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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말하는 한국 예술 미학 보고서- 강석경 《일하는 예술가들》
"한국인이 말하는 한국 예술 미학 보고서- 강석경 《일하는 예술가들》" 내용보기
이 책은 한국 예술 문화계 파르테논 신전 기둥 같은 이들의 인생과 예술관을 인터뷰로 풀어놓고 있다. 내가 그간 읽어온 어떤 미학론보다 진솔하게 와 닿도록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같은 땅에 내가 살고 여전히 어려운 예술 환경과 인식과 세태를 같이 겪고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 상당수 작고하셨다. 1986년 초판 이래 꾸준히 애독되었지만
"한국인이 말하는 한국 예술 미학 보고서- 강석경 《일하는 예술가들》" 내용보기

 

이 책은 한국 예술 문화계 파르테논 신전 기둥 같은 이들의 인생과 예술관을 인터뷰로 풀어놓고 있다. 내가 그간 읽어온 어떤 미학론보다 진솔하게 와 닿도록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같은 땅에 내가 살고 여전히 어려운 예술 환경과 인식과 세태를 같이 겪고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 상당수 작고하셨다. 1986년 초판 이래 꾸준히 애독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된 게 안타깝다. 이 책은 계속 읽을 가치가 있다.

 

 

(※본문 사진은 모두 김동희 사진작가)

 

 화가 장욱진(1917~1990)
산다는 건 생활이에요. 나는 산다는 말 대신 걷는다는 말을 해요.”(p13)
 
화가 장욱진은 남자보다 대범했던 고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인터뷰어인 강석경은 그의 그림 속 통나무 같은 허리며 단순화한 표현이 탄탄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아낙네들이 그를 키워왔고 화가로서 자연의 생명력과 삶에 순응해 가는 한국 여인네들의 슬기를 배웠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판화가 제일 먼저 생긴 데가 미국이에요. 많이 보급하기 위해서죠. 미국은 땅덩어리가 크니까 캔버스도 대형이에요. 그러나 국경이 인접한 유럽에 가면 대개 삼십 호 이내예요. 그게 다 주변 조건에서 만들어져요. 나는 작은 그림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는데, 큰 화면은 친절미가 적요. 또 큰 화면은 계획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체질에 맞지 않아요. 언젠가 큰 벽화를 맡은 적이 있는데, 작은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어요. 벽화라는 건 한눈에 휘둘러보는 거지.”(p19)
 
"선생의 그림에 관한 평 중에서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마지막 것에 이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생략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화가 자신도 생략을 말한 적이 있고, 그래서 그는 생략의 예술가로 자주 얘기된다. 하긴 그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가 다 생략의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춤은 언어의 생략이고, 시는 산문의 생략이며, 소설은 인생의 생략이다. 그림은 마음의 생략이라고나 할까.”(p20)
 
자녀들이 아버지로는 인정하지 않으나 그림은 인정한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그림을 위해 자신을 소모한 화가.
 
이 새가 화면에 있을 때와 저 새가 저 화면에 있을 때의 공기가 틀려요.” 같은 말이라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듯. 그러나 공기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공기는 우리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p22)
 
"난 개성이란 말을 싫어해요. 대신 자기 체질이라고 말하겠는데, 체질에 맞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돼요. (중략) 난 예술이 뭔지 몰라. 그것보단 쟁이가 좋아. 쟁이는 무어든 마음대로 오거든.”(p23)

 

 

 

가야금 황병기(1936~)
가야금은 훨씬 전에 시작했죠. 3 때예요. 음악은 어려서 해야 돼요. 문학이나 미술은 그렇지 않은데. 그건 일상생활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가 매일 입는 옷, 가구, 과일 빛깔 모두가 미술 훈련이죠. 글도 일상의 체험에서 나오고요. 음악은 그게 아녜요. 가장 추상적인 것이어서 그럴는지 몰라요.”(p28)
"정적을 좋아하는 것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통한다.“(p29)
 
황병기 선생이 가정교사를 통해 를 배우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전쟁이 나면서 그들을 이별했고 그는 홀로 인생을 고민했다.
 
