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문체의 탁월함 일단 저자가 조선시대에 대한 전문가라고 익히 들었습니다. 말마따나, 당시의 문체나 어휘 사용, 시공간적 배경을 묘사함에 모호함이 없고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독자는 믿고 문체를 즐길 수 있고요. 요즘 백제 시대를 다른 모 드라마가 어휘 고증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짜증이 나던 차에 이런 정성스럽고 믿을 만한 소설을 읽게 되서 무척 기뻤습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써보거나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공부하는 자세로 김탁환 씨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사성어나 옛 성현의 일화를 인용하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나 문인들이 자주 쓰던 표현 방법인데, 그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을 위해 각주가 세심하게 달려있네요. 이게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제가 읽어보니까 어차피 이 소설은 읽는 속도감이 그다지 빠르지 않습니다. 편지를 읽는 다른 사람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황진이의 편지를 엿본다는 느낌으로 읽는 데다가(편지글을 빨리 읽어버리는 사람은 별로 없죠.) 늙은 여성 화자가 삶을 회고하며 지나간 일과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천히 그 문장의 맛을 음미하며 읽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각주를 읽느라 잠시 흐름이 끊긴다 해도 크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남성인데도 여성 화자의 세련되고 여성적인 말투와 내면을 무척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이것은 구구절절히 설명하는 것보단 읽어보시면 아실 것 같습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소설 <여인천하>였는데요. 여성 정난정 삶을 비중있게 그린다기 보다는 남성들과의 세계에서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정쟁 과정을 묘사해서 대조가 되는군요. 마침 시대배경도 비슷하지만, 두 소설의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 것은 아마도 황진이와 정난정의 삶의 모습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2. 여성으로서의 황진이의 삶 초반부 특히 황진이와 눈 먼 어머니, 새끼 할머니, 3대에 걸친 기생의 삶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가슴이 아팠고요. 황진이 자신이 기생이라는 인생의 굴레에 느끼는 분노와 욕망, 경국대전과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성정해가는 과정도 좋았지만 간간이 묘사된 어머니와 새끼 할머니의 삶도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게 당시 조선시대 관기들의 삶의 한이겠지요. 현대에 와서 생각하면 여성들을 관이라는 공식기관에서 관리하며 남자들의 노리개로 부렸다는게 참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권적인 일이지만, 당대 여성들이 그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깰 수 없었던 그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안고 살았을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3. 아쉬웠던 점 일단 수신자 설정에 대해 아쉬움이 있습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허태휘라는 황진이의 지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남의 편지를 엿보는 두근두근함을 느낄 수 있지만, 말 그대로 남의 편지이기 때문에 몰입도가 좀 떨어지고, 당대의 사건에 깊이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동시대를 같이 사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동시대의 사건이나 시대배경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하는 사람은 없지요. 만약 편지를 받는 사람이 현대인 중의 누군가로 설정되어 있다면 더 재미가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훈계조나 너무 설명조로 빠질 위험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에 대해 좀 더 친절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당대의 시대배경, 조정암의 죽음이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이나 중종 이후 대윤과 소윤의 갈등에 대해 미리 배경지식이 있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드라마 <여인천하>를 보신 분이라면 이해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일단은 소설인데, 갈등의 점층적인 고조가 보이지 않아서 후반부에 좀 김이 빠진 듯 합니다. 소설 초반부부터 스승(서경덕)에 대한 언급이 계속 있었고, 황진이와 서경덕의 이야기가 워낙 유명하니 둘이 만나고 서로 배우는 과정이 이 소설에서 가장 최고조된 부분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읽었는데 그렇진 않더군요. 