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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 전공자들은 대학 지리학사 강의 시간에 꼭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라는 이름을 들어보기 마련이다. 근대 지리학의 개척자로서 큰 비중으로서 다루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훔볼트는 지리학사 강의 외에는 크게 다루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고, 또 중등학교 지리 교과서에서 직접 언급될 일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훔볼트의 위대함에 대해서 강의 때 배웠다가도 금세 잊어버리기도 쉽다. 지리학 전공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훔볼트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생물학 하는 사람들 일부만 알 뿐이고, 그 외에는 '언어학자 훔볼트(알렉산더의 형)' 정도만 언급되는 것 같다. 올해는 훔볼트가 탄생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1769년 9월 14일이 훔볼트의 생일이라고 한다). 위대한 지리학자 훔볼트를 기리기 위해, Science지 2019년 9월호에는 훔볼트의 사상과 그 영향에 대한 많은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딱히 훔볼트를 기리는것까지 아니더라도, 관심사가 조금 더 커질 법도 한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훔볼트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 훔볼트에 대해 쓰인 좋은 책을 읽고 싶어서 이 책을 보았다. 이 책에서 인상깊은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세를 위한 훔볼트" https://science.sciencemag.org/content/365/6458/1074 "훔볼트의 수수께끼 : 산의 생물다양성이 글로벌한 패턴을 보이는 원인은 무엇인가?" https://science.sciencemag.org/content/365/6458/1108 첫째, 훔볼트의 답사 실천 과정이 인상깊었다. 훔볼트는 역시 5년간의 남아메리카 답사가 중요하다. 훔볼트는 답사에서 모든 가능한 자연 현상을 관찰, 측정, 분류, 지도화하려고 했고, 이러한 훔볼트의 열정을 책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시에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곳, 그리고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곳을 최대한 답사하고 직접 경험하려는 그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답사를 가서도 조금이라도 더 관찰, 경험, 기록하려는 열정, 답사를 다녀와서도 다음 답사를 고대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60대가 넘어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답사하는 도전정신, 체력이 대단해 보였고, 러시아 당국에 답사 허가를 받기 위해 보이는 괴짜 같은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훔볼트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자연을 바라보고 계측하고 분석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여서, 천상 지리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를 저어갈수록 숲은 더욱 우거졌다. 강둑은 나뭇잎과 칡으로 뒤덮여 녹색 벽이 되었고, 훔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살아 있는 울타리' 같았다. 야영할 곳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강가에는 카누에서 내려 발 디딜 공간조차 없었다. 다행히 날씨만큼은 좋아지고 있었으므로, 지도 작성에 필요한 관찰을 할 수는 있었다. 리오네그로를 거쳐 카시키아레 입구에 들어선 지 열흘 만에, 훔볼트 일행은 오리노코에 다시 도착했다. 리오네그로는 아마존의 지류이므로 '오리노코와 아마존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수역이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 그의 탐험을 통해 카시키아레가 오리노코와 리오네그로 사이에 있는 천연 수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훔볼트는 기존의 지도가 마치 마드리드에서 대충 만든 '상상 속의 지도' 인 것 같다고 말했다.(p.125) 이제 카르타헤나에서 리마까지 약 4,000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동안,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환경을 통해 자신을 신체적 한계에 몰아붙이게 될 것이었다. "어느 과학자도 가본 적이 없는 지역을 통과한다는 유혹은 달콤하다. 젊고 활발한 사람이라면, 여행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이나 위험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라고 훔볼트는 말했다. (...)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은 에너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훔볼트는 말했다.(p.133) 탐사 여행의 타이밍은 절묘했다. (...) 그들의 눈앞에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훔볼트는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한 과학자가 말했듯, 그건 베수비오 화산이 훔볼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벌인 특별 이벤트 같았다. (...) 화산이 분출하는 장면을 가능한 한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훔볼트는 불과 몇 분 만에 분화구를 향해 달려갈 준비를 마쳤다. 그 후 며칠동안 훔볼트는 베수비오를 무려 여섯 번이나 오르내렸다. 그는 봉플랑에게 쓴 편지에서 "매번 오를 때마다 베수비오가 인상적이었다"고 하면서도 남아메리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p.202-203) 훔볼트는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바라빈스크 스텝을 통과한 다음, 바르나울과 알타이산맥의 서쪽 사면을 향해 달렸다. (...) 