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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랑켄슈타인'의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애초 그게 무슨 내용인지 어렴풋이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이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도 마찬가지다) 메리 셸리의 암울했던 생애만큼이나, 다소 무섭기까지 한 책의 디자인만큼이나, 본 소설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어두움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소설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통념대로 과학이나 괴물과 관련된 소설이 아니다. 물론, 이 소설이 쓰여지던 시기 자체가 한창 과학의 빛이 파도처럼 밀려오던 시기였던지라, 당대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경이를 띤 시각이 가끔씩 엿보이긴 하지마는, 기본적으로 본 소설에선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방법(?)이나,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 살해와 관련된 잔인한 표현같은 것 자체가 전무하다. 메리 셸리는 이런 부분을 거의 의도적으로 그냥 넘어간다. 외려 내 시각에 이 소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소설로 보였다. 작품 속에서 굉장히 친절하고, 인덕 있고, 기품있게 묘사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오로지 단 한푼의 관용도 배풀지 않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왜곡시킨 단 하나의 생명(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뿐이다. 산에서 자신이 창조한 괴물과 마주치자마자 저주스러운 말들을 내뱉는 프랑켄슈타인박사에게 그 괴물은 오죽하면 이런 말을 다 할까. "다른사람한테는 잘해주면서 나만 짙밟지 말아주시오,"라고. 괴물은 결국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자 자신의 존재의의를 잃고 자살한다. 인간이 없으면 자연이란 개념도 없음을 상징하는 것일까? 결국 인간이 왜곡시킨 자연은 인간이 치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것은 자연 뿐 아닌 인간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부분에서의 프랑켄슈타인박사의 오락가락하는 발언(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하라고 했다가, 새로운 도전이 부른 파멸을 후회했다가)을 보면 저자인 셸리 또한 미래로의 발전적 해결이 아닌, 과거로의 회귀를 통한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해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은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괜찮은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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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읽었어야 마땅할 책인데 반백살이 되어가는 지금에야 뒤늦게 '문학책 읽기'에 빠져서 허겁지겁 닥치는대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도 그렇게 책꽂이 속에 푹 파묻혀 있다가 뒤늦게 내 손에 집힌 책인데 무려 20년이나 지난 책이다. 하긴 소설이 200여년 전에 쓰였는데, 고작 20년 지난 책을 읽는 것이 무슨 대수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긴 하다. 세월의 변화를 단박에 알아챌 수는 없지만, '뒤침(번역)'에도 유행이랄지 트랜드랄지..뭐,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인지 책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뒤친이(번역가)'의 역량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도 유행에 민감할진데 뒤칠 당시에 알게 모르게 유행하던 말투가 고스란히 담긴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말이다.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아이들과 함께 '문학책'으로 논술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차이가 부쩍 눈에 띄곤 한다. 그래서 왜 그런 차이가 나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애들 책(새책)'과 '샘 책(낡은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뒤친 책의 '원본'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영국소설인 이 책의 원본이 '원작자'인 메리 셀리가 직접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책인 탓에 '미국말로 뒤쳐진 책'을 원본으로 삼아 다시 '우리말'로 뒤쳐진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더욱 복잡한 경우는 '어린이를 위한 축약된 책'인 경우인데, 이 경우엔 뒤침이에 의해 '각색'까지 더해져서 원작의 내용과 사뭇 다른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여러 버전의 뒤침책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지 않았다면 그런 차이를 모르고 지났을 것인데, 뒤늦게 이런 경험을 하다보니 왜 그토록 '같은 원작의 소설'이 다양한 출판사와 여러 뒤침이에 의해 출간되고 뒤쳐지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암튼, 책마다 '맛'이 색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으니, '깜냥'이 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맛'을 최대한 살려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맛이 다르면 '느낌'도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공포'라는 느낌은 그닥 들지 않곤 한다. 왜냐면 익히 알고 있는 '괴물'의 등장이 상당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즘 트랜드에는 초반부에 등장해도 시원찮은 공포감이 들기 때문에 '시작'과 동시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괴물이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꽉 채우곤 하기 때문에 소설의 중반부를 훌쩍 넘어갔는데도 사람만 죽고 정작 '원흉'인 괴물이 등장하질 않으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난 이것을 두고 아이들에게 '고전명작의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이들은 '찐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고 밋밋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괴물 주인공'이 등장했는데도 공포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외모가 흉칙하기 이를데 없다는 '묘사'가 나오긴 하지만 동영상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인데다 어렵사리 등장한 괴물이 너무나도 '감상적인 복수'를 하고 '논리정연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공포감'은 싹 사라져버리기 일쑤란 얘기다. 이런데도 이 책을 '공포소설'이라고 소개해도 좋은 걸까?
