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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놓아보내기 위해 떠난 여행의 기록 Judith Hermann - Nicht als Gespenster (유디트 헤르만 - 『단지 유령일 뿐』)
누군가와 격렬하게 부딪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인내와 이해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우발적인 충돌도 존재하겠지만, 갈등의 격렬함은 관계의 견고함과 뜨거움을 반증한다. 여기서 우리는 관계를 다루고 있는 문학 텍스트들의 '온도'를 잴 수 있다. 독일의 젊은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단지 유령일 뿐』이 지닌 온도는, '얼지 않을 정도의 서늘함' 이다. 한 마디로 밋밋하다. 유디트 헤르만 소설 속의 인물들은 뜨겁게 얽히거나 차갑게 대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극적인 상황과 뜨겁게 부딪히는 관계가 부재함에도 평범한 일상들은 조금씩 스며든다.
『단지 유령일 뿐』에 수록된 7개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머물지 않고 움직인다. 인물들의 움직임은 뚜렷한 목적이 없다. 무언가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다. 연인들의 밀월도, 실의에 빠진 자의 방황도, 재충전을 위한 결의도 없다. 마치 유령처럼 그들은 떠돌며 만나고 대화하고 같이 머문다. 물론, 서늘하게. 이 서늘한 온도는 “상대방을 사랑할 그런 위험”(259쪽)이 없는 관계 속에서 유지된다.
인간이 관계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은 착각과 오해 때문이다. 사랑을 신념의 실행 과정으로 오해할 때, 이해받고자 하는 행위가 어긋났을 때, 착각과 편견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줄 때, 타인과 나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온도는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갑다. 이렇듯 ‘관계’의 온도는 늘 문학 텍스트의 체온을 형성하는 유력한 코드이다. 그러나 헤르만은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관계의 온도를 낮추면서 그것을 누구보다도 면밀하게 응시한다. 갈등과 대립과 외면, 그리고 냉소가 아닌 스쳐가는 순간들 존재하는 어떤 분위기, 그 자체를 통해서 관계의 부조리와 한계를 덤덤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헤르만의 소설들이 대개 일인칭을 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바라보기 쉬운 ‘나’의 위치를 견고히 하고 뜨거운 관계에 휘말리지 않기. ‘나’들은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나’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소심함은 되풀이 된다. 친구의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 남자를 만나러 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나’ (「루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대하다가 정작 그 사람이 돌아서자 상처를 받는 ‘나’ (「뚜쟁이」),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와 키스를 하지만 시작하지 않고 돌아서는 ‘나’(「아리오르카손에게 향한 사랑」). 이런 식의 패턴이 반복되면 사랑 자체를 하기 힘들어진다. 마치 간만 보다가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음식처럼. 가장 견고한 관계인 가족도 ‘나’의 외로움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하며 (「아쿠아 알타」),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불안에 떠는(「어디로 가는 길인가」) '나‘는 결국 홀로 남는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렇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나‘들은 외로움이나 자기 연민에 휘말리지 않는다. 헤르만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타자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견고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러한 자기애는 파멸적이지 않은 체념으로 이어진다.
“나는 오언을 사랑하지 않을 거고, 그리고 오언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주 홀가분하면서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사랑의 부재가, 사랑의 가능성의 부재가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위로가 되고 홀가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슬펐다.” (259쪽)
여행지에서 남자와 단 둘이 남은 상황에서 읊는 ‘나’의 고백은 ‘나’의 체념이 자학이나 소모로 치닫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 고백은 홀가분하면서도 슬프다. 홀가분함과 슬픔. 이것이 헤르만 소설이 지닌 서늘함의 정체이다.
인간은 격정적이며 낭만적인 관계를 꿈꾸고 상처를 동경하다가 상처가 축적되면서 관계에 대한 희구를 포기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삶에서 앙상한 기억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통속에 어김없이 무릎을 꿇는다. 사랑하면 할수록 외로워진다는 역설 속에서 말이다.
