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진보적이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지금의 삶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가끔 직장생활이나, 나의 사생활을 보면 진보나 보수를 떠나 삶의 " 된 사람 " 이 갖추어야 할 성향을 보이면서 살고 있나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즉, 정치적 성향과 시대적 환경앞에서 어쩌면 "개인의 결단" 이 모아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아마, 세상을 진정 변화시키는 것은 종교적 초월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래서인지 문부식이라는 과거 신학생의 지금은 40대가 넘은 그의 글이 와닿는지 모른다. 세상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일부언론에서 광주에 대한 이야기만 실은 것으로 했는데, 실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표현력이 상당히 깊어서 왠만한 독서량 없는 사람은 안보는 게 낫을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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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메마른 성정을 소유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문부식 씨가 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을 읽으면서 며칠을 끙끙 앓아야 했다. 펑펑 울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앞쪽의 글들은 저자의 성찰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지만 뒤쪽 부분들, 서 승, 윤이상, 김경환에 대한 글에 이르러 코끝이 찡했다. 보통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책은 신파조의 소설 아니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감동의 휴먼스토리’ 정도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패배의 기록이며, 불꽃같았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온 한 지식인의 자기반성의 책이다. 패배와 반성의 책이 메말라 있던 내 심정을 자극한 이유? 첫째, 나는 이 책에서 한 때 유행처럼 번졌던 ‘과거 386세대의 고백’이 아니라 진지하면서도 뼈를 깎는 자기성찰의 솔직함과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이 패배의 기록은 되어도 결코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한 그러했다. 신문지상을 통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무수히 많은 사람의 변절과 변신을 보았다. 김지하, 박노해, 김영환, 이재오, 김문수... 혹자는 생명에 대한 경외로 방향을 잡았고, 혹자는 ‘주체사상의 선구자’에서 ‘주체사상 공격수’로 바뀌었고, 혹자는 민중당이라는 한국 정치지형의 극좌파(?)에서 보수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정치적 색채를 바꾸었다. 좋다. 나는 변화를 믿는다. 그래서 인간의 변화도 믿고,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과 이념도 마땅히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에게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고 싶다. 저자의 말대로 “절망은 패배한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굴절된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것과 단절하거나 반성하는 것이 어떻게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 행위가 패배를 넘어서는 인간의 솔직함을 보여주기 보다 권력지향적으로 굴절된 것이라는 데에 있다. 변절과 변신이 회자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한사회변혁운동의 아이콘’들이었다. 그들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던 위치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말 그대로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비판과 반성이 위치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권력자들 앞인가, 아니면 그들을 믿고 그들 주위에 모였던 ‘동지들’의 앞이어야 하는가? 진정한 반성은 그가 어느 길로 가든지 사상과 이념의 동질성을 떠나 박수를 보내주고 격려의 말을 건네게 한다. 하지만 반성이란 것이 주위의 사람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그들의 기억까지 모욕하는 것이라면 그건 반성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허위로 가득찬 말장난일 뿐이다. 2. 나는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1995년 가을은 뜨거웠다. 취업준비로 바쁜 도서관의 복학생 형님들까지 거리로 불러낸 당시의 구호는 “광주학살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바로 그거였다. 그리고 그 외침이 결실을 맺어 특별법 제정이 발표되는 날, 우리는 감격했다. 새벽에 경남 합천 고향집에서 수사관들에게 양팔을 잡혀 끌려 나오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가슴후련함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두 전직 대통령과 학살 관련자들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오히려 혼란에 빠져버렸다. 문부식씨도 같은 점을 지적하는 걸 보니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뭐냐하면 두 명의 ‘학살 주범’을 재판정에 세우고 사형언도까지 받게 한 건 좋다고 치자. 그런데 문제는 누구도 그들이 진짜로 사형을 받게 될거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판결을 내린 판사도, 구형한 검사도, 변호사도, 일반 국민들 어느 누구도 그들이 진정으로 죄값을 치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법정에 세운 것으로, 얼마간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그나마 그들은 감옥에서도 특급대우였다) 그들은 면죄부를 받았다. 국민의정부라던 DJ정부는 그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직에서 횡령한 돈으로, 그리고 단돈 29만원만 가지고도 지금도 잘 산다. 왜? 과거와의 화해와 국민통합 때문에? 거리에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수업도 거부하고 화염병까지 투척하며 나섰던 사람들은 그 현실 앞에 왜 침묵했나? 적어도 법적, 정치적으로 면죄부를 받은 그들에게 이제 누가 광주의 책임을 지라고 말할건가? 나는 그 대답을 모르겠다. 왜 그들이 사면받을 때 우리는 침묵했는가? 