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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에서 피어나는 부정(否定) 정신-『불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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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에서 피어나는 부정(否定) 정신- 가와이 하야오·나카자와 신이치 『불교가 좋다』       가오이 하야오와 나카자와 신이치가 대담한 기록을 담은 『불교는 좋다』(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8)에는 제목 그대로 불교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불교는 제국이 탄생한 시대에 생겨나서, 제국을 탄생시킨 요소에 인간의 지혜를 붕괴해갈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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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에서 피어나는 부정(否定) 정신

- 가와이 하야오·나카자와 신이치 『불교가 좋다』

 

 

 

가오이 하야오와 나카자와 신이치가 대담한 기록을 담은 『불교는 좋다』(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8)에는 제목 그대로 불교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 불교는 제국이 탄생한 시대에 생겨나서, 제국을 탄생시킨 요소에 인간의 지혜를 붕괴해갈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지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사상(43)이라고 대담자 가운데 한 사람인 나카자와는 주장한다. 제국 속에서 제국을 부정하는 지혜를 추구한 불교 사상은 이리 보면 그 자체로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불교는 무엇보다 현실을 부정한다. 현실은 물방울처럼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거대한 제국이라고 해도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성장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견준다면 불교는 정확히 제국=중심의 바깥을 지향한다. 일신교의 특성을 지니고 있되, 일신교라는 틀에 가둘 수 없는 불교의 다양한 면모는 이러한 바깥의 사상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가오이 하야오는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에는 심리학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탐색하는 학문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상정하고 있으므로 신이 인간에게 전하는 말=명령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하지만 불교는 자기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에 주목하는 종교이다. 자기 내면을 모르면 불교도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일신교의 종교는 윤리를 매우 중요시하지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심리를 중요시합니다.”(78)라고 가와이는 말하고 있다. 윤리는 신의 명령을 지키는 과정 속에서 굳건해진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을 생각해 보라. 십계명을 지키는 건 신이 내린 윤리적 명령을 지키는 것과 같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 어떻든 신이 내린 계율은 반드시지켜야 한다.

 

불교에도 물론 계율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설정한 계율은 십계명처럼 추상적인 단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상황이 벌어지면 그에 맞춰 설정되는 게 불교의 계율이다. 나카자와의 말을 들어보자.

 

젊은 청년들이 열심히 에 몰두하다 보면, 공부만 하고 운동을 별로 안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에너지가 성적인 상상 쪽으로 향하게 마련입니다. 자연스레 자위행위 같은 것도 생각하죠. 그것도 엉뚱한 방법까지. 예를 들어 여성의 무덤을 파서 뼈를 캐낸 다음, 그 뼈를 빻아 반죽해서 여성의 성기 모양으로 만들어 자위행위를 하는 사람도 나타났지요. 그런데 그런 일을 밀고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 그때마다 붓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고발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법이라면 교단 추방, 하지만 저런 방법이라면 괜찮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 일까지 해야 했다니, 참으로 붓다에게 동정이 갑니다. 그럴 거라면 초전법륜 같은 걸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94)

 

불교는 왜 이리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계율을 하나하나 정해나간 것일까? 나카자와는 불교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신화세계의 야생적 사고와 연결 짓는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신은 아버지로 불린다. 가부장제의 세계관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불교에서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는 은 여성적인 존재와 이어진다. 나카자와는 수렵시대의 사냥꾼이 사냥을 위해 숲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공의 세계를 추구하는 수행자들을 비유한다. 사냥꾼과 수행자는 목숨을 걸고 숲=공의 세계로 들어간다. 숲이나 공의 세계에서는 아버지=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유일신 사상이 신의 이름으로 자연보다 인간을 우위에 세웠다면, 신화시대의 구성원들은 인간을 자연 속 한 존재로서 규정했다. 불교는 신화시대의 이런 논리를 따른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사냥을 하기 전에 숲=자연에 경의를 표하는 사냥꾼들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공의 세계에 접근하려고 했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부처라는 절대자의 명령을 수호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공의 세계와 접촉한다. 당연히 누군가는 깨닫고, 누군가는 깨닫지 못한다. 부처를 믿는다고 구원을 받거나 하는 상황을 이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부처는 다만 먼저 깨달은 존재로 그들에게 비쳐진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분명 부처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렇다고 부처를 자기중심에 세운 것은 아닌 셈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그것은 숲에 들어간 사냥꾼이 개인으로 사냥을 하는 것과 같다. 나카자와의 말마따나 사냥꾼과 수행자는 완전한 개인으로 모성이나 여성(136)으로 대변되는 자연=진리와 접촉하게 되는 셈이다.