문득 한 생각이 뒤통수를 쳤다. 두부장수는 벌써 두부를 해와 팔러 나서고 있었다. 그가 밤새 인생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말이다. 그것은 헛것이 아닌가. 두부장수는 목적도 모른 채 나아간다. 티끌 같은 생각을 하며 변소조차 못 가고 있는 존재보다 두부장수가 확실히 나았다. 그때 그는 논리라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논리의 끈에 공을 달고 돌리는 공간뿐이라고."(p32)
 
피난 시절에 우연히 가야금을 접하게 되었고 법대를 졸업할 때 음대 학장인 현제명 박사가 그에게 국악과 강사로 나와 달라고 할 정도로 그의 실력은 대단했다. 그가 처음 작곡을 시작한 것은 62년도. 문학과 달리 전통 곡밖에 없는 국악도 바꿔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의 최초 가야금 독주곡이자 우리 음악 사상 처음 작곡된 현대 가야금 작품 (1963)이 탄생했다. 또한 조선조의 유산인 한국 전통음악의 틀을 벗어보고자 근원인 신라에 접근했다. “신라미술이 국제성을 띠듯 음악에서도 공간을 넓히려 했다. 77년작인 비단길침향무에 이어 이국정취를 자아낸다.”(p36)
 
음악이란 내가 살아온 것 속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죠. 현대음악 발생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죠. 추상미술이 나오면서 현대예술은 난해하다고 해요. 예를 들면 피카소 그림에 코가 두 개 있고 얼굴이 기하학적이니까. 음악은 그 반대예요. 웃음소리 같은 구체적 음이 들어가면 어렵다고 해요. 음악이 굉장히 보수적이죠. 추상이 습관이 돼서 구상이 나오면 장난같이 들려요.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죠. 그렇게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보여요. 無用하다는 면에서 가장 강하기도 해요. 그러나 추상적 현상이 일어나려면 구체적인 것이 수없이 걸러진 뒤에라야 되겠죠. 음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에요. 우리가 살고 경험한 소리의 에센스를 뽑는 거지요. 심리 체험 속에서 공통분모가 추출된 것이고 정신의 뿌리지요. 아리랑이나 애국가를 들으면 어머니 목소리 듣는 것 같잖아요.”(p36~37)
 
"우리 음악은 수천 년의 경험이 뽑아져 나온 것이죠. 우리 미술을 동양화라고 말하지만 음악은 국악이라고 하잖아요, ‘이 들어가는 것은 국어와 국악밖에 없죠. 악기도 그래요. 가야금 같은 건 어떤 나라 악기와도 달라요. 줄을 누르기 때문에 더 절실하고 미묘한 소리가 나죠. 서양 음악이 벽돌처럼 나열된 것이라면 우리 것은 천연돌 같은 거라고나 할까.“(p37)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들으며 고통의 극치와 희열의 극치가 닿는다는 것을 깨닫지만 합리성으로서 예술을 하려고 노력하는 그. 그런 점이 그의 천부적 매니지먼트 능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있던 전위 무용가 홍신자 씨를 직접 초청해 찬사와 비난을 불러일으킨 가야금과 인성(人聲)을 위한 미궁을 실현할 수 있었던 힘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을 거예요. 우연히 책방에 들러 채근담을 들춰 보았어요. 다른 건 다 같은 소리지만 한 구절이 충격을 주었어요. 바람이 대밭에 불어오되, 바람이 지나면 대는 그 소리를 남겨두지 않고, 기러기가 연못을 지나가되 기러기가 가버리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이건 즉, 집착하지 말란 뜻이죠. 예전부터 우물은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말만 들어왔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모든 것이 너무 빡빡하게 돌아갔죠.”(p44)
 
그의 음악 인상과 달리 굉장히 현실적인 예술가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말은 집중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겠다.

