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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며칠 동안 메데이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합니다만, 그래도 기왕 시작한 것, 마무리는 지어야겠죠. 그래서 코린토스를 떠난 메데이아는 어디로 갔는가, 말하자면 메데이아의 후일담입니다.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할아버지인 태양신 핼리오스가 보낸 불의 전차를 타고 코린토스를 벗어납니다. 그리고 아이게우스가 다스리는 아테네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요. 에우리피데스는 추방령을 듣고 절망에 빠진 메데이아를 델포이에서 신탁을 듣고 돌아오는 길이던 아이게우스와 만나게 합니다. 그러니까, 코린토스를 떠난 메데이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이게우스의 이야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죠.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의 운명은 미로처럼 꼬여 있는 인생 그 어디쯤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아이게우스의 부인이 누구인지는 신화 속에서도 밝히고 있지 않은데, 델포이의 신탁을 받기 전까지 그는 두 번이나 아내를 맞아들였지만 자식을 얻지 못합니다. 원래 동생들과 나누어 통치하자던 약속을 어기고 영토를 독점하였기에, 후사가 불안한 그는 자식이 없는 것이 늘 근심입니다. 신탁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게우스는 트로이젠의 왕인 친구 피테우스를 만나게 되지요. 친구가 받은 신탁이 영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은 피테우스는 그날 밤 친구의 잠자리에 딸 아이트라를 밀어넣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보물을 훔치러 온 이아손의 여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아버지를 등지고 연인을 따라나선 메데이아의 존재가 도드라져서 그렇지, 신화나 역사 속 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응하기 위해 불려나오는 존재들이죠. 그래서 후대의 창작자들이 여성이기 이전에 독립된 주체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메데이아나 엘렉트라, 안티고네 같은 인물들에 주목했나 봅니다. 여튼 아이게우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이게우스는 아이트라에게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나중에 성년이 되면 찾아오라고 증표를 남기고 떠납니다. 증표라 함은 신전의 기둥 아래 부러진 칼을 묻어놓고 아들이 그 칼을 가지고 찾아오면 자신이 간직한 남은 반쪽과 맞춰보는 거였지요. 이는 유리왕이 아버지를 찾아간 이야기와도 유사한데, 동서를 막론하고 영웅의 아버지 찾기는 이렇듯 같은 흐름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에우리피데스가 삽입한 메데이아와 아이게우스의 만남은 이 아이게우스와 아이트라의 동침이 있은 다음일 겁니다. 코린토스를 떠난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를 따라 아테네로 가서 왕비가 되는데, 그녀의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 중 하나인 테세우스가 곧 아버지를 찾아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테세우스가 아테네 땅에 나타났을 때, 메데이아는 직감적으로 그가 남편의 아들임을 알아차립니다.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메도스를 두었는데, 테세우스가 나타나는 순간 자기가 애써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된 거죠.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리왕의 설화에서는 동명왕의 두 번째 아내인 소서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나는 것과는 달리, 메데이아는 남편의 아들을 독살함으로써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운명을 달리한다면 테세우스의 이름이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기록되지도 않았겠지요. 테세우스가 메데이아가 건네는 독주를 마시기 직전, 아이게우스는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메데이아는 다시 아테네를 떠나는데, 이후의 신화에서 더 이상 메데이아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메데이아는 사라지고 없지만 테세우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이 이야기도 매듭지을 필요가 있겠지요. 순조롭게 왕세자가 된 유리왕의 이야기와는 달리 테세우스에게는 시련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크레타의 영향권 아래서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던 아테네는 해마다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제물이 될 젊은 남녀 각 7명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우리도 공녀를 보내라는 중국의 요구에 시달려본 역사가 있고 환향녀 같은 시대의 희생양들이 있었습니다만, 산 목숨을 제물로 보내야 하는 아테네 사람들의 근심은 보통 정도가 아니었겠지요. 테세우스는 자신이 그 제물로 바쳐지는 젊은이들 가운데 섞여 들어가 괴물을 처단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고 자임합니다. 