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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표지에 있는 <장교와 웃는 소녀>라는 그림을 보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를 떠올리게 됩니다. 베르메르하면 흔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델프트 풍경 View of Delft>이 우선 생각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에서 읽은 기억 때문입니다. 소설에서는 <델프트의 풍경>을 매우 좋아할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까지도 잘 안다고 여기고 있는 작가 베르고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르고트는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황색의 작은 벽’이 귀중한 중국의 미술품처럼 알찬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쓴 비평가의 글을 읽었지만, ‘황색의 작은 벽’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림을 다시 보러갑니다. 그리고 그림 앞에 섰을 때 “황색인 작은 벽면의 값진 마티에르(matière)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마티에르는 작품 표면의 울퉁불퉁한 질감 자체나 회화기법필치, 혹은 물감에 따라 야기되는 화면의 표면 효과를 의미합니다. ‘황색의 작은 벽’의 질감을 새겨 본 베르고트는 ‘나도 이처럼 글을 썼어야 옳았지’하고 생각합니다. 최근 발표한 작품들이 건조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참이라서, ‘황색의 작은 벽’처럼 ‘채색감을 거듭 덧칠해서 문장 자체를 값진 것으로 했어야 옳았다’라고 자책하게 된 것입니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갇힌 여인 245쪽, 국일미디어 1998년) 유예진교수의 <프루스트의 화가들; http://blog.yes24.com/document/7776597>에서 <델프트의 풍경> 이외에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베르메르의 여러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은 작품을 두고서도 참 다양한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베르메르의 모자>를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특히 캐나다출신으로 중국학을 전공하는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17세기에 활동한 베르메르의 그림들에서 당시 동서문명의 흐름을 읽어낼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표제를 <베르메르의 모자>라고 한 것은 <장교와 웃는 소녀>라는 그림의 배경에 걸려있는 지도가 이 책의 기획을 잘 담고 있다고 보았거나 혹은 작가가 캐나다 출신임을 암시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티머시 브룩교수는 캐나다출신으로 1973년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상하이의 푸단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여러 대학을 거쳐 지금은 옥스퍼드대학교 중국학과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들을 보면 특히 중국 명대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메르의 모자>에는 제목과는 달리 <델프트의 풍경>, <장교와 웃는 소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 <지리학자>, <저울을 든 여인> 등 5개의 베르메르의 작품 이외에도 헨드리크 반 데르 부르흐의 <카드놀이>, 레오나르트 브라메르의 <베들레헴으로 여행하는 세 동방박사>, 그리고 중국화원의 풍경이 그려진 17세기 말경의 접시 하나를 다루었습니다. 이들 작품들은 네덜란드의 ‘델프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일기작가 새뮤얼 피프스는 1660년 5월 델프트를 방문하고서 ‘가는 거리마다 강과 다리가 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도시’라고 묘사했다고 합니다. 브룩교수가 델프트, 나아가 베르메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스무 살 때였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스코틀랜드의 벤네비스까지 가는 여행의 마지막 여정에 자전거로 암스테르담에서 북해연안을 달리게 되었는데, 델프트에서 비를 만나는 바람에 도로에서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준 아주머니가 건네준 그림엽서에 담긴 델프트의 풍경을 구경하러 나섰다가 얀 베르메르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그가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매우 섬세하고 과학적인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즉 물체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과 빛의 영향을 다양하게 분석한 결과가 그림에 담겼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상을 화폭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구성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베르메르의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들을 통하여 17세기의 세계를 읽어보려 했고, 그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창문처럼 17세기로 통하는 통로가 될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문은 <델프트의 풍경>을 그린 장소로 지금은 작은 공원의 둔덕인데, 이 장소에 있었을 건물의 2층 높이가 딱 화가의 눈높이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문은 <델프트의 풍경>의 오른쪽 아래 묶여 있는 두 척의 배, 그리고 중앙 구교회의 첨탑 왼쪽으로 죽 이어지는 붉은 지붕의 건물이 세 번째 문입니다. 두 척의 배는 청어잡이 배인데, 1550년 무렵부터 1700년까지 전 세계에 몰아닥친 추위 덕분에 북해의 노르웨이연안의 청어떼가 발트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네덜란드 어부들 차지가 되면서 네덜란드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붉은 지붕의 건물들은 동인도회사의 창고였다고 합니다. 16세기 말, 에스파냐의 탄압적 지배로부터 독립을 이룬 네덜란드는 곧 해외 무역의 황금시대를 맞았습니다. 1492년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통하여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에스파냐는 곧이어 이교도들을 추방하였는데, 당시 에스파냐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네덜란드로 이주하였고, 상거래에 밝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무역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동방무역에 나서자 네덜란드 상인들은 2년 뒤인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설립하여 해외무역에 나섰습니다. 네덜란드상인들의 발길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등지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하였습니다. VOC는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기업이었으며 17세기 세계 최대의 회사였습니다. VOC는 암스테르담을 비롯하여 모두 여섯 곳에 지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델프트에 위치했습니다. VOC의 여섯 지부는 단일화된 정책과 지침에 따라 각자의 자본과 사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유연함과 강함을 결합하여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가 주도한 17세기 동서양의 교류는 발견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라고 평가받습니다. ‘완전한 변형이나 치명적인 충돌 대신 협상과 차용을 선택했고,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태도보다는 주고받는 방식을 선택했으며,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상호 교류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도래한 포르투갈이 가져온 기독교가 순식간에 확산되는 것에 놀란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전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내세우지 않은 네덜란드만은 예외로 나가사키에 만든 축구장 2개 크기의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통하여 무역과 교류를 허용했습니다. 데지마는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의 서양학문이 일본에 소개되는 ‘숨구멍’이었다고도 말합니다. 