맞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 분명하다. 하지만 외면의 공포가 아닌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공포가 불현듯 꺼내어졌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소설'이 된 것이라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이 창조해낸 '생명체'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버린다는 '내면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제대로 된 찐 공포가 전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도 다름 아니라 인간의 '편리와 이기'를 위해서 발달해온 '과학'이 만들어낸 공포이기 때문에 정말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공포감'이 들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이 행한 모든 행동과 활동이 '도리어' 인간을 비롯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심지어 지구마저도 파괴해버리는 공포를 말이다.
'과학의 발달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만들어서 '유익'하게 써오다가, 어느날 갑자기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들이 한둘이 아닐 게다. '가습기살균제'는 어떤가? 갓 태어난 아기와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서 아빠는 '가습기'에 낀 곰팡이를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퇴근길에 '가습기살균제'를 사왔다. 그리고 아내가 맛있게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 '가습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물때를 제거한 뒤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청결'하게 하기 위해 소중히 사가지고 온 '가습기살균제'를 넣고 가습기를 켠다.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상황인가. 그런 아빠의 애정을 듬뿍 받은 아기와 육아휴직으로 집에 머물고 있는 아내가 '가습기살균제'의 직격탄을 맞고 '중증호흡기장애'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사망을 하게 되었다. 이제 좀 공포감이 드는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화학을 연구했다. 얼마나 심취했는지 오랜 옛날의 과학자인 '연금술사의 비법'까지 손을 대면서 열중을 했더랬다. 비록 대학교수는 '하릴없는 옛 지식'까지 들춰 대는 프랑켄슈타인을 비아냥거리며 '시간낭비'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학문에 빠져들면서 놀라운 성과를 냈다. 바로 '죽은 시체'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비법을 알아낸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인간'보다 더 크고 힘도 쎈 것을 만들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연구에 성공하고보니 자신이 만든 '새 생명체'가 보기만해도 역겹고 혐오감이 들 정도로 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서 꿈틀대기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혐오감이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인데도 너무도 혐오스럽고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며 갓 태어난 '생명체'를 그대로 방치한 채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빨리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까지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기만 하고 사태를 수습하는데에는 소홀했던 점이 크나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괴물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말이다. 그렇게 괴물은 복수심에 차서 살인을 저질렀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마주하면서 더욱 심한 공포감에 젖어들게 된다. 바로 이 '공포'가 <프랑켄슈타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도 범죄를 막을 수도 없고, 범죄를 밝힐 수도 없는 '주인공'이 겪는 공포 말이다.
하지만 괴물이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성선설'을 증명하기라도 할 것인냥 갓 태어난(?) 괴물은 착한 본성을 지녔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과 달리 너무나도 혐오스런 외모를 가진 탓에 '선한' 인간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을 나중에 새삼 깨닫게 되면서 '증오'를 배우게 되었고, 믿었던 사람에게마저 '배신'을 당하면서 그 무엇보다 처절한 '복수의 화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괴물의 탓'일까? 분명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애초에 사랑을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지 않을까 싶어서, 괴물에게 '동정심'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끝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복수'와 '살인'을 멈추고 싶다면서 '제안'을 내놓는다. 자신과 똑같은 '여자'를 만들어주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떠나 '남미'에 정착하겠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남미'에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데 뭔소린고 싶지만, 19세기 제국주의시절의 감성이 충만한 '막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대영제국'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괴물'이 살아갈 장소로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튼, 비판적인 읽기를 해야 할 부분이지만, 잠시 고정을 하고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그럴듯한 제안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믿고 '여자 괴물'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오면서 막바지에 들어간 작업(?)을 멈추고 애써 만든 '여자 괴물'을 망가뜨려버린다. 왜냐면 괴물 종족이 번식(!)을 해서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전자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의 죽은 시체에서 얻은 조각을 이어붙여서 '부활'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여자 괴물'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여자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될 것이라 '프랑켄슈타인의 고민'은 쓸데없는...이치에도 맞지 않는 고민이었으나, 19세기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의 소설인 것을 감안하면서 읽어보면, 제법 고민해볼 만한 '공포감'이었을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켄슈타인은 또 다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게 되고 만다. 이로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사이의 쫓고 쫓기는(?) 대단원의 막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권리'로써 괴물을 죽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괴물은 '할 수 있으면 해봐라'면서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소설의 줄거리와는 별개로,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수많은 고찰을 하곤 한다.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읽기도 하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과학자의 윤리의식'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연구를 끝까지 하거나, 지적 호기심만 충족하고서 책임은 지지 않는 비양심적인 행태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이기는 대단한 업적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로 인한 폐해에도 무한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인류는 '엄청난 파괴력'에만 주의를 기울였을 뿐, '방사능'이라는 위험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써'보고 나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이런 어리석음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도 왜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항생제의 남용'도 마찬가지다. 수퍼박테리아가 등장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 예상은 둘째치고, 기존의 항생제가 소용 없어지면 '더 강한 항생제'를 개발하려들고, 그도 소용없어지면 '더 쎈 항생제'를 만들 궁리부터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무기로도 엄청난 살상력을 갖추고 있건만 '기어코' 더 쎈 무기를 만들어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 괘씸하단 말이다.
