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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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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자가 한 한국인 목사에게 물었다. ‘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사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그러자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다.‘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너무 바쁘기 때문이지요.’ -Spencer, 「Korea and Christianity」”   2007년 7월 19일, 샘물교회의 23명 선교단은 선교를 위해 ‘여행 제한 국가’였던 ‘아프간’을 방문한다. 그러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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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자가 한 한국인 목사에게 물었다.
‘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사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너무 바쁘기 때문이지요.’ -Spencer, 「Korea and Christianity」”

 

2007년 7월 19일, 샘물교회의 23명 선교단은 선교를 위해 ‘여행 제한 국가’였던 ‘아프간’을 방문한다. 그러나 이들은 탈레반 무장 세력에 피랍돼 2명이 살해되고 나머지 21명이 42일 만에 귀국하고 만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으며 정부 또한 한동안 얼마만큼의 몸값을 지불했다는 염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샘물교회 피랍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큰 사고를 터트려 국민들에게 염려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선교단 파견을 중단 없이 지속할 것이라고 했으며, 실제로 2008년 4월에는 ‘여행 자제 국가’인 네팔에 선교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이 귀국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국민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은 사실,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해, 즉 이교도를 개종시키지 못해 죄송하다.”는 의도로 말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사실 고대 그리스·로마와 그리고 지구상 대부분의 초기 문명사회는, 자기가 믿지 않는 신이라도 남이 믿는 신의 존재를 허용하는 다신교의 세계였다. 반면 일신교는 자기가 믿는 것이 옳은 종교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기독교의 배타성과 비관용성은 어쩌면 일신교로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히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치명적으로 오해했고 오도해왔다. 제문을 읽을 때 들리라는 듯이 크게 찬송가를 부르는 작태나, 남편 제사를 지내는 어머니 옆에서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아들의 모습은 더 이상 충격적인 모습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추석이라는 즐거운 명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기독교인들이 정해 준 날에 추수감사절을 지킬 만큼 어리석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독교와 교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었으며, 세계와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독재자로 만든 것일까. 아니 니체 식으로 과연 ‘어떠한 것이 기독교를 이리도 독단적이며 배타적으로 만든 것일까?’ 포이어바흐의 얘기를 들어보자.

 

가뜩이나 위대한 신의 다양한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분명 ‘창조’일 것이다. 창조가 있은 연유에야 비로소 인간도 있을 수 있고, 인간에게 신의 계명을 전할 수 있으며, 모든 창조물들이 다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 찬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창조가 위대하지 않을 소냐.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신은 이 모든 것을 ‘무’(無)로부터 이끌어낸다. 창조란 신의 말씀이 표현된 것인데, 이것을 말 그대로 무로부터 생긴 것이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그리고 ‘말씀’은 무에서 나온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히브리, 11;3)”
무로부터의 창조는 곧 ‘기적’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폐허에서 재건한 독일을 두고 사람들이 ‘라인강의 기적’이라고들 말하지 않던가. 그만큼 무에서의 창조는 힘들단 말이다. 약간의 재능에 자재만 있으면 누구나 그럭저럭 집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없이 집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결국 기적과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나 기적은 자연의 모든 법칙을 폐기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 가나안의 기적으로 불리는 예수의 첫 기적인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재료가 물속에 있다면 포도주의 생산은 어떤 놀라운 행위가 아닌 자연적인 행위로서, 이것이 우리의 평범한 인생사이다. 그러나 물에는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없다. 따라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경우가 자주 있다면, 아니 한번이라도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과 그간의 경험들을 송두리째 뒤집는, 다시 말해 ‘반자연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온몸이 썩어가는 것, 또는 빵5개 물고기2마리로는 2명이 굶주림을 면하기에도 부족하다거나, 사람은 배를 타지 않는 한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 모두 지극히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법칙이다. 정신이 온전한 이상 ‘내 어머니는 처녀다!’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에게 ‘넌 왜 물 위를 못 걷니?’ 혹은 ‘백 원으로 오천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성경자체는 자연에 모순된다. 그것은 인간을 세계 전체의 연관에서 떼어놓을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적 현상을 신의 목적에 종속시키므로 엄청나게 이기적인 생각이다. 성경 말씀에 충실하자면 자연은 존재 자체가 허무다. 제가 있어야 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가도, 신의 말 몇 마디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폐기하고 신의 목적에 충실 하러 가야되기 때문이다.
또한 무에서의 창조, 기적은 결코 철학적인 탐구 대상이 될 수 없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기적은 사유나 이론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과의 모든 연결가능성을 뿌리째 절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는 것보다 더 신앙과 어긋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이성이 증거를 제공할 때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p.480, Bernardus 재인용)”
그렇다면 기독교의 독단성은 기적과 명령에서 나오는 셈이다. 우리는 ‘까라면 까야 되는’ 명령받는 상황 대신, 스스로 판단하고 판단한 것을 비판하며 미래를 설계할 때 한층 더 성숙해진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성장을 부정한다. 단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대신, 자의적이고 근거 없는 억지나 궤변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신 목적이란 미명아래 모든 것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기독교적 독단성은 여기서 유래한다.