한편 저자는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서 숨어 있는 17세기의 흔적을 찾아 과거를 재발견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만들어낸 다양한 원인과 결과를 반영하는 거울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르메르가 구체 유리, 황동기구, 진주 등과 같은 사물의 표면에 주변의 모든 사물을 비추는 표현양식을 즐겨한 것을 저자는 ‘인드라의 그물’과 연관을 지었습니다. 인드라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천신(天神)으로 그가 거처하는 수미산의 궁전에는 인드라의 그물이라고 하는 커다란 그물이 걸려있고, 그 그물코마다 구슬들이 매달려 서로를 비추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구슬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각각의 존재를 의미하고 서로 인연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나의 구슬이 변하면 다른 구슬에 비친 모습도 변할 뿐 아니라 다른 구슬의 모습도 변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를 ‘모든 존재는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존관계에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델프트의 풍경>에서 17세기에 델프트를 중심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대륙이 서로 연결되었던 사정을 개괄한 저자는 이어서 등장하는 작품들을 통하여 각론에 해당하는 세계문명의 교류상황을 짚어냈습니다.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장교가 쓴 비버 펠트모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비버의 모피로 만든 모자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16세기 유럽에서는 이미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비버가 멸종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16세기말 들어 시베리아와 캐나다가 새로운 비버 모피의 공급지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공급선이 불안정했던 시베리아보다는 캐나다가 더 각광을 받았습니다. 캐나다산 비버모피를 구하려면 서로 입장이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협상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 동부를 차지한 프랑스가 적대적인 모호크족을 제압하기 위하여 휴런족을 비롯한 다른 이로쿼이족을 연합시켜 모호크족에 대항하게 만든 역사적 사실 등을 소개합니다.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에 등장하는 중국산 과일접시를 두고는 VOC가 동방무역을 주도하던 포르투갈 등과 벌인 주도면밀한 싸움 과정을 소개합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선을 약탈하다가 교역은 어느 나라가 독점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만든 자기가 유럽으로 건너가다가 점차 유럽 사람들의 취향을 맞춘 자기를 대량생산해서 보내는 유연성을 보였다니 중국인들의 유연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지리학자>에서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중요시하던 세계지도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1569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한 세계지도를 발표하여 장거리항해에 크게 도움을 준 메르카토르가 네덜란드의 루벵 출신인 것도 참고가 되겠습니다. <지리학자>편에서는 아시아지역의 바다를 주름잡던 유럽 배의 활약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이 무렵 우리나라에도 표류해온 외국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경우는 해당국가로 송환토록 조처하였지만, 기타 외국인의 경우는 별도 조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인조 5년(1627년)에 제주도에 표류해왔다가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온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나 효종4년(1653년)에 표류해왔다가 탈출한 하멜 등이 네덜란드 출신으로 일찍이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인연을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열어 네덜란드와 교역을 했던 일본과는 달리 청나라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의 경우는 쇄국정책을 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벨테브레이에 관한 이야기는 흑인소년의 모습을 담은 헨드리크 반 데르 부르흐의 <카드놀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델프트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합니다. 비싼 중국자기의 대체상품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에 더하여 담배가 확산된 흐름을 뒤쫓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대륙에서 건너온 담배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모양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현실세계에서 초현실세계로 이동해 영혼과 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피우던 담배가 유럽대륙으로 건너간 것은 155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596년 중국의 지방관청의 구매목록에 등장하고, 일본에는 1605년에, 조선에는 그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울을 든 여인>에서는 은을 주제로 하여 페루의 포토시광산과 일본에서 생산된 은을 매개로 중국산 상품을 구입해 유럽으로 보내던 17세기 무역의 구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베르메르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했던 17세기 무렵 조선의 강역을 조금 벗어난 동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해준 책읽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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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술관에서, 또는 책이나 TV 화면, 미술 교과서 등에서 여러 그림을 접한다. 그림을 보면서 '참 잘 그렸네', '그림 속 꽃이 예쁘고 사람 참 멋지다' 등의 생각을 한다. 어떤 화가가 그렸고, 이 그림이 얼마나 유명한지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을 감상하곤 한다. 그런데 그림의 시각적 요소들을 단순히 그림 자체만이 아니라 더 큰 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피는 감상 방법도 있다. 화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림 속 여러 요소들은 화가가 살던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의 속과 바깥 사회 간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이러한 감상법은 미술작품의 감상법 중 하나이고, 타 학문과의 연계가 필요한 방법이다. 이 책의 저자는 캐나다 출신의 역사학자이고, 명대의 중국사를 전공하였다. 중국사 전공의 저자가 왜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회화 작품을 가지고 책을 썼을까? 우선 저자는 그림이 단순히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창문'처럼 여기기), 그림이 그려진 시공간적인 맥락을 읽을 수 있는 수단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통로의 문'으로 여기기). 그림 속 여러 요소를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의 의미를 그림을 그린 화가의 특성과 가치관, 화가가 살던 장소의 지리 및 역사적 맥락, 이러한 맥락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더 큰 세계적 차원의 경제 및 사회적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다. 저자는 베르메르가 그림을 그리며 평생을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라는 장소에 주목한다. 평생 델프트에서만 그림을 그린 베르메르이기에,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델프트를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당시 해상무역 강국이었던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는 전 세계의 여러 장소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으므로,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당대 세계를 살필 수도 있다. ![]() 그림 속에 보이는 사물들을 창문 뒤에 있는 소도구쯤으로 여기지 않고 열어야 할 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그림이 보여주지 않고, 어쩌면 화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17세기의 세계로 향하는 통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문 뒤에는 우리가 추측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더 놀라움을 주는 예상치 못한 복도와 비밀스런 통로들이 혼란스러운 현재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과거를 연결해주고 있다. 