 

 

 

 

건축가 김중업(1922~1988)
나카무라 준뻬이 교수에게 배운 것이 건축가의 양식이라면 코르뷔지에 선생에게 배운 것은 자기 세계를 통해 보는 눈이야요. 눈이 닦여야 돼요. (중략) 르네상스 건축은 권력자들이 지은 것이지만 중세 건축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죠. 정성을 들여서 자신을 바친 거야요. 자기 모색이 시작되면서 이렇게 눈이 닦여 가는 거죠”(p55~56)
 
현대건축의 거장인 코르뷔지에가 너는 전생부터 건축가다. 천재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제자였던 김중업. 1956년 코르뷔지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한 그. 나도 보고 감탄한 바 있는 부산대학 본관, 건국대학 도서관, 명보 극장, 서강대학 본관, 드라마 센터, 원자력 연구소, 제주대학 본관 등이 그의 설계이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한국의 전통미와 프랑스적인 우아함을 잘 조화시켜 62년도 서울시 문화상, 65년도에는 앙드레 말로의 제창으로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를 얻었다.
 
건축이란 리듬, 하모니, 콘트라스트를 이루어야 하므로 작곡과 가장 비슷하다고 말하는 그는 초이상주의자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설득해야 하는 건축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려 했다. 종교가 그렇듯 모두에게 꿈을 나눠주는 것이 건축이기에 또 해나갈 수 있었던 거 같다.

 

 

 

시인 김종삼(1921~1984)
그에게 인간의 죽음이 뭐냐고묻는다면 "모차르트를 못 듣게 되는 거라고.”(p72)
 
김종삼 시인의 시는 이국 풍경이 자주 나오고 그 때문에 비판도 받았지만 국적을 불문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 냄새, 이 땅의 정취들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있던 시절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모시고 와 주인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어버이 날 생일이라고 10을 내미는 장편(掌篇) 2를 보고 누가 이 시, 이 시인을 박대할 수 있을까.
 
선천적으로 현실을 헤쳐나갈 힘이 없는 사람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생활에서는 애처로울 정도로 무산자(無産者)였던 김종삼 시인. 그러면서도 그는 시가 무슨 구원이 됩니까. 따분하고 심심해서 시를 쓴다’, “이치도 없고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 회복을 말할 능력도 없다”,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라 말하는 그의 자조만 봐도 그는 정말 잠수함 속에 산소를 측정하기 위해 태우는 그 시대 토끼 같은 존재였다. 한국의 오염되지 않은 시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스스로 죽는 죽음을 확실하게 되풀이하는 정녕 시인.

 

 

 

화가 유영국(1916~2002)
산수나 치고 무당을 그린다고 한국적인 그림인가? 혜원의 그림을 지금 재현해서 어쩐다는 건지, 동양화에서 지금 무엇이 나왔나요? 사실을 그리더라도 이십 세기의 사실을 그려야 돼요. 한국 여자가 장 보러 가는 것이 한국적인 그림인가? 다른 민족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나와야 해요. 그게 한국적이고 전통이지. 그러려면 수련을 쌓아야 해요.”(p101)
 
일본에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해방 후 어지러운 나라 상황과 생계 때문에 고향에서 10년이나 고기잡이, 양조장을 경영하며 자연인으로 살았던 그.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을 때 학교 강의를 나가기 전 꼭 두 시간씩 그림을 그리고 집을 나섰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화가에겐 단지 엄격한 대결이 있을 뿐이다. 잘 안 될 땐 그림을 엎어놓는다. 틈틈이 보고 생각하면 일 년 안에 다 해결 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이란 끈기다. 화제 하나를 등록상표같이 내걸고 안주하는 화가도 있지만,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야 한다. 한평생 실험 작가는 없다. 감성에는 이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p103)
 
수학 잘하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처음엔 감성이 앞선 사람이 빨라요. 그러나 어느 고비에 가선 뒤져요. 막혀요. 수학 잘하는 사람이 앞서요. 왜 이럴까를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에요.”(p104)
 
"나를 추구했어요. 그림으로 나를 보이는 거예요. 말이 필요 없어요.“(p105)
 
스스로 ‘직업 화가’라고 말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물러나지 않았던 의지. 이런 사람을 예술가라 부르지 않으면 누굴 예술가라 부르나.