이런 비판을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과학'이라는 마법사의 돌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끝내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흉칙한 괴물을 만들고야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공할만 한 물건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의 대명사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또 만들고 있다. 처음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조금 뒤엔 '인간만을 위한 편리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끝에는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때문일까? 여기까지 '죽음을 부르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괴물의 이름'으로 말이다. |
|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프랑켄슈타인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은 1811년 메리 셀리라는 여류작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이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했던 박사의 이름인 것. 그 동안 TV와 무성한 소문에만 충실한 무지한 필자의 탓이라 여기며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이 소설은 윌튼 선장의 1인칭 시점에서 사건의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선박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방식은 직접 소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보다 훨씬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과 사실감을 고취시키며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계선에서 내용에 몰입하여 긴장감을 유지하게끔 한다. 이야기의 전말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대한 창조와 그 창조가 불러온 개인의 몰락과 재앙이다. 더 나아가 괴물 또한 마지막에 죽음을 맹세하며 자신의 행위에 후회를 보임으로서 비극도 희극도 아닌 결말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이야기의 세부사항과 그 허구성에 대한 논의보다 더 심도 있는 토론을 요구하는 책이다. 행위와 사상을 통해 나타나는 메타포에 대한 해석은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으로 ‘프랑켄슈타인의 창조가 잘못되었는가?’다. 메리 셀리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명예와 욕망을 위해 피조물이 만들어졌다고 서술한다. 그 어떤 뚜렷한 목표나 창조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괴물’의 탄생은 지극히 충동적이며 완벽하지 못하다. 이는 우리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해야 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태생은 제네바이며,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을 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이에서 자랐다. 고생을 모르고 ‘인간은 아름다운 것’의 시선과 고정된 틀을 깨지 못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괴물의 탄생과 동시 빅터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괴물을 대했고 위대한 과학자의 발견은 물거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작가는 창조의 진위여부를 따지기 전에 ‘과연 우리가 합당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표한다. 각각의 개인은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인정받는 과학도라 할지라도 한 피조물의 창조에 대한 결정권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으로 ‘괴물의 상징성은 무엇인가?’다. 이는 단순히 인조인간과 창조에 대한 비판으로만 끝나면 아니 될 것임을 말한다. 괴물의 창조는 타자에 대한 창조와 일치한다. 1800년대 영국의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횡포는 도를 넘어서서 거의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간접통치를 실시하고 있을 시기이다. 영국은 자국의 존립을 위해 식민지를 갈취하고 백인이 아닌 흑인이나 일명 ‘식인종’에 대한 구별의식을 추켜세웠다. 괴물이 탄생하는 순간 빅터는 내면적인 성격이나 인격을 따지기도 전에 우선 외모에 대해 경악하게 된다. 이에 괴물은 백인들의 영어, 문화, 풍습, 행동거지의 학습을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홀로 학습했다. 마지막에 용기 내어 오두막의 눈 먼 할아버지를 통해 의사소통은 성공했으나 나머지 가족들에겐 흉측한 괴물로 전락하면서 외면당하게 된다. ‘왜’라는 질문 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전제를 토대로 괴물에 대한 형상화 과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렇게 형상화된 괴물이 나중에 빅터의 가족과 친구들을 차례로 죽이면서 복수를 하지만 나중에는 ‘인간적인 감정’으로 후회를 하게 되고 자살을 결심한다. 결국 괴물 역시 소외 당하여 ‘힘과 무지한 본능’을 바탕으로 움직였다가 자신에 대한 빅터의 큰 뜻을 깨닫고 자멸하게 되는 이야기는 결국 타자를 교육시키려다 실패한 백인들의 씁쓸한 우월주의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그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의 질문을 던져본다. 빅터나 괴물 그 한쪽을 편애하는 결과는 큰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 소설은 선과 악의 구도, 그 어느 쪽의 구조로 얽혀있지 않다. 작가는 빅터의 욕심이 큰 화를 불러일으켰고 재앙을 불러왔지만 자신과 가족의 몰락을 통해 그간의 노력이 무상하다고 말한다. 괴물은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났지만 복수와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화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권선징악적인 설정이 엿보이지만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닌 패자일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삶과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며 사는 태도는 엘리자베스와 아버지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괴물의 등장으로 이들은 모두 고통으로 신음하며 말년을 안타깝게 보내게 된다. 