토볼스크를 지나 자유여행을 시작하자, 훔볼트는 흥에 겨워 훨훨 날아갈 지경이었다. 쉰아홉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프록코트, 흰 넥타이, 둥근 모자를 착용한 채 몇 시간 동안 지친 기색 없이 걷는 모습을 보고 수행원들은 깜짝 놀랐다. 훔볼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단호하고 꾸준했다. 그는 숨이 가빠질수록 쾌감을 느끼는 특이 체질의 사나이였다. 처음에는 남아메리카에서 탐험할 때만큼 흥미로울 것 같지 않았지만, 가면 갈수록 스릴 만점의 풍경이 펼쳐졌다. (p.333) 둘째, 훔볼트가 제시한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이 인상깊었다. 훔볼트는 기본적으로 개개의 자연 현상의 측정에 관심이 많은 자연지리학자이지만, 당시 낭만주의 사조와 관련하여 인문학적, 예술적인 관점으로 자연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연 현상들이 서로 연관이 있고, 통합적인 관점으로서 자연을 바라본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러한 아이디어의 원천에는 침보라소 산에 등정하면서 고도마다 식생과 기압을 체크하여 한 장의 그림인 '자연 그림'으로 시각화한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자연 요소의 일부가 인간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주목하는 부분도 인상깊었다. 인간이 자연에 주는 영향, 전지구적 환경문제가 대두되는 시점에서, 훔볼트의 자연관, 환경주의적 시선이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되었다. 또한 훔볼트는 원주민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였고, 노예제도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사회비판적이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도 보였다. 인문사회 분야와 자연과학 분야의 이분법으로 인해 서로가 소통을 할 일이 잘 없는데, 융합 및 통섭 학문의 시대에 훔볼트와 같은 융합형 인재의 통찰이 절실하다. 지리학 전공자인 나도 자연지리학, 인문지리학 간의 점점 더 멀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운데, 자연지리학과 인문지리학을 넘나든 통합적 지리학자 훔볼트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 발렌시아 호수에서 수면이 급강하하는 원인을 알아낸 후, 훔볼트는 범위를 확대하여 삼림 벌채가 전 세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렌시아 호수의 사례를 토대로 하여, 그 시대의 농업 기술이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 그는 인류가 기후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훔볼트는 숲이 생태계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설명한 사람이었다. 나무는 수분을 저장하고, 대기에 수분을 풍부하게 공급하고, 토양을 보호하며, 냉각효과도 발휘한다. 또한 그는 나무가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고도 말했다.(p.103) 그는 만나는 원주민들마다 호기심을 느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원주민들의 자연 숭배 사상에 매혹되었고, 그들을 탁월한 지리학자라고 생각했다. (...)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달리 훔볼트는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들의 문화, 신념, 언어에 매료되었다. 그는 식민주의자들과 선교사들이 원주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고, 문명인들의 야만성을 깨달았다. 나중에 유럽에 돌아갔을 때, 그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p.122-123) 종전의 과학자들이 자연계를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세세한 분류단위로 구분한 다음 장황한 분류표를 온갖 범주들로 가득 채웠던 것과는 달리, 훔볼트는 자연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자연그림은 침보라소의 단면도로서, 자연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묘사함으로써 만물의 연결관계를 한눈에 보여줬다. 훔볼트는 모든 식물들을 침보라소에서 발견한 위치에 정확히 배치했다. 즉, 식물들은 지하에 서식하는 버섯에서부터 설선 바로 밑에 서식하는 지의류에 이르기까지 고도에 따라 배치되었다. (...) 자연을 전 지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모든 대륙들이 각각 상응하는 기후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는 자연그림이 처음이었다. 과학 정보를 그처럼 단순하면서도 다양하고 풍부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훔볼트 이전에 어느 누구도 그런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p.152-153) "노예제는 자연에 역행한다. 자연에 역행하는 것은 불공평하고 악하고 타당성이 없다"고 훔볼트는 말했다. '흑인은 백인보다 심신이 열등하다'고 믿었던 제퍼슨과 달리, 훔볼트는 '이 세상에 우월하거나 열등한 민족은 없다'고 주장했다. "국적, 피부색,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 여러 식물들이 본디 한 뿌리에서 나와 지리적, 기후적 환경에 각각 다르게 적응했음을 기억하라. 인간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다른 인종 위에 군림하는 인종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종은 각각 자유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p.182)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에 수집한 자료와 러시아에서 수집한 자료를 통합하여, 다양한 자연현상과 자연력 간의 관련성을 확립했다.