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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중이 돈을 신으로 섬기며 자연과 타자를 개발하고 착취하고 폭력을
행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본주의는 역사적 체제일 뿐이다.
수렵채취 시대에, (...) 사람들은 사냥하고 채취한 것들을 골고루 나누어 가졌으며 소유를
부정하고 공유했다. 농경시대에 와서 인간이 소유와 영토에 대한 갈등과 다툼을 행하지만 그럼에도 공동
생산하고 분배하는 영역이 대부분이었으며, 돈과 물질을 밝히는 이들을 경멸했고 지나치다 싶으면 공동체에서
추방했다.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돈이 사람을 지배하며 지나치게 일하고 야만적으로 경쟁하며 타인에게 폭력을
일삼고 게걸스레 소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인류 역사 600만년 가운데 겨우 0.000067퍼센트, 400년에 지나지 않는다." (763~764쪽)
자본주의는 20세기 들어 그 동안 발전한 과학기술과 결합하면서 굶주림과 빈곤, 질병과
미신, 신분과 제도의 억압에서 인류를 구원했지만 동시에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만드는 새로운 억압을 형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범지구적인 사회문제는
대부분 자본주의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런 자본주의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종말을 고하는가 싶었는데, 말도 안 되는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그 명을 이어가더니, 이제는 다시금 게걸스러운 탐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잉여를 착취하고 확대재생산하여 축적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체제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한 시점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 않나 싶다. 시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내에서는 더 이상 확대할
곳이 없어 보이고, 잉여는 계속 줄어들어 종내는 더 이상 착취할 노동자의 잉여가 남아있을 것 같지 않고, 자원은 빠르게 그 한계에 이르러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본이 더
광포해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시대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까? 자본주의를 대체할 체제는 어떤 것이며, 아니 그런 체제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이 책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도흠 교수가 자본주의로부터 야기된
인류의 위기에 대해 진단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글이다. 저자가 다소 이질적인 두 사람, 원효와 마르크스를 끌어드린 것에 대해서 불자에게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가는 길을, 그리고 좌파에게는 불교를 거쳐서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서양사상이
지니고 있는 실체론과 이분법, 동일성의 문제를 불교의 연기론과 퍼지,
차이의 사유를 통해 분석하고, 불교의 관념론은 합리성을 지향하는 서양의 사상을 통해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마르크시즘이나 불교의 화쟁이론으로 그 대안들을 모색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화쟁이론에 방점을 찍는 것 같다. 불교와 마르크스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는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꾸고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유물론에 입각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주체의 실천에 의해 변화시키고자 했다면, 불교는 유심론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깨달음에 따라 새로 구성하고자 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화쟁이란 대립되는 의견이나 논쟁을 통해
핵심과 대요를 파악하여 큰 뜻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不一不二) 이라고 한다. 즉, 불일불이의
새로운 패러다임만이 그 대안임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21세기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사회문제로 10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②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학살, ③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④제국의 수탈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 ⑤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⑥근대성의 위기, ⑦분단모순 심화와 동아시아의 전쟁위기, ⑧욕망의 과잉, ⑨정보화 사회의 모순, 그리고 ⑩가상성과 재현의 위기가 그것으로, 이 문제들은 인류 아니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제반 모순들이기도 하다.
<환경위기>에 대해서 "전 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국 모든 것을 쓰레기로
전환시키는, 종말로 치닫는 질주일 뿐이다." (72쪽) 라고 말하는 그는 "인간이 우위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명이라 여긴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이 환경오염을 낳는 근본적인 원인" (88쪽) 이라며 불일불이의 패러다임아래 엔트로피가 제로상태인 순환시스템으로의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제국의 수탈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에서는 "자본주의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착취에 기대어 끝없이 경쟁하면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는 괴물"(263쪽) 이라며, 자유경쟁의 원리에 입각한 전면적인 자유무역을 실시해야 이윤과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를
비판한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란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을 거쳐 상품자본으로, 그리고 이 상품자본이 다시 화폐자본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자본이 잉여를 착취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시스템이라며, 이 과정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된다고 말한다. 대중은 화폐에서 생산, 상품으로의 변환과정에서는 노동거부로, 그리고 상품에서 다시 화폐로의 변환과정에서는 소비거부로 맞설 수 있지만, 자본의
폭력과 이에 대한 공포는 노동거부를 회피하게 하고, 유혹은 소비를 조장하는 기제라고 한다. 따라서 노동거부는 마르크스 사상에 입각하여 노동자를 주체로 한 연대와 진보운동 길 찾기를 통해서, 그리고 소비거부는 불교가 얘기하는 것과 같이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삶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자고 말한다.
