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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오카 마리/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현암사/2016.6.30.
요즘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사위시대라 할 만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평등이란 사상은 진보주의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페미니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불과 5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는 저자 오카 마리가 1995년부터 5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써온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녀는 현재 교토대학교 인간, 환경연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된 관심영역은 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등이며, 지은 책으로 <기억서사>, <대추야자나무 그늘에서-제3세계 페미니즘과 문학의 힘>, <아랍, 기도로서의 문학> 등이 있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는 서양 선진 공업국 페미니즘이 자신들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제3세계의 베일이나 ‘여성성기 할례’를 객체화함으로써 제3세계 자체를 송두리째 뒤처진 것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가담해버리는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같은 여성’이라고 말하면서 ‘다양’이라는 ‘특권’의 방패에 보호받고 있는 ‘선진국의 여성’이, 또 한편의 ‘후진국의 억압받고 특권이 없는 여성’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 있다. “나는 여성 할례와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 그것을 아프리카나 아랍 여러 나라들의 여성만이 이상하고 야만적인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로 삼는, 구미 여성들의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과 선진국 및 발전도상국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에는 전적으로 반대한다.(p.68)”이와 같이 저자는 특정한 관습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 나아가 세계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자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3세계’는 북반구 선진 공업국이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의 가난한 나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오카 마리의 ‘제3세계’는 이 범위를 넘어선다. ‘제3세계’란 백인이 아닌 유색인인, 피식민자, 소수자, 프롤레타리아 등을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제3세계’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수식어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미니즘’이 보편화 되고 특권화 된 서양의 페미니즘일 뿐이기 때문에 ‘제3세계 페미니즘’이란 서양 페미니즘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오카 마리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 오카 마리가 아랍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들이나 한국의 위안부 여성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p.330)” 그래서 오카 마리는 ‘같은 여성’이라거나 ‘자매애’ 같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카 마리는 제3세계 여성들이 언제나 자신을 표현해왔지만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이야기나 노래, 푸념이나 중얼거림 등의 언어적 형태 외에도 한숨이나 그림과 춤, 혹은 입술 색깔과 요리 등과 같은 형태로 다양하게 자신들을 표현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한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서양적 가치 아래 그녀들을 일방적으로 표현한다. 오카마리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그녀들의 말을 횡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카마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들의 말과 온갖 표현을 알아듣는 진정한 귀라고 말한다. “그녀들의 진정한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은 물론 그녀들을 빈곤으로 내모는 세계적인 착취 구조 등도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p.331)”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코르작 선생>(1990, 폴란드, 서독, 프랑스 합작)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맞서 정신적으로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 역시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폴란드인 코르작의 ‘보편적 인류애’를 묘사하면서 코르작의 정신을 이스라엘 국기 아래 찬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폭력적 건설로 몇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조국을 빼앗기게 된 사실에 대한 시점을 결락시켰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보편적 인류애’라는 시야의 바깥에 놓이게 된 사정을 의도치 않게 드러내버렸다.(p.58)” 영화는 얄궂게도, 코르작의 정신을 배반하여 팔레스타인 혹은 중동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에 이바지 하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피해자라는 사실로 자신의 가해성을 상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조국을 빼앗은 이스라엘의 가해성은 600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고 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의해 상쇄되는 것일까? 실제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점령 정책에 대한 비판을, 그 내실을 불문하고 반유대주의라고 거꾸로 비판해왔다.