아마 어려운 사상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어머니가 죽는 부분과, 이생과의 만남과 헤어짐, 강도를 만난 장면이 제일 긴장도가 높았습니다. 특히 변절자 아버지 때문에 방랑하게 된 이생이라는 인물과 황진이가 유랑걸식하는 장면이 인상깊었고, 도둑을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장면까지가, 그냥 방랑하는 여행이라기 보다는 고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다 읽고 난 후 좀 아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작가가 여성의 내면을 잘 살려주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시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에 기대를 하게 되네요. <열녀문의 비밀="">을 읽어봐야겠습니다. 관련해서 읽을 만한 책으로는, 일단 시대배경이 비슷한 <여인천하> 정난정과 황진이 두 여성의 삶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 여성의 삶과 한에 대한 소설로는 송우혜 씨의 <하얀 새="">가 있는데요. 조선시대 유교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속박했는지, '환향녀'에 대한 대우가 어땠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하얀>여인천하>열녀문의>여인천하>여인천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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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읽은 한 칼럼에서 그 필자는 신진 세대의 소설가들은 이전 시대의 소설가들에 비해 작품의 소재를 구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고 했다. 한국 소설 문학의 중진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들에게는 그들의 살았던 삶과 시대를 가감없이 그려내기만해도 그것으로 충분히 한 두 권 분량의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다. 워낙 힘들고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던 그들에게는 그런 현실을 내면으로 읽어낼 능력만 있다면, 거기에 소설적 허구와 상상만 창조적으로 입힌다면, 무게있는 작품을 형상화해내는 것이 그려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문학상을 휩쓴 대개의 소설의 배경과 분위기는 그런 것들이었고, 그런 그림들은 우리 문학에서 충분히 그려질 만큼 그려졌다. 그에 반해, 오늘날 새로이 등장하는 신진 작가들이 몸담은 시대는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 그 자체로 작품이 되기에는 너무나 풍요롭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시대에 산적한 여러 시대상들의 무게를 그가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의 의도를 잘 이해했을 경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결국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은 노력과 투자의 수고가 필요하다. 갈수록 소설이 독자와 사회에 미치는 힘이 약해진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인정한다면, 그 잃었던 힘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들 나름의 진지한 성찰과 추구로 창조적인 대응의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소설가 김탁환이 택한 길은 그 스스로가 말한 바대로 "동양적 상상력의 소설적 복원"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길을 위해 단지 상상력에 의존한 허구의 복원을 넘어서는 "소설의 역사화와 역사의 소설화"를 추구한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의 한 인물을 복원함에 있어서 야담과 야사에 근거한 살팍한 흥미거리를 그 자료로 삼기보다는, 동원가능한 모든 문헌을 통해 진실을 복원 고증하고, 그 시대적 산물인 문체의 미학을 추진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미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허균을 통해 추구해 왔던 이 신념을 그는 이번에는 16세기 조선 중기의 여인 황진이에 적용시켰다. 그가 고증을 통해 밝히고 소설화시킨 황진이의 실체는 그간 이태준 이후 대중작가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던 단지 재주있는 "기생"이 아니라, 10년동안 서경덕의 문하를 지킨 화담학파의 대모라는 위치였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시도한 텍스트의 형태는 한국의 일반 소설 독자들에게는 일면 버거울 수 있는" 주석달린 서간체 독백문" 소설이다. 이는 분명 생소함의 복합체라 할 만하다. 서간체 독백문이라는 형태 자체가 3인칭의 일상적 대화와 서술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에게 쉬운 독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에 본문의 3배나 되는 600여개에 달하는, 주로 한시로 이루어진 각주는 독서를 위한 호흡의 순리마저 순간순간 막히게 만든다. 