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말고, 반드시 비교, 검토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후에 러시아 탐험 결과를 두 권의 책으로 펴냈을 때, 그는 "인간이 삼림을 파괴하고 환경을 장기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인류가 기후에 영향을 미친 원인을 세 가지로 요약했는데, 첫째는 삼림 파괴, 둘째는 무리한 물 대기, 셋째는 산업 중심지에서 생성되는 엄청난 증기와 가스였다(셋 중에서 통찰력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세 번째였다).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설명한 사람은 훔볼트가 유일했다.(p.344) 셋째, 훔볼트가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고, 또 당대와 후대에 폭넓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 인상깊었다. 훔볼트가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내긴 했지만 그도 역시 홀로 모든 것을 창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선대 학자들의 연구와 당대 학자들과의 서신 교환 및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성과를 이룰 수 있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유럽, 특히 프랑스 파리의 학문적 수준과 토대가 흥미로웠다. 훔볼트가 철학자 칸트의 사상에 매료되는 모습, 작가 괴테와의 지적 교류로 자신의 생각을 심화시키는 모습 등은 일반적인 학문의 경계선을 생각하면 언뜻 상상이 안되는 모습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남아메리카 여행 이후 학문적 교류를 위해 파리로 가서 여러 과학자들과 소통하는 훔볼트의 국경을 넘어선 지리적 입지 선정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훔볼트의 학문적 성과가 여러 사람들에게 폭넓게,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는 점도 놀라웠다.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에서 훔볼트의 아이디어에 감명을 받고 그의 행적을 뒤쫒고자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의 사례가 대표적이고, 19세기 유럽에서 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 훔볼트였다고 하니...(나폴레옹이 적국 프로이센 출신 훔볼트를 견제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또 훔볼트의 사상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아메리카 대륙에는 특히 훔볼트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많았다.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볼리바르가 모두 훔볼트와 긍정적인 교류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두 인물이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지리에 큰 변화를 준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갔다. 미국의 환경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소로, 마시, 뮤어가 모두 훔볼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훔볼트와 괴테의 우정과 교류는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훔볼트는 칸트의 이론에 심취하여 그의 흉상을 서재에 모셔놓고 그를 위대한 철학자라 불렀다. (...) 예나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순수한 실증 연구'에서 '자연의 해석'으로 전향했다. '자연의 해석'이란 '정확한 과학 데이터'를 '시각에 대한 정서적 반응'과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 훔볼트는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은 느낌을 통해 경험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며, "식물, 동물, 암석을 분류함으로써 세상을 묘사하려는 사람들은 자연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했다. (...) 괴테는 과학에 매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에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p.70-71) 훔볼트가 파리에 도착한 지 불과 3주 후인 1804년 9월 16일, 게이-뤼삭은 해발 7,000미터 상공에 올라가 기온과 기압을 측정함은 물론 지자기를 관찰했다. 7,000미터라면 훔볼트가 침보라소에서 올랐던 곳보다 무려 1,000미터나 더 높았으므로, 훔볼트가 게이-뤼삭의 측정 결과를 안데스산맥에서의 측정 결과와 비교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은 당연했다. 그로부터 몇달 후 과학아카데미에서 함께 강의하게 되자, 두 사람은 금세 친해져 여행을 함께하며 방도 같이 썼다. (...) 어딜 가든 새롭고 흥미로운 이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훔볼트는 새로운 과학자들과 어울려 실험을 하고, 탐험담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이론에 대해 토론했다. 그는 밤낮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자기 나름의 페이스대로 연구, 취침, 식사를 했다. (p.190,193) 훔볼트가 파리에 머무르는 걸 수상쩍게 여긴 사람들은 빌헬름을 비롯한 프로이센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나폴레옹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온 훔볼트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폴레옹은 훔볼트를 하찮게 여김으로써 불쾌감을 표시했다. (...) 나폴레옹은 우선 적국 독일에서 왔다는 이유로 훔볼트를 싫어했다고 한다. 훔볼트는 처음에 나폴레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저서들을 연신 갖다 바쳤지만 번번이 무시당했다. 훔볼트는 "나폴레옹이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머문다는 것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좋은 기회였다. 