이처럼 저자는 10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마르크시즘과 불교이론을 결합하여 그 모순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궁극적으로 화쟁의 패러다임에 의한 자본주의의 해체이다.
현재 인류가 맞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를 해체하지 않는 어떤 대안도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스스로
붕괴하든, 혹은 99퍼센트가 돈과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1퍼센트에 맞서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든,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임은 분명해 보인다.
두껍고, 서양과 불교의 각종 사상이론들을 제시하며 설명하는 글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분명하게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란 것을 알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 오랜 시간을 끌면서 겨우 읽은 책이지만, 읽어냈다는 것 만큼이나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순을 확인하고 그 대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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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는 거리의 인문학자,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화쟁(和諍)은 그가 내세우는 화두(話頭)이다. 물론 이 말이 그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원효 대사의 개념이지만 마르크스와 원효의 대화를 통해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 비평을 종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매개하는 중심 개념으로 저자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저자는 원효와 마르크스라는 두 사상가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모순과 불합리, 억압, 폭력, 조작, 착취 등으로 죽음 같은 세월을 보내는 전세계적 위기를 언급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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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27. YES24 블로그 응모 이도흠 교수님의 책이라길래 반가운 마음에 흠쌤을 팔아(?) 응모했는데 당첨됐다. (이도흠 교수님께, 졸업식 전에 찾아가 사인 받아야지) 목차만 보면 수업 시간에 다 배 웠던 내용들인데 조금 낯설긴 하다. 배운 지 오래돼서 그럴 수도 있고, 좀 더 심화된 내용이 들어가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어쨌든 졸업 전에 흠쌤 책을 받아서 매우 기쁘다. 세계를 진단하다 목차를 쭉 훑어보자. 총 10장까지, 환경위기와 폭력, 인간성의 상실과 전쟁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크게 2가지 키워드로 나눌 수 있다. '신자유주의'와 '화쟁'이 그것인데 현재 세계의 문제를 진단하자면 '신자유주의'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화쟁'이다. 먼저 신자유주의라는 화두부터 살펴보자. 신자유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경쟁지향주의로 인해 가족 및 공동체의 해체를 야기했고, 이는 인간성의 소외로 연결된다. 제국주의적 폭력이나 분단 모순, 타자에 대한 지속적인 폭력의 노출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가장 실증적인 예시는 공교육기관, 즉 학교를 들 수 있다. 학생들은 현재 극도로 불안해하거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 큰 비전없이 막연히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신자유주의와 폭력의 문제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학교 내의 경쟁주의야 말할 것도 없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 간의 계급 갈등이 뚜렷해지면서 학교 안은 마치 프랙탈처럼 계급 안의 계급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 중에서 가장 하층 계급은? '싸움도 못 하고 공부도 못 하며 키도 작고 못 생긴 학생.' 학교 내에 평등을 추구하고 공동체지향적인 문화가 있다면 이들이 불안하게 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을 텐데, 신자유주의와 폭력 문화에 길들여진 한국의 학교에서 이들은 아주 좋은 먹잇감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최소한 90~00년대에 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3명 중 1명은 학교폭력을 경험했다. 계급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어디 학교가 계급사회던가? (출처: HOOC) 물론 이도흠 교수님이 신자유주의의 키워드로 세계를 진단한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미 신자유주의는 한풀 꺾인 추세다. (* 여담이지만 최근에 미국에서 사민주의자인 버니 샌더스가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만약 그가 선거에서 이긴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설령 실패한다한들 신자유주의의 공고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진단과는 별개로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키워드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 목차에서 각 장들에는 '~위기'라는 말이 많이 붙는데, 지금 시기처럼 한국이 위태로운 적이 있었던가. 