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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말한다08—동진˙남북조(317년~5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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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남북조 시대는 317년부터 589년까지 273년간이다. 당시는 분열과 할거의 시대로 북방에서 각 소수민족들이 세운 정권을16국 시대라하고 남방에서 사마씨가 재건한 한족정권을 동진東晉이라고 한다. 16국은 5량(전량˙후량˙남량˙북량˙서량), 4연(전연˙후연˙남연˙북연), 3진(전진˙후진˙서진), 2조(전조˙후조), 하, 성한 등을 말한다. 이 중 전량은 한족이 세운 유일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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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남북조 시대는 317년부터 589년까지 273년간이다. 당시는 분열과 할거의 시대로 북방에서 각 소수민족들이 세운 정권을16국 시대라하고 남방에서 사마씨가 재건한 한족정권을 동진東晉이라고 한다. 16국은 5량(전량˙후량˙남량˙북량˙서량), 4연(전연˙후연˙남연˙북연), 3진(전진˙후진˙서진), 2조(전조˙후조), 하, 성한 등을 말한다. 이 중 전량은 한족이 세운 유일한 정권이었고 60여년 총 8대까지 이른 왕조였다. 대부분의 16국 왕조들이 보통 30년 정도에 걸친 3대에서 5대에 그친 것을 보면 장수한 편이다. 16국 시대 통치자들은 한족과 소수민족을 구분하는 호한분치胡漢分治를 실시했다. 동진은 강남에 출현한 첫번째 정통정권으로, 동진 이후 남방의 한인들이 세운 4개 왕조 송宋˙제齊˙양梁˙진陳을 남조라고 한다. 이 때부터 강남지역의 경제가 급성장하여 중국의 경제중심이 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북방 16국 이후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는 동위東魏˙서위西魏˙북주北周˙북제北齊로 갈라졌다.

지배층의 황음무도와 왕위계승을 둘러싼 형제간의 다툼 그리고 무리한 정복전쟁은 빈번한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통일과 분열로 혼란했고, 비교적 큰 전쟁만도 500여 차례가 넘는다. 비수淝水의 전투에서 「초목개병草木皆兵」과 「풍성학려風聲鶴唳」 같은 성어의 전고가 나왔다. 참합피參合陂 전투로 후연이 망하고 강대해진 북위가 중국의 북방을 통일하게 된다. 송위대전宋魏大戰은 비수의 싸움에 이어 중국 남북 간에 벌어진 또 하나의 큰 전쟁이다. 비록 위나라의 침략을 막았지만 송나라 역시 큰 손실을 보아 이후 북강남약北強南弱의 국면이 시작되었다.

남북 각 정권이 세운 도성인 건강建康,장안長安,낙양洛陽이 남북 3대 문화중심지였다.

「중국은 땅이 넓어 각지의 지리 여건, 자연환경, 토양기후와 물산, 민족 등이 서로 많이 다르다. 양진 남북조 시대는 오랜 전란과 분열, 인구의 대이동, 고문 사족집단들의 지역적인 통제, 각 정권의 정책 차이 등으로 지역의 정치경제 발전도 상당히 불균형했다. 당시의 경제 문화 지역은 크게 셋으로 분류됐다. 첫째는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지역인데 여기는 원래 진한시대 중심경제지역이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서는 경제가 파괴되고 지위가 추락했다. 둘째는 낙양, 업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 지역으로 일명 산동 지역이라고도 한다. 태행산 이동 등지이데 이 지역의 사회 경제는 큰 발전을 가져왔다. 세번째는 건강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지역으로 북방인구의 대대적인 남하로 경제가 신속히 발전했다. 이렇게 중국고대의 경제 중심은 점차 북에서 남으로 옮겨갔다. 《수서˙지리지》상중하 3권은 이 상황에 근거해 당시 중국을 관농關隴, 중원, 강남 3대 경제 문화 지역으로 나눈 것이다.」(284쪽)

