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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흥겨움, ‘아라리’의 두 풍경
젊은 시인이 삶에서 토해내는 절절한 고통은 시를 읽기 힘들게 한다. 읽다 보면 어느덧 시인의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한다. 공황장애, 발작, 우울 등 정신적 질병의 언어들이 넘쳐나는 박진성의 두 번째 시집 『아라리』(랜덤하우스, 2008)는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세상이 병들었는데, 시인 역시 병이 들었다. 병든 세상에 병든 시인이라. 좋지 않은가.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힘을 병이 든 시인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병든 세상은 병든 시인의 숨통을 더욱 조인다. 시인의 병은 시적 기호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박진성은 병을 은유로 앓지 않는다. 실제 병이 들었고, 그 병의 힘으로 시를 쓴다. 은유가 아닌 병에서 나오는 고통스런 시는 그러므로 그 고통을 어떻게든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자화상」이라는 시를 먼저 보자. 병원에서 혈관 주사를 맞고 나온 ‘아픈 사람’이 있다. 현관 주사를 얼마나 맞았는지 “돋아날 새살도 없이 흉터는 흉터에 정”든다. 때는 봄이다. “천지간 출렁이는 햇빛은 나뭇가지를 날카롭게 뽑아 올린다”. 겨울 내내 “깊숙이 간직한 침묵을 버리려고 나무는 소스라”치며 햇빛을 빨아들인다. 그것이 나무의 생리이다. 햇빛을 빨아들이지 못하면 나무라는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나무의 그런 생리를 혈관 주사를 맞고 나온 ‘아픈 사람’이 보고 있다. “흉흉(凶凶) 옹이를 매달고 솟아오르는 봄나무의 웅얼거림”을 듣고 있다. 약 기운에 취한, ‘아픈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약 기운이 봄볕에 달궈져서 없어져서 또 다른 상처를 부를 때까지 나무 밑에 앉아 있기로 한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진정될 뿐이다. 약 기운 때문에 생긴 현기증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상처가 불거져 나온다. 겨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생명의 즐거움에 젖은 나무 아래서 펼쳐지는 병의 시학은 “현기증을 받아먹은 나무의 한없이 느린 소용돌이”만큼이나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시에서 시인은 “물과 햇빛과 공기만 있어도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라는 시적 다짐을 표나게 내세우고 있다. 물과 햇빛과 공기는 나무에게 생명을 주는 핵심 요소들이다. 아니,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에게 이 세 요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독한 약에 취해 나무 아래로 스며든 시인은 나무 아래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생명의 숨결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출렁이는 햇빛이 쏟아지는 봄에 생명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기억한다. 「발작이 내게 준 것들」에서 시인은 발작을 하며 느낀 상상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발작은 “늪과 강의 점이지대를 / 팔딱거리는 정신의 수위(水位)”로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고통스런 일이지만, “내 몸이 고요를 되찾는 시간”이 되면 고통은 또 다른 상상의 힘으로 변주된다. 이를테면,
몸보다 먼저 시퍼런 강을 헤엄치는 마음을 보았니 벼 이삭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들 꿈틀거리는 다리를 보았니? 거울 속에 숨은 산산조각 성에꽃에 베이는 붉은 무늬를 보았니? 나 살자고 남 죽이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생초짜 간호사 옷으로 미끄러지는 목숨에 대한 경외감 몸으로 몸으로 들어봤니 병원으로 가는 너른 들판 으슥한 밤, 열심으로 익어가는 벼 뿌리의 힘을 느껴봤니 - 「발작이 내게 준 것들」 부분
에 표현되는 것처럼, 발작은 시인에게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몸으로 몸으로” 알려준다. 정신의 경계를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엿본 존재가 생명의 경외에 이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몸은 그러한 생명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이다. 심하게 발작하던 몸이 고요해지면서 “물고기가 하늘 높이 날아”(같은 시)오르는 일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닌 게 된다. 생명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너른 들판에서 열심히 익어가는 벼 뿌리의 힘을 시인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뿌리’에 대한 시적 탐색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여전히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정신적 힘을 나타내는 지표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주조인 ‘아라리’의 음률에 따라 펼쳐지는 생명의 떨림은 발작하는 가운데 몸속에서 퍼지는 생명의 떨림과 다를 수 없다. 몸이 발작하는 이유는 돌려 말하면 발작을 해야 몸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발작(병)은 몸에 이상신호가 감지된다는 것을 알리는 생명의 표시이다. 죽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비극이지만, 그 발작이 아라리의 음률을 시인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극을 넘어선다. 박진성의 아라리가 몸의 고통을 분출하는 슬픈 아라리로만 한정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모하메드 이야기-아라리2」 「한국인 경필이-아라리 4」 「대평리 약사(略史)-아라리 6」 등에 스며 있는 아라리의 음률이 시적 대상들의 서글픈 삶과 연결되어 슬픈 아라리로 표현된다면, 「화투 치는 여자들」에서 표출되는 아라리는 화투 치는 여자들의 흥겨움이 한없이 묻어나오는 아라리로 나타난다.
