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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벌레 사이
누군가 나에게 옷 한 벌을 맡겨두고 갔다 하얗고 뻣뻣하게 주름잡힌 옷을 쓰다듬으며 나는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밤이면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쉴 새 없는 고통이, 방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밥을 먹던 동생이 내 방문을 잠근다 장판을 들춰보니 벌레들이 기어나온다 마디를 웅크렸다, 폈다 천장으로 낄낄거리며 기어올라가는 벌레들 장판 밑으로 하수구가 흐르다니…… 비닐봉지가 폐수를 타고 떠다니고 옷을 감추려 장롱을 열자 열지어 기어나오는 벌레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면 내 머리카락에 알을 슬어놓는 벌레들 오물에 뒤섞여, 방 안과 천장을 새까맣게, 터지고, 옷 위로 쏟아진다 새벽마다 기지개를 켜고 뛰어다니는, 섬유 사이에서 뭉개지는 벌레들 더이상은 이 옷을 가지고 있을 수 없어 누더기가 된 옷을 밟으며 울부짖는다 늙고 또 늙어야 하네 걸레가 된 옷을 붙잡고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 김성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누군가 시인에게 옷 한 벌을 맡겨두고 갔다. 하얗고 뻣뻣하게 주름이 잡힌 이 옷을 쓰다듬으며 시인은 잠이 든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옷인가? “그날 이후 밤이면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쉴 새 없는 고통이,” 밀려오는 걸 시인은 경험한다. 도대체 이 옷이 무엇이길래 이런 허기를, 고통을 준단 말인가? 밥을 먹던 동생이 방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방문을 잠근다. 방 안에 갇힌 시인이 장판을 들춘다. 벌레들이 기어 나온다. 어디서 나오는 벌레들일까? 벌레들이 마디를 웅크렸다 폈다 하며 천장으로 낄낄거리며 기어 올라간다. 자세히 보니 장판 밑으로 하수구가 뚫려 썩은 물이 흐르고 있다. 방 안에서 냄새가 나는 이유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방문은 굳건히 잠겨 있다. 비닐봉지가 폐수를 타고 떠다닌다. 누군가 준 옷을 감추려고 시인은 장롱을 연다. 장롱에서 열을 지어 벌레들이 기어 나온다.
끔찍한 상상력이다. 시인이 있는 방은 벌레들로 가득 차 있다. 프란츠 카프카가 지은 『변신』 속 그레고리처럼 시인이 벌레로 ‘변신’하지는 않지만, 벌레와 다름없는 상황에 시인은 처해 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인은 억지로 잠을 청한다. 그 사이 벌레들은 머리카락에 알을 슬어놓는다. 방 안과 천장을 새카맣게 만든 벌레들이 오물에 뒤섞여 옷 위로 쏟아진다. 이 많은 벌레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이리 나오는 것인가? 누군가가 준 이 옷인가? 옷이 벌레들을 낳는 모체인가? 그럼 누군가는 왜 시인에게 이런 옷을 준 것인가? 시인과 원수를 진 사람인가? 도통 알 수가 없다. 벌레들이 방 안을 기어 다니는 모습만 확연히 보인다. 벌레에 파묻혀 시인은 숨을 쉴 수조차 없다.
새벽마다 벌레들은 기지개를 켜며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섬유 사이에서 뭉개지는 벌레들을 보다가 시인은 “누더기가 된 옷을 밟으며 울부짖는다”. 옷은 벌레들을 낳으며 누더기로 변해버린다. 벌레들은 옷을 먹으며 끊임없이 번식하고 또 번식하는 것만 같다. 죽이려야 죽일 방법이 없다. 울부짖는 일 외에는 할 일도 없다. 시인은 “늙고 또 늙어야 하네”라고 쓰고 있다. “걸레가 된 옷을 붙잡고” 그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늙고 또 늙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벌레들이 쏟아져 나오는 옷은 늙음과 관련이 있다. 늙음이란 시간이 아닌가? 시간이라는 벌레에 온몸을 파먹히는 생명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일까? 죽음이라는 벌레가 우리 몸을 좀먹고 있는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일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까지 늙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늙는 건 죽은 게 아니다. 늙음은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 있지만 죽은 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는 엄마 뱃속을 알몸으로 나온다. 알몸으로 태어난 이에게 누군가 옷 한 벌을 맡겨둔다. 그 옷을 입고 한생을 살라는 것일까? 시인은 누군가에게 그 옷을 받은 이후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끼고 쉴 새 업는 고통에 빠진다. 허기와 고통은 욕망이다. 욕망이 있는 존재만이, 달리 말하면 생명이 있는 존재만이 허기와 고통을 느낀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허기와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셈이다. 자기 욕망에 빠진 사람일수록 한 벌뿐인 옷은 빠르게 누더기로 변한다. 욕망에 들뜬 벌레들이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산다는 건 결국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던가? 늙고 또 늙는 일은 어찌 보면 욕망에 자기를 빼앗긴 존재들이 이르는 삶의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늙고 또 늙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 잊어버리게 될까? 사람은 욕망의 덩어리가 아닌가?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려면 그러므로 우리네 한생을 지배하는 이 욕망으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한다. 욕망은 늪과도 같은 것이다.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곳에 늪이 있다. 알몸을 이런저런 옷들로 화려하게 치장할수록 그만큼 더 냄새 나는 벌레들만 많아질 뿐이다. 옷을 쓰다듬을수록 냄새 나는 벌레들로 채워지는 방을 상상해 보라. 벌레들로 뒤덮인 방 안에서 나가려면 자기 몸을 치장한 화려한 옷들을 먼저 내버려야 한다.