 

 

 

가곡 여창 김월하(1918~1996)
전쟁 통에 남편과 기약 없이 헤어지고 세월 가라고 배우는시조였으나 그녀의 시조창을 들은 사람은 곧장 귀재인 걸 알았다.
달 밝은 밤 까닭 없이 시조를 부르고 싶어 송도로 가 산 넘어 바다 뒤로 떨어지고 있는 달을 보며 그녀가 스무여 편의 시조를 부르는 풍경은 이야기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이런 풍류 요즘은 참 보기 어려워졌다.
 
기분이 좋을 땐 시조가 명랑하게 나간다. 우울할 땐 슬픈 곡이 된다. 가곡은 원해 음성을 씩씩하게 살려가는 우조(羽調)와 애원성이 있고 장식음이 약간 들어가는 계면조(界面調)를 바탕으로 부르는데, 시조는 그 자체가 대부분 계면조이다. 말로 표현할 것을 소리로 표현해서 더 간결하고 우리 민족성도 그런 쪽으로 흘렀다.”(p116)
 
내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자들은 연애할 때 자신이 희생당해도 모르고 그저 좋아하는데, 정신을 다 뺏기면 안 된다. “오십 퍼센트만 주면 돼.”(p121)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은 한국에서 여자로서의 삶, 藝人으로서의 삶의 경험이 두루 섞여 있는 거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전통무용가 이매방(1927~2015)
시대마다 유행어가 있고 말이 변해도 한국말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여. 원형은 안 떠난다 그말이여. 그런께 춤도 맥이 있어야 돼. 어느 나라든 전통 무용이 있기 마련이지만 꾸준히 하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뿌리가 없어져. 토속적이고 흙냄새, 얼이 백힌 춤을 추어야제. 그런 것이 배어야 원형이 되고 예술이라 할 수 있제.”(p131)
호강하고 사회적 지위나 누리면서 언제 남의 가슴을 울리는 춤을 추어?”(p136)
 
 
남자 양귀비라 불릴 정도로 미남이었던 중국 무용가 매란방은 일본 천황의 공연 요청에도 콧대를 세울 정도로 당시 권세가 대단했다. 그런 매란방 무대에 출연할 수 있었던 어린 이매방은 매란방에게 장검과 등불춤을 배웠고 그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다.
무대 옷도 손수 만들었던 이매방 선생은 바느질할 때 문을 걸어 잠갔다. 남자가 춤추고 바느질이나 한다고 흉보는 그런 편견들 때문에.
살풀이와 승무는 한국 민속무용의 쌍벽이기도 한데 그런 문화를 천시하는 당시 한국의 인식은 뛰어난 예술가들에겐 무시와 천대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게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최승희의 춤도 순수 우리 춤은 아니다. “일본 선생한테 배웠는디 어떻게 순수 한국춤을 춰요?” 예전엔 신무용을 무용식으로 춘다했는데 반도 무희 최승희’의 춤도 전통에서 보면 무용식 춤이었다는 것. 그의 춤을 기생춤, 광대춤이라 헐뜯었다지만 민간 무용의 주역이 바로 기생이고 광대였다.(p136)
 
아주 어릴 적 tv에서 나는 그의 승무를 본 거 같다. 너무 아름다워서 조지훈 승무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영상을 떠올린다.