그리고 17세기 델프트의 복잡한 과거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로, 그림 속 모든 사물에도 드러나 있는 것은 델프트가 따로 떨어진 도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델프트는 전 지구로 뻗어나가는 세계 안에 존재했다(p.30). 저자는 베르메르의 여러 작품들 중 몇 가지를 선정하여, 챕터 별로 하나의 작품을 중심으로 목차를 구성한다. 우선 <델프트의 풍경>에서 청어잡이 어선 두 척과 동인도회사 창고 지붕에 주목하면서, 17세기 기후변화와 네덜란드의 어업, 동인도회사의 경제 번영을 읽어낸다. 그리고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 비버 모자에 주목하면서, 당시 상류층의 문화적 취향과 샹플랭의 캐나다 탐험을 연결짓는다. 그리고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에서는 탁자 위 도자기에 주목하면서 당시 '도자기 선진국'이었던 중국 도자기 무역 이야기를 풀어낸다. 또 <지리학자>에서 나온 지도와 지구의, 지리학자의 탐구적인 태도에서 당시 지리학자들의 정보 수집과 분석에 대한 태도를 실감한다. 그리고 <저울을 든 여인>에서는 베르메르의 아내가 은화를 저울질하는 모습에 대해 당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르주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청어잡이 어선은 이러한 역사의 흔적이다. 전 세계적인 한파 덕에 네덜란드가 얻은 혜택 가운데 하나는 북해에 있던 물고기 떼가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겨울이 추워짐에 따라 북극의 얼음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전통적인 청어잡이 어장이었던 노르웨이 연안도 대부분 얼어붙고 말았다. 이에 청어가 발트해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왔고 네덜란드 어부들의 차지가 된 것이다. 델프트 바깥에 정박해 있는 청어잡이 어선들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후역사학을 수립한 학자들 중에는 네덜란드가 17세기 전반기에 번영 - 베르메르가 실내장식을 통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번영 - 을 누린 것은 이처럼 뜻밖의 자원을 횡재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p.36). 1580년대, 캐나다 비버 펠트가 유럽 시장에 소량 수입되기 시작하자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비버 모자는 다시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으나 몇십 년 후에는 궁정과 군대의 상류층 인사들에게 널리 퍼졌다. 곧 사회적으로 조금이라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비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당시에는 비버 펠트 모자를 이렇게 불렀다. (...)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장교가 모자 띠에 무엇을 꽃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모자는 당시 네덜란드 남자들의 최신 유행이었다(p.76-77) 연인은 상상 속 인물이고, 모델이 들고 있는 종이에는 글자가 적혀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카펫과 접시와 커튼은 모두 인위적으로 배치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진짜이며,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델프트 그릇을 생산하는 마을에서 그려진 그림에 어울릴 듯한 이 접시는 베르메르의 작업실에서 나와 델프트에서 중국에 이르는 교역로를 찾아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p.96)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상인들이 가지고 돌아오는 정보였다.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이전보다 더 정확해진 해도와 지도를 만들어 상인들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말이다. 설사 그렇게 유용한 지식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또다시 새로운 지식이 수집되고 통합될 것이었다. 17세기 지리학자의 과제는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수집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끝없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리학자의 머리 위 지구의에 그려진 카투시를 통해 혼디우스가 요구했던 것이다(p.170-171). 베르메르는 우리에게 카타리나를 비난하라는 것이 아니다. 베르메르는 카타리나에게 빛을 비추어 신의와 양심의 표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녀는 돈을 다루고 있지만, 가족의 재산을 계산하는 행위는 임신이 암시하듯 자연적인 자손의 번식만큼이나 고귀하고 유익한 것이다. 베르메르의 이러한 묘사는 17세기 네덜란드에 나타난 재산 축적이라는 새로운 미덕과 조화를 이루는 긍정적인 의미다. 당시는 자본주의 경제가 모습을 갖춰가면서 정당한 돈벌이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네덜란드 중산층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그림 속 그리스도마저도 저울질하는 카타리나를 축복하는 듯하다(p.226-227). 저자는 이러한 베르메르의 그림 독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17세기 세계의 역사지리적 맥락을 살펴본다. 그림 속 여러 시각적 증거를 통해, 델프트를 넘어서 북해 바다, 스페인, 포르투갈, 캐나다, 볼리비아, 필리핀, 중국 등 여러 지역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시기는 소위 '대항해시대'라고 말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이 항해와 식민지 개척에 경쟁적으로 나서던 시대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시대가 유럽 국가들의 일방적인 팽창이 아니라 '만남'에 주목한다. 유럽의 항해로 인해 시작한 것은 맞지만,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아메리카 여러 국가와 민족 집단들과 접촉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즉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면서, 여러 역사적인 사건의 전개를 입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서 놓치기 쉬운 이야기들이었다. 예를 들어, 단지 유럽 탐험가들은 개척정신만이 아니라, 중국의 도자기를 비롯한 여러 물자를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항해를 감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프랑스의 캐나다 탐험이 그러했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수동적인게 아니라 협상의 주체가 되기도 해서 흥미로웠다. 또한 중국 도자기 생산자들이 유럽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도자기를 생산해주는 모습은, 17세기의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는 '글로벌 상품사슬'의 모습이었다. 새로운 세계에 '던져져버린' 이들의 불안감, 대처 방안에 주목하는 서사도 인상깊은 대목이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문화접변 시대에서 여러 국가가 어떻게 적응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는지에 주목한다. 지리상의 발견 시대의 바뀐 세계관을 적극 수용할 기회가 많은 국가에 있었지만, 이를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자기화하여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은 국가들은 유럽 외에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저자는 중국에 대한 아쉬움을 유럽과 대조하면서 표현한다. 유럽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도자기와 여러 물자를 교역하고 싶어했던 '선진국'인 중국은, 17세기에 조금만 더 외국인, 지리정보, 상업경제, 세계 정세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그 이후로도 시대를 선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개방적이지 못한 사례에서, 네덜란드와 접촉했던 조선의 이야기도 책에 언급되기에, 우리로선 더더욱 안타까웠다. 벨테브레, 하멜(책에는 이름은 안나옴)과 우연히 접촉한 조선이 글로벌 경제에 주체적으로 행위자가 될 수는 없었을까? 만약 가능했다면 조선의 도자기도 베르메르의 그림에 그려졌을까? 역사지리적 상상력을 잠시나마 발휘해 본다.