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늙고 또 늙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걸레가 된 옷을 붙잡고 시인은 내면을 들쑤시는 욕망이라는 벌레와 마주한다. 걸레가 된 옷에서는 더 이상 벌레가 나오지 않는다. 알몸을 치장할 옷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 알몸으로 태어났으니 알몸으로 돌아가는 게 죽음이라는 걸까? 오물에 뒤섞여 천장에서 우글우글 떨어지는 벌레들이 우리네 생을 나타낸다면, 걸레가 된 옷을 걸친 몸은 우리네가 어김없이 마주해야 할 죽음을 가리킨다. 어느 게 ‘사람’이라는 존재에 어울릴까? 개똥이 지천인 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인생은 온통 고통이며 환상에 불과하다는 성인(聖人)의 말을 믿어야 할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무조건 틀리고 성인이 하는 말이라고 무조건 맞을 리는 없다. 방 안에서 벌레와 사투를 벌이는 이가 결국은 선택해야 할 일이라는 얘기다. 이 시를 거듭 읽으며 냄새 나는 벌레들로 뒤덮인 인생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늘 겪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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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보는 책의 종류는 국한적인거 같다. 거의 문학을 보는 듯하고 그 중에서도 소설을 주로 읽게 된다. 가끔 내 삶에 지치고 다른 사람의 일상이 궁금할 떄 에세이집을 펼치기도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시집은 원태연의 시집인 "눈물에 얼굴을 묻다"정도였다. 그러다가 요즘 우연한 기회로 시집이 한권씩 두권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만 보던 중에 우연히 보게 된 한 드라마가 그 계기였다. 그 드라마에서 보면 서재가 나온다. 그 서재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시집의 제목으로 표현했던 부분에서 그 시집의 제목들이 내마음까지 수놓았다. 그래서 고민끝에 시집을 몇권 구입했다. "나의 소중한, 침울한이여", "우연에 기댈떄도 있었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맑은 날", "가슴 속에 누가 걸어가고 있다" 이렇게 다섯 권을 구입해서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왠지 시집이라는 생각에 소설책처럼 읽으면 안될껏만 같은 생각에서였다. 김성규의 시집인 "너는 잘못 날아왔다" 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의 이 시집을 두고, '몽환의 수사학으로 생의 비참함을 꿰뚫어보는 개성적인 신예시인 김성규의 첫 시집. 고고학자처럼 섬세한 눈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며 행복이든 불행이든 치밀하게 들여다본 단면을 실마리 삼아 그 배후의 풍경을 그려낸다. 밀도 높은 언어와 미학적인 표현으로 경험과 상상 세계를 넘나드는 이 시집은 독특하고 저력있는 신예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라고 해설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은 내가 이정도의 감성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던거 같다. 한 사건이 발생에서 그 사건을 해결에 나가는 추리 소설과는 달리 시집은 내게 많은 감성을 필요로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으면 읽어나가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천천히 읽어가면서 생각에 잠기면서 읽던 시집의 매력을 언제쯤 알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매력에 빠질수 있을거라고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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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85 《너는 잘못 날아왔다》 김성규 창비 2008.5.30. 한 가지만 잘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할 테고, 한 가지는 도무지 못 보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잘 하는 사람이 참말 있으려나 하고 돌아보면, 좀 아니다 싶어요. 왜냐하면, 다들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으면서 살거든요. 아니, ‘나는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참으로 아픈 사람’ 말고는 숨도 쉬고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걸어다니고 눈을 떠서 보면서 살아요. 《너는 잘못 날아왔다》를 읽으며 꼭 이렇게 글을 써야 했으려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시라고 하면서 “늙고 쪼글쪼글해진 젖가슴을 만지듯”이라 말하는데, 시쓴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 생각일까요? 언제까지 이 대목에 머무르려 할까요? 시쓴이한테 시를 가르쳤다는 어른(사내란 몸뚱이였을 어른)이 이렇게 써야 시가 된다고 했을까요? 늙고 쪼글쪼글해진 뭔가 보인다면 왜 그 몸뚱이가 보이는가를 깊이 살피기를 바랍니다. 왜 자꾸 겉몸만 보려 하는지, 왜 속마음을 읽는 길하고는 멀어지는가를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잘못 날아온 숨결은 없습니다. 새는 숲에도 둥지를 틀지만 서울 한복판에도 둥지를 틀어요. 어디에 둥지를 틀든 오로지 사랑입니다. ㅅㄴㄹ 늙고 쪼글쪼글해진 젖가슴을 만지듯 / 젓가락으로 살을 집어 / 어머니 앞에 내려놓는다 /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물고기를 드신다 // 자기를 꼭 닮은 물고기와 / 물고기는 죽어가며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물고기는 물고기와/44∼45쪽) 누나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운다 / 아무거나 때릴 수 있는 게 없을까 / 담벼락에 낙서를 하던 아이들이 / 달아나며 못을 버리고, 금간 항아리 같은 여자가 / 마당으로 걸어들어간다 (하늘로 솟는 항아리/56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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