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 되면 매일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어야 되겠지요. 어제 싸워서 미운 감정이 남아도 얼굴을 맞대고 밥숟가락을 들어야 한다지요. 보기 싫으면 따로 밥을 먹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쨌든 가족이 되었으니 죽으나 사나 한 집에서 지지고 볶고 살아가겠지요. 처음 만난 날 차가운 눈빛을 쏘는 장모가 될 사람의 경멸을 견뎌내야 하는 건 결혼의 옵션 정도로 여기면 될까요. 이스마일 카다레의 단편 「거만한 여자」속 인물인 알레코는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딸의 어머니 무하데즈의 심문하는 눈빛을 받습니다. 무하데즈는 몰락한 고위 관리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재산과 명예, 품위를 장벽 저편에 놔두고 쫓기듯 도망 왔습니다. 그녀는 몰락한 세계의 사람들끼리의 결혼이 탐탁지 않습니다. 그들의 재산은 국외 은행에 묶여 있고 서류뿐인 공증 서류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무하데즈는 못생긴 딸에게 호감을 느낄 남자란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래, 이 애를 예쁘게 여겨 데려갈 남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 하고 노파는 생각했다. 혹 어떤 비열한 계산이 끼어든다면 모를까. 하지만 옛날식의 계산은 더 이상 통하지 않잖아. "뭐라고요, 엄마?" 딸이 반문했다. "방금 전에 네가 알려준 소식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거야. 너희도, 네 친구들도 눈을 크게 뜨고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야 할 테니까. 다만······(이 애한테 말을 해야 할까 말까? 안 될 것도 없지. 이 애도 진실을 아는 게 낫겠지·····) 다만 너도 아는 게 좋을 게다. 넌 체칠리아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어떤 공산주의자 청년의 넋을 빼놓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딸에게 넌 체칠리아처럼 예쁘진 않지만 넌 그 애보다 부자였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어머니 무하데즈입니다. 못생긴 딸에게 '저쪽'의 사람들이 순수한 청혼을 해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돌직구로 말합니다. 어느 날 딸은 '저쪽의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맴돌기 시작했다는 말을 합니다. 어머니의 첫 질문은 이렇습니다. '그 사람······외모가 어떻지?" 딸은 그가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역겹다고 합니다. 무하데즈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다고 여깁니다. 외모가 그렇다면 공산주의자 소위가 자신의 딸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알레코는 장차 장모가 될 무하데즈의 무례한 질문에도 열정적인 눈빛을 담아 대답합니다.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므로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요. 무하데즈는 알레코가 자신들의 가문이 가진 부의 환영에 사로잡혀 딸을 데려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알레코는 결혼과 동시에 당에서 축출됩니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알레코는 난방용 장작 저장소에서 하급 일자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처세술에 눈을 뜹니다. 영리하게 행동하는 것이지요. 차장급 인사들의 집에 들어가는 장작에 좋은 나무 몇 개를 넣어 성의를 표합니다. 관리들은 사소한 성의에 감동을 하고 알레코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해고의 바람이 불어도 숙청의 소용돌이가 몰아쳐도 알레코는 허름한 장작 관리소에서 몸을 엎드린 채 정치의 암흑기를 견뎌냅니다. 새로운 상사가 부임하면 기존의 상사가 가지고 있던 허물을 같이 이야기하며 친밀감을 유지하기도 하는 뻔뻔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런 채 직장 생활을 해 나갑니다. 이제는 그가 결혼으로 인해 당에서 제명되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힙니다. 집에서는 어떨까요. 여전히 무하데즈는 못생긴 사위가 못마땅합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가진 국외은행에 유치된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면전에 험담을 하면서 싸웁니다. 그런 증오심을 견뎌내기에 그들의 집은 너무 비좁았다. 무언의 협약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피해 다녔다. 그는 저녁 늦게야 귀가했으므로, 낮 시간 동안 노파는 주방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싸늘한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엔 좀 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집이 좁으니 싸워도 장모와 사위는 따로 갈 데가 없습니다. 시간을 쪼개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으로 싸움을 이어 나갈 수밖에요. 그들이 내뿜는 냉기는 더 심각해집니다. 무하데즈는 사위를 향해 지독한 폭언을 퍼붓습니다. 