 

 

 

토우 제작가 윤경열(1913~1999)
하늘의 환상을 옮겨 놓았다는 불국사도 석가탑 다보탑도 그렇죠. 살아서 절대 갈 수 없는 하늘색, 부처님 나라의 동경이 이런 것으로 이루어진 거지요. 신라인들은 천상의 환상, 꿈을 현실로 옮겼어요. 불교엔 내세가 있지만 유교는 현세만 중시했고 꿈이 없어요. 꿈이 없으면 발전을 못 합니다. 조선조 때엔 자연스러운 것을 다 막았어요. 그래서 예술이 예술로 내려오지 못하고 양반의 노리개가 되었어요. 그래서 예술이 예술로 내려오지 못하고 양반의 노리개가 되었어요. 신라엔 예술이 살아 숨 쉬었어요. 백결 선생은 백 군데나 옷을 기워 입으면서 악기를 탔어요. (중략) 예술을 세상에 달리려는 입장이었고 예술정책이 그 정도 되니까 석굴암 같은 불후의 걸작이 나온 겁니다.”(p150)
 
많은 예술가들은 신라 속에서 한국 예술의 많은 가능성을 본다. 윤경열 선생도 그랬는데 그가 발견한 것은 밝음이었다. 금관의 찬란한 빛과 역광을 받으면 금산이 되는 토함산, 맑은 하늘에 가장 조화되는 색인 흰색 옷을 입는 사람들.
 
왕릉의 사자에서도 밝음이 보인다. 일본 사자는 독이 있다. 표정이 기교 있고 섬세하나 표정이 밝지 않다. 중국 사자는 거만하고 내가 제일이라는 힘을 과시한다. 신라의 사자는 깔깔 웃는다.(p148)
 
어느 일본 학자가 남산을 둘러보고 이런 말을 해요. 한국 불상은 이 사람 한잔하고 가게,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일본의 불상은 표정을 꾸며요. 정원도 자연도 더 재미있게 꾸며요. 중국 불상은 너무 엄격해요. 정원도 자연보다 더 재미있게 꾸며요. 중국 불상은 너무 엄격해요. 정원도 자연보다 더 신비해야 하기 때문에 괴석을 많이 놓아요. 우리 안압지는 자연 그대로 돌을 놓았어요. 신라 불상 얼굴도 꾸밈새가 없어요.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을 갖게 되면 표정을 꾸미지 않아요.”(p154)
 
그의 평은 나도 평소 느끼던 바여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으니까 단일 풍속, 언어, 단일문화가 되었지요. 그리고 백제 왕조는 끝났지만 백제는 죽지 않았어요. 그 억세고 무뚝뚝한 신라 문화가 백제와 합쳐져서 숨 쉬고 살았어요. 신라는 직선적인데 통일 신라 이후 직선에 곡선이 조화됩니다. 석굴암이 그렇죠. 강함에 부드러움이 생겨요. 신라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신라적인 것은 오히려 사라져요. 직선이 없어집니다. 고려자기 보세요.”(p156)
 
대릉원에 담이 쌓일 때 울었다는 그. 어린이 박물관 학교 만년 강사로 신라의 후예를 키우기 위해 애쓴 그. 한국의 이런 숨은 예술가들을 우린 참 모르고 사는구나 했다.

 

 

 

조각가 최종태(1932~)
창작은 자기표현의 욕구로 시작되는데 기술, 나아가서 미가 첫째 관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천적인 기질까지 포함하여 예술가는 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 경우는 어떠하신지요.?”
내겐 자연이 조각의 바탕이 돼. 어릴 때 본 산천이 작품으로 나와. 십 년간 통학 길을 혼자 오가며 나무와 대화했거든.”(p169)
논리적이고 서양적인 조각가 김종영 선생과 동양적인 화가 장욱진 선생을 다 받아들이자 생각했던 최종태 선생은 조각가의 길로 들어서며 장욱진 선생의 순일한 작품세계가 그러하듯 원을 향한소녀상 제작에 매진해왔다.
 