이는 일반 학위 논문의 기본 구조마저도 넘어서는 처사다.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 일반적인 흥미진진함이나 고도의 추리, 가슴아리는 연예담을 포함한 감정의 고조를 경험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 소설을 감내해 내려면 독자 역시 작가가 그려내려한 고뇌하는 지식인 황진이의 내면과 합일하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상황과 사건을 바라보고 그녀와 함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16세기 조선 중기라는 독특한 시대의 상황하에서 황진이가 바라본 신분제와 남녀의 성역할의 차이, 기생이라는 직업에 할당된 사회의 인식, 문학과 유학, 도학, 역학을 포함한 학문적 발전과 담론의 상황, 시와 음악과 춤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터득한 깨달음 등을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지루한 과정이 될 수 있다. 맛깔스레 포장되어 쉬 먹을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을 원하는 현 시대의 즉흥적이고 원색적인 화려함에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흑백의 영상 속에서 우리의 내면을 은근히 담아내는 진정함을 발견하듯이, 실제 그러했을 16세기의 우리 선조들의 삶의 수묵화같은 아름다움을 우리의 오늘의 삶에 투영하기에 이 소설은 더할나위없는 교과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향한 평론가들의 문화사적, 문학사적 극찬을 그리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역사 속의 한 여인을 행한 세인의 왜곡된 인식을 인간적으로 변호해 주었다는 그 자체에 나는 더 애정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완벽한 한 권의 서책을 쓴다는 것은 완벽하지 못한 수만 권의 서책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 수암이 부족하지 않고 넘치지도 않게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텅 비워두는 게 낫다고 했을 때, 스승은 배움이 크다고 칭찬하셨어요. 나는 그 비어있음의 아득함을 짐작은 하되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간 적은 없습니다. 비어 있음에 기대어 만물의 근원을 아뢴 수암조차도, 있고 없음의 간극을 지우기 위해 여지껏 고심하고 있으니까요."(p. 242) |
| 최근 6개월간 내용면에서든, 형식면에서든, 감동면에서든 가장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난 이책을 꼽을테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은건 너무 감동먹은 정신에 주저리주저리 쓰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때문에..이젠 써도 되겠지...그 책은 <나. 황진이.=""> 이 책은 보급판과 주석판 두가지 버전이 있다. 보급판에는 글에 어울리는 동양화가 수려하게 펼쳐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주석판을 구입해서 읽었다. 왜냐..원래 매니아틱한것에 반하면 더 미치면 법이니까. 그리고 왠지 반할 것 같았으니까. 내가 주석판에 반하지 않는다면 보급판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일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나의 생각은 적중했다. 나는 이책의 많은 부분에 반했다. 정말 반했다는 말이 딱 맞도록 반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의 감동이란... 하나_ 이 책이 형식에 반했다. 이 책은 소설이다. 16세기에 살았던 황진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에 삶을 반추하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글을 쓴다. 시로써 자신의 회고록을 쓴다. 그것도 다른사람의 시의 인용만으로 가득찬 자신의 회고록을 쓴다.... 글쓰는 사람이 가장 쓰고 싶은 글은 인용만으로 이우러진 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은 인용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황진이의 고백론을 만들었다. 문학과 역사와 소설과 시의 만남.. 죽이지 않는가. 16세기 이전의 그 많은 고전과 시와 철학서를 탐독한 후 황진이가 생각을 짐작케한 문헌을 뽑아낸 그 노력이라니...정말 생각만으로도 방대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이 책 한권으로 그 시대 지혜의 석학들의 글을 맛볼수 있는 기쁨이라니...정말 대단한 책이다. 두울_ 주석이 본문의 반을 넘게 차지하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인 가독성을 망치게 하면서까지 주석을 하나하나 달면서 설명을 하는 편집스타일을 고집스레 추구한 출판사의 고집. 정말 반했다. 명색이 소설인데 그런 편집방법을 생각하기란 정말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급판이 따로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그런 모험을 감행한 출판사의 노력에 우선 박수! 나같은 경우에는 주석만 따로 읽어보는 것도 큰 재미가 되었다. 셋_ 누구나 황진이를 알지만 아무도 황진이를 모른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매력적인 황진이. 