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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원작으로 삼은 소설이 있다. <마지막 증언> 등으로 한국에서도 꽤 인지도가 높은 존 카첸바크의 작품인데, 처음에 전쟁물인 줄 알고 영화를 고른 관객이라면 좀 당황스러울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장르작가로서 카첸바크의 개성에 대해 익숙하다면, 전쟁물의 탈을 쓰고 있어도 그만의 스타일이 곧 드러나리라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제목에 '전쟁'이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전쟁 장르로 찍는 건 단순한 생각이 아닌가? 살벌한 부부싸움을 다룬 <장미의 전쟁> 같은 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예컨대 피터 오툴 주연의 <머피의 전쟁>처럼, 우리에게는 꽤나 낯선, 개인 이름 뒤에다 '~의 전쟁'이란 어구를 붙이는 건 명명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자주 시도되었다. '~의 전쟁'은, 명령이나 법규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온 게 아니라, '이 전쟁은 (이제) 나의 전쟁이 되었다!'라며, 말하자면 '비즈니스가 아니라 퍼스널이 되어 버린' 역동적인 개인의 동기,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품이 많고, 이들은 상당수가 또 전쟁을 배경으로 삼기에, 꽤 잘된 작품이라면 전쟁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예를 자주 보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명작에 속하는가? 꽤 괜찮지만, 사실 우리는 미디어와 컨텐츠의 홍수 속에 사는 중이라서, 기존 창작물의 이런저런 요소로부터 넉넉한 영향을 원튼 않든 홍수처럼 입는 터라, 열렬한 소비자이기만 한 처지에서도 '이 정도는 나도 지어내겠다' 같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그런 작품에서는 별다른 외경을 못 느끼는 게 솔직한 반응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수수께끼의 살인극, 범인은 으레 동기가 충분했던 누구로 지목되고, 이 '이지 빅팀'을 향해 흔한 마녀사냥과 린치가 벌어지기 직전이지만,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명문 로스쿨 재학생(아직 변호사가 아니며, 장교 신분으로 입대하였다가 현재 포로로 끌려 왔음)에 의해 군사재판이 열리게 된다.
재미있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이것은 피고인의 권리입니다! 반드시 재판이 열어져야 하며, 안 그러면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죠! 흑인이 열등인종이라고 해서 나치는 이런 식으로 저 사람을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죠?' '오, 그래? 니네 위대한 미국에서는 잘도 그래서 흑인을 부르는 다른 이름까지 정해 놓았나 보군? 앨라배마 같으면 바로 정식 재판이 개정되었겠음을 나도 믿어 의심치 않아.' 마지막 줄은 비꼬는 뜻이다.
미스테리가 낄 여지가 없을 것 같은데 보는 중에 결국 미스테리의 익숙한 길로 빠져들게 하는 게 이 영화(라기보단 원작 소설)의 묘미이다. 콜린 패럴이 꽤 젊은 얼굴이고, 콜린 패럴 말을 할 것도 없이 브루스 윌리스부터가 아직은 액션을 찍어도 될 만큼 젊다. 독일군 대령 역을 맡은 마르첼 유레시는 내가 지난 8월 3일 리뷰를 쓴 <피스메이커>에서 이지적이고 고독한 피아니스트 겸 스포일러를 맡았던 바로 그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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