‘서양페미니즘’은 억압받는 여성의 주체성 회복을 늘 문제 삼으면서도, 민족적 전통이나 이슬람에 주체적으로 동일화하는 아랍여성, 또는 무슬림 여성이 서양이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성에 의문을 표명하면 ‘원리주의자’, ‘광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 “워커의 <기쁨의 비밀>도 아프리카 여성의 표상을 둘러싼 그 근원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기 수술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는 것 아닐까. 하지만 <기쁨의 비밀>을 그렇게만 본다면, 이 작품은 결국 성기 수술의 ‘야만성’을 호소하는 단순한 프로파간다적 텍스트에 지나지 않게 된다.(p.111)” 소말리아 여성 아만이 구술한 파란만장한 반생을 엮은 <벌거벗은 아만>을 읽으면 더욱 명백해진다. 아만의 시선에 포착된 소말리아 여성들의 모습은 워커의 텍스트<기쁨의 비밀>에서 그려지는 아프리카 여성들과 확연히 다르다. 생명력 넘치는 아만의 말이 실감나는 것은 아만의 삶의 일부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워커의 텍스트는 부권제도에서 희생자인 여성들의 삶의 세부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14세 때 나이 많은 신랑과 결혼하기 싫어 가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슈퍼모델이 된 <사말의 여성 디리>의 저자 와리스 디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매일 저 자신이 아프리카인이라는 것을 신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매일 그렇습니다. 저 자신이 소말리아인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우리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할례를 제외하면 저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그 환경을 다른 누구와도 절대로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p.119)”
변영주 감독의 영화 <낮은 목소리> 속에서 ‘위안부’였던 여성들은 틀림없이 일본을, 일본인을 고발하고 있다. 매주 빠짐없이 열리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항의 행동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녀들은 일본과 이 범죄의 책임자 그리고 천황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천황’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을 지닌 일본판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의 여성들이 조선이나 아시아 여성-타자인 여성들-은 동정하지만 나라를 위해 싸운 자기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침략자나 강간마라고 부르면서 폄하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국가에 대한 동일화와 노골적인 혈연주의를 나는 단연코 거부한다.(p.213)” 이렇게 저자는 역사의식 없이 소아적인 고집에 연연하는 국수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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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은 전짓불 앞에서의 '말하기' 공포를 다룬다. 6·25가 터지고 나서 마을에 경찰대와 공비가 찾아 들어온다. 한밤중 전짓불을 들이대고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채 대답을 해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은 채 진술의 강요를 당하는 공포. 이때의 말하기는 폭력의 기저 안에서 세계의 단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말하기이다. 소설의 세계는 자유로운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를 표현한다. 말과 언어, 글쓰기가 과잉 생산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억압과 강요는 없다. 자유를 넘어선 방종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글쓰기의 통로는 쉬워졌다. 전짓불 앞에서의 공포는 사라졌지만 무참히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내상이 깊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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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오카 마리/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현암사/2016.6.30. sanbaram 요즘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사위시대라 할 만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평등이란 사상은 진보주의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페미니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불과 5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는 저자 오카 마리가 1995년부터 5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써온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녀는 현재 교토대학교 인간, 환경연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된 관심영역은 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등이며, 지은 책으로 <기억서사>, <대추야자나무 그늘에서-제3세계 페미니즘과 문학의 힘>, <아랍, 기도로서의 문학> 등이 있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는 서양 선진 공업국 페미니즘이 자신들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제3세계의 베일이나 ‘여성성기 할례’를 객체화함으로써 제3세계 자체를 송두리째 뒤처진 것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가담해버리는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같은 여성’이라고 말하면서 ‘다양’이라는 ‘특권’의 방패에 보호받고 있는 ‘선진국의 여성’이, 또 한편의 ‘후진국의 억압받고 특권이 없는 여성’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 있다. “나는 여성 할례와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 그것을 아프리카나 아랍 여러 나라들의 여성만이 이상하고 야만적인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로 삼는, 구미 여성들의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과 선진국 및 발전도상국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에는 전적으로 반대한다.