많은 작가들은 여기에 저항하거나 일찍 체념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청춘의 이미지로 남는 작가와 젊음에도 불구하고 조로(早老)한 작가들이 많은 까닭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균형을 유지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부유하는, 유령 같은 ‘나’의 고백처럼. 위태로운 이 균형을 바라보며 소설 속 ‘나’들을 향해, 문득 떠오른 시 한 구절을 적어본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 허수경,「不醉不歸」에서)
<책 속의 밑줄 긋기>
그가 "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가 뜻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 말을 이해했다. (54쪽)
그 차가움에 그녀가 거부감을 갖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끌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낯선 사람의 차가움, 어쩌면 수천 년 동안 같이 지낼 수 있지만, 끝내 속내는 알 수 없는 그런 차가움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사실, 차갑고도 푸른 사실. (79쪽)
'누군가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라는 표현이 떠올랐고,'나는 너를 끔찍이 사랑해, 나는 너를 끔찍이 사랑해.' 몇 번이고 여러 번 연달아 생각했다. 그러자 말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우리가 서로에게 거슬리게 하는 것, 터놓고 말하지 않은 것, 이해 못한 것과 섭섭한 것에 대해 헛되이 물어보는 것 모두가 사랑이며, 사랑의 첫 번째 모습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나보다 더 많이 안다. 그는 "나는 너와 함께 늙고 싶어." 라고 말한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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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의 <단지 유령일 뿐>을 여행 가방에 넣은 건 몇 가지 사소한 계기의 우연적 연쇄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았고, 추천을 받아 책을 샀고, 책 표지, 그러니까, 길 위의 자동차에 탄 한 쌍의 남녀 그림은 묘하게 길을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뒤표지에는 소설가 조경란의 "어디 먼 데로 떠날 때마다 나는 유디트 헤르만의 책을 갖고 간다"라는 추천사도 쓰여 있었다. 게다가 책 속 일곱 개 단편의 공간적 배경이 모두 여행지라고 하니, 여행길 친구로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느껴진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대만 지우펀의 조용한 숙소에서 첫 단편 '루스(여자 친구들)'을 읽으며 내 선택이 무척이나 큰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줄거리를 요약할 필요도, 이야기에 어떤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루스'지만 대충 요약하면 이 정도 되겠다. '아주 오랜 친구 루스의 남자 친구 라울을 사랑하게 된 주인공이 먼 길을 떠나 그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지만, 사실, 그것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일임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오히려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주는 행복, 그러니까, 그네에 앉아 귤을 까며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작은 순간들이, 친구를 배신하고 몇 시간 기차를 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 보다 행복한 일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루스와 함께하는 익숙하고 사소한 시간으로 돌아간다.' 조용하고 쓸쓸한 여행지에서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묘사하는 책을 보는 건 분명 고역이었다. 게다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막 비집고 나올 때는 더더욱. '루스'의 주인공은 "... 난 너와 반대로 나를 잃어버리길 원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길 원해. 그리고 그건 내가 여행할 때만 가능해. 또 가끔은 사랑을 받을 때도.(p. 33)"라 말하지만, 결국 그녀가 여행과 사랑을 통해 발견한 건,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매번 여행길에 오르는 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행지에서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건 거의 '필연'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책을 덮어 여행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고 두 번 다시 여행 중에 이 책을 펴지 않았다. <단지 유령일 뿐>을 다시 읽기 시작한 건,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에 너무 빠르고 완벽하게 적응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낯선 공간이 아닌 익숙한 공간에서 새롭게 읽기 시작한 책은,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감상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고, 사소한 내 일상을 그리워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책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새롭게 읽기 시작한 <단지 유령일 뿐>은 뭔가 묘한 구석이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것을 넘어 지나치게 사소하다 느껴질 정도다. 도대체, 이게 소설이 되긴 해, 이런 느낌이랄까. 클라이맥스도 없고, 갈등도 없으며, 심지어 문체에서는 어떤 유의 감정의 진폭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10년 동안 알고 지낸 애매한 관계의 여자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미국으로 떠났고, 그 친구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들더라.' 딱 이 정도 내용으로 유디트 헤르만은 일곱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극적인 긴장감도 그럴듯한 플롯도 없는 소설이 재미있게 읽히는 건 분명 희한한 일이다. 