 

아울러 기독교 그리고  다른 독실한 일신교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신이나 그리스도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인간이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랑은 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이며 따라서 죄인 것이다. 신은 물론 인간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적인 사랑으로서 이들이 기독교도일 때 한에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도는 기독교도만을 사랑해야 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경우 ‘잠재적인’ 기독교도로서만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 사이의 자연스러운 유대를 없애버리는 대신, 신앙 안에서의 강제적인 통일을 중요시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또는 믿지 않는 사람을 저주한다. 왜냐? 신과 반대되는 것은 신과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선한 것이며,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악이라는 편협한 논리. 그러기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에 동화될 가능성이 없을 경우 그리스도의 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이면에는 사랑은커녕, 악의로 똘똘 뭉쳐진 증오심만이 가득하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독기어린 생각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랑 놀면 큰일 난다. “불신자들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의로움과 불법이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신자와 불신자가 어떻게 한몫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떻게 뜻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2고린, 16;14-17)” 따로 노는 것도 서러운데 이교도들은 저주받아야 한다. “우리가 전에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9)” 저주도 모자라 이들은 지옥의 고통까지도 겪을 것이다. “그때에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오시어,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그분 권능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 영원한 파멸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2데살, 1;8-9)” 점잖은 요한도 비슷하게 말한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기독교가 만인 앞에 군림하는 것에 더불어 이들의 신앙은 당파적이다. 세상에는 아군 아니면 적군만 존재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편, 그렇지 않는 개종시켜야만 하는 나뿐 놈들. 신앙은 본질적으로 관용을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애초에 중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을 설파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지옥의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에게 천국은 신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므로, 이교도를 위한 지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오죽했으면 고상한 품격을 지닌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천국에 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지옥에서 벌어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광경을 바라보는 특권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비신앙인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기독교인의 태도는, 기독교가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나가는데 일조한다.

 