중국과 서부 인접국 및 유럽 나라들과의 빈번한 접촉과 교류가 있었다. 남북조시대 중원지역에서 영향이 가장 컸던 소수민족음악은 구자악龜茲樂이었다. 전진의 여광이 구자국에서 그 음악을 얻어 중원에 전파되었다. 또한 민족 간의 대융합 시대로 각 민족의 투쟁과 융합과정을 거쳐 흉노, 갈, 저, 강, 선비 그리고 기타 민족 등 10여개 소수민족 1000만 인구가 한족에 융합되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 전연의 명장 모용각慕容恪, 전진의 재상 왕맹王猛, 동진의 승상 사안謝安,연나라를 재건한 모용수慕容垂, 서역을 정복한 여광呂光, 동진의 대사마 도간陶侃, 닭이 홰를 치면 검 연습을 했다는 고사성어 「문계기무聞雞起舞」의 주인공 조적祖逖, 불교를 숭상하고 달마대사를 만난 양무제 소연蕭衍, 소림사를 세운 북위 효문제 원굉元宏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는 제2차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불교의 현학화와 유불선 3교의 합류 등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16국 시대 인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343~413)은 《유마힐경維摩詰經》과 《금강경》 등을 남겼다. 유마힐은 인도 법문의 음역인데 티없이 깨끗한 명성이 멀리 퍼진다는 의미다. 구마라습은 남조 양진 시대의 진체真諦, 당나라 현장玄奘과 불공不空과 더불어 중국불교사의 4대 번역가에 속한다. 그가 번역한 불경은 대부분 대승경론으로 중국의 대승불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적인 중국불교를 모색한 고승 도안道安은 본무종本無宗을 제창하고 그의 제자 혜원慧遠은 강남의 불교발전을 추진했다.

도교 역시 크게 융성했는데 동진의 도교 영수라 할 수 있는 갈홍葛洪(283~363)은 도교사상가이자 연단술사요 과학자로서 의학, 제약, 화학 방면에서 중요한 발견과 발명을 했다. 모두 530여권의 저서를 저술했다는데 현재 《포박자抱朴子》와 의학서 《주후구졸방肘後救卒方》 등만이 전해진다. 그의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은 제일 처음 부황을 붙이는 법을 소개한 책이다. 동진의 갈홍과 남조의 육수정, 도홍경陶弘景(456~536), 북조의 관겸지冠謙之 등은 모두 양진 남북조 시대 민간의 도교를 통치계급의 도교로 바꾼 대표적 인물들이다. 관겸지가 창립한 도교를 북천사도北天師道라 한다.

위진시대 회화는 중국 회화사에서 가장 번영했던 시기지만 잦은 전쟁으로 보존된 것은 극소수다. 서예분야에서 한족의 엄격하고 무거운 예서체에서 왕희지 부자의 행운유수와 같은 행서와 초서등으로 변했다. 동진시대의 명문장가 왕희지(王羲之,303~361)의 자는 일소逸少이며 낭야 임기(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縣) 사람으로 회계(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일대)에 정착해 살았다. 관직은 우장군右將軍과 회계 내사內史 등을 역임해 왕우군王右軍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서성書聖으로 추앙을 받았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그의 작품으론 해서로 쓴 〈악의론樂毅論〉과 〈황정경黃庭經〉, 그리고 행서로 쓴 〈난정집서蘭亭集序〉가 유명하다. 천하제일행서라 칭송받는 〈난정집서〉는 37편의 시에 쓴 서문으로 모두 18행 324자이다. 당태종의 유언으로 그의 묘에 같이 묻힌 작품이다. 왕희지는 모두 일곱 아들이 있는데 다들 서예를 즐겼다. 둘째 왕응지, 셋째 왕휘지, 넷째 왕조지, 일곱째 왕헌지가 있다. 이 중 왕헌지王獻之의 서예가 가장 빼어났다. 그래서 왕희지와 왕헌지를 일컬어 「이왕」이라 한다.

동진남북조 시대 시단에는 기존의 현언시玄言詩나 유선시遊仙詩 말고 산수시와 전원시라는 두 가지 새로운 장르가 출현했다. 산수시는 송나라의 사령운謝靈運(385~433)이 창시했고 전원시는 동진의 도연명陶淵明(365~ 427)이 창립했다. 하나는 동적으로 하나는 정적으로 서로 조화되어 새로운 시 세계를 개척했다. 도연명의 〈귀원전거歸園田居〉 1수를 감상해보자.