화투 치는 여자들은 웃고 또 웃는다. “똥을 쌌다고 이 나이에 아무 데나 아무 때나 똥을 싼다고 웃고 웃고 / 흔들었다고 늙은 엉덩일 흔들흔들 몸빼바지는 헐렁한 경로당 바람 깔고 앉아 들썩”인다.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철에 펼쳐지는 웃음의 향연은 시인으로 하여금 아라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한다. 이들이라고 삶을 만족스럽게 살았겠는가. 노동에 찌든 시골 여인네들의 삶이야 가슴에 첩첩이 쌓인 한(恨)이 그 삶의 아픔을 증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그녀들은 고스톱을 치며 웃는다. 놀이를 하며, 아니 놀이에 빠져 그녀들은 놀이와 하나가 된다. 놀이와 하나가 된 그녀들의 웃음은 그러므로 이미 아라리의 난장 속으로 빠져든 웃음이다. 웃을 이유가 있기에 웃는 게 아니라 웃음이 저절로 나오니까 웃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아니면 무엇으로 이 웃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박진성의 이 시집은 물론 이러한 웃음보다는 병과 관련된 서글픈 삶들이 주류를 이룬다. 「유채꽃밭」에서는 병력(病歷)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지는 삶의 비애가 나타나 있고, 「외도(外島)」에는 오래 사람에 섞이지 못한 존재의 우울이 짙게 드러나 있다. 아들의 병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스런 삶이 시집 곳곳에 분산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어머니와 산문시」에서 “신음 없이 발작 없이 어머니의 오래된 손맛 같은 시 한 편 쓸 수 있을까”라는 서글픈 고백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품고 가야겠다”(「지느러미의 힘으로」)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악화와 회복의 지루한 공방전 사이”(「나무의 경제」)에 드리워진 서글픈 존재의 삶을 시인은 인정하면서도, “네 몸 침대에 눕히듯 어미의 고요한 아침을 밥상에 얹어두어라”(「불안과 놀다」)라는 시구에 표현되는 대로, 어미의 고요한 아침을 기원하는 아들로서의 애틋한 마음도 잊지 않고 있다. 정신적 공황상태라는 불안심리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들을 위해 불안과 놀고 싶어 한다. 그 점이 박진성의 아라리를 흥겨움의 아라리로 변주하게 하는 힘이다. 병과 더불어 사는 것은 결국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광경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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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간절함과 위로의 격렬함, 이상한 종교가 뿜어내는 이상한 힘으로 없는 문을 여느라 나는, 여전히, 진땀이다. 눈물이다.” (『아라리』, 시인의 말 중에서)
간절, 격렬, 눈물이란 단어 없이 이 시집을 얘기할 수 있을까. 『목숨』에 이어 박진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라리』가 출간됐다. 아라리, 났다, 났어.
첫 번째 시집이 불안. 강박, 우울, 공황, 발작 사이에서 어떤 격렬함을 보여주고 있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꽃, 나무, 강, 어머니…와 함께 호흡하며 서로의 아픔을 주무르는 풍경들을 제시한다. 조물조물, 아픈 것들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은 위트 있고, 섬세하며,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이 질질 짜는 신파가 아니어서, 때로는 신명나게, 또 가끔은 기막히게 나의 환부에 들어맞는 것이어서 시집을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웠다. 첫 번째 시집에 담긴 시인의 아픔이 너무 강렬해서, 독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이 찍, 하고 나왔다면 『아라리』의 아픔은 시인과 나와 세상이 함께 부둥켜안을 수 있는 것이어서 좋다. 이제 박진성 시인이 앓고 있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감당해야만 하는 쓸쓸함이 아닐까. 우주적으로 쓸쓸한 기분. 시인에게 그것은 시이며, 넋이고, 아라리인 것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쓸쓸한 사람들아, 강력 추천! 아라리. 아라리는 힘이 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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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을까. 박진성의 두번째 시집을 오래 기다렸는데 오랜만에 좋은 시집을 읽어서 좋다. 열심히 시인의 세번째 시집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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