점차 지속적이고 어느 정도 반복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가져온 결과는 예측하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때로는 일상생활까지 철저하게 변화시키기도 했다. 쿠바 작가 페르난도 오티스는 이것을 '문화접변'이라고 불렀다. 어떤 때는 접촉이 저항과 폭력, 정체성 상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17세기에 이루어진 두 번째 접촉의 대부분은 이 두 가지 극단적 성향의 중간에 속했다. 말하자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선택적으로 적응하는 것이었다(p.44). 유럽에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중국으로 가는 기존 경로는 멀고 험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어느 쪽으로 가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 프랑스가 빙산이나 다른 유럽 세력에 방해받지 않고 전설적인 동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길을 발견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샹플랭은 이 숨겨진 길을 찾기 위해 원주민의 지식이 필요했고, 또 그 비용을 충당할 만큼 수익성 좋은 상품을 구하기 위해 원주민과의 교역이 필요했다. 정복이나 식민지 건설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p.79). 동양 물건들을 판매하는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곧 그러한 물건이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 유럽인들의 주문이 늘어나자 동남아시아 항구에서 활동하던 중국 자기 중개업자는 유럽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됐고, 그 정보를 본토에 있는 공급업자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면 공급업자는 거기에 맞추어 제품 디자인을 수정했다. (...) 예를 들어 1620년대 북유럽에서 터키 튤립이 유행했을 때 징더전 도공들은 접시에 튤립을 그려 넣었다. 한 번도 진짜 튤립을 본 적이 없는 자기 화공이 그린 탓에 튤립이라고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시장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이다(p.120-121). 중국 상인들은 배를 타고 지구를 돌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군다나 더 넓은 세계에서 이 정보를 가져온 사람들은 결코 신뢰해서는 안 되는 외국인이었다. 그러니 베르메르의 지리학자처럼 누군가에게 실제로 필요한 유용한 지식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통합하길 원하고, 또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게 당연했다. 유럽 사람의 경우, 외부 세계가 생각과 사물이라는 형태로 삶 속에 들어오고 있었다.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 속 방에서도 그 중 일부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중국 사람에게 외부 세계는 그대로 외부에 남아 있었다(p.174). 이처럼 대규모로 은이 수입됨에 따라 중국에서는 국가 정책과 개인 상거래 사이에 불편한 격차가 두드러지게 디었다. 한편에서는 명 왕조가 광산 도시 내에서 부패와 사회 불안이 야기될까 봐 두려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은 채광을 제한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상인들이 엄청난 양의 은을 남중국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 반대쪽에서는 상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은을 수 톤씩 들여오는데, 부랑자들이 옛 은광을 파내지 못하게 하려고 경계를 강화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것이 17세기 전반 중국 내부의 모순적 상황이었다. 중국 정부는 사회적으로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사유재산을 축적할 경우 이 부가 반역세력으로 흘러들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사유재산 축적을 막으려 했지만, 상인들은 해외 교육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쌓았다(p.247-248).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전례 없이 바쁜 일정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던 유럽 상인 조합은 해상 공격에도 잘 버티고 화물도 많이 실어 나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거대하고 튼튼한 선박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선박이 거대해질수록 먼 바다의 해협을 항해할 때 기동성이 떨어졌고, 폭퐁우가 닥쳤을 때 무사히 해변에 정박하기가 어려웠으며, 작고 민첩한 배를 탄 적들을 피하기가 곤란했다. 그런 이유로 17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난파 사고가 많았다. (...) 선장들은 더 빨리 배를 몰았고 경쟁자를 제치기 위해 더 큰 위험을 감수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선원과 승객들이 그 어느 때보다 먼 해변에 내던져져 살아남기 위해 지혜를 짜내야만 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다양한 문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한군데 내던져짐에 따라 피부색, 복장, 몸짓, 언어 등 내가 누구고, 네가 누군지를 구분 짓는 시각적 차이를 빨리 극복해야 했다(p.274-275). 아무래도 이 책은 미술 책이 아니라 역사 책이다보니, 베르메르의 회화 작품 모두를 폭넓고 깊게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가 관심이 있고 '썰'을 풀 수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만 다루고, 오히려 더 유명함에도 스토리가 적은 작품은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글의 흐름을 위해서 책 후반부에는 베르메르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도 언급한다.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미술사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을 기대하면 이 책이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작품 일부로부터 시작해서 17세기의 역사지리와 문명교류사에 주목하고 싶다면, 이 책이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저자의 탁월한 스토리텔링은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저자의 탁월한 식견과 온갖 사물과 세계를 연결해서 풀어내는 능력은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또한 이 책은 네덜란드 여행을 준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는 네덜란드의 작은 소도시이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주도하는 도시 중 하나였던 델프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을 것이고, 이 책을 통해 암스테르담만이 아니라 델프트에도 여행을 가 보고 싶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책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베르메르의 회화 작품은 델프트에는 한 점도 없고 '맨해튼에서 베를린에 이르기까지(p.23)' 흩어져 있다. 아무튼 미술, 역사, 지리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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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맺으며 - 인간은 섬이 아니다. 중 307쪽