빅터와 괴물의 양자간 대결구도를 탈피하면 그 누구도 대결하지 않는다. 모두 이유 없이 당하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은 원래 박사이며 괴물은 그냥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부분만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년이 가깝게 지나도록 리메이크되고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기란 쉽지만 않다. 핵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에 대한 충실이다.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와 현실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 그리고 타자에 대한 그릇된 시선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인류의 행보에 중요한 이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소설 중 드문드문 등장하는 시와 문학적이며 감성적인 부분은 단순한 공포소설을 탈피한 휴먼소설로서, 삶의 방향과 갈등에 대해 고뇌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프랑켄슈타인. 그 이름 너머로 흐르는 기운을 이제 느껴보고 싶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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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은 후 미니 감상평 ♣
괴물의 대명사 <프랑켄슈타인>, 사실 책 자체 내용보다는 제목으로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책을 읽은 후에도 그런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이다. 대부분 이런 장르의 책을 읽다보면 섬뜩할 정도의 치밀함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작가는 나름 과학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은 너무 허무맹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엄청난 괴물의 효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이 소설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상품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탄생 시킨 인물은 천재성을 지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분명 괴물의 아버지는 빅터이다. 마치 조물주가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내듯 빅터는 프랑켄슈타인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태초의 창조주처럼 흙으로 인간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빅터는 시체의 여러 부분과 이상한 화합물을 혼합하여 신비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는 ‘생명의 비밀’이라는 주제를 놓고 미치도록 연구하고 또 연구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연구 결과물이 자신을 향해 걸어온 순간 그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분명 실험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결과물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다. 괴물은 250센티미터의 큰 키에 엄청난 힘과 몸집을 가졌다. 얼굴은 보기만 해도 기겁을 할 정도로 흉측했지만 마음은 갓난아이처럼 순수했다. 하지만 그 순수한 마음은 시체 조각을 붙여 만든 얼굴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상처만 받았다. 난 이 부분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 앞에 괴물 프랑켄슈타인이 있다면, 나 역시 그의 순수함을 알아보기 전에 돌멩이 먼저 집어 던지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것 같다. 난 이 소설의 내용보다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주 빅터를 비난하고 싶었다. 정말 화가 났다. 괴물의 말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욕하고 외면해도 빅터만은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괴물의 말처럼 빅터가 그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괴물은 순수했고 백지처럼 하얀 마음을 가졌지만 사람들이 괴물을 괴물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창조주 빅터를 증오했고 더 나아가 인간들을 저주했다. 나는 분명 괴물이 몇 번이고 인간들과 어울려 인간답게 아니 최소한 한명만이라도 그를 인간으로 인정해 주길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점점 분노는 증오심으로 증오는 복수심으로 복수는 살인이라는 최후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빅터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죄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괴물의 첫 희생자는 빅터의 동생이었고 그 다음으로 친구,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빅터는 모든 걸 잃었다. 그의 첫 번째 실수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죄요, 두 번째 실수는 자신의 창조물을 외면한 죄이다. 빅터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악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악마는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랄뿐이었다. 그렇다, 사람들이 그를 괴물, 악마라고 불렀지만 그는 단지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소설의 관점은 괴물의 입장보다는 빅터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빅터는 하늘과 땅의 비밀, 자연의 비밀을 얻고자 괴물을 탄생시켰음에도(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불구하고 괴물 프랑켄슈타인에게 무조건 추잡하고 더러운 악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의 입장에서서 그를 안아주고 인정해줬더라면 괴물은 괴물처럼 살지 않았을 것이다. 