아이게우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들을 보내며 실패하면 지금 달고 가는 검은 돛을 그대로 달고 오되, 성공하면 흰 돛으로 바꾸어 멀리서도 결과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라고 이릅니다. 크레타 왕 미노스에게는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영어로는 페드라라고 표기하지만 역시 백과사전의 표기를 따릅니다)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영웅이 가는 길에 미녀가 빠질 수 없듯이, 이 두 공주는 배에서 내리는 늠름한 테세우스를 보고 연정을 품게 됩니다. 메데이아가 이아손에게 반했듯 두 자매도 테세우스에게 마음을 주는 바람에 운명을 그르치는, 영웅을 사랑한 딸들의 배신은 신화 속에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거지요. 위에서 유리왕 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만, 그의 손자인 호동왕자에게 반해 아버지를 배신한 낙랑공주 이야기도 많은 창작자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소재고요. 자매의 사랑을 무게에 달아 비교할 수는 없었겠지만 언니인 아리아드네 쪽이 좀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어 괴물이 사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녀의 도움으로 괴물을 처치하고 미로를 빠져나온 테세우스는 목숨을 잃을 뻔한 아테네인들을 구하고 자매를 데리고 크레타를 탈출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낙소스 섬에 잠시 들르게 되는데, 문제는 여기서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 그녀를 두고 떠났다는 것이죠. 여러 판본이 전하는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데요, 일설에는 낙소스 섬의 주인인 디오니소스가 아리아드네에게 반해 그녀를 달라고 테세우스에게 청을 넣었다고도 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자매 중 한 사람만을 데려가야 한다는 아테나 여신의 신탁을 받은 테세우스가 파이드라와 사랑에 빠져 언니를 버렸다고도 합니다. 테세우스는 돌아가면서 아마존을 정복하고 여왕 히폴리테와 결혼해 아들 히폴리토스를 얻게 되지요. 테세우스와 결혼한 것은 히폴리테라고도, 또는 히폴리테의 동생 안티오페라고도 전해지지만, 또 다른 일설에는 그녀가 트로이젠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떠났다고 합니다. 복잡한 인명과 지명이 마구 뒤섞여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트로이젠은 이 포스트의 도입부에서 아이게우스가 친구 피테우스를 만나 그의 딸을 취한 그곳입니다. 이로써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데, 크레타에서부터 줄곧 파이드라를 곁에 두고 있던 테세우스가 히폴리테와 결혼하고 아들을 얻은 뒤에야 파이드라가 히폴리테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 흐름은 뭔가 어색하죠. 다른 판본에 따르면 파이드라의 오빠 데우칼리온이 크레타의 왕이 된 뒤, 아테네와의 수교를 위해 파이드라를 테세우스의 아내로 주었다고도 합니다. 데우칼리온은 이아손의 아르고 호 원정에 함께 한 전사이고 다른 판본에서는 데우칼리온이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괴물을 죽이고 크레타 섬을 떠날 때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고도 전합니다. 신화의 이야기란 그 긴 실타래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늘 복잡하게 엉켜들고 말아요. 파이드라와 테세우스, 그리고 그의 아들 히폴리토스와의 삼각관계 역시 많은 작가들이 사랑한 소재인데요, 우리에겐 라신의 비극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하겠습니다. 벌써 메데이아의 이야기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군요. (조지 프레드릭 워츠,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1875년) 아이게우스의 이야기로 포스트를 시작했으니 아이게우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전하는 것으로 포스트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아이게우스가 아들을 크레타로 보내며 당부한 말, 기억하시죠? 괴물을 없애는 데 성공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꿔 달고 오라고요. 이 검은 돛과 흰 돛의 모티브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지요. 젊은 영웅은 모험의 흥분에 도취되어 아버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맙니다. 절벽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아이게우스는 검은 돛을 올리고 가까워지는 배를 보자 아들이 임무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실패는 당연히 아들의 죽음을 의미하고요) 바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에게해는 '아이게우스의 바다'라는 뜻이지요. 포스트는 메데이아의 코린토스 탈출에서부터 이어지지만 본문 안에 소개된 책은 페르세우스와 테세우스 두 영웅의 모험담을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테세우스보다는 페르세우스 쪽이 더 모험담으로는 흥미롭지만, 글쎄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이 이야기를 할 날도 오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