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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박완서 선생님의 책이야 고르는데 어찌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이책이 눈에 띄어 내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의 책은 어떤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나의 마음을 늘 흔들어 놓곤 한다.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한것은 30년도 훨씬 지난 고등학교시절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책을 통해서다. 아마 달리기 시합(마라톤인가??)에서 꼴찌로 들어오는 아이를 통해 꼴찌에게도 1등에 못지않는 그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것이 어린마음에 큰 느낌으로 다가왔었던것 같다. 늘 꼴찌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던 고등학교 시절의 삶에서 많은 변화를 가지게 해준 책이었다. 그뒤로는 늘 박완서 선생님의 이야기는 늘 내곁에서 함께하곤 했다. 이책도 박완서 선생님의 새로운책이라 읽었지만 아쉽게도 이책은 2006년에 출간되었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의 증보개정판이다. 그래도 미발표된 원고 5편을 함께 수록했다니, 새로운 느낌의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쉬운건 이제는 박완서 선생님의 새로운 글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데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선생님의 책은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의 감동을 받을수 있어서 좋다.
이책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한 주간의 묵상의 글을 올린것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한것이다. 책은 크게 4파트로 나누어서 주제별로 정리해 놓았다. 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도 없는 문, 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순명의 아름다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이렇게 나누어서 각 파트별로 묵상의 글들을 배열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보면 사실 책의 순서는 별의미가 없음을 느낄수 있다. 어느부분 어느파트를 읽어도 글의 주제가 어긋나거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발견되지 않는다. 워낙 한편 한편 별도의 묵상거리이기 때문이리라. 그저 순서를 정한것은 나름 주제별로 나누어서 읽기 편함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고 생각이 든다. 이책은 천주교 신자인 선생님의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과의 대화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느 목사님이나 신부님의 말씀같이 미사여구를 사용한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이웃의 보통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대화와 일상의 모습을 참으로 편하게 읽혀진다. 비록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의 이야기인듯, 내이웃의 이야기인듯하게 글을 쓰는것이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는 늘 느끼는것이지만, 나의 이야기로 와 닿을수 있게 책을 읽게 한다. 한가지 아쉬운것 있다면 매 글의 말미에 언제 '서울주보'에 실린글인지 날짜 표기를 했으면 그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더 쉽게 느낄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내용이 20년이 지난 시점이라 현재의 시점에서 읽는게 아니라 글을 쓴 그때의 시점으로 읽는것이 내용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제목: 빈방
저자: 박완서
출판사: 열림원
출판일: 2016년 7월 10일 3판 1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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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책에 대한 뚜렷한 취향이 있다거나내 인생에 이 책만큼은, 혹은 이 작가만은 이라는 나만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없기에 언젠가책장 하나에 내가 그토록 염원했던 책만을 모아두는 것이 소망이기에 지금도 조금씩이나마 책을 읽고는 있다지만, 그중에서도 웬만해서는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계발서와 경제, 경영,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원채외고집이 강한터라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도 그는 그의 삶은, 나는 나의 삶을 이라는 생각에 그 안에 내용들을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경제/경영분야는 아직 아는 것이없기에 읽기 버거운 이유로 회피하고 있다면 종교에 관한 내용은 감히 그 분야에 대해서 무엇이라 왈가왈부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영역이기에 좀처럼손을 대지 않고 있다.
제가 예수에게 사로잡힌 건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대목에서였습니다.사로잡혔다고는 하나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위선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위선을 부렸다는 증거를 끝내 잡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통 사람, 병든 사람, 미천한 사람, 천대 받는 사람과 진정으로 더불어 계셨습니다.
제작년이었던가,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후 몇 달은 꽤나 열심히 성당을 나섰지만 그 이후에는 냉담하고 있는나로서는 여전히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식을 하고서는 그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히 움직이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잠시 그 안에서 쉬어가는사람처럼, 성당에 들러 미사를 드리고서는 조용히 홀로 나오는 그런 사람이기에 제대로 알지도 못할뿐더러종교라 함은 무언가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아마도박완서선생의 이 <빈방>이라는 책이 아니었다면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기반으로 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녀의 이야기라는 말에 용기를 가지고서는 이 책을 마주해본다.