 

구체와 추상, 혹은 개별과 보편을 가르지 않는 불교 사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뻗어 나온다. 이를테면 불교는 자살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다만 자살을 손해 보는 짓(161)으로 표현한다. 왜 손해라는 것일까? 자살을 하면 고통의 근본 원인을 소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준 신에게 죄를 짓는 것으로 자살을 판단한 유일신 사상과는 분명 다른 발상이 불교에는 나타난다고 하겠다. 불교는 자기에게 주어진 업()을 소멸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업을 없앨 수 있을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나카자와는 이 자비라는 말을 증여론적 사고방식(171)으로 풀이한다. 불교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찾지 않는다. 제국 속에서 태어났지만 제국을 부정하는 불교의 지혜는 영원을 부정하는 사고방식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다.

 

불교는 부정의 정신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부정은 아니다를 의미한다. 부정에 익숙한 사람에게 단 하나의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유일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신을 절대 진리로 생각한다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자는 부처마저도 서슴없이 죽이는 강단을 내보여야 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돌려 말하면 우리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끊임없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여기에는 내포되어 있다. 언어는 사물의 의미를 정확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면 부처의 말을 기록한 그 숱한 경전들은 무엇인가? 다만 거짓을 기록한 책일 뿐인가? 가오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선()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중요한 부분이니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하세요.”라는 지시가 어떤 차원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거죠. “선생님, 내일 학교에 가려고 해요.”라고 말했을 때, “아니, 그런 거라면 어머니에게 말하지 그러니.”라고 대답한다면 그야말로 평범하죠.

그런데 상대방에 내일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요.”라고 말했을 때 우와! 아침밥은 바나나구나.”라는 대답이 튀어나올 때가 있죠. 나도 깊은 레벨에서 나온 듯한 그런 식의 말은 합니다. 말을 한 당사자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어서 아주 재미있지요. (202~3)

 

내일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요.”라는 학생의 말에 선생님은 우와! 아침밥은 바나나구나.”라고 맞장구친다. 말장난이라면 그냥 넘기면 되지만, 말장난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깨달음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정원에 핀 꽃 한 송이를 가리킨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개 한 마리를 가리켜도 상관없다. 어떤 스승은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어떤 스승은 몽둥이로 제자의 머리를 후려친다.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방할((棒喝)로 대답을 했다. 그런 대답은 일반인들의 사고 범위를 넘어서 있다. 스승은 소리를 치고 몽둥이를 휘둘렀을 뿐이다. 그것을 깨닫고 못 깨닫고는 제자의 문제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얼마나 다른 수행방식인가.

 

스승은 제자의 질문을 부정한다. ‘이것이야, 이것이야라는 말은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아니야, 이것이 아니야라는 말과 같다.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단순 긍정으로 대답한다. 거기에는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부정하는 스승의 정신(역설)이 스며들어 있다. 스승이 내지른 몽둥이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든 제자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순간에 집중하는 마음이라는 해답이 놓여 있지만 사실 그것은 불립문자로 표현된 의미일 뿐이다. 깨달음을 언어로 드러내는 순간 부정이라는 의미가 따라온다. 누군가 깨달음을 얻은 건 분명하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깨달음이 아니라 무한한 깨달음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불교의 부정은 이렇게 새로운 긍정을 낳는 원형이 된다.

 

불교는 하나하나의 사례를 중시한다. 이 사람이 깨달은 것과 저 사람이 깨달은 것은 다르면서 같다. 다르기 때문에 불교는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중시하고, 같기 때문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나카자와는 이 책의 후기에서 확실히 불교사상은 상식을 깨뜨리고 권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비판력을 내장하고 있다.”(278)고 주장한다. 고타마 붓다는 현실의 각 장면에 대처하면서 진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84000개가 넘는 다양한 표현들을 구사했다(278)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는 원형原型불교라는 말로 불교에 담긴 근원적 상상력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원형불교는 기존의 불교에 안주하지 않고 거기에서 새로운 α를 끊임없이 찾아내는 사상을 가리킨다.

