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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고정관념이 하나 있다. 꼭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 책과 연결시켜 보자면 한 가지가 떠오른다. 서구의 가정은 평등하며 여자를 많이 배려해 준다는 생각.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남존여비가 철저하게 뿌리박혀 있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남성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많이 나아졌다지만-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위와 같은 나의 생각은 그야말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열 살 소녀 레프티는 공부에 열의도 있고 뭐든지 배울 준비가 되어있는데 아버지는 딸은 공부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진작부터 못박는다. 대신 항상 형편없는 성적표를 가지고 오는 쌍둥이들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건다. 그러기에 레프티의 쌍둥이 동생들이 공부쪽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성적표를 가지고 왔을 때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고 한탄을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40년대의 상황이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즈음한 시기다. 레프티네 위층에 사는 프랑스인 마르쎌 아저씨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는 소식에 모든 관심사를 끊고 오로지 고국의 소식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정이 많고 현명한 마르쎌은 레프티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만사를 제쳐 놓고 도와준다. 그런 이웃이 또 있을까.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양산을 단지 몰래 빼내오기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 공을 들인다. 할머니가 이야기가 시작할 때 즉 처음 양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양산을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간에서도 양산은 어떤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산 이야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개구장이 아이들의 아슬아슬한 장난에 온통 신경을 쓰고 읽는다.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양산이 의미있게 다가오고 아이들의 순수함과 순진함 때문에 지금까지의 말썽으로 인해 미웠던 마음들이 싹 가신다. 그리고 마지막 할머니가 나오는 부분에 가서는 잠시 어리둥절한다. 갑자기 왜 할머니가 나올까. 그만큼 처음에 할머니가 나왔던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쌍둥이 동생들의 기가 막힌 말썽들 때문에.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을 한 아빠가 혹시나 바뀌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은 그게 아니었다. 또 많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아빠가 금방 변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고. 그러기에 다른 부분을 바꾸도록 한다. 바로 레프티 자신 말이다. 레프티는 이제 권위에 맞서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보이면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특히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외의 것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 빅토리아를 레프티 친구로 설정하면서 대비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모두 독자가 느끼길 바랄 뿐이다. 잔잔하면서도 여운이 있는 이야기와 미운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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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잔잔하고도 여운이 있는 동화책이다. 잔잔히 높아지는 감정의 물결이 부지불식간에 절정에 다다르는데, 그걸 독자가 눈치 채지 못한다. 다만 책을 덮으며 아, 자유를 위한 절규의 순간이, 지나갔구나 하고 느낀다. 마치 작중 화자인 10살 엘레프테리아(쌍둥이 남동생들이 줄여서 레프티라고 부르는)가 순식간에 쌍둥이 손자들의 할머니로 돌아와 이야기를 맺는 것처럼. 레프티는 중하류층 쯤 되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는 그리스 소녀다.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과도 같은 아버지와 그에 순종하는 어머니, 말썽계의 장인이라고 할 두 쌍둥이 남동생과 함께 산다. 이 아이에게는 권위적인 아버지,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독일군, 부유하지만 편헙된 히파티아 부인으로 대별되는 폭력 및 억압의 백그라운드가 있고, 다정한 이층의 마르쎌 아저씨(프랑스인), 늘 유쾌한 작은아버지, 꿈을 지니고 살아가는 연극배우인 리처드씨 등의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백그라운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레프티가 억압에서 자유로 향해 나아가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자는 책을 읽거나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아버지의 딸에서, 안티고네로 상징되는, 자주적 의지를 지닌 강한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성장 동화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과정이 그렇게 부드럽고 차근차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든가, 반전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옆집 노부인의 연보랏빛 양산을 쟁취하는 일이 큰 사업인 레프티 남매에게 이 양산은 자유의 쟁취였을 거라 싶다. 할머니가 된 레프티가 나왔다가, 어린 소녀 레프티가 나왔다가, 다시 할머니인 레프티가 나와 이야기를 맺는다. 레프티는 강한 의지와 진취적 기상을 가진 당돌한 어린 소녀였는데, 말썽쟁이 손자들에게는 결국 할머니로 비쳐진다. 손자들은 레프티를 할머니로만 여긴다. 마치 어린 시절이나 풋풋한 꿈 따위는 아예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마치 프랑스 소년을 향한 푸르디 푸른 사랑 따위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매우 강한 메시지인데도 문장 사이사이에 깊이 녹진녹진 녹아 있어, 읽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고, 그런데 점점 되새겨지는 것이다. <작은 아씨들>을 연상케 하는데, 이유가 뭘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