사면조치를 내린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영광을 얻은 정부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어서? IMF 경제위기로 먹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라서? 아니면, ‘이 정도로 그만 되었다. 광주 시민들의 명예도 회복된 셈이고, 5.18묘역도 국립묘지가 되었고, 이제 그만 잊고 그만 용서하자.’ 이런 국민적 합의가 있어서? 5.18 광주가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여러 가지로 듣게 된다. 희생자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진압작전에 참가한 일부 공수부대원들도 대인기피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들에게 5.18은 현재진행형이다. 1980년 5월 18일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겠으나, 그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역사적, 사회적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린 그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기억함]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는 영화이기도 한데, 영화관과는 원래 거리가 먼 내게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다. 이 작품을 영화관에서 두 번 보고, 비디오로도 몇 차례 더 보았는데, 볼 때마다 역사가,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개인을 옥죄면서 망가뜨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순수했던 한 청년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달려오는 기차에 정면으로 마주설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극점에 이르렀던 1979년 구로공단과 그렇게 이루어 놓은 천민자본주의의 사망선고였던 1999년의 경제위기는 결국 한 길일 수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개인 역시 한 쪽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되었다. 전체주의 사회가 무엇인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이념적 잣대하에 모든 사회구성원이 하나가 되어 달려가는 것 아닌가? 그 속에서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뭔가 반대하는 사람은 부적응자로 생각하여 배제하는 것이 전체주의 아닌가? 그런 점에서 <박하사탕>의 전체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기억함]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쓰여진 이 글이 2010년 현재 무엇을 말해주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전체주의 사회가 국가에의 통합을 거부하고, 상품 시장화에 저항하거나 혹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간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시켜 버린다는 데 있다. 고비용/저효율을 이유로 노동자는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리하여 일자리가 귀할수록 그것이 노동하는 인간들에게 작용하는 포섭력은 강해지고, 실용적 가치가 인문적 가치를 몰아내고,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신지식인’이 지식인 일반의 무능력을 비웃는 사회, 모든 국가 구성원의 정신적 가치가 이윤과 결합되어 있고, 자신의 상품성을 광고하는 면접고사장 앞에 사람들이 언제나 늘어서 있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비판적 시민 의식을 거세당한 채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사회, 바로 이 ‘끔찍한 신세계’가 지금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아닌지. 한편 세계적 차원의 권력 중심부에서 오는 통합의 요구와 동질화의 메시지가 강할수록 정권 담당자는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에 매달리게 되고, 종국에는 사회적 합의나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기피하게 됨으로써 내부로부터 그러한 가치를 지켜가는 힘을 잃고 제도적 절차만 남는 ‘민주주의의 안락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국가의 일체의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 정신의 구축이 자기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좀처럼 구축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야말로 그러한 독립적 정신의 가치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는 없을 것이다. |
| 난 1980년에 태어났다. 호남인이다. 이렇게 시작했다고 모든 것을 호남의 관점에서 1980년의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그 맘큼 1980년 전남 광주의 사건은 너무나 큰 한국사적 관점을 가진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죽었고, 마지막 광주시청을 사수하면서도 죽어갔다. 전국을 쇠뇌시키면서 광주를 북한이 보낸 공산당, 레드 컴풀렉스를 다시 들먹이고, 공수 특공부대를 투입해서 살인을 시킨, 전두환 정권 광주를 죽이면서, 사회의 공권력이 개인을 죽음에 까지 몰아세울 만큼 도덕적이고 정당한 것인가? 국가와 사회 시스템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인권, 심지어 생명까지 무시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준 책이다. 앞의 제목에서 그랬듯이 사회 다수의 폭력, 국가=폭력=정권유지라는 공식을 성립시켰던, 군사정권,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면서 감옥에 온 뒤에서, 새롭게 빨갱이라고 하면서,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했던 지난날들. 도대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가? 그 생각을 해 볼 때, 광주의 영혼들, 민주화의 많은 피, 그리고 그 가해자들의 영혼(지금 광주를 무자비하게 군인다운! 명령으로 발포하였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많이 황폐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 악몽, 주정뱅이가 된) 그들 과연 누가 그 책임을 저야 하는가? 우리는 고문왕 이근완이 자기 집에세 가족들에게 어떤 가장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집에서 출근해서 오늘 한 사람을 물에 적셔서 전기 고문을 하고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 퇴근하면, 가정에 돌아와서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정부가 시키니까? 그런 살인적인 행동도 개인의 가치관과 관련없이 자행된다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 많이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도대체 미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게 우리 사회일 수 있다. 나도 미치겠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따로 있는데, 내 앞에 삶의 현실과 싸우면서, 다른 이들은 아직도 감방에서 아직도 수배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것. 아쉽다. 미친 세상에서 미친 잣대로 커가는 사회 구성원들을 과연 누가 바르게 선도할 것인가? 그 선순환적인 사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도 별다르지 않다. 완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비정상적이고, 깨끗이 끝내지 못한 역사에서 그 멍이 되어 살고 있을 뿐이다. |