이에 대해선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진중권 교수의 최근 트윗으로 대신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모든 원인이 신자유주의와 폭력(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꼰대&금수저'들에 의해 '노오력'을 강요받고, 이에 대해선 '헬조선'이라고 자조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은, 분명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쟁지향적&이기주의적 문화와 한국시민의 타자에 대한 폭력성이 꽤나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원효와 맑스적인 해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원효의 마르크스의 대화>의 주제다. 원효와 맑스는 어떻게 말하는가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원효와 맑스의 사상을 정리한 개론서가 아니다. 특히 맑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조금 간략하게 소개를 하는 편이라 만약 맑스주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원효의 화쟁 사상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하고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서문 다음에 방법으로서 <화쟁이란 무엇이며 사회문제에 적용이 가능한가>를 수록해 둠으로써 원효의 화쟁 사상을 밝혔다. 그래서 본문을 읽을 때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원효의 사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연기론'이라 할 수 있다. 이도흠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항시 강조하는 '눈부처(상대방에 눈동자에서 부처를 닮은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론 역시 연기론을 한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기론은 세상 만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인데 얼핏 보면 상당히 고루하고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아와 주체를 강조하는 서양과는 분명히 다른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히, 그리고 넓게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합리적인 견해임을 알 수 있다. 곡식을 훔쳐 먹는 참새를 모두 때려잡으라고 했다가 2천만 명 이상이 아사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세상은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이 한 마디에 몇천만 명이 아사했다.
이러한 화쟁 사상은 헤겔과 헤겔의 바통을 이어 받은 맑스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변증법 자체는 논리학이고 화쟁의 불일부이 또는 연기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개념의 운동성을 중요시한다는 부분이나 근대 이전의 형이상학적 논리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이 부분은 내 생각에 불과하고, 실제로 책에 등장하지는 않아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 책에는 다양하고 폭넓은 사유로 가득하다. 깊이도 결코 얕은 편이 아니며, 학부생 시절 이도흠 교수님의 수업을 모두 수강했던 내가 봐도 이 책에는 이도흠 교수님의 모든 생각이 채워져 있다(물론 방금 말했듯이 학부생 수준에서!). 만약 이도흠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싶은데 시간과 공간의 문제로 여의치 않은 사람은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나로선 더욱 각별했던 것이, 책에 등장하는 예시에 이도흠 교수님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어 책을 읽을 때 그때의 수업풍경이 떠올라 좋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책 제목이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인데, 가끔 내용이 곁가지로 빠질 때가 있다. 진화생물학을 언급하며 신학을 비판한 점이나 뜬금없는 기호학 이야기, 양자역학 등의 최신과학을 다소 거칠게 화쟁사상과 연결한 것이 그렇다. 또, 어떻게든 원효의 사상은 각 장마다 적어도 한 번씩은 언급되나 마르크스의 사상은 뒤로 갈수록 실종한다. 애초에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마르크스로는 충분치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책 제목에 비해 마르크스의 비중이 너무 적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책이 이도흠 교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많이 담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물론 나는 저자가 아니므로 그 의도와 생각까지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수강한 강의들의 내용이 모두 들어가 있는 점이나, 대학원에서 다룰 법한 내용까지 조금씩 언급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어쩌면 교수님은 이번 책에 자신의 모든 이론을 정리한 게 아닐까? 그동안 강의노트나 논문 등으로 자잘하게 흩어져 있던 본인의 사유를, 하나의 책으로 엮어 대중과 소통하려고 하는 게 아닐지.