혹은 그나마 똑똑하다는 황진이조차 남성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이미지일뿐...황진이의 입을 빌려 들은 황진이는 기생이 아닌 인간으로서 누구보다 시대와의 불화속에 고민하면서 자신이 닥쳐있는 삶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고, 인정하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너머로 가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이른바 마이너일 수밖에없는 한계에 굴복하지 않고 누구부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당당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그러기에 너무 힘들었던, 서경덕학파의 대모로서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산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정말 힘든시기에 이 책을 읽었다. 밑줄을 쫙쫙 그어가면서 황진이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 고고한 당당함을 닮고 싶었다. '나의 삶이란 공명정대한 법에 대하여, 지극히 온당하며 인간의 도리를 일깨운다는 관습과 예절에 대하여 던지는 질문에 다름아니었어요.' '남정네들은 은밀한 즐거움만 품고 있었지 끝끝내 나의 깊고 먼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았지요.' 황진이의 독백 어느 하나 소홀히 흘려 들을 대목이 없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한 시대의 마이너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동시에 이젠 대한민국에서 이런 형식의 소설이 나올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한번더 감동먹게 되는 책이다. 푸른역사. 출판사 정말 멋지다...나두 이런 책 함 만들어보고 싶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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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죽음을 앞 둔 노년의 황진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1인칭 소설이다. 처음보는 단어들(친절하게 뜻을 적어 놓았다.)과 황진이가 인용하는 한시(물론 주석을 달아 놓았다)들로 소설 읽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인용했는지 굳이 알지 않아도 되겠지만 주석을 달아 놓았으니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옛 선비들이 정자에 앉아 누구의 실력이 더 좋은지 한시와 고사성어로 배틀하는 기분이다. 미리 많은 한시와 고사를 모아 놓고 그것들을 퍼즐 맞추기처럼 짜 넣으며 소설을 쓴 저자의 수고가 느껴진다.
소설과 함께 조선시대의 많은 한시들을 읽을 기회가 되었지만 역시 한자를 잘 모르기에 한시의 참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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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 황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책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그냥 통상적인 소설책인데 몇 페이지 걸러 수묵화가 실려 있는 예쁜 책이다.또 다른 하나는 ‘역사와 소설의 포옹’이라는 근사한 부제를 달고 있는 주석이 본문의 양보다 많은 끔찍한(?) 책이다. 그냥 부담 없이 읽고 싶어 소설책을 샀다.글도 부담없이 잘 읽히고 그림들이 끼여있어 술술 잘 넘어간다.글은 황진이의 내적 고백이다.황진이? 얼굴 반반하고 재주 있는 기생? 이런 고정관념을 깨기에 딱 알맞다. 인간 황진이가 담담하게 자기 삶을 회고하는 속에 그 시대의 모습과 조선 중기 서경덕의 화담학파의 모습이 얽혀진다.전국을 유랑하는 그녀의 배포가 부럽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나이 오십에 또 다른 배움의 길을 떠난다는 마지막 모습이 뭉클하다.이 책을 읽기 전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었었다.자연스럽게 니나의 모습이 겹쳐진다.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황진이는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이전의 황진이, 즉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황진이가 그 시대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라면 이 책의 황진이 또한 우리의 욕망과 바람이 얼마간은 투영되었을터.그러나 이 소설이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몰라도 삶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왕 읽는 거 제대로 읽자 싶어 주석판을 또 샀다.책을 펼쳐보고 나서 괜히 샀나 싶은 생각이 언뜻 스친다.주석은 가독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마련이다.어찌할까 고민하다 일정한 분량마다 주석부터 읽고 본문을 다시 읽었다.처음 소설책을 읽을 때만큼 황진이의 고백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읽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처음 소설책을 읽을 땐 황진이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작가를 생각했다.