(p.68)”이와 같이 저자는 특정한 관습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 나아가 세계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자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3세계’는 북반구 선진 공업국이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의 가난한 나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오카 마리의 ‘제3세계’는 이 범위를 넘어선다. ‘제3세계’란 백인이 아닌 유색인인, 피식민자, 소수자, 프롤레타리아 등을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제3세계’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수식어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미니즘’이 보편화 되고 특권화 된 서양의 페미니즘일 뿐이기 때문에 ‘제3세계 페미니즘’이란 서양 페미니즘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오카 마리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 오카 마리가 아랍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들이나 한국의 위안부 여성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p.330)” 그래서 오카 마리는 ‘같은 여성’이라거나 ‘자매애’ 같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카 마리는 제3세계 여성들이 언제나 자신을 표현해왔지만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이야기나 노래, 푸념이나 중얼거림 등의 언어적 형태 외에도 한숨이나 그림과 춤, 혹은 입술 색깔과 요리 등과 같은 형태로 다양하게 자신들을 표현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한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서양적 가치 아래 그녀들을 일방적으로 표현한다. 오카마리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그녀들의 말을 횡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카마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들의 말과 온갖 표현을 알아듣는 진정한 귀라고 말한다. “그녀들의 진정한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은 물론 그녀들을 빈곤으로 내모는 세계적인 착취 구조 등도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p.331)”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코르작 선생>(1990, 폴란드, 서독, 프랑스 합작)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맞서 정신적으로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 역시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폴란드인 코르작의 ‘보편적 인류애’를 묘사하면서 코르작의 정신을 이스라엘 국기 아래 찬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폭력적 건설로 몇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조국을 빼앗기게 된 사실에 대한 시점을 결락시켰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보편적 인류애’라는 시야의 바깥에 놓이게 된 사정을 의도치 않게 드러내버렸다.(p.58)” 영화는 얄궂게도, 코르작의 정신을 배반하여 팔레스타인 혹은 중동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에 이바지 하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피해자라는 사실로 자신의 가해성을 상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조국을 빼앗은 이스라엘의 가해성은 600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고 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의해 상쇄되는 것일까? 실제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점령 정책에 대한 비판을, 그 내실을 불문하고 반유대주의라고 거꾸로 비판해왔다. ‘서양페미니즘’은 억압받는 여성의 주체성 회복을 늘 문제 삼으면서도, 민족적 전통이나 이슬람에 주체적으로 동일화하는 아랍여성, 또는 무슬림 여성이 서양이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성에 의문을 표명하면 ‘원리주의자’, ‘광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 “워커의 <기쁨의 비밀>도 아프리카 여성의 표상을 둘러싼 그 근원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기 수술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는 것 아닐까. 하지만 <기쁨의 비밀>을 그렇게만 본다면, 이 작품은 결국 성기 수술의 ‘야만성’을 호소하는 단순한 프로파간다적 텍스트에 지나지 않게 된다.(p.111)” 소말리아 여성 아만이 구술한 파란만장한 반생을 엮은 <벌거벗은 아만>을 읽으면 더욱 명백해진다. 아만의 시선에 포착된 소말리아 여성들의 모습은 워커의 텍스트<기쁨의 비밀>에서 그려지는 아프리카 여성들과 확연히 다르다. 생명력 넘치는 아만의 말이 실감나는 것은 아만의 삶의 일부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워커의 텍스트는 부권제도에서 희생자인 여성들의 삶의 세부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14세 때 나이 많은 신랑과 결혼하기 싫어 가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슈퍼모델이 된 <사말의 여성 디리>의 저자 와리스 디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매일 저 자신이 아프리카인이라는 것을 신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매일 그렇습니다. 저 자신이 소말리아인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우리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할례를 제외하면 저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그 환경을 다른 누구와도 절대로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p.119)” 변영주 감독의 영화 <낮은 목소리> 속에서 ‘위안부’였던 여성들은 틀림없이 일본을, 일본인을 고발하고 있다. 매주 빠짐없이 열리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항의 행동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녀들은 일본과 이 범죄의 책임자 그리고 천황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천황’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을 지닌 일본판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의 여성들이 조선이나 아시아 여성-타자인 여성들-은 동정하지만 나라를 위해 싸운 자기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침략자나 강간마라고 부르면서 폄하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국가에 대한 동일화와 노골적인 혈연주의를 나는 단연코 거부한다.