그가 아첨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하이에나라는 둥 딸을 데려간 이유는 자신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속셈이라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알레코는 접시를 장모의 얼굴에 던질까도 생각해 보지만 참아 냅니다. 무하데즈는 그러고는 밤을 새워가며 '당 지구장님께'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씁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혼인, 혈연, 입양으로 구성된다는 사전의 풀이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은 말입니다. 무하데즈는 몰락한 가문도 가문이라고 그것을 내세워 못생긴 알레코를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제목이 왜 「거만한 여자」인지 아시겠지요. 이 이야기에는 귀여운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거만한 여자, 무하데즈의 가족관이 소설의 마지막에 밝혀지지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어제는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다시 얼굴을 마주해야 합니다. 접시를 던지고 싶고 도마로 날려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릅니다. 참아내는 것으로 하루의 임무를 다합니다. 밤이 되면 다시 돌아와 얼굴을 바라봅니다. 지치고 가련한 어깨에 손을 올려 봅니다. 어제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요, 미안해요, 라고 말하는 순간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서둘러 사과를 하고 다정을 표해야 합니다. 가족은 함께 있어서 외롭고 힘들고 행복한 이름이니까요. |
|
변화의 시기를 통과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물론 시대가 바뀐다는 건 숨 죽이고 살던 사람들에게도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만 말이다. 결과야 그렇다 할지라도 그 시대를 몸으로 겪어내는 모든 사람들의 고충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므로 다 지나고 난 뒤에 우리가 추억하는 것들과 과정에서 실제로 겪는 일들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추억은 그야말로 낭만일 뿐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가상의 현실에 불과하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집 <광기의 풍토>에는 새로운 체제에 처한 알바니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 '거만한 여자'가 실려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고집 센 장모와 약삭빠른 사위 간의 흔하디 흔한 장서 갈등쯤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알바니아의 구체제와 공산화된 알바니아의 신체제의 대립으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공산당의 집권으로 하루아침에 권세와 영화를 잃어버리고 시골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몰락한 가문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만 했다.
옛 고위 관리의 미망인인 무하데즈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국내에 갖고 있던 재산은 모두 수용되었고 그나마 해외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지 않았던 탓에 언젠가 그 재산을 다시 차지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하데즈는 자신의 못생긴 딸을 추남인 공산당 소위 알레코 발라와 결혼시킴으로써 또 한 번의 '재기'를 꿈꾼다.
"딸이 말한 그대로, 남자는 불쾌감을 주는 용모의 소유자였다. 듬성듬성 난 머리털 때문에 얼굴이 더욱 납작해 보이는 데다, 다소 튀어나온 눈을 두리번거리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차마 보고 잇있기가 괴로웠다. 시간과 습관의 완화작용도 손댈 수 없는 혐오감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무하데즈는 확신했다." (p.122~p.123)
그러나 알레코 발라 소위는 당으로부터 축출된 것은 물론 군에서조차 파면당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파면당한 뒤 일주일 후에 무하데즈의 딸과 약속대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신부의 집에 눌러앉게 된 알레코는 마을의 난방용 장작 저장소에서 하급 일자리를 얻는다. 상품 취급 전담원이었던 그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임시로 송장 전담 일을 맡게 되었고, 직장 상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그는 금세 회계 부서의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 거기에는 기획부서 주임을 직원을 탐탁지 않아했던 부장의 생각을 알레코가 읽고 그의 생각에 동조했던 것과 마을 사람들의 우호적인 여론이 합쳐진 덕분이었다. 알레코와 무하데즈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추악한 괴물, 위선자, 엉큼한 놈! 예전엔 자기한테 무언가 굴러들어 오리라 기대하고 싹싹하게 굴며 굽실댔지. 한데 이제 그런 희망이 사라지고 나니 나한테 욕을 해도 된다고 믿는 거야. 자기 사람들을 팔아먹은 더러운 인간. 넌 날 줄곧 방해물로 여기고 있지. 두 개의 젖통을 동시에 빠는 연습을 했으니, 비굴함과 아첨으로 계속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을 거야. 넌 하이에나처럼 공산주의 지도자와 관리자 사이에 충돌이 잇는 곳마다 찾아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선 승산이 잇는 쪽에 붙어 알랑거리며 어떻게든 더 많은 이득을 챙기려 하지. 그렇게 해서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성공할 수도 있겠지." (p.163)