예수를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 라는 말을 담대히 하는 그녀를 보면서 이토록 용기있는 발언이 있을수 있다니,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그득히 맴돈다. 제대로알지 못하기에, 혹은 그게 맞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을 때 조차도 종교라는 이름 하에 성서에 적힌그의 말씀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그러니까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따라야 할 것만 같은 무언의압박감에 그저 고개를 돌리고서는 아직은 아니야, 라는 생각으로 멀게만 느껴졌으나, 그녀는 반항과 같은 마음으로 어떻게든 성서에 말씀을 읽고서는 그를 반박하겠다며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읽기 시작한다. 나는 그저 외면하고 모른 채 돌아섰다면 그녀는 예수와의 정면 돌파로 이 안에 깨달음을 얻은 것을 보며 다르지않은 출발선에서 전혀 다른 도착지를 보여주는 나와 그녀의 모습에 겸허히 이 안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생명치고 귀중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을까마는 효도 관광과 가족 단위의 여행이 많아 어린이가 희생되었다는사실이 우리를 참담하게 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우너망의 소리는 하느님은 없다는말입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거죠.
뉴스를통해서 여전히 지구 상에 전쟁이며 기아, 학살 등의 참혹한 현실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찌하여그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아픔을 시간만이 드리우는 것인지,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이 슬픔과 분노를보며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대로 이렇게 내버려 두시기만 하시는 건지,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전재전능한 그가 있다면, 이상황을 어떻게든 종식시키거나, 아니 그 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셔야 하는 것을 아닐까, 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체 종교의 힘은 무엇에서 기반으로 하여 시작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종교에 대한 믿음을가질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기도 한다. 이모든 것을 그저 방관하고서는 바라만 그의 모습에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그의 존재를 남겨진 활자를통해서만 받아들여야 하기에 늘 그를 향한 내 신념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주님을향한 신념과 믿음이 흐려진다고 한다면 나보다는 그녀가 먼저였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이들을 먼저떠나 보내야만 했던 그녀의 가슴은 냉가슴을 넘어서 꽁꽁 얼어붙어 그를 향한 분노만이 남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그녀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반박을 위해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하지만 결국에 다시 그의 품 안에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나에게는 의문 덩어리인 그 시간을 지나온 그녀의 이야기는 생경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계로 접어드는 문을열어주고 있다.
그때 문득 이 문명의 이기로 가득 찬 도시가 문명 이전의 광야로 변한 것 같아 섬뜩해졋다. 서울 한복판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맹수만 으르렁거리는 불모의 광야나 다름없어 보이다니.
이안의 모든 이야기가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그녀의 부드러운 어조에도 나는 넘을 수 없는담을 앞에 둔 기분으로 막막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일상 속의 이야기들은 이 묵직한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샘물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이들의 동심을 무너뜨리면서도 그것이 더 큰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든가, 운전대 안에서 변모하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든가, 이전보다나은 삶을 위해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등의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긴 이야기들을 보며 묵직한 이야기를 넘어우리네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나에게이 책은 그저 한번 읽어서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랜만에 다운받았던 성서 어플을 보면서 그녀와 같이 조금씩 성경을 읽으며 상념에 잠길 즈음, 다시금 그녀와 함께책을 통해 대담을 나누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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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 empty 비어있다...비어있다라는 말은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빈 집, 빈 방처럼 무언가 채워져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빈 방]이라는 제목에서 비어있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방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에 비유해 본다면 비어있는 마음 즉 소유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다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지만 어렸을때 교회에서 쓰던 주보를 손으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주보'라는 것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 쓰는 식순을 알리는 종이지만 모임의 특성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근황을 알리거나 좋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소식지의 역할도 했었다. 토요일마다 모여서 이번주 주보에는 어떤 좋은 글을 넣을까 하고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도 하고 결정을 하면 손글씨를 이쁘게 쓰는 사람들이 지면을 나누어서 쓰는 일도 꽤 즐거운 일이였었는데 지금은 손글씨는 사라지고 다양한 폰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1996년부터 1998년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이다. 늦은 나이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작가는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서 공유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가 이 종류의 연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겁이 났다고 했다. 수많은 글을 써온 작가가 겁을 냈던 것은 이야기가 실리는 곳이 주보였기 때문이었다. 주보의 지면을 차지한다는 책임감이 너무나도 크게 여겨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글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안을 줄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자신의 글이 실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보의 지면이 정해져 있었기에 모든 글의 분량들이 비슷하다. 한장 내외의 짧은 글, 하지만 그 짧은 글을 통해서 느껴지는 여운은 꽤 길다. 모든 에세이들이 그러하듯이 소설보다는 조금은 더 긴 호흡으로 읽고 다시금 생각해서 내뱉어야만 한다. 그냥 휙 읽고 지나가는 글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경과 관련된 종교적인 의미가 강한 글들은 더욱 그러한 호흡을 늦춰서 읽게 해준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작가가 말씀을 묵상하고 성당주보에 글을 실었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글은 아니다. 묵상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고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글들이다. 더군다나 작가가 자신의 평범한 믿음을 토로하면서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 나는 너무나도 평범하다라는 것을 외치며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는 글들에서는 나도 똑같은데 하면서 절대공감을 외칠 수 있을것이다.