| '문부식'이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알려진 이름이다. 예전에 그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리지는 않겠다. 본인이 그런정도의 인물도 안되고 그럴 자격도 없다. 요즈음에도 단지 '진보지식인'정도로 알려진 문부식씨가 책을 내었다. 사회적 이슈가 있어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나오기 이전부터 언론에서 상당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찬반양론이 넘쳐났다. 진보지식인들 중에서도 이 책의 저자를 비판하는 글들을 쓰는이들이 많았다. 이 책의 내용이 어떻고를 논하기 이전에, 나는 이 책의 큰 공헌을 '성찰'이라는데 두고 싶다. 우리사회에는 '성찰'이라는 것을 싫어한다. 잘된일이든 잘못된일이든 그 일을 되돌아보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꺼려한다. 누구든 '성찰', '반성'등의 용어를 사용하면 그 즉시 그 글의 내용보다는 그런 글을 썼다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사회의 분위기다. 어떻게보면 이러한 우리사회의 분위기는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우리사회의 과거에 대해 성찰하고자 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지난날을 냉정하게 되돌아 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무조건 감싸는 것만이, 무조건 옳았다고 우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 책은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줬고, 우리들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게 해 준 책인 것 같다. |
| 70년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그 사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얼핏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있고 생전 처음 접하게 된 사실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잃어버리고 싶은 것이라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제 예전에는 금기시 되었던 많은 사건들이 TV나 책 등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언급될 수 있고 친미 일변도의 인식에서 벗어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치부들, 비단 국가권력만의 책임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나 자신도 가담했을 수 있는 그 광기의 역사들, 그것에 대해 기억하고 진지하고도 정직하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슬픈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더이상 이념에 매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시대는 끝나버린 듯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더 우리의 과거를, 우리의 현재를, 국가와 그 구성원인 국민의 관계를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서 비로소 상처는 치유되고 그 위에 보다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져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
| 저자 문부식은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구속되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2년에는 촛불시위까지 일어날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 나라도 친미 일변도가 아닌 미국 제대로 보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어떤 내용은 좀 어려운 점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일반 독자들의 수준을 겨냥한 책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던 입장에서 정리된 내용은 어려운 내용을 읽고나서인지 더욱 새롭다. 국가폭력에 대한 것부터 말이다. 저자는 1980년 5월에 보여진 광기의 실체는 국가 폭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전 세계의 양식 있는 이들을 세 번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폭력이 가진 야만성, 광주 학살 이후의 한국 국민의 전두환에 대한 지지 그리고 광주에서 보여 준 한국 군부의 그 무자비한 속도의 학살 행위와 사후 처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고 한다. 이 책을 보고나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과거의 시간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세월. 저자의 말처럼 40대의 가슴 속에는 광주가 있는 것 같다. 나도 학교 시절 5.18만 되면 일주일 이상을 데모하면서 살았은니까 말이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보고 2030과 5060을 편으로 가르면서 40대를 오갈데 없는 것처럼 여기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 1987년의 6.29가 민중 속에 면면히 흘러서 나온 결과인 것이다. 그럼 15년 전의 6.29 당시 주체세력은 지금 어느 나이일까. 당연히 40대가 아닐까. 그런데 그런 40대를 아무 곳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처럼 평하는 수구보수 세력들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이 책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좀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어려움도 피하지 말아야 할 일. 진실을 알기 위해 시간을 좀 쓰는 것도 좋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