 

유일신에 근거한 종교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재 상황을 고려한다면, 불교에 내재된 부정 정신은 그 자체로 현대문명이 가야 할 길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부정 정신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부정은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과 이어져 있다. 달리 말하면 불교의 부정 정신은 다른 것을 긍정하는 마음에서 뻗어 나온다. 나카자와가 신화시대의 대칭성 논리를 불교와 연결 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화시대의 대칭성 논리는 인간과 자연을 우열관계로 보지 않는다. 유일신 종교가 인간에게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을 부여했다면, 그래서 인간과 자연을 차등의 논리로 바라보았다면, 신화시대의 논리는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을 대등하게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불교는 바로 신화시대의 대칭성 논리와 결부됨으로써 유일신 종교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o*****s 2018.01.0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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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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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씨의 동의보감 책은 별로였지만 그 책에 인용된 이 책을 찾아보게 된 건 좋은 인연. 솔직히 말하자면 섹스로 수행을 하는 게 어떤 것인지 실체가 나와 있다길래 이 책을 빌렸다. 환상을 옴팡 깨줄 거라고 하던데, 역시 그랬다. 끄으으~ 궁금한 사람은 직접 읽어보시길! 또 역시 팔리어 성전 '율장'이 궁금하여 읽어보았는데.. 역시 깬다! 이런 꼴통 제자들에게 하나하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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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씨의 동의보감 책은 별로였지만 그 책에 인용된 이 책을 찾아보게 된 건 좋은 인연. 솔직히 말하자면 섹스로 수행을 하는 게 어떤 것인지 실체가 나와 있다길래 이 책을 빌렸다. 환상을 옴팡 깨줄 거라고 하던데, 역시 그랬다. 끄으으~ 궁금한 사람은 직접 읽어보시길!


또 역시 팔리어 성전 '율장'이 궁금하여 읽어보았는데.. 역시 깬다! 이런 꼴통 제자들에게 하나하나 가르침을 주었으니.. 붓다. 댁이 고생이 많았수. 

읽다 보면 우리나라가 역시 동방예의지국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도 쪽... 마구 자유분방하다... 일본..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시민의식, 염치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나라들에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예의와 염치와 율법이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러다가도 우리나라의 환금주의, 속물성, 약자 차별 등을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막장인 것도 같고. 흠.


레비-스트로스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순서로 500년 간격으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면서 점점 질이 나빠지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나도 웃었다.


이슬람교와 불교를 비교하거나, 불교는 여성적이라거나, 야생의 사고라거나. 하는 부분들은 너무 추상적이기도 하고 내가 배경지식이 없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두 대담자가 생각이 점프 점프 하면서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대신 둘은 쿵짝이 잘 맞아 서로 잘 알아듣는 듯) 대신 구체적인 사례들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진언율종에서 진언 다치카와류가 나왔다거나, 일본 불교는 일본 애니미즘과 결합하여 사냥해도 되는 부적을 스님이 써준다든가, 육식과 결혼까지 허용한다든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불교에는 원래 없는 단어인데 스님들이 남발한다는 것도 좀 웃겼고. 대신 안심, 편안, 안락, 평안이라는 단어.... 이것은 '너희에게 내 평화를 두고 간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그 평화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번역의 문제. 예를 들어 나는 한국어로 매우 명쾌한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영역하여 논문을 쓴다. 또는 매우 간결한 문장을 처음부터 영작한다... 그런데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에게 교정을 받으면 늘 '뜻이 모호하다'라며 명확하게 고치라는 코멘트를 받는다. 내가 보기엔 명명백백한 의미라서 뭘 고쳐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일본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읽을 때 종종 모호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지 싶다. 아마 일본어>한국어>영어의 순서로 모호한 것이 아닐까? 그 모호함은 존재의 실체를 인식하는 무의식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은 존재가 중심에 있다고 느끼지만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어렴풋이 인식하나보다.

 

임상의 문제. 대규모 연구와 통계는 환자를 맞닥뜨렸을 때 도움이 거의 안 된다. 결국 사례에 집중해야 한다. 사례.