구원받고 싶으면 하느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참 마음도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렇게 쉽게 구원받을 방법이 있는 줄 알았으면 더 많은 죄를 지을 걸 그랬다는 간교한 생각도 든다.(85p) 누군가는 그랬다.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 줄은 알겠으나 자신이 놀 걸 다 놀아보고 할 것을 다해보고 나중에 죽기전에 믿는다고 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그 말이 맞기는 하다만 문제는 사람은 자신이 언제 죽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놀것을 다 놀아볼수 있겠으나 죽을날을 모르니 언제 회개하고 믿는다고 고백해야 할지 타이밍을 모른다는 것이 참으로 문제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조차도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장 1-14)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랬다. 임금이 베푼 잔치에 사람들이 오지 않자 진노한 임금은 누구든지 불러다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을 하지만 손님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다시 화를 낸다.
작가는 이장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예복을 차려입지 않을 수 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알아간다. '예복'이란 존재가 단지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초대에 응하고 잔치의 기쁜은 주인과 나누려는 최소한 예절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설교라는 것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딱 맞지 않는 경우도 많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자신이 직접 성경을 보면서 답을 찾거나 아니면 기도를 통해서 답을 구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그 말씀을 한 설교자를 찾아가서 답을 구하게 된다. 비슷한 말씀을 들었지만 어떤 방법도 하기 어렵다면 작가의 이 책을 보면서 답을 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속시원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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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박완서님께서 1996년부터 1998년 말까지 천주교 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글을 엮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천주교 신자라서 저자의 글이 더욱 반가웠고 읽고 싶었다.
"빈방이 많아 사는 게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 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책의 겉표지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 글귀를 읽었을 때 강한 울림을 받았었다. 점점 삭막해져가는 우리네 모습을 빈방에 빗대어서 표현한 이 글귀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남았다. 책에는 저자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참 많았고, 중간 마다 그림이 있어서 더욱 좋았다. 저자의 글 속에는 진실함이 느껴져서 좋다. 때론 직설적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고백과 성찰이 깃들어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글...그래서 꺼내기 부끄러웠던 모습까지 마치 기도와 고해성사를 하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라는 공감과 반성을 하면서 책을 읽어 나갔다.