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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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마르크스, 서로 상극인 두 인물의 대화를 시도한 저자 ‘이도흠’의 책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는 불자에게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가는 길을, 좌파에게는 불교를 거쳐서 가는 길을 안내한 것이며, 우리 모두의 참여와 질정을 통해 ‘함께’ 이루어야 할 과업이며,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을!”소망하는 마음으로 펴냈다는 저자의 말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함께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담고 있다. 지금 지구촌은 한마디로 규정하면 자체를 정화할 수 있는 ‘빈틈’이 사라진 세계이며, 끊임없이 착취하여 확대재생산하여 축척해야만 존속하는 자본주의는 이제 자연에서든, 국가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의 마음에서든 빈틈을 거의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세계는 어둠에 가득 차 있으며, 인류 종말의 유령이 환경 재앙과 경제공황, 도덕 붕괴의 모습을 띠고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에 대한 해법을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점을 분석하고 화쟁을 통해 답을 찾고 그 치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화쟁’은 ‘모든 대립과 갈등의 아우름’으로서 첫째, “대립되는 쟁론을 소통을 통해 서로 같은 뜻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 ”부처님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지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여러 경전에서 본 가닥을 찾아 부분의 대립을 이에 통합하고 한맛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며, 셋째, 화쟁은 개시개비(皆是皆非)를 통해 대립과 갈등을 소멸시키고 서로 어울리는 것이고, 넷째, ”대립물 사이의 조건과 인과, 작용에 대한 연기적 깨우침“이며, 다섯째, ”대립물 사이의 중도적 깨우침“이고, 여섯째, ”이문(二門)과 일심, 중생과 부처, 일상과 깨달음의 불일불이(不一不二)에 의한 하나되기“라고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총 10장으로 나누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학살”,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 “제국의 수탈 및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 “근대성의 위기”,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전쟁 위기”, “욕망의 과잉”, “정보화 사회의 모순”,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 등이다.
각 장의 주제들의 제목만 살펴봐도 전 인류 공통의 문제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은 우리가 공존해 가고자 한다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만 하는 것들로 지금 흘러가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반드시 그 댓가는 우리를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갈 우려가 충분한 것 들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문제에 있어 환경이 파괴되어온 것은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의 급증, 자분주의 체제, 제국주의와 세계화,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인간중심주의를 비롯한 근대성의 사유, 국가와 자본의 유착, 소비와 욕망 조장의 문화, 토건카르텔의 탐욕 등 원인은 다양하며, 이러한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식의 전환을 통한 개인의 각성과 사회변화를 종합해야 하고,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바뀌고 그 변화를 유지하려면 세상 또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우선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 근대화를 낳은 ‘폭력적 서열 제도’에 대해 처절하게 성찰하고 불일불이와 같은 생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여야 하고, 이 패러다임에 맞게 사회체제, 국가 체제, 세계 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좀더 근원적으로 능동적인, 곧 탈근대적인 대안은 불일불이의 패러다임 아래 엔트로피가 제로 상태인 순환시스템으로 개혁하는 것, 즉 너무도 강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 거의 모든 것을 순환 체재로 하여 엔트로피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생태 공동체의 진지를 곳곳에 구축하여 그 체제를 안으로부터 파괴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손가락 한 뼘도 안 되는 흙에 10억 마리 이상의 미생물이 살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의 호흡으로도 대기의 미생물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그 미생물들이 땅속의 미생물을 변화시키고, 그 미생물들이 생산하는 유기물질을 먹고 풀과 나무가 자라고, 그 숲에 따라 무수한 생명체가 나고 자라고 사라지며, 숲과 생명체들이 대지와 하늘을 변화시키고 이는 다시 나를 변화시킨다. 