괴물의 말처럼 빅터는 창조가가 자기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묵과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괴물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무것도 모른 체 버림을 받았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총과 돌멩이뿐 자신을 반겨주는 이는 없었기에 어두움을 친구 삼아 지내야 했다. 그는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생존을 위한 짐승과 다를바 없었다. 괴물은 울었다. 배고파서 울고, 추워서 울고, 무서워서 울었지만 정작 그의 눈물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괴물은 빅터에게 말하길 본능적으로 쓸쓸함을 느끼고 사람 곁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엄마가 안아주면 좋아하고 사랑을 느끼듯 괴물도 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말해주고 싶다. 웅덩이의 비췬 섬뜩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괴물은 깨달았다. 자신의 선한 마음은 사람들의 치명적인 편견에 가려 다정하고 상냥한 친구 대신 징그러운 괴물로만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노인은 괴물의 혐오스러운 겉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볼수 있는 사람들은 익사할 뻔 한 어린 소녀를 구해주었지만 그의 보답으로 총을 겨누고 발사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괴물은 단지 사랑이 필요했다. P217에서도 보면 “내가 외롭게 사랑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난 미음과 악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이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면 내 죄악의 동기가 해소될 것이고 나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채 살아갈 거요.”라고 했다.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자신이 악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비참함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괴물 프랑켄슈타인이 내 앞에 나타나면 나 역시 그러겠지만 잠깐이라도 그를 살며시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은 인간이 창조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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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영어 시간에 어느 한 chapter에 나왔던 프랑켄슈타인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수많은 chapter들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게 프랑켄슈타인 뿐이라면 그 위력은 정말 대단하구나 싶다. 영어 시간에 들려주었던 선생님이 틀었던 영어 테이프에서 괴물이 질렀던 괴성과 비명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귓가에 울리는 듯 하고, 그것을 친한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따라하고, 영어책에 나온 내용을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나뿐만이 아니라 친구들 모두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을 은근히 좋아했고,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창조자보다는 괴물에 더 관심이 집중해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 괴물이 내는 괴성과 비명소리가 나오는 영어 테이프 듣는게 재밌어서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수업시간에 열심히 배웠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전체 내용을 알진 못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완역본을 읽기로 결심을 했다.
이 소설속에서 전체적인 틀에서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는 사람은 북극을 항해하고 무언가 대단한 발견을 하고자 하는 로버트 월튼이라는 남자이다. 그는 항해도중, 거의 난파직전이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구하게 되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에 대한 이야기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죽게 된다. 월튼은 프랑켄슈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옮겨 적으며 그것을 편지로 써 영국에 있는 여동생 마거릿에게 보내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적인 능력이 뛰어난 과학자로, 키가 2미터가 넘고 흉칙한 괴물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 괴물을 만들고 나서, 그는 소름이 끼쳐 내팽겨치고 나오고, 괴물은 어디론가 떠난다. 괴물은 떠돌아다니다 어느 오두막에서 눈먼 노인과 그의 아들, 딸, 아들이 사랑하는 터키 여인의 삶을 보면서 그들과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괴물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돌팔매질을 했고, 위기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어도 괴물은 사람들에게 도리어 외면당한다. 괴물은 결국 자신을 흉칙하게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을 저주하게 되고, 제네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남동생 윌리엄을 살해하고, 프랑켄슈타인의 집에서 데리고 있었던 저스틴이라는 아름다운 여자 아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죽게 만든다. 혐오감에 찬 프랑켄슈타인은 어느 날, 괴물과 협의를 하게 된다. 