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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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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세계는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중국 문명의 발달은 중국 내부를 벗어나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완결적인 문화권이 생겨났다. 발 이것이 동아시아 세계이다. 이 동아시아 세계는 문화권으로서 완결된 세계이자 그 자체가 자율적 발전성을 가진 역사적 세계인 것이다. 23쪽   이러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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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세계는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중국 문명의 발달은 중국 내부를 벗어나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완결적인 문화권이 생겨났다. 발 이것이 동아시아 세계이다. 이 동아시아 세계는 문화권으로서 완결된 세계이자 그 자체가 자율적 발전성을 가진 역사적 세계인 것이다. 23쪽

 

이러한 역사적 문화권의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지표는 어떤 것들일까 일단 한자 문화, 유교, 율령제, 불교 등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24쪽

 

상과 주 시대에는 나중에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관계가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났다. 하나는 화이사상의 형성이며, 두 번째는 이른바 중국식 책봉체제의 성립이다. 32-33쪽

 

중국 왕조가 주변 여러 민족의 수장과 정치적 관계를 맺는 방식은 한 대에 와서야 비로소 명확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정이 완료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 과정으로서 한 대는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전한 시대의 덕치주의를 표방하는 유교적 군주관이 황제 제도와 결합하면서 화이사상과 봉건 사상이 이상화된 형태로 정치 사상 내에 정착되었다. 또 이를 통해 한 왕조는 이민족을 대하는 방침을 이론화할 수 있었고 중국 왕조와 이민족 간의 관계는 정식으로 규정되었다. 둘째, 한 왕조라는 선진적인 통일 제국이 결국 군현화라는 직접 지배의 형태를 취하면서 남방과 동방에 진출한 일은 이 지역의 원주민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그 사회가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발f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족 지배에 대한 원주민의 반항을 야기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과정에서 원주민의 정치적 사회는 더욱 성장해버렸다. 39-41쪽

 

6세기 말 수 왕조의 중국 통일은 동아시아 세계 내에서 복잡하게 얽힌 책봉 체제를 일원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를 대신하여 당 왕조가 들어서지만 역시 동아시아 세계의 책봉체제는 지속된다. 동아시아 세계가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일체된 움직임을 보인 것은 이 수당 시대에서 현저했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세계는 자기 완결성을 지닌 역사적 세계였으며 자율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 동아시아 세계가 구조적으로 성격이 크게 변한 것은 10세기 초에 당 왕조가 멸망한 이후이다. 44-45쪽

 

중국 사회는 당 말기에서 5대 10국 시기에 이르는 동안에 경제력을 성하게 발전시킨다. 농업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상업 활동은 두드러지게 활발하게 된다. 송대에는 이른바 송학이라든가 사학같은 정신 문화 활동이 성했기 때문에 이들 서적이 해상 루트를 타고 퍼져나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이러한 정신문화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도자기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들, 즉 물질문화의 우수성도 지끔까지 쌓아온 상업무역의 거대한 파도를 타고 각지에 전달되었다. 경제적 문화적 중심으로서 중국 왕조는 여전히 존재했다. 이처럼 동아시아 세계의 성격은 변했어도 그 세계는 존속하고 종래와는 달리 세계의 서민생활까지 관련한 생활문화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47-48쪽

 

송 왕조가 몽골제국에게 멸망당하자 이 동아시아 세계의 자기 완결성은 일시적으로 동요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 왕조의 성립으로써 다시 부활한다. 명 왕조에 들어와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가 강화되고 동아시아 세계의 경제와 문화의 공유관계도 이 체제를 매개로 하여 실현된다. 이 관계는 중국사상 동아시아 세계사상 최대 최강의 왕조였던 청 왕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동아시아 세계는 문화적 세계이자 경제적 세계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혹은 문화적으로도 붕괴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자본주의의 파도가 이 세계에 밀려왔던 때의 일이다. 49-50쪽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북제에 견사조공을 하고, 다음해 북제가 신라와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했다. 그 작칭이 낙랑군공이었기에, 고구려의 요동군공이나 백제의 대방군공과 어깨는 견주는 위치였고, 한 낙랑군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졌다. 여기에서 북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책봉체제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 3국이 북제에게 받은 작위는 국왕 군왕 국공에 다음 가는 제4위의 군공이었다. 그리고 작위의 이름 또한 한 위 이래 중국의 동북지방 남부에서부터 한반도까지 이르는 영역에 설치되었던 요동 낙랑 대방 3군의 명칭을 답습했다. 과거 이 지방에서 있었던 중국 왕조의 군현지배가 실패한 이후 이들을 봉국으로 삼아 다시 질서체계 안으로 재편성하려는 중국 왕조의 의도가 이 시기에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74-75