이 책 <베르메르의 모자>를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진 그물인가를 새삼 느꼈다. 나 개인의 삶이란 나만의 것이 아닌 거대한 세상의 그물 중 작은 한 코인 것이다. 내가 읽는 이 책, 내가 먹는 이 음식,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을 통해서 내게로 온다. 인간은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지의 그림은 <진주귀고리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델프트 출신의 17세기 화가 베르메르의 <장교와 웃는 소녀>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는 소녀의 얼굴에 시선을 맞춘다. 그러나, 저자는 그 그림이 17세기를 향해 열려있는 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장교가 쓰고 있는 모자가 바로 그 열쇠다. 이 모자의 재료인 비버 가죽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채집한 가죽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들 영국인들을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비버 가죽 한 장에 멋진 칼 스무 자루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열려진 창문은 베르메르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구도이다. 바로 세계를 향해 열려진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상징한다. 또한 벽에 걸린 지도는 네덜란드인들이 바다 무역의 중심에 있음을 알려주는 도구가 된다. 베르메르는 특이하게 육지를 푸른 색으로 바다를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당시의 사회 제도가 재편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책 <베르메르의 모자>는 이처럼 베르메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비버 펠트와 중국 자기 그릇, 세계 지도와 담배, 그리고 은과 노예등이 델프트의 집안까지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17세기 유럽 사람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식민지 구축 과정, 그리고 너무나 의외로 그 무역의 세계에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는 조선의 모습까지도 만날 수 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의 목표는 중국으로 가는 길의 개척에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의 발길이 미친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중국의 화려한 부와 아름다움을 그들은 동경했다. 동남아시아의 마닐라와 마카오 그리고 반탐과 자바, 바타비아, 아프리카 연안의 마다가스카르와 볼리비아의 포토시까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본 폐허의 도시 <포토시>의 사진이 떠 올라서 씁쓸했다. 그 도시가 그렇게 버려지기 시작한 것이 17세기부터라니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역사의 격동 속에서 그물의 한 코를 이루는 한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은 이 길고 그 분류를 정할 수 없는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며 저자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다. 화승총을 지닌 채, 원주민들과 동맹을 맺고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려던 샹플랭, 중국 최고의 교양인 원전헝, 현명한 판관 판룬민, 다양한 항해 경험을 책으로 내서 성공한 본테쾨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건넨다.
우연히 네덜란드를 여행하던 중 델프트에서 넘어진 자전거가 저자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말이 떠 오른다. 그가 그곳에서 넘어진 것은 그가 델프트와 인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드라는 세상을 만들 때 하나의 그물처럼 만들어 그물의 매듭 하나하나에 진주를 꿰어 넣었다. 현재 존재하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 진실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자료가 인드라의 그물에 달린 진주이다. 인도 철학 용어로는 이를 다르마라고 한다. 그물에 매달려 있는 각 진주는 당연히 다른 진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각 진주의 표면에는 다른 진주들의 모습이 반영된다. 인드라의 그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함께 존재하는 다른 모든 만물을 내포한다. " 본문 46쪽
베르메르의 그림 속의 소녀가 진주 귀고리를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그 소녀의 진주 귀고리에 다른 사물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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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학이라고 하던가, 그림을 보고 그림에 나타나 있는 악기들을 보고 악기의 역사를 연구하거나 그림속에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들을 보고 음악사회사적인 측면을 유추해보는 작업을 하는 예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티모시 브룩의 <베르메르의 모자>는 베르메르라는 한 화가의 작품들에 나타난 모티브를 활용하여 17세기의 동서무역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영화화되었던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 덕택에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 그가 자신이 살았던 델프트의 모습과 그 시절의 생생한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게 될 줄이야.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저자 브룩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17세기의 동서교류사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한다.
요즘에도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소리소문없이 세계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 같다. 기업들의 자유무역을 위해 최대한의 여건을 만들어 놓고 있는 면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정책이라기보다 면면히 내려온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인드임에 틀림없다. 표지의 그림에 나온 커다란 모자를 쓴 장교의 모습, 잔잔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고 있는 소녀, 뒤에는 그림의 절반을 채운 커다란 지도가 있다. 저자는 이 그림에서 장교가 쓴 모자가 바로 캐나다산 비버가죽으로 만든 모자임을 확인해준다. 그 이야기속에는 프랑스인들의 아메리카 5대호 주변 정복사가 담겨있고 유럽인들의 취향에 부응하여 원주민으로부터 싸게 구입한 비버가죽교류사가 그려진다. 아리러니하게도 서구인들에게는 동방견문록이래 중국에 가면 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게 되었고 그들의 정복사 배후에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하는 열망이 기초해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열린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에 나온 도자기 접시는 유렵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기꺼이 사용하고 닮기를 원했던 중국 도자기이다. 유럽인들은 중국물건을 일상에서 사용하고 싶어했고 나아가 자신들의 미적 기준도 수정하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물건은 같은 문화적 사조여서 받아들여졌지만 유럽물건은 가치는 없고 단지 호기심만 일으킬 뿐이었다. 저자는 델프트 사람들이 중국 접시를 행운을 불러오는 부적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계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베르메르의 '지리학자'에서 보이는 세계지도는 17세기 세계교역로에 대해 눈뜨게 하지만 단지 그것은 유럽인의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외부세계는 생각과 사물이라는 형태로 삶속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외부세계는 그대로 외부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동양인들이 쇄국적 정책을 폈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바이고 그런 사고관때문에 중국이 19세기에 아편전쟁과 같은 불행한 역사를 겪었다는 것을 알지만 이역시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동서교류사에 대한 한 평가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편 냉전의 시기를 겪어오면서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과의 교류가 차단되었던 시절이 과거사의 한 자락이 되어버린 현재, 그리고 이제 내노라하는 세계무역의 중심지가 되어가는 중국시장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17세기 동서 무역의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어 보인다. 21세기의 세계무역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얼마간의 예측은 가능할 것이다. 세계 경제의 틈새를 잘 이용하려면 지난 세기의 모범과 우를 잘 분석할 필요도 있겠다.