폭력에 가까운 기독교적 행태에도 모자라 기독교는 더욱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인간 스스로에 대한 평가절하가 그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탄탈로스(Tantalos)를 아는가. 그는 신들에게 자기 아들 펠롭스를 재료로 한 음식을 접대함으로써 지하세계에 감금된 자이다. 아들을 살해함으로서 신의 영역으로 상승하고자 했기에 신들에게 찍한 것이다. 성경에도 아들살해라는 비정한 부정(父情)이 나온다.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인데, 그 동기는 그리스 신화와 상이하다. 일찍이 종교학자 엘리아데(Eliade)가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 해석한 아브라함의 아들 살해는, 신에게 자신의 자식을 바침으로서 자신의 상승 욕구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음을 그려낸다. 그리스 신화가 일종의 ‘상승 주의적 가학성’을 대변한다면, 성경은 ‘하강 주의적 피학성’의 입장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이외에도 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인간비하는 성경의 단골소재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기독교적 가치관을 너무나도 증오하여, 아니 모든 초월적이고 노예적인 가치를 증오하여, 일생에 걸쳐 그것들을 비판한 철학자 니체. 그는 이러한 인간의 평가절하를 매우 우려하여, 가치상실이 아닌 가치창조를 위해 투쟁한다. 니체는 어떤 인간이 자기의 본능을 상실할 때,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선택하고 선호할 때 타락(데카당스)한다고 말하며 비판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기독교란 “삶의 최고 본능을 경멸하라고 가르쳤다는 것 ; 육체를 모욕하기 위해서 ‘영혼’과 ‘정신’을 날조해냈다는 것 ; 삶의 전제인 성(性)에서 어떤 불결한 것을 느끼도록 가르쳤다는 것 ;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 불가결한 이기심에서 악의 원칙을 찾는 것 ; 그 반대로 ‘무사’와 무게중심의 상실과 ‘탈개인화’와 ‘이웃사랑’이라는 하강과 반본능의 전형적 징후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아니 가치 그 자체를 본다는 것!「이 사람을 보라」”이다.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으며 힘의 감정에 정통해 있는 사람은 기독교적 가치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자들은 기독교적 처방에 목말라 한다. 하지만 ‘이웃사랑’이건 ‘동정’이건 겉을 치장했든 간에, 기독교는 인간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독약일 뿐이다. 자살로 이끄는 삶! “그리스도교는 그 성립 당시에 자살을 무섭도록 강하게 요구하는 것을 힘의 지렛대로 삼았다. 그리스도교는 두 가지 형태의 자살만을 허용하여 이를 최고의 존엄과 희망으로 변형시키고, 그 외의 모든 자살은 무섭게 금지했다. 순교와 완만한 자살인 금욕만이 허용되었다.「즐거운 학문」”
신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빈곤하게 되어야 했다. 신은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했다. 위대한 신이 어떻게 감히 인간과 동격이 될 수 있으랴. 유일신이 위대해지고 찬미되는 것은 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신이 커지는 것만큼 인간이 작아질 때에 한에서이다. 이렇듯 기독교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것에 모자라, 위대한 인간마저도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처음에 밝혔듯이 대부분의 인류는 모든 곳에서 신을 발견해냈다. 세계를 향해 내던져진듯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것들을 신격화하여 숭배하게 만든 것이다. 최초의 신앙심은 말 그대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앙인 셈이다. “최초의 복음, 가장 순수하고 어떤 사제의 기만을 통해서도 왜곡되지 않았던 인간 최초의 종교적 원본은 감성이다. 또는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감성 자체가 최초의 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종교의 본질에 대아여』”
그러나 유일신이 등장함으로서 예전의 신‘들’은 살해당한다. 마치 언제 그랬다는 듯 이젠 유일신의 영광만이 도처에 존재한다. 헌데 그들을 살해한 것은 피가 낭자한 난도질에 의해서도, 오금저리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에 의해서도 아닌, 바로 ‘웃음’에 의해서이다. 진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알려준 것이다.
“이미 한물간 저 신들은 오래 전에 최후를 마쳤다. 진정 나무랄 데 없고 즐거운 신들의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저들이 황혼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너무 웃다가 그만 죽고만 것이다! 이 일은 더없이 신성모독적인 말, 즉 ‘신은 유일하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말이 어떤 신의 입에서 나왔을 때 일어났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신들을 살해한 무기가 다름 아닌 웃음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신이 빼앗아간 인간을 되찾는 것은, 빼앗긴 웃음을 되찾는다는 것과 같다. 그만큼 쉽다. 이미 한번 ‘신들’을 살해한 무기를 이제는 우리가 ‘유일신’을 향해 사용하자는 말이다.
세상은 정말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번 웃기, 동일성을 반복하는 찌푸림 대신 차이를 향유하며 한번 웃기, 변하지 않는 저주대신 모든 변화에 감사하며 한번 웃기 등. 하늘에 빼앗긴 우리의 삶을 되찾는 다는 것, 그것은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전지·전능·전선’의 신 대신, 천진난만한 웃음을 통해 가능하리라.