 

수와 한반도 3국과의 책봉체제가 완성되는데 그 형식은 북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책봉체제를 계승한 것이지만 남조 쪽의 조공을 병존해오는 등 이원적이었던 종래의 책봉체제가 이제 일원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후로 한반도의 동향은 이 책봉체제 내에서 전개된다. 80

 

수의 대원정은 단지 양제 한 사람의 자의 때문에 시작되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는 조야의 뜻, 즉 토벌은 중국 강역의 질서를 바르게 하며 중국사회의 예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는 당시의 일반적인 의식이 존재했다. 그것이 원정 계획을 발안시키고 대규모의 동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만약 이것이 오직 양제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러한 대동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84

 

만약 이적을 주륙하지 않고는 어떻게 중화를 다스릴꼬라고 하듯이 연개소문이 자신의 군주를 죽일 것을 책망하고 있다. 이것에서 책봉관계를 맺은 이상 번국의 질서 유지는 중국 왕조의 책무이며 번국의 질서 유지가 곧 중화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로 생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번국의 질서 유지가 중국 왕조의 질서 유지에 직결된다는 생각은 책봉체제 내에 있다면 설명 이적이라도 군신의 의를 가지고 다스려야 하고 그러한 죄를 묻는 것은 동일한 군신 관계에 있는 국내 질서의 유지와 연관된다고 여겨졌다. 100-101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위태로워진 당과 신라의 관계는 일단 불안정하게나마 신라왕의 사죄 이후 다시 책봉체제가 성립했다. 더욱이 이 재생된 책봉국 신라는 병합한 구백제령을 유지할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다음해 676년에는 당이 한반도의 직접 지배를 단념하고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에 주재하던 안동도호부를 요동고성으로 이동함으로써 온전히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영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이렇게 하여 달성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통일은 신라가 중국 왕조의 권위와 그 질서로부터 분리되어 달성한 독립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을 신라가 단독으로 대표하여 당 왕조의 책봉체제에 참가하는 형태였다는 의미앋. 그 근거로 이후의 당과 신라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으며, 신라왕이 교대할 때마다 신라왕은 새로이 당왕조에서 책봉을 받고 8세기에 와서는 매년 견사입조를 하거나 연간 두세번의 조공을 행한 것을 들 수 있다. 안사의 난의 당 현종황제가 촉에 몸을 피신하자, 756년에는 신라의 사신이 멀리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까지 가서 직접 조공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18-119

 

발해군이란 한 대 이래 하북성의 해안 지역에 속한 땅을 말하는데, 그 당시에는 창주라고 불렸다. 이 지역이 대조영의 작호가 되면서 발해군이라는 옛 이름이 다시 사용되자, 이 책봉을 계기로 진은 국호를 발해로 바꾼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발해는 신라와 함께 당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 속에 포함되었고, 이때 대조영의 첫째 아들 대무예도 계루군왕에 봉해졌다. 계루란 일찍이 고구려의 5부 중에서 중앙에 위치하는 계루부에 근거를 둔 이름으로 앞서 말한 것처럼 고구려 유민 출신의 대조영이 계루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당이 발해왕의 적자를 계루군왕으로 책봉한 것은 발해가 과거 당의 번국이었던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라는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당의 이러한 책봉은 발해의 귀족틍을 구성하는 고구려인들을 의식한 유화정책에 해당한다. 121-122

 

t****b 2013.04.0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