세계로 향한 열린 창의 시기였던 베르메르 시대에 우리나라에도 뜻하지 않은 네덜란드인 방문객이 있었다. 벨테브레는 스페르웨르호의 선원이 돌아가 쓴 여행기에 70대까지 장수하며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박연이란 조선이름을 가졌던 그는 26년을 조선에 산 후여서 표류한 선원들이 제주도해안에 도착하여 그를 보고 반겼으나 다시 네덜란드 말을 기억해내는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그런데 저자는 그 유명한 하멜의 이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한 시대의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그가 살았던 네덜란드 델프트의 모습과 그 시기 사람들의 세계로 향한 열정을 전하는 열쇠역할을 하였다. 따분할지도 모를 17세기 동서 무역 교류의 역사를 마치 전람회의 그림구경을 하다 들은 재밌는 에피소드처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저자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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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델프트(Delft) 여행 중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에 활약한 화가 요하네스 베스메르(Johannes Vermeer)의 묘비석 앞에서 감개무량했던 소회를 풀어 놓았던 지난 포스팅 후 오래 전에 사두었다가 읽지 않고 서가에 방치해 두었던 「베르메르의 모자」란 책을 읽었는데 내가 베르메르의 묘비석이라고 알고 있던, 그 앞에 서 인증샷까지 찍어두었던 그 자리가 사실은 베르메르의 묫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황당했다. 책의 해설에 의하면 오늘날 베르메르는 네델란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가 위대한 화가라고 인정받은 것은 그의 사후 거의 200년이나 지난 19세기 무렵, 2세기 동안 잊혀졌던 화가가 갑자기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베르메르는 당시 전통에 따라 사망 후에 가족이 마련해두었던 델프트 구교회(Oude Kerk) 안에 묻히게 되었는데 사망 당시 그는 괜찮은 화가로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교회 한 묘지에 따로 비문을 표시해 기념할 만큼 저명한 사람은 아니어서 그가 교회 안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것만 확실할 뿐 그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매장된 델프트의 구교회는 1921년에 큰 화재가 있었고 교회 내 묘지의 판석들이 화재로 검게 그을려지자 이 판석들을 모두 꺼꾸로 뒤집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베르메르의 묘지라고 표시된 그 판석은 그의 사후 2세기가 지나 베르메르가 위대한 화가로 재조명 받기 시작하고 그가 묻혀 있다고 알려진 델프트의 구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델프트 사람들이 20세기 들어 적당한 판석을 골라 그 위에 새긴 것이라 한다. 즉, 그 판석은 이 자리에 베르메르가 묻혀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 안에 베르메르가 묻혀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일 뿐이었던 것이다. 참 지독한 네덜란드 사람들, 역시 더취(Dutch)들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책을 샀을 때는 내가 네덜란드를, 델프트를 여행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책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을 감상했던 내 감동과 그가 묻혀있는 델프트의 구교회 안에 있었던 그날 오후, 내 마음 속에 일었던 감동이 전혀 바래지는 않았다는 점을 따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다시 델프트에, 그 구교회에 갈 기회가 있다면 예배당의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교회 전체를 차분히 바라볼 생각이다. 지난번 베르메르의 묘지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의 내 감동은 온통 그 좁은 묘지의 판석 위에 쏠려 있었지만 다시 델프트의 구교회를 찾게 된다면 베르메르가 묻혀 있을 델프트의 구교회 전체가, 그리하여 그가 살다간 그 시대의 일상이 차분히 내 마음에 내려앉을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가져본다.
AUG 2012 HWP
http://blog.daum.net/oalbat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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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다. 그는 네덜란드의 델프트라는 별로 크지 않은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고, 그림을
그리다
마흔
셋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델프트라는 도시를 떠났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그랬다는
정황도
없다. 그야말로 한 도시에서 제한된 삶을 살다간 화가였다. 그런데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는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였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7세기는 이른바 대항해 시대였다. 세계의
경제가
은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있었고, 노동력을 빼앗고, 공업
생산품을
강매하고, 아편을 넘기는,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한 시기다. 네덜란드는
그
시기
그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최초로 동인도회사(VOC)를
세워
세계
무역을
주도했고, 그로 인한 부(副)가 모여들던 나라였다. 그는 바로 그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였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베르메르는 그저 작은 도시에서 그림만 그리던, 약간의
인정을
받던
화가였지만
그런
세계사적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의도했거나, 혹은
그
흐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는 그냥 그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도 그것을 반영하고 있을까? 반영하고 있다면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무엇을 읽을 수가 있을까?
캐나다의 중국학자 티머시 브룩이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 무엇들이 어떻게 세계사적 흐름 속에 놓여 있는가?