YES마니아 : 로얄 r****t 2013.06.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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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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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이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기는 어렵다.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과연 종교의 필요성을 느꼈을까? 최우선적으로는 내세와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더불어 현세에서 삶을 행복(혹은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종교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종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한줌도 제대로 되지 않은 듯 하다. 불교도 어디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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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이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기는 어렵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과연 종교의 필요성을 느꼈을까? 최우선적으로는 내세와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더불어 현세에서 삶을 행복(혹은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종교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종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한줌도 제대로 되지 않은 듯 하다. 불교도 어디서 주워들어서 연기,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니 하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깊이있는 고민을 해본적은 없는 듯도 하다.


우파니샤드를 통해 불교의 근본사상(?)에 대한 고민도 해보게되고 이 책을 통해 불교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나름의 정리도 해 보게 된다. 


대담집이다 보니 산만할 수도 있지만 나름 핵심을 찌르고 있다. 한국 불교는 통불교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합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생각일지 모른다. 일본불교가 불교 경전에 대한 연구도 많이 앞서 있고 철학적인 깊이도 더 깊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아픔도 한 몫하고 있지만 다양한 불교경전에 대한 연구가 뒤쳐져있는 건 사실이다.


기독교도 많은 분파가 있지만 불교도 이에 못지 않은 것 같다.


석가모니의 원시불교의 말씀에 없던 것들이 이후 대승불교, 밀교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마치 성서의 내용을 문자그대로 이해할 것인가 그 뜻을 새겨서 이해할 것인가 만큼이나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부분이다. 원시불교와 대승불교는 구약과 신약만큼의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석가모니는 영혼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 없고 윤회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없지만 이후 불교에서 언급되며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게 된다. 원시불교는 무아설를 기초로 하지만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아뜨만과 같은 진여를 논하니 천국과 같은 사후의 극락이나 정토의 개념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고, 유일신의 사상처럼 대일여래나 비로자나불처럼 창조주의 개념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어디까지를 어떻게 받아드릴지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석가모니가 윤회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카르마(업)에 의한 윤회를 믿고 진정한 안락(행복이란 단어보다는 안락이 맞는듯)은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이라고 생각한다면 현재의 아무리 힘든 카르마도 지금 풀지 않는다면 결국 돌아오게 된다는 걸 이번에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책의 이야기대로 불교적으로 보면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을 한다고 카르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잠시 벗어나지만 윤회에 의해 다시금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고...


이 말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는 듯 하다. 결국 카르마를 풀기 위해 죽기전까지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고 새로운 카르마를 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불교가 내게는 늘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만 느껴졌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게되니 상당히 적극적인 생각이 든다. 어차피 회피하지 못할 카르마라면 직시하고 철저하게 느끼면서 헤쳐나갈 수 밖에 없다. 


"행복"이란 단어가 밴담의 공리주의의 happiness를 일본에서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행복으로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고 이 책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행복일까? 안락일까? 행복이라는 말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고 반면 안락은 소극적인 단어로 들린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은 감각과 직접적인 연관이 크며 찰라적이다. 아무리 보고 싶던 사람이라도 만나는 그 순간 그리고 잠시의 시간동안에 희열을 느끼지만 곧 희석되고, 꿈에 그리던 일도 성취되는 순간에 최고의 희열을 느끼지만 그 또한 지나면서 희석된다. 인간의 많은 행복들이 그러하니 이것이 감각적으로는 너무나도 좋지만 지속적으로 쫓아야할 길일까? 행복보다는 안락이 더 맞는 방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뜨만(진여)과 무아는 여전히 헤갈리는 면이 있다. 


갑자기 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나를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 육체를 제외하고 영혼은 느낄 수 없는 부분이고 그렇다면 현재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인격적인 요소(성격, 가치관 등등)가 나라고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춘기때의 나는 중년의 모습을 싫어했다. 사춘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어찌 생각할까? 아마도 싫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나도 사춘기의 미숙한 나를 좋아하지 않다. 같은 육에 시간적으로 존재했던 나는 서로 다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나이가 더 들어서의 나는 현재의 나와 또 다를 것이다. 이런 것이 제법무아의 한 내용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통섭적으로 바라보고 담론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 자칫 피상적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맛도 있는 듯 하다. 이 담론집의 내용을 똑같은 수준으로 이해하면서 따라가기에는 낯선 부분도 꽤 있지만 나름 의미있는 대화론집이라고 생각한다.


1/4/2014



a***k 2014.01.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