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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힘 <구원의 미술관>을 읽고
어느 우울한 젊은이가 미술관 구석에 걸린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이윽고 그림 속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그는 불현듯 깨닫고야 만다. 그 말 한마디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오래도록 자신을 둘러싼 어둠을 걷어내줄 빛이자 구원의 신호임을 말이다. 그의 이름은 '강상중', 재일 한국인(자이니치, 在日) 2세로 어려서부터 자기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대학원 유예중에 독일로 유학(본인 스스로가 그때를 회상하면서 '망명 생활'과도 같았다고 밝혔으니 '유배'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을 떠났다. 사십여 년 전, 그가 독일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이 다름 아닌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이다. 그동안 여러 미술 에세이를 읽으면서 알게 된 그림이지만, 개인의 삶을 뒤흔들 정도로 큰 힘을 가졌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작품에 뒤러의 오른손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은 나에게는 그 손이 그에게 내미는 구원의 손길처럼 보였다. 그때를 회상하며 그 역시 손에 펜을 쥐고 갖가지 이유로 삶을 힘겨워하는 현대인에게 위로를 넘어 구원의 의미를 전하는 작품과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를 <구원의 미술관>이라는 책에 담아냈다. 독자도 두 손으로 이 책을 들고서 저자의 안내에 따라 방구석 미술관을 거닐기로 했다. 젊은 시절에 스스로를 '모라토리엄 인간'(지불 유예된 듯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그를 다시 일으킨 화두가 바로 책의 일본어 원제이기도 한, "당신은 누구야? 나는 여기 있어"다. 이렇게 말을 걸어온 작품에는 앞서 언급한 뒤러의 「자화상」만 있는 게 아니다. 스페인의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앉아 있는 궁정 광대의 초상」에 그려진 난쟁이,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와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가 각각 그린 「올랭피아」의 창부와 「잊히지 않는 사람(낯선 여인의 초상)」의 여인이 그러하다. 흥미롭게도 모두가 초상화인데, 화폭에 담긴 인물을 바라보면 마치 거울에 견자(見者)의 다양한 감정들을 비춰보는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초상화(肖像畵)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므로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래서인지 미술 문외한을 자처하는 독자도 그림을 보고 난 뒤 직관적으로 각자의 감상을 표현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런데 우리말 초상화에서 'ㅗ'를 'ㅜ'로 바꾸면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 추상화(抽象畵)는 도대체 무엇을 표현한 그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저자 또한 이러한 점을 모르지 않으나, 자신과 주변 환경 간의 괴리에서 비롯된 정체성 문제 때문에 '불가해(不可解)'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추상화가 도움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20세기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온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회 질서가 무너지면서 추상주의가 등장했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은 대상과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알 수 없어서, 말 그대로 '불가해'해서 구체적으로는 그릴 수 없기에 추상적으로 그리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추상화 하면 가장 먼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이(라는 이름만) 떠오르는데, 두 화가도 동시대인으로서 같은 이유로 추상화를 그렸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책에는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라는 그룹에서 활동한 파울 클레(1879-1940)의 「추억의 양탄자」와 유대인으로서 세계대전을 몸소 겪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시그램 벽화」가 소개되어 있다. 두 작품을 실제로 본 적 있는 저자의 감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화뿐 아니라 다른 예술 작품을 어떠한 태도로 대하면 좋을지에 대한 실마리가 되어준다. 클레와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 "캔버스에 그려진 무엇이라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믿고 거기에 스스로를 내맡겼을 때, 그 행위로 인해 자기 안에서는 자신의 원형 같은 것이 나타난다. 이윽고 마음이 채워지고 때로는 마치 갓난아기 때로 돌아간 듯 평온해진다.(122쪽)"는 것이다. 이러한 관객의 마음가짐과 더불어 화가에게도 초상화든 추상화든 어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받아들임'의 자세가 요구된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초상화 그리기가 시작되고, 부조리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화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수용해야만 추상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책의 부제 '그리고 받아들이는 힘에 관하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동서양의 도예가 - 오스트리아 도예가 루시 리(1902-1995)와 독일 도예가 한스 코퍼(1920-1981)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심수관 - 를 소환하여 유태인 혹은 조선인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을 받아들이고 한평생 도예에 헌신함으로써 마침내 예술적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도예'라는 예술이 그들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표현력을 오롯이 반영할 수 있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도(자)기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뒤 작가의 손을 떠나 가마 속으로 들어가면 전적으로 운명과도 같은 불의 힘에 따라 달라질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받아들임은 체념이 아닌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이며, 비록 깨어지더라도 다시 도전하여 기어코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도예가와 작품의 관계에서 삶과 예술이 하나되는 경지를 엿본 것만 같아 왠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이 책의 출간 시기에 눈길이 멈춘다. 2011년 여름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일본 사회가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던 때가 아닌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일 힘도, 앞으로 살아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저자는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과 성찰을 담은 책 한 권을 뒤러의 「자화상」이 그러했듯 독자들의 손 닿는 곳에 놓아둔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의 손짓이자 빛이 되어주었을 텐데,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많은 게 불확실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구원의 미술관>에 들러 나와 당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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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의 미술관 강상중 저 /노수경역 ?사계절 을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여러 작품을 쉽게 설명해주면서 본인의 이야기나 감상을 함께 써주고 있어서 편하게 읽기 좋았어요 유명한 작품들도 있고 미처 몰랐던 작품도 있고 그림이 함께 있어 더 좋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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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 대학을 졸업하고 톰이 아프기 전, 나는 ((뉴요커))에 지원했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게도 합격하게 되었다. 단순 신입 이상의 직급으로 채용되었기에 나는 마치 빅 리그로 수직 상승할 공식 허가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는 뉴요커였다. 대형 잡지사의 직원으로 엄청난 미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사랑했던 두 살 많은 형이 2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걸 내려놓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 된다. 그렇게 10년 세월을 산다.
나는 그의 미술 작품과 작가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놀랐다.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예술 작품들은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고, 단지 그의 경비원으로서의 삶과 그만의 어떤 감성이 너무 좋아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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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제목에 끌려서 구매했던 책으로 기억합니다. 읽으려고 확인해 봤을 때 미술관련 전공이 아니셔서 좀 의외기는 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아닌가 싶네요. 전문적인 미술사나 테크닉적인 관점을 읽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추천드리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요.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예술작품에 관해서라면 종종 꿈보다 해몽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기는 한데 저자가 제시하는 관점이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구나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