심지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 슬며시 웃거나 슬퍼하는 자신을 보거나, 위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그 희한함은 절정에 이른다. 이건 분명, 이야기 자체 보다는 작가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감정의 흐름에 대한 무의식적 동조 때문이다. <단지 유령일 뿐>은 그런 소설이다. 나른하고 건조하고 심심한 이야기가 어느 순간, 사소한 감정의 진폭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동조하게 만들며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느리고 조심스러운 변화다. 나긋나긋하고 느릿한 소설 속 문체처럼 말이다. 그런 느낌의 변화는 유디트 헤르만이 아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일상은 무척이나 하찮기 마련이지만, 그 하찮은 순간에 불현듯 개입하는 아무것도 아닌 감정이 때론 거대한 사건보다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10년 친구가 미국으로 떠나든 말든 내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고 나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친구가 떠나는 뒷모습을 볼 때 느끼는 '순간'의 아련함이 내 일상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가장 강렬한 감정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그런 순간을 포착하고 근사하게 묘사해 깊은 잔영을 남긴다. '단지 유령일 뿐'의 엘렌이 버디의 손을 꼭 잡는 장면이나, '아쿠아 알타'의 주인공이 잠시 열어둔 기차 창문 사이로 밀려오는 따뜻한 공기를 느끼는 장면처럼. 그리고 어떤 감정에 대한 애매하지만 탁월한 표현들... ... 3월에 그들은 집수리를 시작하고, 4월에 요니나는 요나스를 생각하는 걸 그만둔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그녀는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그만둔다. 그것 대신 다른 것이 시작될 거라는 것 없이 뭔가 끝나 가는데도, 그건 요니나에겐 새삼스럽고 전에는 전혀 경험한 적 없는 상황이다. 요나스를 생각하지 않고 잠드는 건 힘이 든다. 하지만 그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그의 털모자와 녹색 눈, 자제심 부족과 변덕스러움, 행복, 대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잠이 먼저 찾아온다. - '차갑고도 푸른', p. 109 ... "모든 이야기는 끝이 있어." 하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들 이야기도 끝이 있고 그 끝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걸 듣고 싶은지 그에게 묻고 싶다. 그걸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 야콥. 언젠가 아니면 지금 바로 다른 사람에게 다음 번 이야기를,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어." 하고 말할지 모른다. ... 그가 갔으면 한다. 그는 갈 것이다. 다만, 아직은 아니다. - '어디로 가는 길인가', p. 243 그녀는 불친절하고 모호하고 흐릿한 표현을 주로 사용하지만, 그 애매한 표현은 깊은 행간을 만들어낸다. 책을 읽다 문득(그것이 우연이라도) 그 행간의 의미를 찾게 되는 순간(혹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순간), 그녀가 천천히 묘사했던 모든 표현들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감정의 진폭을(크든 작든) 만들어 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단지 유령일 뿐>은 뭔가 낯설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지만, 또 그 비밀스러운 구석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다. 그러니 이 책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의 느낌이, 일상의 모든 사소한 일들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감상을 찾아냈을 때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테다.
* '루스(여자 친구들)', '차갑고도 푸른', '아쿠아 알타', '단지 유령일 뿐'의 네 편과 유디트 헤르만의 데뷔 소설집 <여름 별장, 그 후>에 수록된 단편 '허리케인'을 묶어 영화화 한 <단지 유령일 뿐>이 올해 국내 개봉 대기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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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근거지인 베를린을 떠나 여행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 일곱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아마도 작가는 베를린이란 도시만으로는 갑갑했던 모양이다. 아이슬란드로, 미국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노르웨이 등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걸 보면 말이다. 나이도 성별도 떠난 이유도 다 제각각인 소설속 주인공들이 들려주는 일곱가지 색깔 이야기, 닮은 듯 다른 이야기를 한데 묶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이 짐작된다. 그런데 왜 작가는 여행을 소재로 글을 쓴 것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하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는 왜 떠나는 것일까? 혹 이방인이 되고 싶어서 떠나는 것은 아닐까? 나와 다른 나를 연기해도 얼마든지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말이다. 너저분한 일상이나 어딘가 버렸음 딱 좋겠을 책임과 의무들,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잠시 피해서, 오로지 진정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 아니겠는가. 마음껏 내 자신이여도 좋고, 내진 마음껏 내가 아니여도 상관없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이 단편들의 특징을 꼽자면 지극히 일상적이고 담담한 톤으로 그려냈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작가에게 여행은 거대한 이벤트가 아니라 (악!!! 나 드디어 여행가요! 가 아니라는 말씀) 그저 일상의 연장으로써의 의미밖엔 없어 보였다. 