가끔 그리스도인이지만 성경말씀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저자 역시 그런 마음들을 글에 옮겼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란 성경구절에서 군중에 둘러싸여 있던 예수님께서 어머니께 한 행동을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냉랭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더 크고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구세주로서 걸어가야 할 길에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 하신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글에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 일상생활에서 느낀 점들도 이야기하고 있다. 가장 부끄러운 고백이라고 밝히면서 축하해줘야 할 결혼식이 두 건이 있었는데, 한 건은 부잣집이고 한 건은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동시에 갈 수 없어서 마음은 하객도 별로 없을 것 같은 두 번째 결혼식을 생각했지만, 행동은 한껏 멋을 부리고 축의금도 과하게 준비해서 첫 번째 결혼식에 갔다고 한다. 물건 살 때도 백화점 슈퍼에서는 물건 값도 보지 않고 대충 장바구니에 담는데, 노점에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에게는 천원도 아까워서 깎으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해달라고 깊이 통회한다. 나또한 이 글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하게 행동한 적은 없는지를 반성하였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추어질수록 따뜻함이 필요한 계절이다. 내 주위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은 없는지 살펴봐야겠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바쁘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우리네 이웃들을 생각하고 따스함을 잃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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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소원은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고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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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은 40세의 나이에 등단하여 이책은 주님, 그 정도라면 뭐 하나라도 현세의 보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원통한 일이지만,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이책을 읽고 주님, 저의 임종의 자리에도 임하시어 저로 하여금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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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다소 늦은 마흔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게 된 고 박완서 작가님의 글. 이 책에 실린 글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님이여, 그 숲 을 떠나지 마오」와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의 개정증보판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성경 구절에 맞게 저자의 느낌과 나름의 깨달음을 정리해 놓은 것 같은데 천주교 신자가 아니 라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도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4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저의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누군가 설명을 하더라도 그 사실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제 성격때문에 꽤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녔어도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저희 집에 오셔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성경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1년 동안 신약성경을 서너 번 통독하고 말씀에 숨겨져 있던 속 뜻을 알게 되어 무척 신기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많았고,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이기적으로 사는 걸 많이 봤기에 교회에 대해서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 하는 중에도 목사님께 부정적으로 질문을 던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그 때마다 목사님께서 명쾌한 답을 주셨지만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 의심병이 도지는 겁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저보다 나이도 많고 신앙심도 깊은 박완서 작가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되니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내가 남의 귀인이 돼주지 않고 어떻게 길 떠난 내 자식이 귀인을 만나기 바라랴.' (p 93) 자유란 인간에게만 부여된 누릴 가치가 있는 존엄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책임이요, 운명이기도 하다. 세상을 왜 이렇게 부조리하게 만드셨냐고 하느님을 원망할 건 없다. 우리의 자유의사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차마 못 버리시고 인간의 영혼이 살아남기 위해 접붙여야 할 참생명의 나무로서 외아들까지 내놓으셨다. (p 210) ![]() 제가 꿈꾸는, 제게 합당한 부활은 저의 전체 중 가장 미소한 일부인 저의 좋은 점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를 잊지 않고 저를 향해 마음의 문을 늘 열고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들이 저를 향해 굳게 문 닫고 있다 해도 가끔 그들 사이로 돌아와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주 저를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슬플 때 제가 생각난다면 기쁨이 되고, 어려울 때 제가 생각난다면 힘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제 육신을 떠난 영혼에 그러한 자유를 주신다면 임종의 순간에도 결코 두렵지 않으리이다. (p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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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은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천주교 신문인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에 담긴 글들을 한데 모아놓은 책입니다.
박완서 작가는 천주교인으로서 특별한 봉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끼며 글로써 그것을 대신하려고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점차 이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님에 어려움을 느끼고 버거워서
여러 차례 그만두려고도 했었다고 합니다.
작가 자신은 이 일이 어렵다고 느꼈겠지만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빈방을 조금 더 일찍 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비록 이 글들이 성경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글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렇기에 약간의 종교적인 색채만 지나가면
이 글들은 수필에 가까운 일상적인 이야기로 가득차있습니다.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서 평화를 찾는 기분으로 읽어보았는데요.
마치 그녀가 아직도 이 세상에 있어 옆에서 "삶은 가끔 이런거야." 혹은
"네게도 이런 행복한 순간이 있었지?"라고 속삭여주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찌는듯한 더위속에서 오랜만에 만나본 편안하면서도 평화로운 느낌,
마치 그늘없는 언덕을 걷다가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작은 그늘을 만난듯하다고나 할까요?