나폴레옹은 과학의 든든한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과학과 군사적 위업을 모두 사랑했지만 훔볼트에게는 극도로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훔볼트의 저서 <신대륙 적도지역 항해> 시리즈를 질투했는데, 이유인즉 그 책이 자신의 자랑이자 기쁨인 <이집트 묘사>와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p.227-228) 훔볼트는 늘 그렇듯, 새로 출간된 <뉴스페인 왕국에 대한 정치적 고찰>을 제퍼슨에게 발송했다. 훔볼트의 저서 덕분에, 제퍼슨은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는 남아메리카 식민지의 상황을 면밀히 연구하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훔볼트의 저서에서 정보를 얻은 사람은 제퍼슨뿐만이 아니었다. 볼리바르도 그의 저서를 탐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해방시키고 싶어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p.249-250) 나일 강 유역을 여행하다 보니, 그동안 훔볼트의 저서를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이 단박에 해소되었다. 훔볼트는 "대규모 인간사회의 지속적 활동이 지표면을 서서히 파괴한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마시는 그 전형적 사례를 나일 강 유역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 여행이 끝날 때쯤, 마시는 '인간이 수백 세대 동안 근면하게 농사를 지은 결과, 지구의 한 부분이 마모되어 지력이 다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의 첫번째 해외여행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p.456-457) 훔볼트, 마시, 뮤어는 모두 자연 파괴의 위험성을 제기한 선구자들이었지만, 세 사람의 역할은 조금씩 달랐다. 훔볼트는 자연이 직면한 위협을 이해하여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마시는 관련된 증거를 수집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환경에 관한 우려를 정치적 장으로 이끌어내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사람은 뮤어였다.(p.528) 이외에도 책에서는 훔볼트에 대한 여러 사적인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있다. 훔볼트가 부모에게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사랑은 받지 못한 안타까운 이야기, 학문적인 탐구와 학자들과의 학문적 이야기에는 열정이 넘치지만 한편으로 가족에게 진솔한 감정적 표현을 하지 않는 모습, 평생 독신으로 지내고 여성에게 마음을 전혀 안주면서도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남성 학자 한명과 단짝이 되어 플라토닉한 교류를 하는 이상한(?) 모습 등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외로웠을 것 같으면서도 그걸 학문적 열정으로 승화시켜서 이렇게 대단한 성과가 나타났지 않을까 싶었고, 유명한 인물인 만큼 성적 취향에 대한 스캔들도 많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 훔볼트가 위대한 학자로서 긍정적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에, 이 책은 훔볼트의 성과가 제국주의 통치에 영향을 준 비의도적 영향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제퍼슨이 훔볼트에게 받은 남아메리카에 대한 정보와 미국의 남아메리카 전략의 관계, 그리고 훔볼트 이후 과학 답사가 보편화되어 비유럽지역이 과학적으로 '벌거벗겨진 것' 등이다. 이런 부분은 다른 책들을 통해 보완해도 좋을 것이다. 훔볼트에 대한 책이 국내에 몇 권 번역되어 있는데,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저자가 훔볼트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 인용하고, 직접 훔볼트의 행적을 찾아서 답사까지도 해서 내용이 알차다. 훔볼트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내용이 너무 많았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이러한 저자의 노력을 쉽게 풀어쓴 저자의 글솜씨, 또한 이를 우리말로 잘 읽히도록 다시 쓴 번역자의 공도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통찰을 제시한 훔볼트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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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n, 1769~1859)는 현대에 거의 잊혀진 과학자이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든 당시에는 가장 유명한 탐험가이자 과학자였다. 이 책은 아메리카 대륙 탐험과 과학자로서의 활동, 자연과 인간을 생각할 줄 알았던 그의 생애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알려준다. 이 책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그의 아메리카 여행과 전체 생애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생활상과 과학에 대한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1800년대에 이미 아메리카의 주요 거점 지역에는 많은 유럽인들이 정착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훔볼트는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교류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물학, 동물학, 지리학, 지질학 등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관심이 높았고 발전하고 있었다. 훔볼트는 이런 유럽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최근 몇 권 읽은 훔볼트 책 중에서 이 책이 제일 좋다. 여행과 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할 만한 책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