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
|
혜초의 발길을 따라가다.
지금까지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은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단편적인 지식만을 알고 있었다. '왕오천축국'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접어버린 나의 천학(淺學)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마침 문명교류사와 이슬람문화의 권위자인 정수일 교수가 역주한 양장본을 일반 독자들이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도록 두 권의 문고판으로 개편한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을 읽고서 조금이나 마음의 짐을 풀 수가 있었다. 역주자도《왕오천축국전》은 국보급 진서이며 불후의 고전인데, 우리의 손으로 제대로 된 연구와 번역을 하지 못하고 낯선 무연고지에서 유폐되어 있음을 자탄(自嘆)하는 심정을 서문에 절절하게 쓰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승려인 혜초의 저작으로 당시 5개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권을 두루 돌아본 여행기이다. 우리나라의 최고(最古)의 서책(書冊)이자 최초의 여행기이며, 이븐바투타의 여행기(이 책도 역주자가 완역했다)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중의 하나로 꼽고 있지만, 정작 혜초 연구의 시작은 다른 나라의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왕오천축국전》이 신라사람 혜초의 저작이라고 밝혀진 것도 돈황의 막고굴에서 발견한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에 의해서였다. 유럽학자로는 드물게 한문에 능통했다는 그는 중요 고문서를 발견하여 가치가 있는 것들은 본국으로 송출하였고, 이후 파리국립박물관에 소장된《왕오천축국전》은 문화재반환목록에서 조차 빠져있다고 하니 혜초의 기개를 물려받은 우리로서는 통한의 일이 아닐 수 없다.《왕오천축국전》이 발견 된 이후로 독일학자 폭스와 일본의 여러 학자 들이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이루는 동안 정작 혜초의 모국인 우리나라는 지엽적인 소개에 그치고 있었다니 혜초의 연구를 얼마나 등한히 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크게 인식한 정수일 교수가 역주한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은 과히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라 하겠다.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원전의 역주(譯註)를 심혈을 기울여 제대로 해냈다. 물론 그의 역주가 완벽한 것은 아닐지언정 다음 세대의 연구가들에게 심도 있는 공부의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은 한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이며, 책명과 저자도 떨어져나가 없는 총 227행 5893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락자(缺落字)와 오자(誤字)가 많아서 제대로 주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역주자는 중국과 중동에서 공부한 해박한 지식과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보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책의 특징은 번역문과 원문을 실은 다음 알기 쉽게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돕고 있다. 보통의 식견으로는 접근하지 못할 주석은 정수일 교수의 학문적 성과가 그대로 천착되어 있다. 가령 해초의 여행기 중에는 5편의 서정시편이 실려 있는데, 특히 객수(客愁)가 잘 드러난 시구(詩句)인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누가 소식을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日南無有雁/誰爲向林飛)”라는 구절의 해제(解題)를 보아도 정확성을 위해서 고로(苦勞)를 아끼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일남(日南)은 베트남 중부를 지칭하는 고대어이며, 남해의 출항지로서 중국에 오는 외국 상인들도 이 항구를 통하여 상륙하였다고 한다. 혜초가 ‘일남에는 기러기가 없다(日南無有雁)’라고 읊은 것은 아열대지방인 일남에는 기러기가 있을 리 만무하여,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아마 고향은 깊은 가을이 지난 계절이었을 것이며, 고향의 기러기의 행렬(雁行)을 떠올리고 시를 지은 것으로 보여 진다. 역자(譯者)는 혜초의 향수 어린 시어(詩語)한마디에도 그가 남해로를 거쳐 인도로 갔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누가 소식을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誰爲向林飛)’에서는 림(林)자가 신라를 나타내는 계림이라는 단정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례(實例)를 보면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림(林)자의 해석을 두고 학설이 매우 분분하기 때문이다. 