(p.213)” 이렇게 저자는 역사의식 없이 소아적인 고집에 연연하는 국수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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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선진 공업국 페미니즘이 자신들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제3세계의 배일이나 ‘여성성기 할례’를 객체화함으로써 제3세계 자체를 송두리째 뒤처진 것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가담해버리는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같은 여성’이라고 말하면서 ‘다양’이라는 ‘특권’의 방패에 보호받고 있는 ‘한편의 여성’이, 또 한편의 ‘억압받고 특권이 없는 여성’의 아픔을 분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 있는 책이다. 나는 여성 할례와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 그것을 아프리카나 아랍 여러 나라들의 여성만이 이상하고 야만적인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로 삼는, 구미 여성들의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과 선진국 및 발전도상국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p.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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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사위시대라 할 만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평등이란 사상은 진보주의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페미니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불과 5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는 저자 오카 마리가 1995년부터 5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써온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녀는 현재 교토대학교 인간, 환경연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된 관심영역은 현대 아랍 문학,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등이며, 지은 책으로 <기억서사>, <대추야자나무 그늘에서-제3세계 페미니즘과 문학의 힘>, <아랍, 기도로서의 문학> 등이 있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는 서양 선진 공업국 페미니즘이 자신들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제3세계의 베일이나 ‘여성성기 할례’를 객체화함으로써 제3세계 자체를 송두리째 뒤처진 것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 가담해버리는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같은 여성’이라고 말하면서 ‘다양’이라는 ‘특권’의 방패에 보호받고 있는 ‘선진국의 여성’이, 또 한편의 ‘후진국의 억압받고 특권이 없는 여성’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 있다. “나는 여성 할례와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 그것을 아프리카나 아랍 여러 나라들의 여성만이 이상하고 야만적인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로 삼는, 구미 여성들의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과 선진국 및 발전도상국 여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에는 전적으로 반대한다.(p.68)”이와 같이 저자는 특정한 관습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 나아가 세계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자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3세계’는 북반구 선진 공업국이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의 가난한 나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오카 마리의 ‘제3세계’는 이 범위를 넘어선다. ‘제3세계’란 백인이 아닌 유색인인, 피식민자, 소수자, 프롤레타리아 등을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제3세계’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수식어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미니즘’이 보편화 되고 특권화 된 서양의 페미니즘일 뿐이기 때문에 ‘제3세계 페미니즘’이란 서양 페미니즘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오카 마리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 오카 마리가 아랍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들이나 한국의 위안부 여성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p.330)” 그래서 오카 마리는 ‘같은 여성’이라거나 ‘자매애’ 같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카 마리는 제3세계 여성들이 언제나 자신을 표현해왔지만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이야기나 노래, 푸념이나 중얼거림 등의 언어적 형태 외에도 한숨이나 그림과 춤, 혹은 입술 색깔과 요리 등과 같은 형태로 다양하게 자신들을 표현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한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서양적 가치 아래 그녀들을 일방적으로 표현한다. 오카마리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그녀들의 말을 횡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카마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들의 말과 온갖 표현을 알아듣는 진정한 귀라고 말한다. “그녀들의 진정한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은 물론 그녀들을 빈곤으로 내모는 세계적인 착취 구조 등도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p.331)”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코르작 선생>(1990, 폴란드, 서독, 프랑스 합작)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맞서 정신적으로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 역시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폴란드인 코르작의 ‘보편적 인류애’를 묘사하면서 코르작의 정신을 이스라엘 국기 아래 찬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폭력적 건설로 몇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조국을 빼앗기게 된 사실에 대한 시점을 결락시켰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보편적 인류애’라는 시야의 바깥에 놓이게 된 사정을 의도치 않게 드러내버렸다.