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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을 읽고 있다. 순전히 배수아 작가의 번역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민 없이 택한 책이다. 역시나. 그의 번역, 그의 문장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배수아의 번역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이 불안의 꽃을 이토록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을까. 나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배수아가 번역한 작품들을 '읽어대는'중이다. 한마디로 작가나 책의 소재가 아닌 오로지 번역가 이름 하나로 책을 선택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정말 좋은 작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눈먼 부엉이, 산책자, 페르난도 페소아, 제발트 등. 나로서는 생소한 작가들의 생소한 문학작품들이었으나, 곧 나는 이 작가들과 작품들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 배수아의 번역이, 문장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아마 그의 번역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푹 빠져들 순 없었으리라. 생소했던 작가들뿐만 아니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을 배수아의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다. 배수아의 시적이고 감성적인 문체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과 만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정말 좋지 않을 수가 없는 조합인 듯하다. 헤세의 문장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사람. 문체도 문체이지만 내가 배수아의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는 "번역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유명한 고전이라도 어색한 문장으로 가득한 번역서를 읽으면 도저히 참고 끝까지 읽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그 언어에 통달한 언어학자의 번역일지라도, 그것을 한글로 바꾸고 나서의 문체와 느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번역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 읽지 못하고 있는 유명 고전들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배수아의 번역에서 나는 그런 어색함과 맞닥뜨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한글로 쓰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물론 나는 원어를 전혀 모르기에 오역과 의역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으나, 그러한 자연스러움에 더해 문장을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게 변신시켜주는 점도 배수아의 번역을 사랑하는 이유중 하나다. 번역가 자신이 소설가이기 때문일까? 아마 그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믿고 보는', '믿고 듣는'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배수아가 번역한 작품들은 '믿고 읽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 한 번도 배신당한 적이 없다. 배수아의 번역은 원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다 '배수아'라는 이름이 보이면 나는 주저 없이 그 책을 꺼내든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욕심을 부리자면, 좀 더 많은 작품들을 배수아 작가님께서 번역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세상 모든 작품들을 작가님의 문장으로 읽어보고 싶다. 정말 행복할 것 같다. |
어느날 오후는 극장에 앉아 있는데, 비스듬히 몇 줄 앞쪽에 그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칼의 어떤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서로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다음번에 프란츠 요제프 거리의 집에서 그를 만날 때 해명을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그녀야말로 괴상망측하다. 자기가 거의 먹여살리다시피하고, 정기적으로 선물도 사주고, 거기다 섹스까지 해주는데, 그런데 그녀는, 자기 집에 올 때 생전 뭘 들고 오는 법도 없고, 언제나 몸뚱이 하나만 달라, 그런 주제에 지금와서, 뻔뻔스럽게도 배타적 독점권을 행사하려 들다니. 그 검은 머리 여자랑은 일곱 번이나 했다. 그것도 하룻밤 새에. 요니는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걸로 관계를 마감했다. 21세기의 토마스 만, 독일의 필립 로스가 쓴 것 같은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른 노년의 신사가 마주치는 삶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다. 배수아 작가의 번역픽은 왠만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절판이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복간된다면 하나 소장하고픈 마음이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분위기에는 힘들 것 같은 소설이라 안타깝다. 늙어도 사람은 현명해지지 않는다. 단지 현명해보이라는 사회적인 압력 때문에 현명한 척 하는 스킬만이 늘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늙은이는 더욱 빠르게 늙어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을 충동질하고 욕망하게 하는 근원은 오직 섹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