평상이나 마루 같은 ‘상(狀)’으로 보는가 하면, ‘숲’이나 ‘고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자는 <삼국사기>에 수록 된 <신라본기>의 ‘시림(始林)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명명(命名)하고 그것을 국호를 삼았다.’라는 내용을 토대로 신라는 말 그대로 숲을 신성시 했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명하여 국호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혜초의 향수병을 자극한 림(林)은 고국인 '계림' 즉 신라를 지칭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명백한 사실은 림(林)자 하나의 자구(字句)에 혜초가 신라사람, 즉 우리의 先代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퍼즐을 맞추는 듯한 주석은 해석이 불가해한 부분에서 더욱 돋보인다.《왕오천축국전》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많은(160여자)결락자와 해독하기 어려운 글자가 다수 있는데, 현장의 <대당서역기>등 여러 고서자료와 국내외 석학들의 기존 연구서들을 총망라하여 고찰한 다음, 실례(實例)와 예증(例證)을 통하여 가장 타당한 것을 의견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불어 역자의 미더운 부분은 당시 입었던 복식고증을 거쳐 혜초의 여행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복원하였고, 혜초가 다녔던 곳곳의 유적을 수록하여 혜초가 여행담을 직접 구술하는 것처럼 엮어놓아 이보다 더 탁월한 역주서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해석이 불가능한 부분은 아예 공란으로 비워 두어 후세의 정확한 복원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대략 723년경에 한국인 최초로 서역을 기행한 위대한 장도(長途)의 기록이며, 특이하게 5편의 서정시편을 실어 개인 서정적인 여행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왕오천축국전》의 발견자 펠리오는 시(詩)들이 '아예 수록하지 않는 것만 못 하며, 서술은 절망적으로 간단하고 단조롭다'고 평가절하 했다고 하지만, 혜초는 단순 기행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여행을 한 것이다. 인도 고대 16개국 중의 하나인 <마케타국>의 갠지스 강 북쪽 강가를 기행 할 때 그곳의 여덟 개의 불탑을 친견(親見)하고 '내 본래의 소원과 맞는 지라 무척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엮어 본다.' 라고 감탄하여 지은 시를 보면 혜초가 감수성이 상당한 문사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왕오천축국전》은 700년대 초엽 혜초의 발길이 닿은 곳, 즉 인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아랍 문화권의 풍습과 풍물, 각국의 역사, 정치, 문화, 종교, 법제 등 거의 실사에 가까운 기록을 통하여 중세 세계사의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서역 각지의 당시 사용한 국명과 지명을 알 수 있는 지리사적 가치도 충분하다. 이점에서는 최초의 발견자인 펠리오도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시했다고 하니 가히 최고의 여행기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왕오천축국전》을 역주한 정수일 교수가 문명교류학과 실크로드학을 필생의 연구과제로 삼은 것도 조국 분단으로 편협해져버린 근시안적인 사고의 기저를 버리고, 우리 기상을 세계로 확장하고자 하는 혜초와 같은 의지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나라 문명교류사에 개척자적인 족적을 남긴 혜초는 우리 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웅이다. 이런 혜초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은 사적비 하나도 세워주지도 않고 영웅에게 홀대했다. 자국의 홀대와 더불어《왕오천축국전》이 먼 이국땅에 유폐되어 있어 불초감을 감추지 못했다던 역주자의 분심(忿心)을 충분히 이해 할 수가 있는 대목이다. 돈황의 막고굴에서 서구 열강의 동양 고고학 연구를 빙자한 마구잡이 찬탈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된《왕오천축국전》은 이제 발견 100주년이 넘었다. 앞으로 반환염원 100년이 된다고 해도《왕오천축국전》이 우리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있다. 혜초가 여행기의 행간에 수록한 시구(詩句)마다 조국(고향)을 그토록 그리워했던 향수를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인 내가 책을 덮으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는 기쁨과 더불어 허우룩한 기분이 감도는 것은, 역주자 정수일 교수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불초함 때문일까. 타국에 유폐되어 있어 안타까운《왕오천축국전》이 눈이 아리도록 어룽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