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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철학적 잔소리는 엄마보다 무섭다_철학의 참견
"[책]철학적 잔소리는 엄마보다 무섭다_철학의 참견" 내용보기
각주1 /   이번에 빨대 꽂은 분야는 철학이다.      도입부가 굉장히 흥미를 끌어당기게 구성되어 있다. '주차 문제-토마스 홉스', '신상 털이-푸코', '다이어트-들뢰즈와 가타리', '보이스 피싱-프로이트' 등 K씨와 K씨의 아내의 일상적 이슈와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결지어 철학을 적출해내고 있다. 말 그대로 적출(摘出)하고 있다. 만만히 보고 시작했던 철학에 내 피를 적출당한 기분
"[책]철학적 잔소리는 엄마보다 무섭다_철학의 참견" 내용보기
각주1

 

이번에 빨대 꽂은 분야는 철학이다.

 

 

 

 

도입부가 굉장히 흥미를 끌어당기게 구성되어 있다. '주차 문제-토마스 홉스', '신상 털이-푸코', '다이어트-들뢰즈와 가타리', '보이스 피싱-프로이트' 등 K씨와 K씨의 아내의 일상적 이슈와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결지어 철학을 적출해내고 있다. 말 그대로 적출(摘出)하고 있다. 만만히 보고 시작했던 철학에 내 피를 적출당한 기분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여가 여유 여백이 사라진 도시는 홉스의 세계관과 잘 맞아떨어지는 공간이다. 출근길 지하철을 상상해보라.(...) 노량진이나 신림동에 있는 고시원 쪽방들도 마찬가지다. 고시원 생활을 하는 사람은 친구를 데려갈 수도 tv를 켤 수도 없으며 방 안에서 전화를 받는 것도 조심스럽다. (...) 홉스가 그린 여백 없는 세상이란 이렇듯 끔찍하고 기괴하지만 분명히 우리 삶 어딘가에 실존하고 있다.


이 사회에는 낯선 익명의 사람들 틈에서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려고 타인을 짓밟고 그것이 마치 신이나 국가의 뜻인 양 위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느와르나 사극을 보면 그냥 죽이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데 굳이 명분을 만들려고 제 팔다리를 잘라가면서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계략을 세우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땐 일차원적인 생각에 가득차 직선으로 나아가면 될 것 같았던 사회가 실은 과거에 저지른 한 가닥의 실수도 미래에는 엉망진창으로 엉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한 가닥의 '명분'을 갖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아픔을 감수할 정도로 넓은 길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 덩어리 토지 위에 하루 아침에 국가가 멸하고 생기기를 반복하던 시절에 '명분'이라는 것은 '출발 신호'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왕을 죽여버리고 새 왕을 추대하려면 왕이 폭군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음양오행이었다. 쇠퇴하고 흥하는 게 반복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은 없어지고 현대 사회는 쪼개고 쪼개진 관계를 맺고 있다. 급기야 개개인의 성공에 매달리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polis에서 경찰police라는 단어가 파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가정 하에는 평화를 보장하는 경찰권력이 필요하다. 갈등과 마찰을 전제로 공권력에 호소하는 홉스의 평화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평화가. 소통과 사랑의 평화가 아니다.


​왕은 없어졌지만, 통솔자는 필요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통솔해야 하는 통솔자는 제어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제어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이 제러미 밴담이 제안한 건축 형태이자 미셸 푸코가 연구한 감옥, '판옵티콘'이다. 이 감옥은 가운데에 높은 감시탑을 두고 감시탑을 축으로 죄수들의 방을 빙 두른 형태로, 감시탑은 어둡고 죄수들의 방은 밝다. 즉, 감시자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으므로 지금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죄수들은  외부의 압력이 없음에도 스스로를 감시하는 '효율적인' 감옥 시스템이 완성된다. 이 시스템이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옥에 한했을 때고 인권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니 멀게 느껴지겠지만, 여러분도 CCTV라는 판옵티콘 속에서 살고 있다. 나쁜 마음을 먹으려다가도 어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을 CCTV를 떠올리면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CCTV가 작동하는지 작동하지 않는지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의 등장으로 규율권력은 처벌 중심의 훈육사회에서 감시 중심의 통제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지배자 입장에서 판옵티콘의 효과는 놀라웠다. 학생들은 유순해지고 죄수들은 잠잠해졌으며 노동자들은 성실해졌다.