그저 사물을 좀 더 객관적이고 심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닫힌 장소로써 쓰여다고나 할까? 물론 감각이 깨여있다는 점은 일상과는 달랐다. 주로 느른하고 소심하며 말이 하기보단 삼키길 잘하는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다보니-- 아마도 작가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그들에게 무슨 말을 시키려면 여행이라는 조치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이 대단한 것을 발견했냐고? 아니, 그것은 아니다. 작가는 한치도 높아지지 않는 톤으로 그들의 여정을 설명한다. 그리곤 잡힐 듯 말 듯 그들이 느낀 것들을 풀어놓는다. 너무 미묘하게 풀어놓은 통에 그들이 어떻다는 것인지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들이 행복해졌냐고?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냐고?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달라졌냐고? 글쎄. 어쩜 그들은 굉장한 것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다. 아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돌아왔을 뿐이거나... 우린 여행을 통해 어떤 것을 얻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많을 것을 얻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것도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가 말하려는건 그들이 무엇을 했고, 말하던지간에 우리의 본질을 흔들어 놓는 사건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일곱개의 단편들 중 친구의 애인과 바람이 나면서 친구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나 (루스)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났으나 한마디로 하지 못한 채 보내버린 가이드의 이야기 (차갑고도 푸른 ), 취소된 카니발에 초청가수로 세상 끝 마을에 도착한 두 남녀가 일상에 지친 한 부부와 조우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단편(아리 오스카손에게 향한 사랑)등이 인상적이었으나 , 이 책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 단지 유령일뿐>이었다. 닳고 닳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연인이 미국 사막으로 여행을 간다.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머문 마을에서 그들은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된다. 손바닥만한 마을, 빈방있다고 선전하는 모텔, 혼자 사막을 걷는 여인을 두고 지나치지 못하는 트럭기사, 마치 <바그다드 까페>를 연상시키는 술집, 유령을 잡겠다며 요란스런 기구를 들고 찾아온 중년의 여성, 카리스마 넘치는 술집 여주인, 사막에서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한 사내를 그들은 하루밤 사이 만나게 된다.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아이의 엄마기에 그녀를 떠날 수 없다는 사내와 그런 그를 강렬하게 바라보는 술집 여주인을 보면서 둘은 마음이 풀어진다. 유령 사진을 찍겠다고 나선 정신나간 여인의 소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막 거주자들의 인정에 휩쓸려 버린 두 사람, 결국 모두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다음 날, 마치 오랫동안 인적이라고 없어 보이는 술집 앞에 선 그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둘 만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 줄거리다. 눈이 번쩍 트였을 만치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그냥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탄탄한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성, 신비롭고 흥미가 동하는 사람들,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의 외진 마을의 버려진 듯한 분위기,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 그들이 말하는 희망과 삶의 끈기, 별종에 대한 다정한 관심등이 세련된 묘사로 그려져 있었다. 단지 일상적인 디테일만으로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꾸며 내던 이야기꾼으로써의 작가의 역량이 돋보였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다소 심드렁했던 자세를 한 순간에 고치게 만든 단편으로, 이 한편만을 위해 이 책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니, 혹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취향에 안 맞는다고 실망하신 분들이라도 꼭 <단지 유령일뿐> 만은 읽고 넘어가시라고 권하고 싶다.
<밑줄 그은 말>
나중에 나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졌을지,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말을 의심없이 들었어야 했다. 그가 "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가 뜻한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 말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사실 이렇게 말했다. " 너한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고, 너는 어떤 약속을 받아낼 수도 없는 그런 배신자니? "그는 "나 때문에 루스를 배신할 거니?하고 물었고 나는 " 그래. "라고 대답했다.--54
몇년 뒤 그녀는 펠릭스와 함께한 그 시간을 통해 적우도 한 가지는 배운 게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특히 사랑 같은 것은.우스꽝스러운 깨달음이긴 하지만 그런데도 위로가 되었다.--193
버디는 그의 아내가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는데, 어쩌면 여기 오스틴에서의 삶 때문이거나, 아니면 삶 자체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아이의 엄머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난 그녀를 사랑해. 그녀는 내 아들의 엄마잖아."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그들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엘런이 애니를 향해 몸을 돌려 포도주 한 잔을 시킬 때까지, 한참 동안.
