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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칼의 노래 '강물도 목이 마르다'
"생명을 살리는 칼의 노래 '강물도 목이 마르다'" 내용보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시집을 읽었다. 어찌나 날이 서 있던지 칼로 베는 듯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시들이었다. 시를 향한 시인의 자세 때문일까, 한 편 한 편 넘기기가 쉽잖았다.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삼천배를 하고 오라던 어떤 스님이 떠올랐다. 저녁 늦게 펴든 시집을 밤새 읽었다. 읽다가 덮고 읽다가 다시 덮었다. 기한내에 마쳐야 할 숙제를 하듯 그렇게
"생명을 살리는 칼의 노래 '강물도 목이 마르다'" 내용보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시집을 읽었다. 어찌나 날이 서 있던지 칼로 베는 듯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시들이었다. 시를 향한 시인의 자세 때문일까, 한 편 한 편 넘기기가 쉽잖았다.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삼천배를 하고 오라던 어떤 스님이 떠올랐다. 저녁 늦게 펴든 시집을 밤새 읽었다. 읽다가 덮고 읽다가 다시 덮었다. 기한내에 마쳐야 할 숙제를 하듯 그렇게 시와 씨름을 했다. 아침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시인에겐 낙장불립 시인이란 예명이 붙기 시작했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통해 친숙하게 다가온 시인, 그의 이름은 이원규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느껴지던 시인이 낙장불립이란 우스개 예명으로 불리다니,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지리산에 들어오기 전 시인은 유수 일, 월간지의 잘 나가던 기자였다. 20대 초반 등단했고, 머리도 비상해 세상에 거칠것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에겐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든 아픔이 있었다. 평생 한번 밖에 만나지 못한 빨치산 아버지는 시인과 어머니의 가슴에 그리움와 아픔을 심겨놓았고, 시인의 마음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었다. 그는 광야같은 세상으로 일찍이 발을 내딛었고 치열하고도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의 이력서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마음엔 평온이 없었다.

 

천적

 

생과부 울 엄니 나를 낳자마자

탯줄로 짠 그물로 네 평 점방을 차렸다

막걸리 국수 오징어 양초 포도 감기약

하내리 구랑리의 만물 백화점

아직 젊은 마흔 살 암거미의 집이었다

처마 끝 외줄을 타고 날아간

우사비행의 좌파 아버지 거미에게는

집이 곧 덫이요 무덤이요 감옥이지만

서방도 없이 새끼를 낳은 화냥년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차마

씨를 발설할 수 없는 무당거미의 집이었다 

 

후략

 

모든 걸 정리하고 시인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1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는 지리산 지킴이가 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고 국토대장정을 기획하며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족필(足筆)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지리산에서의 생활을 위해 입산 전 실제 노숙을 했다는 시인이 말이 떠오른다. 그가 말하는 노숙자는 생에 실패한 자로서가 아닌 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땅과 함께 하는 자연인으로서의 노숙자를 말한다. 걷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생의 신비가 그의 시 안에 들어있다. 직접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이 삶에는 적잖이 있다. 그의 시는 그의 발자취를 손으로 그려낸 온 몸의 언어다.

 

쑥무덤

 

홀로 지리산 빗점골

빨치산 루트를 따라 오르다

무성무성 웃자란 쑥무덤에 합장을 한다

 

뉘신가

나보다 먼저 가시었네

이미 오래전에

한 무더기 똥을 싸놓고 지나가시었네

 

고마워라, 당신의 똥 자리

쑥쑥 무성하다니!

 

산짐승이든 빨치산이든

누군가는 꼭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요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자기 실존의 부재를 의도적으로 꾀하다 땅과 만나면서 이원규의 시는 지난 시간과 오늘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의 걸음걸이는 단순히 발을 움직이는 동작이 아니다. 살아있는 자로서의 처절하고 숭고한 실존의 확인이자, 타자와의 소통이며, 자연과의 내밀한 교류이며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코 부드럽지 않다. 그래서 스스로도 '활인검'이란 시를 통해 자신이 칼임을 고백한다. 많은 것을 죽이고 마침내 자신조차 죽였지만 그 죽임과 죽음을 통해 자신이 이젠 생명을 살리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날카롭지만 생명을 살린다. 

 

 

d*********2 2012.09.11. 신고 공감 5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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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으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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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황지연에서 을숙도까지 걷고 걸어 스물닷새 민족의 젖줄을 따라가다 보았다   시커먼 폐수의 얼굴 뭉개진 사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우는 돌이 있고 우는 여자가 있고 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홀로 걷고 또 걷다가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으니   새는 날며 저의 보드라운 깃털로 공중의 길을 지우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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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황지연에서 을숙도까지

걷고 걸어 스물닷새

민족의 젖줄을 따라가다 보았다

 

시커먼 폐수의

얼굴 뭉개진 사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우는 돌이 있고

우는 여자가 있고

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홀로 걷고 또 걷다가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으니

 

새는 날며

저의 보드라운 깃털로

공중의 길을 지우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저의 지느러미로 물속의 길을 지우고

 

새와 물고기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새는 날며 저의 보드라운 깃털로 공중의 길을 지우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저의 지느러미로 물속의 길을 지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는 시커먼 폐수의 사내들이 있다. 폐수의 사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돌과 여자와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우는 돌과 우는 여자와 우는 아이. 단단한 자연물인 돌과 인간의 약자인 여자와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모두 울고 있으니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러나 비극은 거기에서마저 끝나지 않으니 제 자신의 얼굴마저 뭉개고 있음이다. 남도 나도 타락하고야 마는 자리. 그리하여 시인은 ‘나는 나그네라는 말이 좋다 / 일평생 한자리 노거수처럼 / 온몸의 그대로 한 채의 집이어도 좋’(「나그네」)겠다며 사내의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 ‘임대차계약서 같은 거 없어도 / 당당한 / 감나무 한 그루 / 그 아래 / 부동산 전무의 처사님’인 달팽이에게 ‘어쩐지 낯이 익다’ (「달팽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대문이 없고 훔쳐갈 게 없으니 / 아예 자물쇠도 필요 없는 산중의 외딴집’(「논두렁 우체통」)에서 살며 ‘말복의 지리산 해발 900미터 / 하늘 아래 첫 동네 가까이 / 나만의 비밀 계곡에 들어가 / 겨울 신갈나무처럼 훌훌 옷을 벗고 / 가랑이 사이 산바람이 지나는 거풍을’(「뼈가 투명해질 때까지」) 하는 것도 폐수의 사내를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눈물의 모터사이클 시속 170킬로미터 / 생사의 경계를 넘나’(「비야 청산 가자」)드는 것조차 시인에게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아무래도 가장 첨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때는 길 위에 있을 때다. ‘달마다 천 리 길 해마다 / 만 리 길을 걸어’가며 ‘허공의 새들에게도 길이 있고 / 물속의 고기들에게도 길이 있’(「길이 길을 막다」)다는 것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이 때의 길이란 폐수의 사내가 남긴 자리와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것일 터.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게 된 길이다.

 

족필(足筆)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YES마니아 : 골드 g*******g 2008.07.1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