트로 만든(그래서 부제가 ‘Ein Singspiel오페라’다) 연작 작품이다. 그래서 한 작품인데 동명의 책으로도 만들어져 있다. 베가북스는 <샬로테> 초판에 한해 그의 그림 네 개를 엽서로 제작해 동봉해 판매하고 있으니 읽을 계획이라면 초판으로 사 문장과 그림을 함께 보며 책을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최우수상의 주인공은 샬로테 잘로몬입니다! // 곧바로 불편함이 좌중을 사로잡는다. / 샬로테가 이 상을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잖아. / 모두 다 지나칠 정도로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는데. / 다들 학교의 유대인 학생에 대해 입방아를 찧을 텐데. - p.135(제5부 1장 中) 우리의 남편들은 어디에 있는가? /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디에 있는가? / 그들은 단 한 가지 정보를 간청한다. / 살아 있다는 증거를 달라고 애걸할 뿐이다. - p.156(제5장 6장 中)
이모와 엄마의 죽음은 13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다. 엄마와 할머니의 죽음을 갈라놓은 간격과 꼭 같이! / 그래, 정확히 동일한 시간의 거리다. / 세 사람 모두에게 거의 동일한 하나의 몸짓. / 허무의 한 가운데로 내닫는 한 번의 도약. / 젊은 아가씨, 가정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 그러니까 그 어떤 나이도 살 만한 가치가 없구나. / 수용소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샬로테는 계산해본다. / 1940 + 13 = 1953. / 그러니까 내 자살의 해는 1953년이로군. / 그 전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야. - p.211(제 7부 1장 中)
아주 일찍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했으나 발표할 방법이 없던 사람. 가장 예민하고 한창 때인 10대와 20대를 고스란히 억압받은 사람. 민족 정체성이 전혀 없는데도 피로 낙인 찍혀야 했던 사람. 집안 여인들의 주기적 죽음을 의식했던 사람. 그래서 채 다 자라기도 전에 미래를 막연히도 꿈꿔보지 못한 사람.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문장으로 표현되는 인간 샬로트 잘로테의 삶은 너무나 슬펐다. 그 인생은 연극이 되지 못한 실제의 삶이었고, 결말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책장은 쉽게 넘어가나 활자에 간 눈과 그 활자를 담는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지는 책이었다. 종종 시점이 종횡무진하기도 한 <샬로테>는 예술적으로 예의바른 것이 무엇인지, 한 예술가가 다른 한 예술가에게 어떻게 절절한 헌정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모범이었다. 책을 덮고 간절하게 샬로테 잘로몬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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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테란, 이름도 낯선 화가에게 무엇이 매료되었기에 저자는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임신 5개월의 몸으로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한 젊은 화가인 샬로테 잘로몬의 불우한 가정사가 이어질 때도 마음에 지지 말자고 스스로를 꾹꾹 눌러 다스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고 그런 그림을 남긴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는 무언의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산문시. 이 소설을 처음 마주하고 든 생각이었다. 뿌쉬낀의 산문시처럼 장황스럽진 않지만 한 줄로 끝나는 시 같은 문장을 보면서 소설이 아니라 샬로테의 내면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반면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철저하게 지켜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독자는 그 모든 일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게 된다. 현재형인 시제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비극이, 암울한 전쟁의 상황이 고스란히 박혀버리는 것이다.
자살한 이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엄마가 자신에게 붙인 이름 샬로테. 정말 자살 유전자가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샬로테의 외가 쪽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암울한 시기였다는 핑계가 무색할 정도로 생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린 무의함이 샬로테를 덮칠까 두려웠다.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의 이모와 엄마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진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그녀 주위에 일어나는 변화는 늘 거셌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기란 여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옥죄어오는 유대인 학살은 그녀를 더 피폐하게 만들어갔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의 대상이 새엄마에서, 새엄마의 지도 교수인 알프렛으로 바뀌어 갈 때 그 사랑이 결코 오래갈 수 없음을 짐작했다. 그 결과가 뱃속에 든 아이고 결국에는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할거라 생각했지만 샬로테의 사랑은 더 질기고 더 간절했음을 나중에 드러난 그녀의 그림에서 밝혀졌다. 그녀만이라도 지옥 같은 독일에서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지만 오히려 그녀의 죽음을 앞당기고 말았다. 그곳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알프렛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녀의 영혼을 뒤흔드는 사랑이 아닌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던 시기에 그녀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마지막을 예감한 듯 자신의 작품이 든 가방을 건네며 ‘이게 제 삶의 전부예요(240쪽)‘ 말할 때 알았다. 우울한 가정사를 견디고 알프렛과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가 되어 조부모 곁에서 힘든 시간을 버텼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음을 말이다. 그녀가 남긴 그림이 정말 전부였음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 한동안 말을 멈추고 숨을 멈출 정도로, 최후가 되었던 가스실이 아닌 모리디스 박사의 진료실 문 앞에서 그녀와 이별을 나눈 것 같았다.
저자가 이 소설을 써야만 했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길이 없지만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꼭 해야만 했고 했어야만 했던 일이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국의 낯선 화가로만 치부하기엔 그녀가 살다 간 짧은 생이 너무도 강렬하고 먹먹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 역사의 반복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보지만 그런 굴레가 주변의 곳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음에 마음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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