(p.58)” 영화는 얄궂게도, 코르작의 정신을 배반하여 팔레스타인 혹은 중동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에 이바지 하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피해자라는 사실로 자신의 가해성을 상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조국을 빼앗은 이스라엘의 가해성은 600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고 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의해 상쇄되는 것일까? 실제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점령 정책에 대한 비판을, 그 내실을 불문하고 반유대주의라고 거꾸로 비판해왔다. ‘서양페미니즘’은 억압받는 여성의 주체성 회복을 늘 문제 삼으면서도, 민족적 전통이나 이슬람에 주체적으로 동일화하는 아랍여성, 또는 무슬림 여성이 서양이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성에 의문을 표명하면 ‘원리주의자’, ‘광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 “워커의 <기쁨의 비밀>도 아프리카 여성의 표상을 둘러싼 그 근원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기 수술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는 것 아닐까. 하지만 <기쁨의 비밀>을 그렇게만 본다면, 이 작품은 결국 성기 수술의 ‘야만성’을 호소하는 단순한 프로파간다적 텍스트에 지나지 않게 된다.(p.111)” 소말리아 여성 아만이 구술한 파란만장한 반생을 엮은 <벌거벗은 아만>을 읽으면 더욱 명백해진다. 아만의 시선에 포착된 소말리아 여성들의 모습은 워커의 텍스트<기쁨의 비밀>에서 그려지는 아프리카 여성들과 확연히 다르다. 생명력 넘치는 아만의 말이 실감나는 것은 아만의 삶의 일부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워커의 텍스트는 부권제도에서 희생자인 여성들의 삶의 세부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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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여럿 모이는 곳이면 대부분 '상대'의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앞에 있던 없던간에 꼭 빠지지 않는이야기가 그것이다. 내용의 질이 좋건 나쁘건 간에 서로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재 중 하나다. 상대를 알던 모르던 상관치 않지만, 상대를 잘 모르거나 알게 된지 얼마되지 않았을 경우, 일종의 선입관을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수년 간, 다분히 노력했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어느 새 내 본연의 눈이 아닌, 청각적 눈으로 상대를 보게 됨을 고백한다.
'내가 보기엔 좋은 사람인데 이사람 저사람의 말을 들으면 내가 보지 못했던 그사람의 이면이 있는 것 같아서 다시 그사람을 보면 예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보게 되는 것'....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모자른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이런 것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맘으로 살려고 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쉽게 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읽게 됬다. 그리고 내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사람이 사람을...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배운자는 덜 배운자를, 가진자를 못 가진자를 위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맞다. 그러나, 그 방식에는 우선시 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배운자가, 가진자가 함부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강요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이 책에서 얘기하듯 또 하나의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들에게 서양 페미니즘의 차별적 시선을 폭로한다. 여기서 현재의 우리 에게 '제3세계'란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된다고 한다면, 여전히 그녀들과 같이 차별적 시선에 있 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물음은 함정이다. 그들은 "당신은 어떤 입장입니다까?'라고 집요하게 물을 것이다. 중립성을 위장하면서, 그리고 당신에게 주체적 선택을 보증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로 이 물음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누구라도 정의의 편에 서고 싶을 것이다. '차별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주체적으로'선택한 입장이 어느 쪽이든, 이런한 논의의 패러다임에 편승 하는 순간 당신은, 누가 타자를 표상하는 담론의 주체가 될 것인가에 대한 전제를 승인해버리는 셈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보편적 인권주의'냐 '문화상대주 의'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논의를 생겨나게 하는 담론의 토포스 - 타자를 표상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생각나는 토포스- 야 말로 우리가 문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p.43)
이 책은 앞으로 내게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할 것 같다. 아직 미처 다 읽지 못한 뒷부분의 리뷰를 다시 쓰면서 나는 지금의 생각과 그때의 그것이 얼마만큼 넓어지고 깊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여지까지 생소한 '제3세계'에 대한 여러 시선과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 알아야 할 것과 알아야 할 것, 지켜져야 할 것들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제3세계'를 희생자로 간주하는 시선으로부커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 사다위의 말을 빌리자면 '제3세계'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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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이리가라이의 남근 중심주의에 관한 논의를 인용하면서 예엔올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양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을 기원으로서 타자화함으로써, 기원인 여성과의 관계에서 동일성과 자기를 재 생산한다. 그러나 남근을 갖지 않은 여성은 남성이 동일성과 자기를 재생산 하기 위한 기원일 뿐, 스스로 동일성과 자기를 확립할 수 없다. 그러나 오리엔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 공간으로 관입함으로써 서양 여성은 서양에서 서양인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소유할 수 없는 남근의 대체물을 획득할 수 있다. 오리엔트 여성들을 앞에 둔 서양인 여성들은 서양인 남성의 시점과 동일화하여 훔쳐보기, 즉 절시증의 주체로서 남성의 눈길로 그녀들을 관찰한다. 그리하여 오리엔트에 관한 지의 대리 보충을 제공함으로써 서양에서의 동일성/자기를 확립한다. 그렇다면 서양인 여성에게 오리엔트 여성이란, 동일성/자기를 확립하고 주권을 가진 주체의 위치를 획득하기 위한 대지이며 기원이 될것이다. 서양인 남성에게 서양인 여성이 그렇듯이 말이다.(p.16)
