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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해 첫날, 눈이 왔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예수님 오신 날에는 내리지 않던 눈이다. 어제에 이어지는 날이기도 하지만, 잘라서 새로운 해를 만들고 그 첫날이라 오늘은 뜻깊은 날이다.
그런데 아침나절부터 아내와 큰 아이는 다툰다. 엄마 눈에는 아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들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한다. 그래서 서로 제 생각을 큰 목소리로 외치다가 토라지고는 둘 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어른이랍시고 살아본 느낌 대로 아이들이 하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아직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제 생각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게 어른들의 눈에 엇길로 보일지라도... 어버이와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사뭇 다르다.
제임스 엘 브룩스 감독이 1983년에 만든 <애정의 조건 Terms of Endearment>은 엄마와 딸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살다가 다투고 그러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을 담은 영화였다. 영화를 본 132분 동안 한 가지 느낌이 아니라 여러 느낌으로 다가왔다. 안타깝기도 하고,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2. "만일 네가 플랩 호튼과 결혼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네 삶을 망치고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 뻔해...플랩은 답답한 사람이야. 그 나이에 고작 안정적인 선생이나 되고 싶어하다니..." 텍사스주 휴스턴에 사는 오로라 그린웨이(셜리 맥클레인)가 다음날 혼인할 딸에게 밤에 하는 말이다.
딸인 엠마(데브라 윙거)는 이런 엄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전 플랩이 절 여기서 구해줘서 고마워하고 있어요...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면 결혼식에 안 오셔도 돼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하려는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는 속에 있는 말을 내뱉고 만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도 위선은 싫다" 세상에...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에 가지 않는 엄마가 다 있다니... 딸한테 원수가 진 것도 아니고, 그게 사위될 플랩 호튼(제프 다니엘스)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니...
요즈음 우리나라로 보면 선생이 되려고 교대나 사대를 나오고도 몇 번이나 시험을 치기도 한다. 큰 돈벌이는 안 된다 해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보람되고 좋은 일자리인데, 그런 일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마와 어떻게 해야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을까?
3. 곱게 자는 아이를 두고 애가 숨을 쉬지 않는다며 걱정하면서 5분마다 딸의 방을 들여다 보는 엄마. 옆지기가 죽고난 다음부터도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를 걱정하며 괜시리 깨워 같이 자자고 하는 엄마. 어릴 때부터 딸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려 하는 엄마를 딸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주 끔찍하게 여기지 않을까? 시도 때도 없이 제 삶에 끼어드는 엄마 때문에 미쳐버릴지도 모르고...
그런데 딸의 마음과 달리 엄마는 그게 다 널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기 쉽다. 그렇게 딸을 챙겨주는 게 사랑이라고 여기는 엄마와 어떻게 하면 다투지 않고 사이 좋게 잘 풀어갈까? 사랑하는 마음도 알맞게 나타내야 하는데,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할 수도 있는데...
영화는 딸한테 온 마음을 다 쏟는 엄마와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딸의 모습을 섞어서 잘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한 길로 가지 않는 엄마와 딸의 사랑과 삶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게 좋았다.
나오는 꼭지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아기자기한 영화였다. 우리나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그렇겠지만, 장모인 오로라와 사위인 플랩이 늘 다투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그래도 제 딸과 사는 사내인데 정말 저렇게 미워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딸이 떠나면서 옆집에 살던 우주비행사 개렛 브리드러브(잭 니콜슨)와 엮이게 되는 엄마의 이야기는 늙은이들이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잘 보여주어 많이 웃었다. 잭 니콜슨은 이런 연기에 이골이 난 듯 보였다. 오로라를 둘러 싸고 주치의 에드워드 존스나 땅딸보 버논 달라트(대니 드비토)가 사내라면 나이가 들었든 젊든 예쁘고 돈 많은 아낙네의 꼬리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에선 실실 웃었다.
옆지기를 따라 아이오와주 드모이스로 집을 옮기고 나중에는 네브래스카주로 옮기기까지 하는 엠마 집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들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엠마가 믿었던 옆지기 플랩이 딴 마음을 먹자 따스한 마음을 가진 샘 번스(존 리스고)와 사귀는 대목은 애틋해서 바람을 피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영화라서 그럴까?
알 수 없는 대목은 입맞춤 하는 거였다. 사랑하는 사내와 계집이 입술로 입을 맞추는 것은 늘 봐왔던 모습이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뺨에 입술을 댈 뿐이었다. 그런데 엠마가 같은 마을에 사는 벗인 팻시와 입술끼리 입을 맞추거나, 텍사스에서 아이오와로 떠날 때 엄마 오로라와 엠마가 입을 맞추는 건 낯설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게 누구든 입술끼리 입을 맞출 수 있는 게 서양 사람들의 풍습인가?
텍사스에서 네브래스카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개렛한테 오로라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 뒤 공항으로 들어가는 개렛한테 오로라가 가다가 돌아서서 "개렛!" 하며 부르는 대목이 있는데, 어쩐지 안 맞았다. 돌아서서 가는 시간에 비추면 문 안쪽의 개렛한테 소리가 들리려면 조금 더 빨리 오로라가 불렀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야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를 알맞게 들을 수 있을 듯.