티머시 브룩이 고른 그림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베르메르의 유이(唯二)한 풍경화 중의 하나인 <델프트
풍경>, 과장된 원근법의 <장교와
웃는
소녀>, 창문에 얼굴이 비친<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 아마도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처음 관찰했다고 알려진 안토니 반 레벤후크(어떤
곳에선
레이옌후크라고도
한다)를 그림 것으로 보이는 <지리학자>, 저자는 은의 무게를 재고 있다고 보고 있는 <저울을
든
여인>이 그것들이다. 그
밖에
그
당시
네덜란드에서
쓰였던
중국
화원이
그려짐
접시, 반 데르 부르흐의 그림인 <카드놀이>를 소재로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흔히
하는
것들이
아니다. <델프트 풍경>에서는
당시가 '소빙하기'였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즉, 그림
속
청어잡이
배는
기후변화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고, 그 청어잡이를 기반으로 네덜란드가 세계로 뻗어나갈 자본을 얻어낼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장교가
쓰고
있는
모자에
주목하고
있다. 바로 '베르메르의
모자'다. 당시의
유럽
남자라면
다들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이는 다른 책에서도 등장하는 얘기다), 그림
속
커다란
모자가
비버
털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비버 털가죽은 다름아닌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도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과일 접시, 즉
자기는
중국과의
관계, <저울을 든 여인>에서는
은을
매개로
한
세계
경제의
통합, 그리고 모순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가운
것
중의
하나는
벨테브레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그가 끝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일하고, 자손까지
낳으며
생을
마쳤다는
얘기다. 바로 박연이라는 인물 이야기다. 이를
통해서
세계를
여행하던
이들의
다양한
행로를
추적하고
있다.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역사학자가 전혀 얘기치 않은 방식으로 한 시대를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지금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와 역사로 향하는 창이 다양하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베르메르를 읽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가 바로 이 책에게까지 다가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참 얘기할 게 많은 책이다. (실수로 올렸던 리뷰를 다 날리고, 이전에 썼던 리뷰를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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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에 대해 다소간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 책의 표지나 목차를 보고 정말 당황할 것이다. 바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남은 작품은 서른 점 남짓이며,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실내에 있는 한두 명의 인물을 그린 소품이다. 복잡한 알레고리와도 거리가 멀고, 주제가 방대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그린 것도 아니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걸작이기는 하지만, 시대 자체를 바라보는 통로로 연구하기에 과연 적합한 제재일까?
읽고 난 후의 감상. 노파심과 기우란 앞에서 상술한, 이런 책을 두고 섣불리 든 걱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인간 정물화'. 베르메르의 그림을 두고 곰브리치가 한 말이다. 정적이고 고요한 베르메르의 그림은 분명 인물화인데도 불구하고, 웬만한 정물화보다 더 차분해 보인다. 사진보다도 더 사진같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정교하고 섬세한 묘사가 전부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세부묘사가 치밀하고 정교하면 전체적인 조화가 깨지기 쉬운데, 베르메르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
<베르메르의 모자>는 베르메르의 그림 자체가 아니라, 베르메르의 그림의 소품들에 눈을 돌린다. 그리고 그 소품들로 일종의 마인드 맵을 그린다. 여기에서 이런 것을 연상하고, 저기에서 저런 것을 연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가.
이를테면 그림의 전경에 나온 청화백자 접시에서 델프트 도기를 도출해낸다. 델프트 도기는 당대 네덜란드의 활발한 교역과 유럽에서 손꼽히는 도자기 기술을 동시에 보여주는 물품이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네덜란드 항구를 통해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도자기 만드는 법조차 몰랐던 유럽에서는 청화백자를 모방한 도기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고, 대표적인 '이미테이션 제품'이 바로 델프트 도기인 것이다. 아울러 유명한 델프트 도기 몇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벽에 걸린 지도, 등장인물이 쓰고 있는 모자, 등장인물이 들고 있는 저울, 책상에 놓인 기구 등도 당대 세계로 통하는 통로가 된다. 몇 되지 않는 베르메르 작품 중에서, 17세기 네덜란드를 읽어낼 수 있는 소품이 많다니. 저자의 놀라운 눈썰미와 재미난 입담에 이끌려 책을 읽고 나면,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든다. 베르메르는 자신의 그림에 있는 '오브제'들이 자신의 시대를 표상할 것을 의도했던 것일까?
난 잘 모르겠다. 확신할 수도 없다. 그냥 쉽게 구할 수 있는 소품을 가져다 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은 될 것이다. 막상 만든 사람은 별 생각 없이 넣은 요소가 심오한 상징으로 해석되는 일은 많지 않은가.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철저하고 절도있게 그림을 구상하기로 유명한 베르메르라면 일부러 당대의 소품을 골랐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만약 그렇다면, 베르메르는 자신의 과욕을 절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화가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를 의도했다고 하기에는, 그 요소들이 그림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그림과 조화된 경지가 너무나도 훌륭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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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르메르의 그림 안에는 사회적 콘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는 코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가 태어나고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는 데카르트가 '가능성의 집합소'라 부를 정도로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티머시 브룩이 쓴 <베르메르의 모자>(추수밭 펴냄)'는 예술책과 역사책의 장점을 두루 갖췄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비버 펠트, 중국 도자기, 세계지도, 은화 등이 어떻게 네덜란드 델프트의 거실까지 들어오게 됐는지 설명해주는 역사 책이면서, 책을 읽고 나면 베르메르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는 예술서적이기도 하다.
미술사와 역사의 경계에서 17세기 교역망의 확장 과정을 그림 속에 등장한 소품의 유입경로로 안내해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동서양 사람들의 세계화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무역 발전의 빛과 그림자, 난파와 대량학살의 비극, 세계 기후 변화의 패턴 등을 통해 17세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티머시 브룩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소녀의 얼굴보다 진주 귀고리에,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는 집안으로 옮겨진 남녀의 데이트보다 장교가 쓴 화려한 모자에 주목해보길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어쩌면 화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17세기의 역사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17세기를 지배하던 열정은 '동양과 서양을 잇는 미지의 바닷길'을 찾는 것이었다. 여행과 만남과 새로운 지식을 통해 과거에는 갈 수 없었던 거리를 줄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원하는 세계를 찾아나섰다.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베르메르처럼 고향에만 머물던 화가들까지도 변화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유럽에서처럼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지도록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평면이라는 전통적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여전히 통했다. 중국 상인들은 배를 타고 지구를 돌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무역과 이동이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추적하는 이 책에는 다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마닐라 총독 세바스티안 코르쿠에라, 중국인 <장물지>의 저자 원전헝, 델프트에 살았던 얀 베르메르 등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인간은 혼자 떨어진 섬이 아니라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라는 저자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베르메르의 말년을 통해 17세기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17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전례 없이 많은 그림들이 거래됐다고 한다. 전 세계 박물관에 17세기 네덜란드 작품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1672년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베르메르의 수입원이던 미술 시장이 무너졌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베르메르는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의 한 상인에게 마지막으로 빌린 돈은 은화 1000길더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한다. 그 상인은 아마 베르메르의 그림을 선물(先物)로 거래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활고는 그의 영감을 앗아갔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린 베르메르 후기 작품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세 작품은 모두 수줍은 듯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이다. 그 중 하나만 전작과 같은 탁월함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베르메르는 1675년 12월, 마흔 세 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저자는 아마도 치명적인 감염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풍경화에 등장하는, 첨탑이 있는 구교회에 묻혔다. 먼저 죽은 아이들 셋과 함께.