"잘 보세요, 마리. 여기가 예루살렘, 우리의 도시예요.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기서 몇천 년 전부터 살아왔어요......."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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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오카 마리 저/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공역 사실 지금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개인적인 판단이기에 쉽게 내 의견을 밝히지는 못하겠으나, 적어도 지금 국내에 퍼져있는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페미니즘이 아니라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실지로 서양문화권에서도 뜻이 편질되어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도 내가 페미니스트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꼰 전례가 있다. 약자라고 여겨졌던 여성의 권위를 드높이는데는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역으로 이용하여 달콤한 것만 먹고 쓴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형태는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진정 평등함을 추구한다면 이러한 방식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세간에 이슈가 될 만한 소재를 찾고 거기에 뛰어들어가 분란만을 일으키고 자칭 페미니스트라며 가짜 페미니즘으로 포장하는 현 사태에 아쉬움을 표하며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한다. 참으로 신기한 책이다. 단순히 책만으로 보면 자칫 페미니즘을 드높이는 그러한 책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서양 페미니즘의 차별적 시선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책으로 조금은 신기한, 그리고 조금은 의아한 마지막으로 조금은 지루한 구성의 책이었다. 제3세계의 페미니즘 사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다양한 사례를 들며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첨언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영화 평론가가 감독이 생각치도 않았던 부분에 자신의 생각을 넣는 것을 넘어, 작가가 느끼고 작성한 감정이 아닌 학자들이 멋대로 생각하고 이러이러한 것 때문에 이러이러한 문단이 만들어졌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작가인 오카 마리가 이 분야에 정말 관심이 많고 분석도 기가막히게 해놓았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닌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듯한 기분이 생길 정도였다. 어찌보면 이렇게도 해석이 될 수 있구나에 대한 신선함이라는 감정을 느낀 것 이외에 책을 아무리 정독해보아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마치 '비공상과학대전'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인데, 의의는 알겠으나 정작 그녀가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을 못했다. 리뷰를 쓰는 이순간에도 이 책을 다시금 읽어보고 있다. 좀 더 읽다보면 내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몰입도가 훌륭하기에 이러한 매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좀 더 분석해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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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카 마리는 1986년 홀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당시 그녀는 작은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안내받은 방에는 팔레스타인 여성이 혼자 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여성은 오카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피곤했던 오카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그녀들의 말을 알아듣고 그녀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나누는(분유) 것이고, 그녀들의 요청이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을 대리 표상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그녀들의 상황과 표상을 수동적인 주체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목격-증인) 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녀들과 진정으로 함께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공진)이 우리게 부여된 의무이다." - 옮긴이 후기 중에서 (331쪽)
오랜 기간 이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의 세련된 서술은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녀의 진정한 이름'을 알아야겠다는 자각을 일깨운다. 이 책은 서양의 시각에서 강요된 제3세계의 페미니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다. 책을 읽는 것은 기존의 사고를 되짚어 보고 새로이 다듬는 성찰의 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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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에서 출간된 저자 오카 마리의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 옮긴이 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 "는 이 책의 제목 만큼이나 무거운 내용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1986년 아직 학생시절이었던 때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우연히 만나게 된 중동 여인과의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이해하는 만남이 아닌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그녀들의 편에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또 다른 편견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한다.