괴물은 자신처럼 흉칙한 여자 괴물을 만들어 주면 그녀를 데리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것이며, 더 이상 어떤 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민하던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영국으로 가서 그 작업을 착수하기 시작하다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인류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반쯤 완성된 작업물을 괴물이 보는 앞에서 파괴시켜 버린다. 괴물은 "네 결혼식 첫날 밤에 두고 보자"란 말을 남기고, 분노를 하여 그 자리를 뜬다. 프랑켄슈타인은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를 떠올리며 괴로움에 젖지만, 다시금 제네바로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떠나는 도중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절친한 친구인 클레르발을 살해하고, 마침내 프랑켄슈타인의 신혼여행 첫 날 엘리자베스까지 죽이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프랑켄슈타인은 온갖 분노에 휩싸이며, 괴물의 최후를 자신의 손으로 매듭 짓고자 그를 계속해서 추격한다. 그야말로 파멸된 삶에 이어, 완전이 폐인이 되는 것이다. 괴물은 계속해서 그를 피해 도망쳐 갔고, 드디어 북극에서 프랑켄슈타인은 난파할 위기에 처해지고 월튼이 구해주는 것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월튼에게 자신의 지식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파멸된 삶을 통해 교훈을 얻을 것을 촉구하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말하며 돌아가라고 당부한다. 프켄슈타인이 죽은 후 괴물은 월튼 앞에서 자신이 죽여야 할 것인데 죽이지 못했다는 것과 그가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욕심들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말하며 자신 역시 죽겠다고 말하고 떠난다. 월튼은 결국 프랑켄슈타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신의 욕심을 접고, 돌아가고자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약간은 실험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탄탄하게 잘 짜여진 구조는 그것을 잘 매꾸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었고, 꿈도 희망도 사랑도 행복도 그 어느 최소한의 권리도 가질 수 없는 한 괴물을 통해서 인간다운 사람과 인간의 자격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괴물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으나 그의 흉칙한 외모로 인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한다는 사실은 외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지금도 역시 그렇다는 사실에 씁쓸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한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 만든 파멸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자연권'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첨단 과학으로 만들어질 복제 인간이 '자연권'을 가지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해 보게 되었고, 복제 인간을 만드는 것은 솔직히 반대다. 이 소설을 읽고 끔찍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이지만, 인간이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 여러 매체를 통하여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거의 다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사람과 원작의 작가에 대해서 또 이 책이 씌어진 시대와 원작이 말하여 주는 바를 깊게 통찰한 사람은 드물것이다. 이 책은 영문과 교재로도 배운바 있는데 그만큼 대중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1818년 처음 출판되었지만 괴물과 여성을 등치시키면서 오는 그 깊은 감동은 현대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고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성이면 꼭 한번은 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하며 꼭 여성이 아니라도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과학의 위험성 또한 전해줄 수 있기에 추천하는 바이다. 여러가지 비평으로 내용이 풍성한 책이니 만큼 얻어갈 것 또한 많다고 생각한다. 메리 셸리의 과학적 상상력 또한 높게 평가된다. 지금 입장으로는 말도 안된다 할 수 있지만 시대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몬스터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외모와는 달리 지성인의 말이었다. 참 인상깊은 구절이 있다면 괴물이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성적인 그의 말이다. 지금의 여성 또한 시대의 희생물로 몬스터 처럼 일그러 지지는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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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에의 낭만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월튼. 그는 북극해에서 항해를 하다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정체 모를 한 이방인을 구해주게 되고, 그에게서 그의 잘못된 피조물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이 때부터 소설은 마치 양쪽에서 서로를 비춰 자신 속에 끊임없는 자신을 담아내는 두 개의 거울처럼, 월튼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 속에 또다시 그의 이름 없는 피조물의 참담한 심정이 담겨 있다. 프랑켄슈타인, 그는 고루하고 진부할 뿐인 평범한 과학 속에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상한 신비에 눈을 뜬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병사로 인한 상처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체 안치소에서의 관찰,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의 과중한 연구,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죽은 자의 몸으로 생명의 불꽃을 피운 한 피조물. 