무역으로 호황을 누리던 델프트의 위대한 화가 베르메르의 삶은 경제적 몰락과 함께 끝이 났지만, 무역과 여행과 전쟁이 열어놓은 문은 여전히 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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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서도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림도 단연 당시의 생활상을 그리는 것이 맞는 것을 "베르메르의 모자"를 통해서 그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엇다는 것도 나의 무지함임을 시인한다. 네델렌드의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읽으면서 17세기에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시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델프트의 풍경, 장교와 웃는 소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 지리학자, 저울을 든 여인,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동서양의 문화들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교류를 어렵풋이나마 알 수가 있다. 베르메르의 그리들은 정말 그림이 아닌 사진처럼 보이고 그림이라는 평면구도를 이루고 있지만 역동성을 느낄 수가 있다.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나는 추상적인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면에서 베르메르의 그림은 정말 좋아보이고 아름다와 보인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풍경의 구교회 첨탑에 묻혀 있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근방,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금방에 묻혀있다고 한다. 당시에 베르메르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죽고나서 그의 진가가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델프트의 베르메르의 무덤을 찾으면서 더 유명해 졌다고 한다. 베르메르는 델프트의 근방 25km 이내의 인물들만 그림의 모델로 사용했다고 하니 델프트를 참 많이 사랑하였었나 보다. 장교와 웃는 소녀, 편지를 읽는 여인 등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은 베르메르의 부인 카타리나라고 한다. 그녀는 결혼 후 근 10년을 임신을 하면서 보냈다고 하는데, 그 결과가 그림 속의 여인이 항상 배가 불러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화가가 자신의 아내를 그림의 모델로 많이 이용하는가보다. 그림 속의 풍경을 보면 당시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접시가 그림 속에 많이 등장하고 비버털로 만든 모자가 그려진 것을 보면 동양에서 건너 온 물건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동전을 만들때 은을 섞어서 사용하였고, 돈은 사용하면서 닳기 때문에 그 동전의 값어치를 알아보기 위해서 저울을 사용하는 그림이 있다.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VOC라는 회사는 동서양의 교류를 주관하여 당시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네델란드에서 온 외국인이 있었는데 VOC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던 것이다. 당시 중국이나 필리핀, 한국에 서양인들이 건너와 문화와 교류를 하였던 기록을 찾아보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다. 이렇듯 그림을 통해서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역사를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나니 다른 그림들을 이용하여 또 다른 문회상을 살펴보는 것에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번 방학에는 그렇게 역사에 접근해 보면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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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해 총체적으로 문외한인 터라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그림은 모 책의 표지로 쓰였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밖에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에서도 겨우 머리에 수건 같은 것을 두르고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가 커다란 진주 귀고리를 하고 있다는 정도밖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르메르의 모자> (2008, 티머시 브룩 지음, 추수밭 펴냄)의 저자는, '그림을 다른 시공간을 향해 직통으로 열려 있는 창문처럼 여기는 태도'를 버리고, '그림은 사진처럼 찍힌 것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떤 객관적 사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특정한 시나리오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감상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관점으로 베르메르의 그림들, 즉 '델프트의 풍경', '장교와 웃는 소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 '지리학자', '저울을 든 여인'에서 이야깃거리를 꺼낸다. 그리고 중국 화원의 풍경이 그려진 접시, 헨드리크 반 데르 부르흐의 카드놀이, 레오나르트 브라메르의 '베들레헴으로 여행하는 세 동방박사'에서도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이제 그림에 있는 문을 열고, 얀 베르메르가 살았던 17세기의 시대로 들어가 보자.
얀 베르메르(1632 ~ 1675)가 살았던 네덜란드의 델프트는 암스테르담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 세계 교역의 영향을 받았다. 해상 강국인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이 향신료와 자기 등의 교역을 위해 활발한 세계 교역을 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17세기는 신대륙의 발견이나 시장 개척의 시대가 지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두번째 접촉의 시기였다. 베르메르의 첫번째 그림 '델프트의 풍경'에서는 콜크 항, 청어잡이 어선, 동인도회사의 창고 등이 그림을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콜크 항은 스히 운하를 타고 델프트를 오가는 배들을 통제하는 항구로, 정박되어 있는 여객선과 화물선, 바지선 등으로 보아 교류가 활발했음을 의미한다. 거기 매여 있는 청어잡이 어선에서는 1550년부터 1700년까지 몰아닥친 추위 때문에 북해에 있던 청어가 남쪽으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델프트 지부는 델프트와 아시아를 잇는 거대한 국제 교역망의 중심지로서, 세계 최초의 거대 합자 회사이며 독점을 채택한 VOC는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을 지배하는 경쟁에서 네덜란드에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이 VOC의 활약은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 장교의 화려한 비버 모자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여러 기법들을 사용한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통해, 그리고 당시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델프트 지방 뿐만 아니라 세인트헬레나 섬과 중국과 퀘벡과 마카오와 일본을 볼 수 있었다. 한낱 어느 시기의 장면을 찍은 사진과 같다고 생각했던 그림에 이처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세계사에도 문외한인 내게 그림 맞추기처럼 느껴졌으니 저자의 해박한 구성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베르메르의 모자>를 통해 그림을 읽는 적극적인 방식을 여실히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