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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랑’의 환한 빛-허형만 『눈 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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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랑’의 환한 빛  -  허형만 『눈 먼 사랑』     허형만의 『눈 먼 사랑』(시와사람, 2008)은 사물의 감각에 눈 뜬 존재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사물과의 사랑에 눈이 먼 존재는 저마다의 사물들이 뿜어내는 감각의 빛에 둘러싸여 있다. 사물은 고유의 리듬으로 사물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사물의 리듬을 감각하는 시인은 사물들의 고유한 리듬(삶)을 직관하며 시인 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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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사랑의 환한 빛

 -  허형만 『눈 먼 사랑』

 

 

 

허형만의 『눈 먼 사랑』(시와사람, 2008)은 사물의 감각에 눈 뜬 존재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사물과의 사랑에 눈이 먼 존재는 저마다의 사물들이 뿜어내는 감각의 빛에 둘러싸여 있다. 사물은 고유의 리듬으로 사물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사물의 리듬을 감각하는 시인은 사물들의 고유한 리듬()을 직관하며 시인 고유의 시적 현재를 일구어낸다. 등 푸른 그리움이라는 짧은 시를 보자. 시인은 풍경 소리를 듣고 있다. 어느 고요한 산사(山寺)에서 내밀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는 적요의 강을 치솟아오르는 저 등 푸른 그리움 한 마리라는 이미지로 변주되어 시인의 온몸을 짜릿하게 울린다. 풍경의 내밀한 소리는 시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 시인의 온몸을 행복감으로 들뜨게 한다. 온몸으로 사물과 마주할 때 사물은 자신의 심연을 열어 시인의 온몸을 받아들인다. 눈 먼 사랑의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이 시에서 시인은 온몸으로 세상의 사물들과 마주하는 존재의 행복감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에 눈이 먼 존재는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는 항상 하심(下心)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 사랑에 눈이 멀 수는 없으며, 자신을 낮추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 나이가 되니 / 땅바닥의 봄까치꽃 앞에서 / 무릎을 조아리게”(下心) 된다고 이야기한다. 고개를 조아리는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대상화가 불가능한 절대적인 사물로 시인의 앞에 서게 된다. 대상화란 시인의 의도대로 사물의 의미를 재단하는 것이 아닌가. ‘의도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 대상화는 사물을 하심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 고유의 리듬을 배제하고 사물을 대상화하는 존재(주체)의 리듬만이 부각된다. 허형만은 이런 대상화의 역방향 자리”(뒷모습을 찾아서)에서 사물을 바라보려고 한다. 역방향의 자리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 참 황홀한 광경에 눈시울이 젖는다”(같은 시)고 시인은 말한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것은 그러므로 역방향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물의 보이지 않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역방향의 정신은 허형만의 이 시집을 관류하는 시적 태도라 할 수 있겠다.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룬 동굴이 있습니다

그 동굴에는 눈이 먼 사랑이 살고

그리움이 살고 아픔도 살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눈 먼 사랑을 잡아먹고

아픔은 그리움을 잡아먹고 삽니다

 

눈 먼 사랑이여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 떨어질 때마다

그 파동으로 울음 우는

서러운 짐승이여

- 눈 먼 사랑전문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룬 동굴이 있다. ‘강을 이룬 동굴은 동굴이지 강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동굴에 습기가 있으므로 당연히 물방울이 생길 것이고, 그 물방울이 떨어져 동굴 바닥을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물방울이라는 사물에서 강에 대한 그리움을 엿본다. 시인은 강에 눈이 먼 물방울의 삶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물방울에게 강은 자신이 도달해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일 수 있다.

 

하지만 동굴이라는 한계지점에 갖힌 물방울에게 강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움이 아픔과 이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강에 눈이 먼 사랑의 존재(물방울)는 하염없이 강을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의 대가로 끊임없이 아파해야 한다. 사랑에 눈이 먼 물방울이 동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는 파동(울음)은 그래서 서러운 짐승의 소리로 나타난다. 서러운 짐승의 파동은 물(방울)이 고인 동굴 바닥을 바라보는 시인의 온몸에 파동으로 전해진다. 물방울이 처한 상황은 실상 시인, 나아가서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아파하는 존재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눈 먼 사랑으로 표출되는 그리움과 아픔의 시적 상황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한번쯤은 겪게 될 운명적 삶으로 의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이 있어도, 그 그리움이 온몸을 아프게 해도 살아 있는 존재는 여전히 살아야 한다. 그리움과 아픔이 존재의 운명이라면,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삶 역시 존재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주라는 수틀 위에서 꽃잎들이 하롱하롱 수를 놓는”(수틀) 것처럼, 삶의 운명이라는 수틀 위에서 살아 있는 존재들은 저마다의 꽃잎을 피워야 한다. 바람결과 어울려, 햇살과 어울려 하롱하롱 수를 놓는 꽃잎들”(같은 시)을 보며 산다는 것은 바로 저런 거다라고 깨닫는 시인의 마음 속에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사물의 파동은 그 사물들의 고유한 파동이면서, 동시에 타자를 향한 파동으로 이어져 우주를 사랑의 우주로 만들어낸다. “홀로 남산을 걷노라면 / 한 평 남짓 적요함도 넉넉해서 행복하다는 시인의 행복감은 사물들의 수많은 소리들로 둘러싸인 남산의 시적 상황이 아니면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십 이층 창으로

바라보는 뒷산 숲속에는

둥지를 튼 소리들이 산다

세상과의 인연은 멀어

청청하게 살아가는 소리들이 산다

오늘도 새벽녘

쌀을 씻다가 보았다

은피라미떼 몰려들 듯

오글오글 몰려드는 어린 햇살 앞에

조배를 올리는 소리들

반짝반짝 빛나는 그 소리들이

하이얀 쌀 속에서 수런거리고 있음을

- 소리들전문

 

사물들의 소리는 신성(神性)을 담고 있다. 세상과의 인연을 멀리 한 채 청청하게 살아가는 소리들은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시인에게 신성의 소리로 다가온다. 소리들이 어린 햇살 앞에서 올리는 조배는 신성한 소리들로 엮인 세계의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하이얀 쌀 속에서 수런거리고 있는 소리는 새벽녘에 하루를 시작하는 시인을 신성의 세계로 이끈다. 신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온통 고마운 대상들로 넘쳐난다. “제 한 몸 공양하는 목숨”(쌀 벌레 한 마리)인 쌀 벌레 한 마리가 고맙고, “뭐 하냐 밥 먹자고 말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계셔 행복하다는 제자들(한 둘)도 고맙다.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다. 이 시집 곳곳에 드러나는 감각의 세계는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시인의 세계인식에서 비롯된다. 나이가 들며 사물 하나하나에 더욱 더 정을 느끼는(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시인의 마음이 사물들의 환한 빛을 향한 눈 먼 사랑의 열정을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o*****s 2018.02.16.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