 



YES마니아 : 로얄 a*****e 2008.07.27. 신고 공감 1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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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인간이 신이며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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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태극기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담임목사의 카톡을 받으며 이건 아닌거 같다는 생각으로 찾은 책이다.포이어바흐의 당시 이책은 이후 철학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마르크스 유물론에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하니 더욱 기대기대하며 책장 넘겼다.처음엔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무슨 말인지 한줄읽고 다시 앞줄 다시 읽고. 지금껏 접한 책 중 단연 탑이다.옮기신 강대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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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태극기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담임목사의 카톡을 받으며 이건 아닌거 같다는 생각으로 찾은 책이다.

포이어바흐의 당시 이책은 이후 철학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마르크스 유물론에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하니 더욱 기대기대하며 책장 넘겼다.

처음엔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무슨 말인지 한줄읽고 다시 앞줄 다시 읽고. 지금껏 접한 책 중 단연 탑이다.
옮기신 강대석 교수는 폭풍처럼 몰아친 책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강하게 와닿아서 , 그래서 순식간에 읽어내려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독해가 않되어서 읽다가 강대석 교수님께 따지고 싶었다. 쉽게 번역해도 되지 않았냐며.... 원어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는 한 쉽게 번역하였다 하니 뭐 어쩌겠나.

한장한장 읽어가며 나의 뇌가 독해력이 늘었는지 중간부터는 적응이 된다. 속도가 붙어 2주 걸렸다.

책은 종교비판서 이면서 철학비판서 이기도 하다.
인간본질에 다가가지 않는다면 종교도 철학도 아니라 한다. 당시 시대 사회상에 비춰보면 정말 용기있는 주장이고 논리였을것이다.

이책은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도,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서도, 기독교를 알기 위해 꼭 1독을 권한다.
첫장부터 버거울 정도겠지만 읽다보면 바흐선생 말투에 빠져들어 쉽게 읽힐것이다.

종교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해방!
휴머니즘!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200년 외침이다.

오늘날 발전소노동자와 지하철 노동자의 죽음을 외면하고 트렌스젠드 숙명여대 등록을 포기하게 사회적폭력을 행사하며 코로나를 하나님이 벌주신다고 외치며
범죄(강간 폭행)를 저질러는 목사에 대한 기독교전체의 사회적지탄을 평신도들의 기도가 부족해서다라고 떠들어대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큰 일침이리라.


 


m*****1 2020.03.0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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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궁금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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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기독교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 같지만,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자체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종교를 믿는가?' 등등. 포이어 바흐는 이 책을 통해 종교의 본질과 근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이 종교/신에 대해 다루면서도 관조적(?) 태도를 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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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기독교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 같지만,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자체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종교를 믿는가?' 등등.

포이어 바흐는 이 책을 통해 종교의 본질과 근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이 종교/신에 대해 다루면서도 관조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 

비슷한 주제의 베스트셀러,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읽는 내내 작가의 종교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 강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반대로 그에 대항하여 나온 「도킨스의 신」은 기독교 공동체의 시각이 짙게 깔려있다고 느꼈었는데.

 

포이어 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어떤 관점도 섣불리 선택하지 않고 깊이 있게 종교에 대해 다룬다.

신학적이기보다, 철학적인 책이라고 느꼈다. 

 

포이어 바흐(or 포이에르 바허) (Ludwig Feuerbach, 1804-1872)는 2년 동안 헤겔과 직접 같이 공부한 헤겔의 제자다. 베를린에 도착한 즉시 헤겔의 철학에 끌렸던 포이어 바흐. 그는 1828년 헤겔 밑에서 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헤겔 철학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점차 헤겔의 주장에서 멀어져 '인간학으로서의 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 포이어 바흐.