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소무적속운 성본애구산)
誤落塵網中 一去十三年(오락진망중 일거삼십년)
羈鳥戀舊林 池魚思故淵(기조연구림 지어사고연)
開荒南野際 守拙歸園田(개황남야제 수졸귀원전)
方宅十餘畝 草屋八九間(방택십여묘 초옥팔구간)
榆柳蔭後檐 桃李羅堂前(유유음후첨 도리나당전)
曖曖遠人村 依依墟里煙(애애원인촌 의의허리연)
狗吠深巷中 雞鳴桑樹顛(구폐심항중 계명상수전)
戶庭無塵雜 虛室有餘閒(호정무진잡 허실유여한)
久在樊籠裡 復得返自然(구재번롱리 복득반자연)

어려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청산을 좋아했네.
어쩌다 세속의 그물에 걸려 13년을 허송했네.
그물에 걸린 새 숲을 그리워하고 못에 갇힌 고기 심연을 그렸네.
남산 기슭을 개척하고 전원으로 돌아오니
밭은 10여무이고 집은 아홉 칸 초가집.
뒤뜰 처마 곁엔 느릅나무가 녹음을 드리우고 앞마당에는 도화꽃이 만발하네.
저 멀리 건너 마을 밥 짓는 연기가 하늘하늘.
골목 깊숙이 개 짓는 소리 들리고 뽕나무 위 닭 울음 들리네.
집안에 속세의 번잡함 없고 빈 방에는 한가로움 넘치네.
오랫동안 조롱에 갇혔던 새 이제야 대자연으로 돌아왔네.

남북조 시대 시가총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은 남조 진나라 서릉徐陵(507~583)이 편찬했다.주로 여성이나 남녀 연정에 관한 시들을 선록했다. 《세설신어世說新語》는 남조 송나라 유의경이 문인들을 소집해 편찬한 사대부의 언행을 기록한 필기체 소설이다. 남조 양나라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은 중국 최초의 문학평론서이다. 《화품畫品》은 남조 제량연간의 화가 사혁이 화가예술을 평론한 저서로 중국 현존 서화평론서 중 최초의 저서다. 송나라 사람 법엽范曄(398~446)이 지은 《후한서後漢書》는 본기와 열전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진나라 유연자劉涓子가 집필하고 남조 제나라 공경선龔慶善이 정리한 책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은 현존하는 최초의 외과의학 전문서이다. 소명태자 소통蕭統(501~531)이 지은 《소명문선昭明文選》은 중국 최초의 시문총집이다. 중국 최초의 농업백과사전은 북위 말기 사람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이다.

z***a 2009.05.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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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말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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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 시대는 국명과 종족명을 연계해서 외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나라 이름을 짓는데에도 일관된 패턴이 없어서 어지간히 암기력 좋은 사람에게도 이해하기에 수월한 과제가 아닙니다. 남북조 시대에 진입하기 전 최후의 패자(覇者)라고 할 수 있는 영걸 부견이 세운 나라는 전진(前秦)이고, 자신이 천자로 섬기던 부견을 죽이고 새 황제로 등극한 자는 요장인데, 이 요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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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 시대는 국명과 종족명을 연계해서 외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나라 이름을 짓는데에도 일관된 패턴이 없어서 어지간히 암기력 좋은 사람에게도 이해하기에 수월한 과제가 아닙니다. 남북조 시대에 진입하기 전 최후의 패자(覇者)라고 할 수 있는 영걸 부견이 세운 나라는 전진(前秦)이고, 자신이 천자로 섬기던 부견을 죽이고 새 황제로 등극한 자는 요장인데, 이 요장이 세운 나라가 후진(後秦)입니다. 부견은 저족(氐族)이고 요장은 강족(羌族)이므로, 핏줄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둘 사이에는 어떤 인적 연계점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몰락한 부견에 등을 돌린 자들 중 선비족의 모용수 같은 이는 자립해서 후연(後燕)을 세웠는데, 이 모용수는 전연(前燕)의 창업자인 모용외의 아들이므로 정통성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혈연도 직계로 이어집니다. 같은 시대 정통 황조로 평가되는 동진(東晉)의 초대 황제 사마예가 종래 황실의 비교적 먼 친척인 것과 구별됩니다.

부견 역시 방계 왕족(창업자 부건의 조카)에 불과했으나, 부건의 적자 부생이 황위에 올라 지나친 폭정을 일삼자 반정을 일으켜 스스로 천자가 되었습니다. 남조의 경우를 보면 이 시점으로부터 근 백 년 후, 소소경이 세운 제나라가 망하고 그의 먼 친척 소연이 황제가 되었을 때 국명은 양(梁)이었습니다. 이때 제나라는 본디 창업자 소도경부터가 한문(寒門) 출신이었고, 그를 이은 후계자들이 하나같이 상궤에서 크게 벗어난 행동과 도착적 성품을 드러낸 이들이었기에, 국풍을 일신하는 의미에서도 종래의 국명을 고수할 이유가 없었겠습니다. 하지만 요장이 구태여 나라이름을 바꾸지 않은 건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만듭니다.