그녀가 느즈막에 천주교를 만났을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싶기도했고
비록 이 글들로 인해 제가 갑자기 천주교 신자가 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오랜시간 이 글들로 평화를 얻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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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 그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이성이 가장 믿을만 하다는 '믿음'입니다. 누구나 어떤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나라에서 나고 자라며 비슷한 환경, 비슷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다른 믿음, 정반대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중에서도 하필 2천 년 전에 지구의 변방 한 점에 불과한 땅에서, 그것도 "삼십 대의 청청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예수라는 인물을 신으로 믿는 믿음은 어떻게 가지게 되는 걸까요?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로 이름이 높은 박완서 작가님도 그런 물음을 가지고 있었던가 봅니다. 누군가는 벼락이 친 것처럼 순간적으로, 도망갈 도리 없이 예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는데, 박완서 작가님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의심과 탐구 속에서, 저항과 번민 속에서, 따름과 실패 속에서 서서히 물들어갔다고 고백합니다. <빈방>은 "1996년부터 1998년 말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다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입니다(7). 2006년도에 초판되었고, 2016년 3판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자신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게 된 동기"를 여러 모양으로 고백하는데, 자신은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에 "뭐 이런 소리가 다 있나 싶은 저항감 때문에 예수의 언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게 서서히 신앙으로 발전한 경우"(43)랍니다. 예수를 본받을 만한 분이라 생각은 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주님을 영접할 용기를 낸 것은 "암울한 시대상을 향해 거침없이 외친 정의 구현 사제단의 참다운 용기에서 영향"(183-184)을 받은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이라 할 수 있는 한 분을 예수께 이끌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정의에 이끌렸고, 사랑에 매혹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의와 사랑은 박완서 작가님의 성품과 삶의 지향점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특히 권력과 부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관심과, 먹을 것을 나누는 일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분이 한평생 짊어진 고민, 뜨거운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빈방>은 그렇게 자의식 강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매혹 당하는 과정, 우레와 같은 충격이라기보다 갈증을 적셔주는 단비처럼 서서히 깊어지는 묵상, 영혼의 심지에 불을 당기는 불꽃 같은 갈등과 깨달음의 열매가 아름답게 녹아 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22)라고 고백하는 박완서 작가님은, 그래서인지 유독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에 날카롭게 반응합니다. 사실 그것은 박완서 작가 개인의 위선이 아니라, 종교인의 위선이며,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한 위선입니다. 그래서 <빈방>은 세례 요한의 설교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찔러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을 쏟게 만듭니다. "좋은 교인이란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닐까"(184). <빈방>은 분명 같은 믿음을 가진 독자들에게 더 쉽게, 더 깊게 와닿는 묵상집입니다. 그러나 구도자적 물음 안에서 고통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이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 만큼이나 사회를 꿰뚫는 통찰도 날카롭습니다. 성경적 깨달음이 사회적 통찰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날카로운 사회적 통찰이 성경을 읽어내는 깊이를 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이 영혼을 힘차게 힘들어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진실되고 따뜻한 고민, 통렬하면서도 겸손한 고백이 삶과, 신앙과, 이웃과, 오늘과, 나와, 나눔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책입니다. 기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자비심 없는 종교란 나쁜 정치 못지않게 사람을 억압할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도 해방의 소식을 도리어 억압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닐까요"(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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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님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썼다. 그리고 그 것을 갈무리하고, 미수록 원고 5편과 <노란집>의
일러스트를 그린 이철원 작가의 그림을 더한 것이 <빈방>이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조성모가 불러서 유명해졌던 복음성가
‘가시나무’가 떠올랐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라던 그 노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어려운 내용도 생각보다 많았고, 가끔은
‘소 귀에 경읽기’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책의 작가 박완서님 역시 처음부터 신실한 종이
아니었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백하지만 충실하게 담아냈다. 그래서 마냥 멀게만 느껴지는 책은 아니었다.
요한 9장 1-41절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길을 걷던 그녀는
하반신이 없는 맹인이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이천 년 전 주님의 제자가 가졌던 물음을 다시 떠올렸다. 심지어
그 맹인은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있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주님은 거기에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답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녀는 주머니에 있는
작은 것 조차 맹인과 나누지 못했다. 생각의 둑에 갇혀 몸이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주님이 말했던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라는 것은 아주 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그와 함께 기꺼이 행복하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의
책을 몇 권을 읽으면서, 내가 갖고 있던 그에 대한 감정은 ‘대단하다’였다. 마치 내가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선망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해 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완서님의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그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그녀는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을 말하던 ‘산상수훈’에서 나온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에도 그러고 싶지 않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럴때면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는 작가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곧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사실 종교에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는 나로서는, 이런 과정이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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