​이런 투명한 유리방이 필요한 것은 사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가장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소통'과 '이해'라는 것을 구축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원이 많을 수록 어떤 의견을 내도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낼 수도 없고 일부 게으름뱅이들에게만 주의를 쏟는 데는 시간도 힘도 많이 드는 일이다. 따라서 차라리 모두를 감시하는 형태의 판옵티콘은 지배자의 편의성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거리가 멀어질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는 일괄적으로 자율성이 꺾이고 강제성을 띤다. 그런데 놀랍게도 판옵티콘이 개인에게 미치는 부작용이 '관심종자'라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감시 사회는 개인들을 유아화하는 결과도 낳는다. 부모의 시선 아래에서 떼를 쓰는 아이처럼 감시시회의 성인들도 유치해진다. 대중의 시선을 받으면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되었다고 느끼는지 자신을 노출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 현대의 삶에서는 인터넷 공간이 부작용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집 안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공혼장에 접속할 수 있고 공적 공간이 개인의 스마트폰 안에 들어와 있다.


​일전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한 도서를 두고 A라는 인물이 당당하게 책을 부인하는 댓글을 쓰고는 반나절 내내 집단 린치를 당하는 광경을 봤다. 유형도 다양했다. 반말에 무논리 무작정 비꼬는 부적응자 유형부터 너의 생각을 내가 바로 잡아 주고 말겠다는 선생 유형, 아예 무슨 말인지 이해 자체를 못하고 딴 소리를 꾸준히 하는 난독 유형까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명을 손가락으로 구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한마음 한뜻으로 분개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A의 의견이 자신이 평가한 책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이 높이 평가한 부분을 옆에서 깎기 시작하면 자신이 내린 평가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자신이 내린 평가를 올바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깎아내린 자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사건이 생각났던 이유는 "공적 공간"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들이 집단 린치를 가하는 논리 중 하나가 "여기는 공적 공간이니까 네 맘대로 떠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였다. 정말 놀라운 개논리다.


역감시를 가능케 하는 질서는 판옵티콘의 반대 개념인 시놉티콘(synoptic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자신의 정보를 노출할 것인지 아니면 프라이버시를 지킬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각 개인에게 있음을 존중하고 그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얘기하지만, 이는 동화같이 모두가 하하호호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버젓이 눈 앞에 요구하지도 않은 신상 정보를 까놓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해킹이나 스토킹 같이 힘이 드는 건 물론이고 구글링같이 손가락만 까딱거릴 수 있는 과거 탐색기도 파헤칠 필요 없이 누구나 하나쯤은 가입하고 있는 SNS를 생각해 보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어느 SNS를 봐도 자신의 개인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는지 본인이 직접 설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게재하는 글도 100% 본인의 자율성에 맡기고 있다. sns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개인의 자유고 자신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도 자유다. 물론 정보를 공개했다는 것이 맘껏 우리집에 처들어오고 전화주세요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런 정보를 돈주고라도 얻으려고 혈안이 된 불법 단체 또는 견물생심이라고 눈 앞에 필요한 것을 흔들고 있는데 모두가 그걸 참을 수 있을까? 개인이 나쁜 마음을 먹을 순 있지만 시행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개한 자신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물론 길에 지갑을 떨어뜨리고 일주일이 지나서 와도 그자리에 있는 사회의 시민성이 옳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애초에 지갑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건 본인의 몫이 아닐까?


이렇게 눈 앞에 개인 정보를 들고 흔들어도 꾹 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덥석 무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이 있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성향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도 가정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한결같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 바로 학교다. 교육 방식은 어딜 가도 일륜적이다.


만약 준거(기준)집단이 만들어지면 그에 따라 차별의 잣대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축구를 잘 하는 아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공부를 잘 하는 아이 등 서로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를 하나의 기준점으로 잡아버리면 그에 따라 위계화와 서열화가 이루어져 차별의 잣대가 작동한다.