옛날 역사책에는 모용수가 일부러 부견을 망하게 하려고, 무리한 원정을 말리지 않고 강남으로 출정하여 동진을 정벌하게 부추겼다는 식으로 적어 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적, 혹은 중화 중심 세계관의 유치하고 억지스러운 합리화가 아닐지 의심이 듭니다. 부견이 백만 대군을 모아 장강으로 향했을 때, 군세가 그 상대의 거의 열 배, 스무 배에 달했습니다. 병력에서 이 정도의 격차가 벌어지면, 전황은 대개 더 두고 볼 것이 없을 만큼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모용수 역시 배는 아팠겠지만(부견은 밉든곱든 자신의 모국이었던 연을 망하게 했습니다), 현재 자신의 주군이고, 나름 위대한 국량을 지닌 인물의 야심 가득한 도전이니만큼 행운을 빌어주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랑캐들끼리 싸움을 붙인다는 의미에서 후대의 한족 사가들이 악의적인 곡필을 했을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긴 하죠. 부견이 백만 대군을 모았다고는 하나, 이게 그다지 충실한 대비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 늙은 나이는 아니었겠으나, 다소의 조바심으로 그저 물량의 우세에 힘입어, 현지의 지형과 정세를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일을 서둘렀을 수 있습니다. 모용수는 부견보다 열 살이나 많았기에, 보다 노련한 안목으로, 이런 그의 준비에 뭔가 부실하고 불안한 요소가 잠복해 있었음을 눈치채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점을 더 보강하셔야겠습니다." 부견의 충신 왕맹처럼 만류까지야 하지 않더라도, 황제의 장래를 걱정하는 충심이 있었다면 작은 조언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을 텐데요.

한편, 왕맹이 과연 부견의 출정을 막았을까, 중국의 정사(正史)가 다분히 프로파간다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성이 담겨 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한족이었던 그에게 종족적 충성심을 부여하고(평판이 나쁘지 않으면 한간으로 덧칠을 씌우지 않습니다), 현명한 한족 출신 인사의 말을 듣지 않아 파멸적 패배를 당했다는 식으로 억지 교훈화를 시도하는 것도, 당대 역사 기술에서 흔히 보는 모습입니다. 물론 반대될 만한 근거가 충분치는 않기에, 일단 정사에 쓰여진 기록을 믿는 게 아카데미즘의 바른 자세입니다.

요장을 두고 흔히 배신자라 칭하지만, 요장은 부견이 아니라 부견이 몰아낸 왕 부생(그의 조카)에게 항복한 사람이므로, 사실 저 후대의 후경처럼 악질 배신자는 아니라고 봐야겠습니다. 모용수는 그저 돌아가서 자기 나라를 복원했을 뿐이지만, 여튼 그는 부견 본인에게 직접 항복한 처지라는 차이가 있겠고요. 한편 부견은 죽기 직전 요장에게 극도의 경멸감을 갖고 맹렬히 그를 비난하다 죽음을 맞이했는데, 마치 사담 후세인이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관들 면전에다 대고 "너희들이 누구 이름으로 임명장을 받고 그 자리에 앉은 자들인데 감히 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사담 후세인과는 달리, 부견은 당시 기준으로(심지어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이해가 안 될 만큼 낭만적인 구석을 보인 인물입니다. 왜 백만 대군을 모으고도 군기가 오합지졸의 그것이었느냐. 그가 독하게 군을 다스리고 몰아붙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정통성도 부족한 이민족 출신이라 한족에게도 권위를 넉넉히 얻지 못했고, 하물며 본디 기질이 사나웠던 유목민족들이라면 이 신출내기 정복자에게 최종적 충성을 바쳤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당장의 주먹이 무서우니 복지부동한 것에 불과한데... 이걸 진짜 충성으로 알고 한없이 너그러운 태도로 고비를 늦추었으니,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무섭게 각처에서 반란이 터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겠습니다. 수 양제 같은 경우는 워낙 학정을 일삼다 그꼴을 당했지만, 부견은 자기 나름대로 관용을 베푼 구석이 있었는데도 인심의 배반을 겪었으니.. 창업자의 경우 모질게 몰아치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어떤 험한 꼴을 보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원장이 피에 굶주렸다 할 만큼 잔인한 모습을 보인 것도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습니다. 


v*****7 2016.02.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