거기서 모든 불행과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잘못된 호기심은 프랑켄슈타인을 더 이상 빅터(victor)가 아니게 만들었다. 비록 인간이 아닌 듯한 흉측한 외모이지만, 선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지성, 그리고 고결한 성품을 지녔던 프랑켄슈타인 2세. 그러나 그가 원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단지 외모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거부당한 뒤로 그의 정신의 찬란한 광채는 걷히고 창조주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마음만이 남는다.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사탄에게는 칭찬해주고 용기를 줄 동료 악마들이라도 있었지만,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 미움을 받는 존재라니." 그는 결국 그가 추구했던 그 비범한 능력들을 토대로,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의 친구와 가족들을 차례로 살해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안식을 얻지 못한다. 사실 그는 빅터의 행복을 빼앗고 복수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조차, 그에게 완벽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빅터에게 불행을 준 만큼 불행해지며, 마침내 빅터가 죽은 것으로 인해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그 정당화된 슬픈 동기 사이에서 갈등하며 스스로 한 줌 재로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모든 것을 잃은 빅터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증오하는 그는. 그러나 무엇이 당연한 것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를 괴로운 존재로 만든 창조주, 그의 선행을 그릇된 편견만으로 파탄으로 이끈 사람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악으로 변질해버린 그인가? 비극은 언제나 무엇이 진짜 진실인지 알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질문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약점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프랑켄슈타인>은 빅터나 그의 피조물만의 비극이 아닌, 인류 전체의 비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의 성스러운 영역을 침범했음에도 온 인류의 축복을 받았던 복제양 돌리가 죽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최초의 실제 프랑켄슈타인'인 셈이다. 비록 방법이나 기술이 많이 달랐을지라도. 곧 인조인간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느꼈던 생생한 공포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그런 풍조에 대해서도 경고장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꼭 그런 비판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다른 작품('괴물'이라 인식 받는 존재가 원한을 품고 상대를 해치려 하지만 결국 멸망한다. <오페라의 유령="">, <괴물>,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등)에 비해, 훨씬 섬세하고도 열정적이며, 공포와 스릴보다는 그 이면 뒤에 프랑켄슈타인 2세의 생생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인상깊은구절] "여기 나의 제물이 또 있구나!" 그가 소리쳤다. "그를 죽이는 것으로 내 죄도 이제 끝이다! 그 동안의 비참한 사건들이 이제 그 종말을 향해 가는구나! 아, 프랑켄슈타인! 너그럽고 헌신적인 인간이여! 지금 당신한테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 당신을 영원히 파멸시켜버린 나를. 아아! 당신의 몸뚱이는 차갑고 아무 대답이 없구려."지킬박사와>괴물>오페라의>프랑켄슈타인>프랑켄슈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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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제발,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한테는 잘해주면서 나만 짓밟지 말아주시오.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했건만 타락한 천사가 되었고,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세상 모든 곳에 기쁨이 가득하지만 나만 혼자 영원히 기쁨에서 따돌려졌소. 나는 원래 착하고 너그러웠소. 하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오. 날 행복하게 해주시오. 그러면 다시 선해지리다. -감상- 슬픈 러브 스토리. 괴물의 빅터에 대한 노골적인 사랑. 괴물은 그 대신 반려자를 원한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흡인력 있고 읽기 쉬운 문체와 단어 선택으로 감정이입도 수월했다. 유일하게 괴물과 대화했던 빅터의 죽음으로 괴물은 영원히 혼자가 된다. 인생을 연소시키며 괴물을 좇던 빅터도 마지막엔 하나 남은 자신의 것이었던 괴물에게 집착하였던 것이라 생각한다. -내용요약- 온화하고 지성적인 부모 밑에서 완벽하게 자라난 빅터는 대학에서 어릴 때 심취하였던 연금술서에 대한 기억과 열정이 되살아나 자연철학을 전공한다. 천재성과 집중력으로 그는 단시간에 현재까지의 자연철학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자가 되는 일에 몰두, 괴물을 만들어낸다. 순간 그의 모습에 강한 혐오감을 느낀 빅터는 괴물을 버리고 도망친다. 괴물은 인간에 관한 것을 한 가족의 헛간에 숨어 조용히 터득하지만 그는 상처받고 만다. 빅터는 괴물의 손에 사랑하는 막내동생, 가족과 같았던 소녀, 절친한 오랜 친구, 갓 결혼한 자신의 아내를 차례로 잃는다. 괴물이 원했던 반려자를 창조하기 거부한 죄로 그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괴물에 대한 복수를 다지며 그 뒤를 쫓는다. 남극을 탐험하던 월든은 빈사상태의 그를 발견하고 깊은 애정과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무모한 진리탐구의 위험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를 던지던 빅터는 끝내 숨을 거둔다. 월든은 남극행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향하던 차, 깊은 밤 자신의 창조자를 만나러 온 괴물과 마주친다. 