그러나 알레코가 승승장구를 할 때는 무하데즈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가도 숙청의 칼바람이 불어 납작 엎드려 있을 때에는 수그러들곤 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성공을 이유도 없이 미워하곤 한다. 일종의 질투일 수도 있고 열등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다. 무하데즈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무하데즈로서는 사위의 성공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해 여름을 나면서 괴롭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살아 있는 동안 간혹 폭풍우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며 몸을 낮춰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p.139)
그러나 알레코의 성공이 마냥 못마땅하고 누구보다도 사위를 미워하는 듯 보였던 무하데즈의 속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노파가 친구에게 심중의 생각을 그대로 고백한 바로는, 사위와 자기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 됐든 사위 역시 이제는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 또 여하한 경우에도 집안의 수치를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p.166)
우리가 이따금 착각하는 게 있다. 갈등이란 언제나 집단과 집단, 세대와 세대 사이의 대규모 단위로 벌어지는 충돌쯤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만한 여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체제를 대표하는 알레코와 구체제를 대표하는 무하데즈의 충돌처럼 갈등은 지극히 사적이며 개별화된 사건이라는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레코의 아내가 소설 속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개별적인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 현상을 이룰 뿐이지 커다란 사회 현상 속에서 개인의 갈등이 노골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도 수구꼴통만 있는 게 아니고 진보주의자 중에도 이념적 좌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위 '일반화의 오류'는 어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지극히 위험하다. 소설에서 알레코가 장모 무하데즈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
|
취향의 문제 개인의 취향 따위 무시하는 동서고금의 자녀교육은 유년기와 아동기에 가장 극심해져서 그 자녀가 2차 성징기에 이를 쯤 가능한 삐뚤어지고 싶은 욕망을 북돋는다. 그러다 "누가 함부로 내 방 치우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인다는 것은 이제 껌씹을 때 하관 꽤나 들썩일 만큼 머리가 컸다는 것. 훈계라도 할라치면, 고개는 수직하강하여 괜히 바닥이나 차고 짝다리나 짚고 있는, 녀석의 고관절을 바로 잡고 싶어지는 것은, 그렇다, 동서고금의 모든 부모 마음 아니겠는가. 어디서 들은 얘긴데, 또래보다 유독 발육이 남달랐던 어떤 초등학생에 관한 일화가 있다. 신체적 변화에 발맞춰 질풍노도에 빠르게 진입했더랬는데, 그날도 "콩나물국에 콩나물이 제일 싫어!" 반항기를 한껏 뽐내며 저녁 밥상을 박차고 뛰쳐나가 근방 야산에서 삐라나 주울 생각으로 방황하였다. 해는 저물고 자식 놈의 버릇을 고쳐주겠다 마음 먹은 부모들은 일찌감치 밥상도 치우고 사립문은 걸어둔 채 찾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정교육에만 집착했던 우리 부모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당시는 1968년, 바야흐로 무장공비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반항기 넘치는 어린이는 자신의 신체조건만을 믿고 단행한 야밤 산행이 아무래도 무리인 듯 싶어, 이쯤 됐으면 부모도 반성하고 다시는 콩나물국 따위 끓어주지 않겠거니 믿고 돌아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부스럭 인기척이 들려오더랬다. 크게 놀라 괴성을 지르고 손에 짚이는 것은 모조리 집어 던지면서 귀신이냐, 사람이냐, 물어도 대답이 없어 제길, 귀신이구나. 그냥 콩나물 먹을 걸, 때늦은 후회를 해보는 것인데 편백나무 뒤편에서 쓱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들고 있는 게 지게 작대기는 아닌 걸로 보아 장총쯤이나 되었을 거다. 그렇다, 빨간 비디오만큼은 아니지만 호암마마에 버금가는 무장공비였던 것이다. 