4. 딸의 삶에 시시콜콜 끼어들어 챙겨주려고 하는 엄마 오로라를 맡은 셜리 맥클레인은 본디 제니프 존스가 맡기로 했다지만, 그보다는 더 잘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플랩이 부교수 자리를 찾아 아이오와주 드모이스로 가야한다고 엠마가 말하자 "아니, 저 사람은 그것도 못해서 시골로 쫓겨나니?" 하며 딸을 멀리 보내게 하는 사위를 나무랄 때나, 엠마가 아이를 가졌다며 "엄마가 기뻐해주지 않으면 난 미쳐버릴 거야" 하자 다른 엄마라면 잘 됐다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이지만 가재 눈을 뜨고서 시큰둥한 얼굴로 "내가 할머니가 되는데 왜 기뻐해야 해!"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수저로 식탁을 두드릴 때나, 병원에서 엠마한테 놔주기로 한 10시가 지나도 가만히 있자 "빨리 주사를 놔줘!" 하며 고래고래 소리치거나, 빠듯한 살림살이 때문에 도와달라는 엠마한테 "내가 얼마나 돈하고 헤어지기 싫어하는지 다 알지?" 하며 죽었을 때 물려줄 그림마저 딸한테 주기를 꺼려할 때의 모습은 그가 아니면 보여주기 힘든 연기로 보였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엠마도 만만치가 않았다. 씨씨 스페이식이 본디 맡기로 한 자린데 그가 뿌리치자 데브라 윙거가 맡았다고 한다. 여리고 갸날픈 모습으로는 씨씨가 나을지 모르지만, 선머슴같이 엄마에게 대차게 나가는 딸로는 데브라가 훨씬 나아 보였다.
"끊어요. 엄마랑 얘기하기 싫어요. 난 행복해요...플랩한테 잘못 했다고 할 때까지 엄마 수다 안 들어줄 거에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고 새살림을 차린 집에서 엄마 전화를 받지 않고 버티는 모습이나, 오로라가 말리는 데도 생긴 아이들(토미와 테디, 멜라니)은 지우지 않고 다 낳아 키우겠다며 할 때나, 돈이 모자라 가게에서 고른 물건을 다 사지 못하고 돈에 맞춰 하나씩 솎아내면서 아이들한테 "지갑을 바꿔와 돈이 모자란 거야" 하며 둘러대고 일하는 아가씨한테도 기죽지 않고 따질 때, 크게 뜬 눈은 정말 커보였고 목소리가 시원스럽고 몸짓은 사랑스러웠다.
5. 예쁜 계집들을 보면 눈이 돌아가는 괴팍한 우주비행사 개렛 브리드러브 노릇의 잭 니콜슨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즐거움은 아마 반쯤 줄었을 것이다. 본디 폴 뉴먼이나 해리슨 포드한테 넘기려 했지만 그들이 안 하는 바람에 맡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연기를 아주 잘 하는 사내들이지만, 나는 그들보다 잭 니콜슨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같이 바닷가에서 차를 신나게 몰고 가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오로라 탓에 바닷물에 나가떨어졌을 때 놀라 달려온 오로라한테 "나를 눕히고 싶다면 부탁만 하면 됩니다" 하거나, 거기서 그냥 껴앉고 입맞춤만 하면 될 터인데 오로라의 가슴에 손을 넣어 만지려다가 혼이 나거나, 오로라가 집에 있는 르누아르 그림을 보러 오라고 전화를 걸자 "침대로 오란 말이지?" 하며 느끼하게 나오는 모습은 '천의 얼굴' 잭 니콜슨이 아니라면 맛이 아주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플랩으로 나온 제프 다니엘스는 깔끔하게 연기를 했지만 보는 맛은 좀 떨어졌다. 장모인 오로라한테 대들 때를 빼면 그리 내세울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아이들이 더 돋보였다. 어른들 뺨치게 잘 했다. 엄마와 아빠가 돈 때문에 싸울 때 소리 내지 않고 밖으로 나가 추운데도 계단에 걸터앉아 있을 때나, 차에서 기다리라고 하는데도 제 엄마가 아빠 아닌 샘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 빨리 가자고 다그칠 때의 토미의 모습은 어린애다운 연기를 깜찍하게 보여주었다. 병원에서 "엄마를 미워하는 척 하지 마! 바보 같은 짓이야" 하는 엄마한테 "엄마, 금방 나을 거지?" 할 때나, 할머니 집 마당 모퉁이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을 때는 불쌍해 보여서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6. 감독은 모든 걸 다 그냥 좋게 끝나게 할 생각은 없었나 보다. 보기 좋은 끝맺음만으로 보여주었다면 아마 조금 싱거운 영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살면서 가슴이 아프거나 슬픈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닐 것이다. 아쉽기는 했지만 마무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세상을 따뜻한 쪽으로 보고 이끌어가는 게 좋았다. 아픔이나 슬픔도 견디어 낼 수만 있다면 사람을 더 키우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고...
<마지막 영화관 The Last Picture Show>을 쓴 래리 맥머트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한다. 그 영화도 좋았는데, 이 영화도 나무랄 데가 없다. 별 다섯을 주기에 아깝지가 않다.
영화를 만든 지 이제 마흔 해가 지났지만, 디뷔디 화면이나 소리는 깔끔하고 좋다. 감독과 제작자가 영화를 보면서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예고편이 들어 있어 덤도 괜찮다. 다만 배우들이 영화를 만들 때 어땠는지를 들려주는 게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인데 아쉽다.
4,400원에 이만 한 영화 디뷔디를 사는 건 그저 남는 장사다. 그런데 떨어져 나오지 않는다. 빨리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