소말리아나 아프리카에 대해, 아니 그곳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데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동안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이 물음에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문화와 비교하여 미개하거나 뒤떨어진 문명인 등의 편견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해 왔을 것이다.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치부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위한다는 말로 마치 대변자가 된 듯한 언행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그녀들이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거나 스퍼하거나, 괴로워 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햐 생각해보지 않고 소위 우리의 사고범위내에서 "보편적 정의"라는 것을 내세워 단순히 억압과 고틍으로부터 행방시켜야 한다는 것만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제3세계라는 타자는 희생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희생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불안의 대상이 되는 것은 희생자의 역할을 이미 버린 타자입니다." - 슬라보예 지젝 -
여성 할래부터 위반부 문제까지 서양 페미니즘의 차별적 시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특히 서먕 페미니즘 안에 숨겨 있는 그들의 문화가 아닌 그 이외의 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차별의식을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또한 같은 여성 입장에서 단순하게 내가 속한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 즉, 지금 내가 속한 문화보다는 뒤떨어진 집단에서 핏박받고 있는 여성을 위한다는 행동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잘못된 것인지 비판하고 있다.
"아랍 이슬람의 유산에는 여성에게 유익한 것들이 많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내어 밝히고 강화애야 한다.(........) 아랍 여성의 해방이라는 문제는 전통적 유산 속의 유익한 것들과 현대사상의 유익한 것들을 합치는 데 달려 있다.
아랍 여성들을 모든 억압으로부터 행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이론, 사상, 투쟁의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들 자신이다. 자신의 문화적 전통속에서 진정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골라내고, 거기다 과학의 진보와 현대사상을 덕붙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독자성이 풍부한 새로운 아랍 여성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그녀들의 노력뿐이다." - 본문 중에서 -
옮긴이는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그녀들의 말을 알아듣고 그녀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나누는(분유) 것이고, 그녀들의 요청이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을 대리 표상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그녀들의 상환과 표상을 수동적인 주체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목격=증언)한다. 그리하여 얹나 그녀들과 진정으로 함께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공진)이 우리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이 책의 내용이 쉽게 이해되거나 공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것 같다. 하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의식 중에 자롯 접근하고 있었던, 아니 오만을 자각하기에는 추운하지 않을가 한다. 이와 같이 고찰이 우리의 손이 아닌 이방인의 연구에 의해 집필된 것도 조금은 부끄럽다.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는 다른 아닌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아랍 여성, 특히, 할레를 겪는 그녀들의 단순한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 또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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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리뷰에 없는 말만 하자면, 이 책의 문장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문장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느낌을 준다. 논리적이라고 하기에는 논리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라고 하기에는 감성적이지 않은......?!
아무래도 문학 평론? 혹은 영화 평론? 같은 글이 중간중간 들어 있어서 그런 탓도 있는 듯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읽기 힘들었다면 힘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빨리 읽히는? 그런 문장이라는 점을 명심하기를 권한다.
또한 이 책은 저자가 5년 동안 발표한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그래서 앞부분의 내용과 뒷부분의 내용에서 -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 미묘한? 변화가 있다.
앞부분은 뭐랄까 야나기 무네요시를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다.
아무튼 이 책은 제1세계의 일원인 일본인의 입장이 다른 제1세계의 일원인 국가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닌 듯하지만, 이 책은 식민모국으로서 일본인의 처지와 식민모국으로서 유럽/서구인의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힌다.
유럽/서구인은 제1세계이고 그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나 아랍 등의 사람들은 제3세계이라서 유럽/서구인은 아프리카나 아랍 등의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하는데,
일본인은 제1세계이고 그들의 식민지였던 한국 - 혹은 대만 - 은 제1세계가 되었다. 일본인은 한국인을 대변할 일이 없으며, 대변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듯하다. - 사죄를 해야하니까.....
일본이 제1세계의 일원이면서도 유럽/서구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서 별점을 더 줘야 할 듯하지만, 아무래도 산만하고, 과하게 복잡한 문장이 싫어서 내용 별은 3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