자책과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던 괴물은 모든 살인과 죽음의 끝을 고하고 얼음의 남극 속으로 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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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작품이라 했던가.제대로 원작을 읽지 않은 채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작품들이 꽤 있다.<프랑켄슈타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서운 이야기로 전해들은 이후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인 줄 알고 있다가 20여년전 TV에서 납량특집으로 레너드 화이팅 주연의 미니시리즈로 보게 되었다.비교적 괴물의 고뇌를 충실히 반영했다고 기억한다. 원작에서처럼 차마 눈뜨고 못볼 흉칙한 괴물은 아니었는데 자신의 외모로 본심을 알아주지 않고 혐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그를 점점 괴물로 만들었던 것 같다.모든 걸 잃고 하얗다못해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북극에서 스러져가는 빅터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의 최후는 비장했고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상당히 오래 전 본 건데도 젊은 과학자의 열정과 고뇌 ,갈등,피조물과의 긴장,스멀스멀 피어나는 공포스럽고 오싹한 분위기,그리고 괴물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증오와 애정까지 그대로 기억이 남는다.등장인물들이 미남 미녀들이라 더 좋았다. 제인 세이모어도 나왔고 엘리자베스 역도 예뻤다.내가 보기엔 원작의 분위기와 주제를 충실히 잘 살려낸 걸작. 그리고 10여년 전 케네스 브래너와 로버트 드니로 주연 영화도 보았다. 헬레나 본햄 카터의 누더기인형같은 얼굴 외엔 기억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다층적으로 해석하고 읽을 수 있는 원작을 그냥 단순하게 재현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가 20대의 젊은 여성이 쓴걸 알게된 건 몇년 되지 않았다.겨우 20살의 여성이 이런 엄청난 상상력과 통찰력을 펼쳐놓은 것이 정말 놀랍다.개인적으론 몹시 불행했고 다른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이번에 읽으며 알게 되었다.
200년 전 창조된 암울하고 기괴한 이 이야기가 130편이나 영화로 만들어진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사랑,우정, 열정,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욕,좌절, 고뇌, 고독,소외, 복수.....그리고 존재에 대한 근원적고민-나는 누구인가,나를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왜 , 어떻게살아야하는가.... 그리고 새로운 여러 영역을 뜻하는 동의어가 되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자,인조인간, 유전자 조작식품까지....이젠 현실이 된 인간복제문제- 인간이 신,자연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늘날 여전히 살아있는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이다.
창조주에게서 버림받고, 흉칙한 외모로 무작정 자신을 생명을 위협하는 끔찍한 괴물로만 보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괴물의 처절한 슬픔과 고독이 연민을 갖게 한다. 그가 비록 끔찍한 살인을 여러번 저지르긴 했지만.처음부터 그가 악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그가 원해서 그런 외모로 태어난게 아닌데.... 빅터는 처음 그 외모만 보고 괴물이라 보고 그를 외면하고 버렸다. 괴물은 처음엔 외모만 괴물일 뿐 백지 상태였지만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좌절하며 마음까지 괴물이 되어버렸다.
비록 자신이 만든 괴물을 인정하지 않고 없애야할 악으로만 본 빅터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초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세상 끝까지 괴물을 쫒아 대결하고 책임을 지려는 그의 모습은 숭고하게 보인다.
피조물-실험결과물은 빅터의 그림자,무의식의 존재인데 인정하지 못하고 거부하고 부정하고 악한 존재로만 본 것이 그를 점점 더 무서운 괴물로 만들어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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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극히 서양적이며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작품이다. 제목이 왜 프랑켄슈타인이겠는가... 괴물이 더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 그 괴물을 만들고 방치하고 자신의 죄를 그 괴물에게 뒤집어씌우는 프랑켄슈타인이 더 잔인한 존재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메리 셀리라는 스무 살의 영국 여성이 이런 작품, 놀라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안에 그 당시 영국의 죄악과 함께 영국의 찬란함과 아일랜드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영국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유부남과의 바람으로 한 여자를 자살로 몰고 갔고 결국 행복을 잠시나마 만끽했으나 결국 평생이 불행했다고 하니 이 작품은 그녀의 미래에 대한 예견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동판만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읽으며 의아함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읽는다 생각하고 보면 놀라움을 느끼기 충분한 작품으로 아동판이 아니 완역판을 중학교 이상의 청소년에게는 읽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된다. 하지만 1818년 판이 아닌 그 뒤 다시 고쳐 출판한 1831년판이라는 점은 좀 아쉽다. 원판의 번역도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비교하고 싶은 생각에서... 프랑켄슈타인 푸드라는 유전자 변형물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해도 과학은 우리 손을 이미 떠났다. 생각해서 뭐하랴. 흐름에 맞기고 자신의 죄를 남의 죄에 앞서 고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길이 프랑켄슈타인의 교훈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