 

이런 포이어 바흐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의 본질」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포이어 바흐가 종교의 본질을 어떻게 분석했는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전 스승, 헤겔의 신학을 어떻게 뒤집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포이어 바흐라는 학자에 관심이 없더라도, 종교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본래 포이어 바흐가 이 책의 제목을 「네 자신을 알라」 로 결정하려 했다는 일화는, 종교의 본질이 다름 아닌 '인류의 소외된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는 그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신이 궁금한 사람, 자신의 종교 생활을 성찰하고 싶은 사람 등…

'종교가 궁금한 사람'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p******k 2022.05.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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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속에 숨겨진 ‘인간‘을 발견하다.
"기독교 속에 숨겨진 ‘인간‘을 발견하다." 내용보기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이다.    내가 포이어바흐를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와 관련된 책을 읽었을 때였다.  과거 마르크스는 젊었을 때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는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포이어바흐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여기까지였고,
"기독교 속에 숨겨진 ‘인간‘을 발견하다." 내용보기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이다. 

 

내가 포이어바흐를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와 관련된 책을 읽었을 때였다. 

과거 마르크스는 젊었을 때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는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포이어바흐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여기까지였고, 실제로 그의 저작을 읽지는 못했다. 솔직히 나는 우리나라에 포이어바흐의 책이 출판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는 포이어바흐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 철학이나 유물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 사이에서일 뿐, 포이어바흐가 누구인지,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책을 썼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 또한 그러한 일반인 중 한 명이었기에 포이어바흐에 대해 알고자 하는 바람도 식어갈 뻔했다. 

하지만 한길사에서 출판한 '기독교의 본질'과 '종교의 본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마음도 잠시 나는 이번에야말로 포이어바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먼저 사서 읽어보았다. 

 

그렇게 읽어 본 '기독교의 본질'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사실은 예수와 같은 신의 존재를 위한 종교라기보다는 자기 자신, 즉 인간의 본질을 대표하는 종교이며,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을 무시하고 오직 신만을 추켜세워 인간을 소외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리들을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하나하나 따지며 기독교가 결코 추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이 종교가 아니었음을 간파한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성을 부인하는 모습은 자칫 무신론자처럼 보이지만 포이어바흐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 내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 다른 종교들과 달리 감성적이고 사랑이 있는 기독교의 본모습을 보여주며 진정한 기독교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인간보다 신을 우선시하고 숭배하는 일반 기독교나 신학자들과 달리(모든 기독교나 신학자가 그런 것은 아님) 포이어바흐는 기독교 속에서 인간 사랑을 발견했고, 신보다는 인간을 중요시하는 휴머니즘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 어렸을 적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던 내게 그때 당시 느꼈던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을 어느 정도 속 시원히 알려준 것 같았다. 

뭣도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왜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을 보고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왜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라는 것을 하는지, 왜 다른 기타 종교보다 기독교에 열광하는지 등등이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포이어바흐의 책을 읽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결론을 내려보자면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그동안 일반인들 사이에서 신비로운 종교로서 알려진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폭로하는 책이며, 기독교도 결국에는 인간의 종교이며 인간을 위한 종교임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인간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것에서 인간적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포이어바흐의 분석력은 마찬가지로 우리 눈으로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자본'과 '노동력' 속에서 인간적 의미 - 인간 착취를 발견한 마르크스의 분석력과 매우 비슷하다)

 

비록 일반인들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일 수도 있으나 기독교나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마르크스 철학과 유물론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해 본다!

YES마니아 : 로얄 v*****7 2021.07.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 내용보기
우리가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해왔으며 그 교리가 어떤 동기에서 만들어졌는가를 인간을 중심에 두고 파악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다.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 문제뿐만아니라 철학문제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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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해왔으며 그 교리가 어떤 동기에서 만들어졌는가를 인간을 중심에 두고 파악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다.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 문제뿐만아니라 철학문제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s*******i 2017.01.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