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워 2』는 1968년의 혁명(혹은
혁명의
열망)이 사그라든 그 시점부터 시작한다. 그
방향성은
달랐지만
서유럽이나
동유럽이나
변화의
열망은
컸지만, 어떤 이유로든 그 열망은 꺼져버리고 만다. 『포스트
워 2』는 그 열망이 꺾인 이후 유럽의 무기력함과 그 무기력함을 이겨내려는 노력, 그리고
이어진
느닷없는(?) 질서의 재편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포스트
워 2』는 1989년의
대격동의
시기가
정점인
셈이다. 사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저 부록처럼 느껴진다.
1989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지금에서 보면 필연적이라 여겨지지만 굳이 그 시기일 필요는 없었던 사건들의 연속으로 유럽은 새로운 유럽이 되었다. 1989년
몇
년
전이라면
그
몇
년
후
그들의
질서가
그렇게
재편되리라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1989년의 사건으로 동과 서로 구분되었던 유럽은 그 구분의 근거가 되었던 이념적 구분이 사라졌다(정말로
그
이념에
충실했다는
전제에서이지만, 결코 그 이념에 충실했다는 전제는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동과
서는
여전히
서로
구분이
되고
있다. 유럽은 넓어졌으되, 다시
좁아졌고
유럽의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토니 주트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게 질문의 형태를 띠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질문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렇지만 명백히 그것들은 질문이다. 유럽이란 무엇인가? 유럽인이란 어떤 사람까지 포함하는가? (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의 청산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가?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며, 과연
우리는
용서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일까? 다원주의와 동질감은 무엇이며 무엇이 우선인가? 유럽연합(EU)는
해답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결국은
역사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헤매며 읽다 문득 스스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왜 유럽인가? 그가 유럽(영국) 태생이기 때문에? 그게 결코 틀린 답은 아니겠지만, 생물학적인
답변은
될
수
있을지언정
만족스런
답도
아니다. 게다가 그는 결국은 미국으로 떠나간 사람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분명히 편협된 시각이긴 하지만 세계사를 좌지우지했던 그
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힘을 잃어가는 과정과 분열과 통합의 움직임 속에서 다시 그 힘을 되찾고자 바둥대는 모습을 토니 주트는 그려내고 있다. 유럽은, 그
유럽은
오랜
역사
속에
존재하는
지역이자
문화이자, 세력인 셈이다. 그렇기에
현대에서
의미가
지역적인
것으로
격하되지
않고, 세계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듯하다. 토니
주트는
바로
미국이
아니라
그
유럽에서
어떤
답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토니 주트는 유대인이다. 결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
자신
학문의
중심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에필로그를 보면 그는 분명 유대인이었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당연히 전후 유럽의 역사를 그리면서 유대인에 관한 얘기가 중심에 서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래서 이렇게까지 쓰고 있다. “홀코코스트에 대한
인식은
현대
유럽에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1306쪽)
그러나 이 말은 곱씹어야 한다. 단순히
유대인에
대한
인식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하고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다짐 없이는 현재에 편입될 수 없으며,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역사는 계속 쓰여져야 한다고 한다. 기억은
늘
비대칭적이다. 누구의 기억이냐에따라 기록되는
역사는
달라진다. 기억은 비대칭적임과 동시에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왜곡은 비대칭적 기억의 상대편 쪽의 시각이기 때문에 왜곡에 대한 비판은 입만 아프다. 따라서
비대칭적
기억
자체를
인정(옹호가 아니다)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역사는
새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계속 써야 한다는 것은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한다는 것과 거의 상응되는 말이다. 역사는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어느 시기에 그 역사를 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
읽고
써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강요할 수 없는 것이기에. |
|
역사책을 볼때면 저자의 사관을 추정하게 되는데 가장 쉬운 기준은 소련과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토니 주트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 저항 지식인, 68혁명등에도 철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유지한다. 균형감을 유지하긴 하지만 너무 냉소적이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과거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 이책의 에필로그는 홀로코스트로 마무리짓고 있지만, 지금은 그때의 희생자들의 후손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학살하고 있다. 유럽인이 20세기 전반에 자초한 집단적 불행의 규모 자체는 강한 비정치화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파시스트 정당이나 공산당이 일상적인 생존의 어려움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고, 경제가 집단행동의 목적과 언어로서 정치를 대체하며, 가내 오락과 소비가 공적인 일에 대한 참여를 대신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 396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