"넌 어딘선가 나온 말이나 문장들, 소위 순간들에 너무 매달려 있는 경향이 있어." 펠렌스가 엘렌에게 언젠가 말한 것이 있다.--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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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이란 것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이란 규칙적, 익숙함, 안정감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반면 지루함, 권태감, 반복성 등과 같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속에 살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잠시나마 그 일상을 벗어나기를 꿈꾸며, 또한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일상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일탈’이란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일상 속에 살다가 이 일상이 잠시나마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한 여행과 같이 의도된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의도 밖에 있는 우연에 의해서 경험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에 근거한 일탈은 워낙 순간적이어서 그것이 닥쳐올 때의 느낌을 포착하기가 어렵고, 어느 정도 일탈이 진행되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아! 내가 뭔가 다르게 살고 있구나’, ‘뭔가 다른 것을 경험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상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면 일탈은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우연성 때문에 일상이 깨어질 때에는 익숙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뭔가 박진감 넘치는 스릴을 느끼면서 자극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유디트 헤르만은 이와 같은 일상의 틈새를 파고드는 ‘일탈’을 잘 간취하는 작가인 것 같다. [단지 유령일뿐]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은 일상과 일탈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7편의 단편은 모두 ‘여행’이라는, 우리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방법으로서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유디트 헤르만은 ‘의도된’ 일탈 과정 중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의도되지 않은’ 일탈을 배치하여 이런 우연성에 기반한 일탈이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친구의 애인을 만나러 떠나고(루스),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며(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 뿐,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긴 여행을 떠난다(뚜쟁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리고 유디트 헤르만은 이런 일탈의 이야기를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그야말로 툭툭 던지며, 메마르고 차갑게, 마치 담배 연기 속에 금방 사라져 가는 듯이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내가 보기에 유디트 헤르만은 7편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일탈이 주인공들에게 단지 그 시점에서는 ‘순간’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일탈이 이후의 주인공의 살아가는 인생가운데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순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관심이 간 본 작품은 <차갑고도 푸른>, <단지 유령일뿐>, <어디로 가는 길인가>였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인생이란 시간은 선(line)을 따라 단순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가 분리될 수 없고, 서로 뒤바뀔 수 있는 입체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이리저리 돌려서 동일한 색상을 만드는 큐브 퍼즐처럼, 일상과 일탈, 또는 예측가능성과 우연성은 서로 맞물려서 현재의 ‘나’란 존재를 형성한다. 일상이 계속되어 쌓일 때, 어느 순간 일탈은 ‘우연’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 내 삶을 흔든다. 그 일탈이 진정되고, 일탈의 변혁성이 사그러질 때, 일탈의 에너지는 다시 일상 속으로 녹아들고, 그 때의 일상은 일탈 이전의 일상에 비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도저히 풀 수 없는 큐브도 결국에는 정확한 순서와 인과관계에 의하여 같은 색상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듯이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차갑고도 푸른>에서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는 ‘현재형’ 시제를 들 수 있다. 현재의 동거인인 마그누스와 딸 수나와 살고 있는 일상을 당연히 현재형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1년전 독일에서 온 요나스 및 이레네와 보낸 5일간의 과거 회상 내용 역시 모두 ‘현재형’으로 처리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일도 ‘요나스는 말했다’가 아니라 ‘요나스는 말한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을 떠올리게 하는 이 단편은 과거가 현재는 뒤섞여 있으면서 과거의 ‘일탈’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같은 맥락으로 <단지 유령일 뿐>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사막과 같은 사이였던 펠릭스와 엘렌은 우연히 묵은 모텔에서 만난 ‘버디’를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버디’가 자기 아이에게 줄 작은 운동화를 통해 느끼는 행복감과 신비로움은, 마지막 문단에서 펠릭스와 엘렌이 실제 둘 사이의 아이에게 사주는 운동화로 현실화된다. 과거의 일탈, 과거의 충격은 현재의 실제와 현재의 행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한 작은 운동화와 함께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해 줄께’라는 작은 위트는 과거가 현재속으로, 현재가 과거 속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1년 전의 내 모습... 또는 2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본다. 중간중간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경험한 사건, ‘우연히’ 가게 된 장소... 어쩌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우연한’ 사람, 사건, 장소,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수록된 7편의 간단한 줄거리 정리 1. <루스> ‘나’는 연극 공연을 위해 떨어져 지내던 오랜 친구인 루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루스의 애인인 라울을 만난다. 루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울은 ‘나’에게 “너 같은 사람은 내 인생에서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고,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울로부터 자신이 있는 뷔르츠부르크 행 왕복 기차표와 한 줄의 편지를 받는다. “네가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뷔르츠부르크 행 기차에 오른다. 2. <차갑고도 푸른> ‘세상의 끝’이라는 아이슬란드에서 동거하고 있는 마그누스와 요니나. 