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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경의 난과 무너지는 양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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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만 요란한 번영의 극치를 달리지만 그 안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던 양나라.그 양나라를 일격에 무너뜨린 인물이 바로 북방에서 투항해 온 장군인 후경이었다.비록 신의가 없고 배신을 잘 했지만, 후경은 매우 뛰어난 장군이었다.후경이 투항해 오자 양무제는 그런 후경을 환영하고 높은 벼슬을 주었다.하지만 후경은 매우 교활하여, 양나라의 극심한 부패와 빈부격차로 인해 불만을 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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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만 요란한 번영의 극치를 달리지만 그 안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던 양나라.


그 양나라를 일격에 무너뜨린 인물이 바로 북방에서 투항해 온 장군인 후경이었다.


비록 신의가 없고 배신을 잘 했지만, 후경은 매우 뛰어난 장군이었다.


후경이 투항해 오자 양무제는 그런 후경을 환영하고 높은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후경은 매우 교활하여, 양나라의 극심한 부패와 빈부격차로 인해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많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고, 그들을 선동하여 양무제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켰다.


후경의 반란 소식을 들은 양무제는 그저 별것 아닌 일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후경의 반란군이 건강까지 들이닥치자 더 이상 여유도 부릴 수 없었다.


후경의 반란군에 굶주리고 핍박받은 양나라의 천민과 빈민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드는 바람에, 반란군은 수십만이나 불어나서 건강을 공격하여 마침내 함락시켰다.


그리고 후경에게 사로잡힌 양무제는 감금당한 채로 비참하게 굶어죽었고, 후경은 양무제의 아들들을 멋대로 제위에 올리고 죽이고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


하지만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일자무식인 후경은 양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고, 급기야 그의 폭정과 횡포를 더는 견디다 못한 양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자 도망가다가 원한을 품은 부하한테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후경의 죽음 이후에도 양나라의 혼란은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부패하고 타락한 양나라 황실은 장군 진패선이 일으킨 진나라 황실로 대체된다.


눈부신 건강의 번영과 양나라의 영화는 그렇게 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시대의 번영과 종말이 마치 우리 시대를 보는 듯해서 매우 씁쓸했다. 

x***2 2016.11.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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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17: 남북조 양시대 2 - 권중달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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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은 원칙적으로 남조(南朝)를 정통으로 간주하고 서술을 진행합니다만 북조에 대해서도 소상한 기록을 이어나갑니다. 말이 북조일 뿐이고 선비족 탁발씨의 위(魏)가 화북을 통일한 후에는 그저 위나라일 뿐이었습니다. 반면 남조는 우리가 잘 알듯 송-제-양-진으로 황실이 여러 차례 교체되었기에 통칭하여 "남조"라 부를 필요가 따로 있습니다. 그냥 정통을 북조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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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은 원칙적으로 남조(南朝)를 정통으로 간주하고 서술을 진행합니다만 북조에 대해서도 소상한 기록을 이어나갑니다. 말이 북조일 뿐이고 선비족 탁발씨의 위(魏)가 화북을 통일한 후에는 그저 위나라일 뿐이었습니다. 반면 남조는 우리가 잘 알듯 송-제-양-진으로 황실이 여러 차례 교체되었기에 통칭하여 "남조"라 부를 필요가 따로 있습니다.

그냥 정통을 북조에 두었다면 이 기간을 위(魏) 시대로 불러도 될 텐데, 중화 사관에 철저히 물든 후대의 평자들이 이처럼 짜디짠 기준을 적용하여, 근 150년을 존속한 황조를 두고 마치 반역 분립 할거나 벌인 집단마냥 폄하한 것 아닐지요. 현대인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위 황실은 현지에서 꽤 폭 넓은 위신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무력으로나 종합적 국력으로나 동아시아 최강자로 군림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단 유목민족의 특성상 부자세습의 관행을 그닥 존중하지 않고, 실력이 뛰어난 자에게 합당한 권력과 직함이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관념이 확고히 자리한 터라, 탁발씨(이후 원씨)가 (같은 선비족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성씨를 지닌 무장 집단(부족)을 확고히 통제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씨 황제가 수완이 좋은 권력자일 때는 이런 갈등이 봉합되었어도, 그렇지 않고 중앙에서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노출한다든가, 무리하게 한족 농경 문화권의 고리타분한 행세를 흉내낸다든가 하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반기를 들곤 했습니다.

탁발씨 상당수는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기존 화북 귀족들과 서서히 경계가 사라져 가며 본격 지배층으로 편입을 가속화한 반면, 변경에서 국경 수비에 종사하며 여전히 척박한 생활을 하던 집단은 이런 중앙의 한화 정책에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이는 이런 침투 왕조 시스템에서만 보이던 현상은 아니고,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나 여진의 금나라에서도 고유의 기풍을 유지할지, 아니면 한족의 문화에 동화할지를 놓고 격렬한 내부 투쟁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몽골 제국은 자체 성취가 워낙 두드러졌던 터라, 이런 문제보다는 극성스러운 기질 때문에 누가 무력과 전통적 권위 서열의 우위에 서느냐를 두고 내부 항쟁을 벌였을 뿐, 노선 갈등이나 문화 투쟁 양상은 아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자체 실력을 상실한 채 책략과 술수, 헛된 권위 의식만으로 황조를 지탱하려던 원씨들의 구상이 제대로 실현될 리가 없었고, 변방에서 고유의 검소하고 질박 강건항 기풍을 유지하던 무력 집단이 점차 황실의 정통성을 넘보게 됩니다. 반역이라기보다는 원씨 황조의 수완이 그만큼 졸렬했던 탓이 더 큽니다. 할거 집단 중 이주 씨의 세력이 가장 강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들조차 내분을 겪고, 이 집단은 엉뚱하게도 종래 2인자였던 고환이 최종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주씨는 원씨에 반역하고, 고환은 자기가 섬기던 이주씨를 다시 배반한 겁니다.

마치 (이때로부터 팔백여 년 후)일본에서 아시카가 씨가 자측이 밀던 덴노를 옹립하고 새 막부를 개창하던 시대의 양상처럼, 무력을 장악한 실권자들이 허울뿐인 황족을 내세워 서로 정통성을 겨루던 국면은 여튼 시대가 인정하던 정통성이 원씨 쪽에 있기는 했다는 반증입니다. 이 시기가 동위/서위의 대립 항쟁기이며, 이런 괴뢰극도 싫증이 났는지 고환이 죽고 나서 그 후계자인 고양은 스스로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릅니다(조조의 아들 조비처럼).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도 이로부터 7년 후에 건원칭제하는데, 이때부터 북조는 둘로 쪼개져 화북의 패권을 다투게 되죠. 사실상 삼국 시대가 열린 셈인데, 후한 말의 삼국시대와는 달리 화북에 두 국가가 섰다는 게 차이입니다.

v*****7 2017.11.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