곧 끝날 줄 알았더니 끝날 기미는 안 보이고 점점 판만 커지는 성차별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꾸만 어느 한쪽을 기준으로 잡으려는 일부 의견이 고개를 디밀기 때문에 '차별'이라는 단어가 잊을만 하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균형을 잡자고 외치는 과도한 언성이 오히려 배를 뒤집을 기세로 흔드는 중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 보고 있으니


내가 싸우고 있는 상대방이 괴물인지 괴물이 아닌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이 괴물이어야 지금까지 싸운 내 모습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불필요하다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다. 깨닫는 순간 내가 괴물이란 걸 깨닫기 때문이다. 그들의 과열된 전투 양상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면 서로가 괴물이라고 외치는 괴물들의 아가리가 달싹이는 모양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소 불만스러웠던 건 동화 같은 착한 결말 짓기와 그놈의 '소수자' 이야기 때문이었다. 특히 특이성 부분에선 '소수자'까지 언급하길래 신랄한 내용을 기대했으나 "워크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더니 사고가 풍부해지고 충만해졌어요~"라는 식으로 '소수자=조금 독특한 발상을 가진 사람'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부들부들.


피터 싱어는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유정성이라은 개념이 여기서 등장하는데 동물도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다른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살장에서 동료 동물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동물들은 심각한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발버둥을 친다. (...) 피터 싱어는 무척추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완전채식을 권했다. 하지만 그처럼 고통의 여부만을 척돌 삼아 모든 생명체에 대해 같은 태도를 적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완전 채식을 권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여부라는 단 하나의 명제로만 동물의 권리를 해명하기는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는 과거 여성 해방과 흑인 해방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앞으로 동물 해방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형평성을 가지려면 밤마다 닭다리를 뜯는 주제에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닭, 오리, 돼지, 소, 양 등 가리지도 않고 없어서 못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못하겠다. 개나 고양이는 먹을 것이라는 것보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또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인간과 '반려'하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자리잡았다. 그들을 먹는다는 건 인간의 허벅다리를 잘라 먹는다는 생각만큼 끔찍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매일 밤 치킨의 허벅다리를 뜯어먹는 데는 죄책감이 없나. 반려닭이 아니어서? 고양이처럼 발이 부드럽고 사랑스럽지 않아서? 개처럼 오로지 하루가 나로 가득할 정도로 충성스럽지 않아서? 이런 얘기는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겐 거북하고 피하고 싶기만한 주제다. 개와 고양이는 먹을 수 없지만 닭과 돼지는 먹어도 된다는 것을 가르는 명확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똑같이 죽음 앞에선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관계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를 소비로 풀라고 속삭인다. 예컨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사귀기보다는 나를 거 매력적으로 보일 아이템들을 구매하라고 꼬드긴다.


저자는 텔레비전을 끄고 대안미디어를 찾아 공동체나 아웃사이더 비판 세력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진보적이며 텔레비전에 빠져있는 사람은 파시즘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다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극단적으로 느껴졌다. 나 역시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채널을 돌려대고 멍때리고 웃고 채널을 돌리고를 반복하다 문득 이런 식으로 허비하는 시간이 많다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어떤 드라마가 제일 잘 나가고 어떤 연예인이 한창 뜨고 있는지 등 화제가 되는 모든 걸 알 수 있다. sns든 포털사이트든 동굴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다. 이제 매스미디어에 텔레비전만 일컫는 건 구식이다. 물론 정치적 선동이 오히려 수월해졌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일면만 보고 우르르 몰려갔다가 누군가 아니래! 저쪽이래! 외치면 또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가 야유하거나 환호한다. 저자의 문장을 일견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지금 이 순간 왠지 모를 빡침이 밀려온다. 그래서 제목이 <철학의 참견>이다. 누가 참견하면 그렇게 빡치더라.


가장 마지막엔 빠지면 시원섭섭한 에피쿠로스의 "쾌락"이 등장했다.


쾌락을 즐겨라! 그것도 절제함으로써 더 강렬히!


​쾌락을 즐기려면 자신이 쾌락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순순히 인정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음기에 성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쾌락은 보편적이다. 특히 절제할 수록 쾌락을 느끼는 것에는 성취감이 있다. 이 책에서는 당장 산과 들과 바다로 뛰어나가라고 하지만 학문적 성과 또는 업무적 성과로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도 쾌락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교집합인 상태라는 것이 오묘하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한번 더 읽어야 할 책이라는 뜻이다. 공감만을 이끌어내는 책은 어차피 내 생각이 니 생각, 니 생각이 내 생각이기 때문에 읽어봐야 효용성이 없다.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한 책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다른 관점으로 쓴 책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댓글을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으려면 불편한 책도 씹어 삼키고 소화하는 튼튼한 위장을 가져야 한다. 가지고 싶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b**********1 2016.08.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