마그누스의 베를린 유학시절 알고 지내던 이레네와 요나스가 그들을 방문한다. 단조로우면서도 무미건조하던 아이슬란드에서의 일상을 보내던 요니나는 활기차면서도 솔직한 요나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눈밭에 빠진 차 아래 들어가 바퀴의 눈을 파내면서 요나스와 서로 ‘머리를 맞대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한 희열을 느낀다. 3. <아쿠아 알타> 부모님은 물의 도시 베니스로 여행을 떠나셨다. 코르시카를 여행하던 ‘나’는 베니스로 부모님을 찾아가 1박 2일을 함께 지내면서(그런데도 잠은 부모님과 다른 호텔에서 잔다.) 부모를 만나러 온 큰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여전히 걱정하는 부모님. ‘아쿠아 알타’ 즉, 가을과 겨울에 물이 범람하여 베니스에 넘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한 감정은 차오른다... 그리고 그 감정을 나타내기 전에 딸과 부모는 작별을 고한다. 4. <뚜쟁이> 연인이었다가 친구가 된 ‘나’와 요하네스는 ‘카를로비 바리’라는 온천휴양도시에서 만난다.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무미건조한 둘 사이의 관계 속에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은 지나간다. 돌아가기로 예정된 전날 밤. ‘나’와 요하네스는 ‘벨레 에타지’라는 나이트클럽에 간다. 술과 피곤에 취하여 숙소로 돌아온 ‘나’는 요하네스의 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다음 날 짙은 안개를 뚫고 집으로 향한다. 5. <단지 유령일 뿐> 미국 횡단여행 중이던 펠릭스와 엘렌은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루를 쉬기 위하여 모텔에 투숙한다. 거기서 그들은 모텔을 운영하는 애니와 유령을 쫓는 여자, ‘버디’라는 한 남자를 만난다. 서로간의 대화가 줄어들고 멀어져만 가던 느낌을 받던 펠릭스와 엘렌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된다. 6. <어디로 가는 길인가> 야콥과 사귀는 중인 ‘나’는 1년 전 연말을 보내기 위해 페터, 미하, 사라와 함께 프라하의 미로슬라브를 방문한다. 해가 바뀌는 3일동안 ‘나’는 프라하에서 이들 네 명과 함께 생활한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던 단조로운 생활 가운데 ‘나’는 소통의 단절을 느낀다. 7.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받고 노르웨이 트롬쇠로 간 오언과 ‘나’. 그러나 페스티벌은 취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구나르란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게 되는데, 여기서 같은 독일인인 마틴과 카롤리네를 만난다. 이들은 함께 지역의 파티에 참여했다가 아리 오스카르손이란 사람과 그의 아내 시카를 만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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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모집 할 때부터 단편이고, 유럽 일대를 여행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장편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
쭉 읽어 지는게 아니라 단편형식으로 짤막짤막 읽혀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그리고 독일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지만
역시나 개인적인 취향으로 인해 어렵다고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이 책은 가장 큰 테마가 여행이다.
미국, 아이슬란드, 체코,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면서 주인공들끼리
일어나는 일들과 이야기가 펼쳐진 책이다.
아직 유럽 여행을 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휴가 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며 유럽일대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받고 싶었는데, 여행 전문 서적이 아니라 아주 자세히
이 여행지들이 소개 된 것이 그런 느낌을 못 받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여행을 하며 일어나는 그런 이야기 들인데
느낌으로는 이 주인공들이 사랑을 하는 사이인데 열정적이기 보다
이별을 앞둔 사람들 같은 사이 같이 묘사가 된 부분들이 많았다.
여행을 하며 즐거워하고 한참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해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표현들이 일상적이고 단편적이라
그냥 편안한 느낌을 받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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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ith Hermann :: Nichts als Gespenster 참 속상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똑같이 좋아하게 되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자기 좋다는 사람 싫다고 거부까지 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만큼 똑같은 강도로 좋아해 주지는 않는다. 딱히 사람 고르는 안목이나 인복이 없어서라기보다 그저 내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면 나 역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같은 강도로 좋아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의 마음은 알겠고 참 고마운데 어쩐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듯 그 사람을 좋아해 주는 건 잘 안된다. 사람에겐 애초에 밀고 당기기 습성이라도 있는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복에 겨운 줄 모르고 한없이 바라고 아쉬워만 하는 걸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착각이고 다만 내가 준 만큼 환수 받지 못하니까 오기가 나서 정복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보면 좋아하게 되는 사람은 대체로 나를 닮았으되 내가 없는 것을 갖고 있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다. 그들을 좋아함으로 내가 그들과 닮았다는 것에 위안하고 그들에게 인정받음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함께 소유한다는 착각을 맛보고 싶어서 끌리게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해 주지 못하는 건 일종의 자기비하에 의해서가 아닐까? 스스로 잘난 점을 잘 못찾겠는데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 얘기하면 그것이 의아한거다. 저 사람은 나의 가짜를 보고 있어, 진짜를 알게 되면 분명 실망할거야 하고 의심과 불안에 휩싸이면서. 그러니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자신의 보고 싶은 모습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이고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할 때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 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목도해야 되는 과정탓이 아닐런지. 자기 비하나 열등감이 심해지면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자신감 없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그와 이루어지는 것에 있어선 겁을 내게 된다. 