지구의 온 생명은 서로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서로 조건과 인과로 작용하고 의지한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의존하고 작용하며 서로를 만들어주는 상호의존성과 상호생성성의 관계 다발 속에 있다.』- 본문 중에서 - 우리 사회의 폭력은 개인을 넘어 국가나 집단, 종교에 의해 자행되고 심화되어 왔다.눈에 보이든 , 보이지 않든 수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으며, 이는 인간성의 문제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인간이 잔인한 폭력과 학살을 일소하는 출발점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내 마음의 중심이며, 그의 고통이 내 것처럼 아픔을 느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좀더 적극적인 평화를 위해서 구조적 폭력과 폭력을 낳은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는 동일성을 해체하고 눈부처-차이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되, 모든 장에서 비대칭적인 권력을 해체하는 실천을 하고 이 권력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와 권위에 저항해야 한다. 문화적 폭력과 재현의 폭력에 대해서는 담론투쟁과 헤게모니투쟁을 전개하고 구조적 폭력을 구성하는 모든 제도와 시스템,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여 이를 혁파하고 해방을 달성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 결국 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혁신을 가해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자연과 문명 간의 균형의 원리로 바꾸지 않으면 그 어느 대안도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변화를 주도해온 가장 유용한 이론이 바로 마르크시즘지만 마르크시즘도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인간중심주의, 기술력 과대평가, 환경인식 미비, 계급문제로의 환원 등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실천활동을 요구하고 있다. 『20세기는 한마디로 말하여 서로 지나치게 욕망을 확대하는 바람에 갈등과 전쟁을 낳은 시대였다. 지금 인류는 여러 가지로 위기에 있다. 이 위기의 근저에는 욕망의 확대재생산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욕망이 극단으로 확대재생산되는 바람에 ‘빈틈’은 사라지고 서로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절제 없는 욕망의 끝은 파멸이다. 더 이상 욕망을 확대한다면 지구 사회는 멸망을 맞는다. 욕망을 수용할 여분이 지구에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욕망을 확대하는 것보다 절제하는 데서 행복을 더 느끼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패러다임을, 사회체제와 제도를 전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 본문 중에서 - 마지막으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고 자본주의의 해체 없이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앞으로 50년 안에 이윤율의 저하, 재생에너지, 집단 지성과 공유경제, 지역 공동체와 협동조합 등 새로운 흐름과 대중의 운동에 의해 붕괴되고 새로운 세계가 들어설 것이며, 이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 거듭남과 깨달음,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는 적극적 자유(to freedom), 타자와 연대하여 그를 행복하게 하는 적극적 자유(for freedom)를 종합한 눈부처주체에 의한 화쟁의 세계 체제라는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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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인류 생존의 대안을 찾아? 간만에 인문학 도서에 빠져들었다. 사유하기 싫어, 혹은 게을러서 피했던 과제를 뒤늦게 떠앉고 설 명절을 그대로 고민 속에서 방황해야만 했다. 단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한 채. 840쪽이 주는 부담은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결국 용두사미격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못내 씁쓸함을 금할 길 없다. 시간을 내서라도 반드시 가감첨삭의 형식을 거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한다. 이도흠 교수는 거리의 인문학자, 좌파등등 여러 닉네임이 따라붙을 정도로 기존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범죄에 반기를 들고 만연한 부패, 타락, 만행, 반인류, 반문명, 반자연적 죄악과 소름에 정면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현 실태에 제동을 걸 대안으로 마르크시즘과 원효의 화쟁 사상을 끌어들인 저자의 탁월함에 우선 박수를 보낸다. 총10장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더라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테마가 없다. 