발육이 실한 남조선 어린이를 목격한 공비 역시 당혹스러웠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둑어둑한 산길에서 그림자로만 보기엔 웬 장성한 사내인가 했으나 변성기도 아직 지나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보니 잠깐 마음이 편해졌을 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울컥 북조선에 두고 온 동생을 생각했을까. 성능 좋은 칼빈 소총을 비껴메고 걸어간 이 공비, 어떤 호의에서 그랬는지 인민군복을 뒤적거려 사탕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린이는 자신의 손바닥과 공비를 번갈아 쳐다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다. 그러니까 낯선 사람이 주는 것을 함부로 먹지 말라던 제 부모의 가르침과 아무리 재빠르게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도 총알이 먼저 와 닿을 것 같은 이 불안감 사이에서 최선의 선택지를 고민해보았다. 어린이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공비가 다시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권하고, 그것을 재촉하는 줄로만 알았던, 신체조건은 조숙했으나 위기관리능력은 제 또래보다 떨어지는 편에 속했던 우리의 남한 어린이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실언을 해버렸던 것이다. "저는 콩사탕이 싫어요." 공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이 종간나 에미나이? "저, 저는. 콩사탕이 싫어요" 이 모든 게 취향의 문제였다. 어떤 사람은 콩사탕에 환장하여 치과치료와 맞바꾼다 할지라도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권장량을 넘겨 섭취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린이는 콩이라면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랬을 뿐인데, 고작 콩사탕 때문에. 어떤 시대든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취향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질문에 무작정 솔직해서는 안된다거나, 내문서 안에 찌르레기 폴더를 가족과 공유할 수 없는 사연이라든가, 혹은 오랜만에 모인 동창모임에서 우리집 구독신문과 지지정당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지극히 사적일 것 같은 이 취향의 문제가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데 얼마나 유용했던가. 좁게는 동호회에서 넓게는 특정한 정치세력이거나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가 그랬다. 문제는 결속력을 강화한 취향이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클래식이 좋아 클래식 동호회에 들었다가, 펑크락도 좋아서 펑크락을 듣는 회원에게 어쩜, 교양머리 없게 그런 걸 들어, 비아냥거리는 꼴이다. 집단의 취향은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일수록 효율적이고 단단하다. 콩사탕 따위 함부로 싫어할 수조차 없도록. 『광기의 풍토』는 콩사탕만 먹을 수 있던 그 시절 알바니아의 이야기다. 40년 간의 격차를 두고 씌어진 탓인지 조금씩 다른 스타일의 세 편의 단편소설.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있는데, 뭐랄까 엄용수 같은 느낌의 유행타지 않는, 그러나 포복절도 시키지는 못할 개그감. 중국스타일 개그도 약간. 일종의 허삼관스러움. 「거만한 여자」의 경우, 장모와 사위 간의 갈등이 주를 이루고, 정작 아내는 결혼식 후 언급되지 않는 기묘한 결혼생활을 읽는 재미가 쏠쏠함. 아내가 박색이라고 무시하는 경향 있음.
이승복 어린이 알바니아 버전이 궁금하신 싶은 분들께 권장 그밖에, 중국소설 취향인 분들께 추천
|
|
요즘엔 책을 읽다 보면 종종 나의 좁은 세상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 모습은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 매일 들려오는 소리, 매일 만나는 같은 사람들 속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보게 되는 나의 세상이겠다. 이스마엘 카다레, 처음으로 접해보는 알바니아 작가다. 막연하게 알고 있는 동구권 나라 중의 한 나라처럼 이들도 우리 한국을 어쩌면 그렇게 알고 있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삶을, 그들의 유령을 그래서 조금 엿보게 되었다. 이 작품집에는 <광기의 풍토>, <거만한 여자>, <술의 나날>, 세 작품이 실려 있는데, 첫 작품부터 풍기는 그 독특한 분위기에 빠졌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는 가족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나레이터인 어린이가 있다. 한편에선 과거의 유령을 그리워하고 그 옛 유령들은 겨울의 문턱을 어슬렁거리고 ‘나’ 말고는 유령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밤이면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더 많은 생각이 우글댔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변장을 한 광기가 교묘히 스며들어 있었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새로운 체제로 인해 쫓겨난 구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노파가 있고 새로운 군대에서 소위지만 너무나 못생겼고 노파의 너무나도 못난 딸이 있다. 