그냥 한발 떨어져 좋아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려 들게 되는거다. 표현에 소극적이 되고 자포자기와 체념이 빨라져 가며 고독에 적응하려 애를 쓰다가 결국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고 마음을 잘라 나가기 시작한다. 유디트 헤르만의 이 단편집은 그러한 소심한 이들의 사연만을 모아놓고 있다. 친밀했던 여자 친구가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상심 한다든가(※ 루스),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자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가 막상 그 남자가 뒤로 물러서자 상처를 받는다는 등 (※ 뚜쟁이) 그들은 한결같이 [왜 사람은 서로를 함께 좋아하지 못할까] 를 고민한다. 관계를 개선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만큼 무기력 하다보니 갈수록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힘겨워지고, 그래서 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색도 제대로 못한 채 아픈 마음만 안고 흘려 보내게 되고(※ 차갑고도 푸른) 어쩌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귀게 되더라도 서로를 똑같이 좋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으로 관계에 쉽게 회의감을 느끼게도 된다. (※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렇다고 홀로 있자니 가까운 사람이라고 손꼽아봤자 가족 밖에 없다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걸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아쿠아 알타) 어쩌면 좋을까. 마음 흘러가는대로 살다보면 언젠가 또 누군가에게 반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아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애써 좋아하지 않도록 외면하며 길을 가로질러가야 할까, 아니면 되든 안되든 일단 부딪혀서 만신창이가 되는 편이 나을까. 답은 말로 하면 사실 쉽다. [똑같이 좋아해야 된다] 는 강박관념만 버리면 되는거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내가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주지 않는다고 안달하지도 말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똑같이 좋아해주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가지지도 말며 그저 '좋아한다' 는 그 자체에만 충실하면 된다. '사랑 받고 싶다' 는 욕망을 억누르고 '사랑한다' 에 더 마음을 쏟는 것에 버릇 들이면 점차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터득해 나가게 된다. 관계에 대한 회의와 쪼그라든 마음을 그려내던 헤르만도 '그렇게 과욕하지 않아도 행복이라는 보상은 온다' 는 희망의 결말을 조그맣게 써놓았다. (※ 단지 유령일뿐, 아리 오르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어차피 자신의 보고 싶은 점을 보고 싶어 사랑을 갈망하고 자신의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외면하고파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충실하다' 는, 즉 자신의 사랑을 소중히 한다는 진정한 자기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사랑에 의한 상처를 소독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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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동시대성이나 국경으로 경계 지을 수 없는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내가 아는 독일 작가의 전부라 할 수 있었기에 젊디젊은 독일 작가와의 만남은 참 낯설었다.
독일의 기성세대들에게조차 대단히 낯선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유디트 헤르만. 작가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자기 주변의 이야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거대 담론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일의 새로운 세대에 그들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찾아 주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그 속엔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서 맞닿는 보편적인 감수성이 담겨 있다. 그로 인해, 책을 읽는 도중 문득문득 책장을 쉬이 넘길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_루스, 어쩌면 그건 이런 걸 거야. 넌 항상 너 자신을 찾으려 하고 늘 그렇듯 정말 너를 다시 찾게 되는데, 난 너와 반대로 나를 잃어버리길 원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길 원해. 그리고 그건 내가 여행할 때만 가능해. 또 가끔은 사랑을 받을 때도.(33p)
_요니나가 마그누스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요나스에게 슬쩍 넘어간다. 새털같이 가볍고, 분명하고, 아픔이 없는 채로. 이게 바로 가장 끔찍한 거다. 전혀 아픔이 없는 것.(100p)
_여행은 사실 내게 어렵게 다가온다. 여행 떠나기 이삼 일 전부터 이유 없이 겁이 나고, 먼 곳이나 낯선 사람들, 그 모든 게 헛되고, 그곳이 내 방 창문에서 보는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사 주 동안 낯선 나라에 머무는지, 다른 곳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지, 내게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어처구니없게도 이미 다 가 본 느낌마저 든다.(123p)
_나는 부모님과 함께 여행 중일 때 종종 갖게 되는 불안한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눈에 띄고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구경거리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별종처럼.(129p)
_안개가 걷히면 뭔가 다를 것이고, 낯설고 새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두려움 속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안개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없어졌다.(174p)
_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주 홀가분하면서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사랑의 부재가, 사랑의 가능성의 부재가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위로가 되고 홀가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슬펐다.(2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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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작가의 모습에 중성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처음에는 유디트 헤르만이라는 작가가 남자인줄로만 알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쏭달쏭한 이름도 그렇고... 그렇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곧바로 여류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남성작가들에 글에서는 좀처럼 볼수 없는 여성작가만의 감수성이 물씬 풍겨오기 때문이다.