인류 공멸 회피 대안으로 사회 생태론과 불일불이 연기론을 내세운 1장, 집단 학살, 폭력에 맞서 변동어이 눈부처 차이론을 제시한 2장, 욕망을 부추겨 인간성 타락의 원인이 된 효율성 추구 및 과도한 목표 요구에 따른 인간성 상실, 소외에 대항해 진속불이 눈부처 주체론을 3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모순 해결 방안으로 세계혁명론과 화쟁의 사회경제학과 눈부처 공동체론(화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 코뮌, 두레 공동체, 다산의 여전제, 렉토르스키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결합)을 4장에서, 과학기술 도구화, 상품화 대안으로 일심의 체용론, 과학기술 비판을 5장에서, 근대성의 총체적인 위기 탈출로 포스터모더니즘 비판 및 일언결언론(언어를 방편으로 이용해 궁극 진리에 이른 후에는 언어를 버리고 세계의 실체를 대할 것)을 6장, 분단의 모순과 심화, 나아가 동아시아 전쟁 위기론에 변증법적 통일론(남북 통일을 위한 최소합의, 평화협정 체결, 남북교류협력, 화쟁코리아, 남북국가연합, 낮은 단계 연방제, 완전통일국가등 7단계 제시) 및 화쟁의 원리와 동아시아 화쟁체제론(동아시아 평화헌법 규범 실천)을 대안으로 밝힌 7장, 욕망 과잉(절제, 패러다임 전환, 삶의 방식 전환을 통한)으로 인한 대안으로 유물론, 화쟁마음론을 8장, 정보화 사회의 모순과 대응해 디지털정치경제학 및 순이불순(어떤 대립이든 이런 대립과 다툼을 아우르고 궁극적 진리의 바다에 이르는 방편) 공유경제론(자본주의 해체 대안 마련)을 들고 나온 9장, 가상성과 재현 위기(담론, 말의 범람, 형식, 내용, 기표, 기의 분리에 의해)에 맞서 화엄현실론을 내세운 10장. 하나같이 시급한 사안이자 인류 공멸에서 벗어날 획기적이고 참신한 대책들이다. 유심론인 불교와 유물사관인 마르크시즘의 공통분모 찾기는 생뚱맞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가 극에 달해 인류 공멸의 우려를 낳고있는 현실에 비추어 일거에 해소할 대안으로 이도흠 교수가 제시한 10가지 목차는 다소 전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아주 세부적으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자본주의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끄집어낸 마르크스와 원효의 화쟁은 상이하면서도 공통분모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를 바탕으로 치유책을 담고 있다. 일례로 서양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반대다. 씨와 열매처럼, 물은 자신을 소멸시켜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는 흙 속에 구멍을 뚫어 물을 품는 원리다. 최치원은 이런 패러다임으로 삼림을 만들어 1천 여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이 더욱 맑게 흐르게 했다. 인간과 자연이 씨와 열매처럼 자신을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한다면 그 원리에 따라 사회를 재편하고 사회와 정치 시스템을 바꾸고 가치관을 혁신한다면 인간은 함양의 삼림처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P.98-99). 불교는 수행자에 의한 의정투쟁을 통해서 이상사회에 도달하려고 한 반면 마르크시즘은 노동자의 계급 투쟁에 의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P.104). 또한 도구와 기계를 사용하되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연의 개발과 엔트로피 발생을 최소화하면서 자연과 공존을 모색하는 삶, 곧 불교가 추구하는 소욕지족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P.119). 한편, 눈부처 차이란 개념이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이는 물론 그 형상이 부처의 모습과 닮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 눈부처는 상대방을 만나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눈을 마주치며 하나가 되고자 할 때만 보인다. 이는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나보다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 그 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눈부처는 타인 안의 부처이자 내 안의 부처다(P.173). 자본주의 해체 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되는 데 노동자 민중연대를 통해 세계혁명 성공시키기, 진정한 좌파정당 집권 및 민중이 주체 권력을 갖고 함께 생산, 정의롭게 분배하는 공화국 건설, 이윤율 극도 저하로 스스로 붕괴, 노나매기의 눈부처 공동체 건설, 자본주의 체제를 안으로부터 내파, 공유경제 활성화, 자본 잉여가치 착취, 자본축적, 확대재생산 불가능하게 만들기등. 지구촌 변화 방향은 양적발전 보다는 삶의 질 추구, GDP보단 국민의 행복지수에, 경쟁보단 협력, 개발보단 공존에 무게를 둔다. 결국 인류 공멸의 대안으로 불일불이, 변동어이, 눈부처 주체, 국제연합이 모든 국가권력을 넘어서는 권위, 권력을 갖고, 핵발전소 폐기, 재생에너지, 지역중심 에너지 체계로 전환, 굴뚝산업 축소, 농업생산, 정보산업 체제로 전환, 생산수단 공공화, 의료, 주택, 교육 무상, 조세혁명, 불평등 경제협정 폐기, 공유경제 매개, 자본주의 시장체제 코피티션 원리 적용, 금융, 교통, 정보통신 공공화, 사유재산 최소화, 상속 불허, 사회복지세 도입, 불로소득등 부동산 중과세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여 인간적이고 생태적, 이타적인 사회를 건설, 인간답게 살자는 취지에서 근본 대안 찾기에 나선 것이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이해의 폭을 넓힌 저자의 연구에 깊이 공감하는 바가 크다. 특히 일반화되기 어려운 분야에 발을 들여놓고 그 해답을 모색해 본 현실 감각에 또한 크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차제에 보다 심도있는 이해를 위해 재독을 필히 하게끔 만드는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으로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충분하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