와중에 소위는 군대에서 쫓겨나고 노파의 그 못난 딸과 결혼한다. “노파는 경멸 서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한 경멸의 대상은 다름아닌 신부나 사위, 예식, 이런 것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 모두를 뭉뚱그려 멸시했으며, 거기에는 자신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 노파는 생각했다. 그것이 마치 딸의 책임이라는 듯 다소 짜증을 내면서. 딸의 세련되지 못한 용모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매력은 고사하고 얼굴에서 지성미의 흔적 또한 찾아보기 힘들었다. 딸에게 호감을 느껴 잠시나마 마음을 빼앗길 남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성싶었다.” 그들은 어쨌든 한 가족을 이루며 산다. 어쨌든간에. 그러나 노파는 만족하지 못하고 사위는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사회에서 문제를 안 일으키며 살고자 애쓴다. 사위가 미워둑겠는 노파는 사사건건 사위를 물고 늘어지고 사위는 비굴하게든 아첨을 해서든 그 사회에 그 가족에 적응하며 살고자 한다. 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편 신비스러워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또 한편 그 역사, 그 당시의 분위기, 그 사회,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다시금 생각해볼 수밖에. 어느 사회나, 어느 세대나, 어느 나라나 그런 격동, 그런 권태를 겪기 나름인지도 모르지만 역시나 다른 분위기,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
|
제목 그대로 만났는데, 실제 작품은 느낌이 좀 다른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갖고있는 단어를 이해하는 능력의 문제일수도 있겠고. 제목만 봐서는, 좀 섬뜩하기도 하고, 한여름에 읽을때, 뭔가 있을 것 같다. 또 책표지도...
작품은, 공산주의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조금 알고 읽어야 한다. 아니, 그럴 경우 조금더 재미있게 혹 진실에 가까운 감상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할까?
글자만 읽어내는 독서는 겨우 할 수 있었지만, 작가가 진정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전혀 파악되지 못한 책읽기가 아니었나 한다.
두번째로 만난 작가의 작품이건만, 여전히 내게는 생소하고 쉽게 다가서기 힘든 작품, 그리고 작가였다.
속속들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관심갖고 지켜보고 싶기는 하지만, 이해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다른 책들을 곁들여 읽어봐야 할 것만 같다.
세 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작품집이고.
"광기의 풍토"외에 "거만한 여인" 그리고 "술의 나날"이란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꼬마의 시선으로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는 얼마전에 읽은 작품도 떠오르게 했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꼬마가 더 영특하다는 느낌을 줬다. 시대적 배경에 따라 아이의 시선도 다를 수 있다는 뜻일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거만한 여인"은 풍자적인 느낌을 주고, "술의 나날"은 젊은 날의 객기를 엿보게 한다.
확실히 이전에 읽은 작품보다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지만, 선호하는 작가가 되기엔 갈길이 먼 것 같다. |
|
마녀가 나타났다. 마녀다!!! 때려 조져야 한다. 돌이든 똥이든 황산이든 손에 잡히는대로 던지고 뿌려서 묵사발을 만들자. 마녀가 나타났다. 마녀를 처단하는 것이 정의다. 자유다. 민주주의다 !!!
바로 이것이 광기다.
그냥 광기가 뭘까를 생각하다 광기가 발동했나보다.
이 책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 3자적 입장에서 이 책을 보면 차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순진한 소년의 눈으로 알바니아의 정서를 풀어간다. 그 속(알바니아의 여정)에서 있어보지 못한 사람이 읽기에는 피상적이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소년이 묻는다."할머니, 우리카다레家 사람들이 정말 미치광이인가요?" 할머니. "이 도시 사람 절반이 다른 절반을 두고 그렇게 말하지. 그러니 넌 다른 일에나 신경쓰렴!" 작가 카다레의 입장에서는 절반이 절반을 미쳤다고 하는 그 상황을 정신분열적 광기로 보았다. 단편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詩보다 어렵다. 거두절미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 살고 있던가 상황적 맥락을 다 이해한다면 소설도 이해, 공감할 수 있을 터인데... 노신의 <광인일기>가 그렇지 아니한가? 읽고 또 읽어도 당췌 그 취지를 알기가 애매모호하니... 이 책도 알바니아인들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게 아닐까? '임종을 맞은 할아버지 바바조... 그는 분명 알바니아의 수수께끼를 모두 다 알고 있지만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도록 신이 가로막고 있다.' 이스마엘 카다레라는 신기한 작가, 그의 책을 한두권 더 읽어 볼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