한 구절 한 구절 참 정성들여 만든 거구나.처음엔 보이지 않던게 보인다.뒷부분에 실려 있는 창작 보고서와 참고문헌은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분이 생각보다 젊으신 것 같다.결코 동년배라 할 수는 없으니 부담없이 무조건 편안하다 할 수는 없지만 적잖이 공감할 수 있고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선배를 만난 기분이랄까.오랜 시절 사랑 받아오고 다시금 재창조되는 명작을 만나는 것은 기쁜 일이다.이름만으로도 경외심을 품게 하는 작가를 만나는 것은 가슴벅찬 일이다.그러나 몇 발자국 앞서 있으면서 함께 공감할 수 있고 동시대에서 다듬어지는 생생한 글들과 앞으로의 시간과 더불어 더욱 다듬어질 작가를 만나는 것은 진정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다.그가 우리글을 쓰고 우리 역사를 다룬다면 더욱 그러하다. |
| 황진이가 누구인가? 대부분 '기생'이라는 두글자를 갖다 붙일 것이다. 그러나 황진이는 생각보다 유구한 문학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학자의 면모와 유희의 극에 달하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예술적인 영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황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컸으며 그녀의 문학성을 존경해왔다. 이 책은 그 일부를 해소해 주기에 더없이 재미있는 책이었으며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 황진이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성을 더 깊게 엿보고 싶다면 '주역판'을 권하고 싶다.) 그녀의 기생이 되어야만 한다는데 반한 어릴적 부터의 강박관념이 춤으로, 노래로, 그리고 문학으로, 그리고 화담에게로 흘러드는 과정을 누구나 가진 외로움과 고독으로 빗대어 읽는다면 더더욱 내 것이 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 앞서, 고백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충분히 읽지 못했다. 그러나 첫장을 넘기는 감동이 마지막까지 이어지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말고 입을 열고야 만다. 나의 설프고도 진부한 책소개를 용서해 주길 바란다. 작가는 말한다. 역사이자 시이고 소설인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황진이의 마음으로 16세기 지식인들의 사상적, 미적 성취를 살피고 그들의 고뇌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잘못 알려진 부분(누구나 황진이를 아지만 아무도 황진이를 모른다고 한다.)을 바로잡고 잊도록 강요된 삶의 결을 하나씩 되살릴 때마다, 이 회고의 기록은 21세기를 살았던 시인 황진이의 고백으로 변해갔다고. 또, 책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장일구씨는 말한다. 소설은 결코 소설이 아니라는 역설을 어찌 해명할까. . . . 우선 소설 외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황진이가 1인칭주인공시점으로 쓰여진 이 소설. 우선 방대한 자료들에 놀랬다. 이 책은 본문보다 주석의 분량이 더 많다.(절대 주석판구입 하시길) 황진이의 심정토로들은 당시의 시조나 경문들을 염두에 두고 작가가 설정한 것들이라 과히, 이런 글이 과연 소설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많은 주석들. 몇장의 지면들을 통해 작가 자신이 연구하고 도움받은 참고서적들과 문인들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지면에 다 못실린 주석의 자료들의 출처들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다. 황진이에 대한 글을 쓰고저 그 시대의 시조와 경문집들을 얼마나 수집하고 독파하였는지, 그 저변의 노력들에 감탄을 토한다. 특히나 사라진 우리 고유언어들에 대해 아주 감칠맛나는 사용들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수첩(나의 국어사전^^)에 당시 언어들과 그 풀이들을 거푸 실어날르며 행복해했다. 잊혀진 우리말과 고풍스런 한자말들을 위해 작가는 17세기 국어사전을 통독하고 그것들을 혀끝으로 '녹였다'라고 표현한다. 다시금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록한다. 내적으로 황진이에 대한 내 주관적 견해들이 많이 바꿔졌다. 작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알고 있던 송도의 기생 황진이뿐만 아니라 그녀는 지금의 나에게 충분히 매력적이고 닮고 싶은 인물임이 분명하다.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서의 삶, 서경덕의 같은 제자로서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였던 허엽과의 교류, 그외 문인들과의 관계성, 그의 작은 외할머니와 맹인이었던 어머니, 가업인 관기출신들의 사상, 삶, 그리고 황진이의 아버지...아버지... 이런 아프고도 함부로 토로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의 정성어린 노력, 그리고 일류소설가 못지 않는 표현어구, 기법들로 지극한 아름다운 줄거리들이 짜여진다. 음, 나는 이 책을 아마, 다시 읽으면서, 더 많은 감흥들을 토로하고 싶어질 것이다. 허나, 앞서도 말했지만 통독 끝의 즐거움이 너무 큰지라, 한번 크게 숨쉬기운동을 해 본것이다. 추천하니, 많이들 읽어 보시길 바란다. 허나, 쉽게 읽으려 하려는 자는 쉽게 실망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