유령이 등장할것 같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유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 단지 유령일뿐은 이 단편들중 한 작품의 제목이고, 여기에 유령사진을 찍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단편조차 유령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여행과 사랑등을 주제로 한 7편의 작품이 실린 단편집이다.
낯선곳으로의 여행, 낯선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흥분과 불안이 섞인 감정들. 여행과 사랑이라는 다소 동떨어진 소재를 일곱편에 걸쳐서 집요하게 같은 바구니 안에 담는 이유는, 그것을 마주하는 감정에 공통된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감회와, 낯선 사람들, 특히 이성과 맺는 관계에서 오는 감정은 설레이고,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끌린다는 점에서 동일한것 같다. 정착할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희미해져간다는 것도.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에서는 향기가 난다. 그리운 냄새.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지만, 예를 들자면 어느날 문밖을 나서는 순간에 봄내음이 물씬 풍겨와서 가슴이 설렌다거나, 창문을 열었더니 코끝을 스치고 가는 겨울냄새에 센티멘탈해져 버린다거나 뭐 그런 기분.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언제 어디선가 한번쯤은 느꼈었던 것 같은 감정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아련하고도 그리운 향기가 난다.
이 책에 등장인물들이 낯선 여행지와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감정들은 비록 장소가 다르고 상대가 다를지언정, 데자뷰처럼 아련한 기억속의 장면들을 더듬게 하는 결코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기억 속 어딘가에 그 향기만은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리운 느낌을,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일곱편의 이야기 안에서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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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을 독일 문학계의 천재의 반열에 올렸던 단편집, <여름 별장, 그 후>를 읽고 쓴 리뷰에서 나는 그녀의 다음 책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의 다음 책이 아직 없으므로 그녀와의 만남을 조금이라도 길게 하기 위해서 <단지 유령일 뿐>은 매일 하루에 한 편씩의 소설만 읽기로 했더랬다. 그럼 적어도 일주일간 그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중간에 문제가 발생했다. 도무지 책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외출하며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읽으면 딱 한 편을 읽을 수 있겠다고 가지고 나간 뒤로는 행방불명이었다. 며칠동안 열심히 찾다가 결국은 다른 책들에게 마음을 뺏겨 한동안은 그 책에 관해 잊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찾을 것이 있어 방을 와르르 뒤집었는데 거짓말처럼 <단지 유령일 뿐>이 '나 여기에 있었지롱~!' 하고 나타났다. 오랜만에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와락 반가웠다.
전에 계획했던 것처럼, 하루에 한 편씩 읽어나가려고 했는데- '너 오늘 잘 만났다!' 하는 심정으로 휘리릭 읽어내려갔다.
나는 유디트 헤르만을 따라 미국을 횡단하고, 노르웨이의 어느 작은 마을의 여관에 틀어박혀 마을 사람들과 이상한 파티를 하고, 조용한 처녀와 함께 침대 위에서 차를 마시고, 프라하에서 연말을 보내고, 오로라를 바라보고, 베니스의 복잡한 광장에서 나이 든 엄마 아빠를 마주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서른의 생일을 맞이하고 했다.
늦은 시간에서야 책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낯선 사람들과 아침이 올 때까지 낯선 언어로 떠들며 파티를 하던 기억과, 이국적인 풍광 속을 유유히 달려가던 차 안에서의 느낌과, 사람들로 가득한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고독함 속에서 들려와던 소음과, 처음으로 와보는 어느 외국의 작은 공항에서 시작된 긴 여행의 긴장이 모조리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혈관 속을 흐르는 잠들었던 여행의 입자들이 모두 깨어나 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를 갈망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딫히기를 갈망했다.
그리하여, 나는 혹시 나처럼 혈관에 여행입자가 넘쳐나는 사람이라면- 내가 애초에 계획했듯이 하루에 한 편씩 천천히 읽거나, 여행 떠나는 기차, 버스, 비행기 혹은 아예 여행지에서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하는 바이다.
일상이 나른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며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간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순간의 행복, 여행하는 동안만큼은 일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을 맛볼 수 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감정이 찾아옴을 알게 될 수 있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