소녀가 가장 깨끗해. 형태 자체도 박수근의 초봄 그림이 소녀 인상이야. 그림을 그리려면 좋은 것을 그려야 해. 밀레는 사람을 그리려 하는데 누구를 그려야 하는가 생각했어. 좋은 사람으로 밀레는 농부를 택했어.”(p171)
 
"화가가 어떤 미술 운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예전엔 그것이 혁명이었지만 지금은 희생제가 돼. 또 자기 자신도 너무 가꾸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세계적으로 독창성을 요구하고 그 길로만 가려 해. 자기를 모르면서 어디 한 군데로만 몰면 되겠느냐 싶어. 모레 일까지 해버리면 어떡해?" 예수도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망치 들면서 생각해야 돼.”(p172)
 
"예술의 본질은 사람 사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봐. 사람의 전반적인 것, 진선미를 따로따로 뗄 수 없어. 미를 목표로 따라가면 사람 사는 일에 덜 신경 쓰게 되고 함정에 빠져. 통속적이 된 그리스 후기 조각처럼. , 독창성이란 건 예술의 부수적인 것일 뿐이야.“(p173)
 
이런 치열한 정신에도 나를 못 찾은 거야. 자기 변두리에 있는 것 같아.”라고 하는 그의 말은 끝없는 예술의 대변 같다.



작곡가 강석희(1934~)
수학은 증명으로 끝나지만 음악은 그다음부터 시작된다는 거죠.”(p186)
작곡에서 중요한 건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작업이에요. 선택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작곡가죠. 다른 사람의 사고를 뛰어넘어야죠.”(p187)
 
어릴 때 그림에도 뛰어날 정도로 다재다능했지만 간경화 수술까지 치르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서야 자신의 쓸모를 찾기 위해 작곡에 본격적인 뜻을 두게 됐다. 그의 스승이자 영원한 고향은 어머니와 작곡가 윤이상 선생. 동백림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이상 선생이 병보석으로 입원 당시 강석희 선생은 기관원이 지켜보더라도 일주일에 두 번 레슨을 받으러 찾아갔다. 배우고 가르치는 이런 집념들 때문에 예술이 살아남는 구나했다.
 
현대에서 전통을 찾는 작업, 그건 예술의 원시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원형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죠. 원형에의 복위, 이것이야말로 한 나라의 예술이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공통성을 띨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p194)
 
"예술가들이란 창작을 통해 신에 접근하는 사람들이죠. 음악은 열려진 사람에겐 쉬워요. 최선을 다했을 때 응신(應身)이 와요. 부름에 응한다는 뜻인데, 항상 준비되어 있으면 피안과 신과 대화가 가능해요. 이렇게 나온 음악은 순수하니까 감동을 줄 수 있고. 목사의 설교가 이에 못 미치죠. 예술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예요. 나는 그걸 믿어요.“(p196)

 

 

 

연극 연출가 유덕형(1938~)
"인간과 자연, 인간과 과학, 인간과 사회를 예술의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어요. 각 분야를 조화시켜 과학적 이론으로 기반을 다져야 해요. 여태까지 전체적인 틀을 모르고 부분적인 기술면만 강조돼 왔어요.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도 왜 그 일을 하는지, 왜 그런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파악하지 못해요. 이것이 학문적으로 연구되면 방향제시가 될 수 있겠죠.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 가는가를 알기 위해 학문으로 끊임없이 공력을 쌓아가야 해요. 서울 예술전문대학의 운영까지 맡고 있지만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예술의 확산 운동이죠.“(p205)
 
선친이 한국 연극사에서 빠질 수 없는 동랑 유치진 선생, 혁신적인 기질이 많았던 어머니, 뉴욕에서의 고생, 알렉산더 칼더 모빌을 발견하고 전달의 방법을 고심하게 된 계기 등등. 좋은 환경과 그가 찾아낸 환경이 실험적인 걸 추구하는 그를 만들었다고 하겠다.
 
작가 최인훈의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를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관객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 거 같아요. 문둥이 어미를 따라 모두 문둥이가 되는 것, 이건 이론적으로 되는 얘기지만 신의 사랑이에요. 옛날엔 부모를 따라 죽으면 효자라 했지만 현대에선 달라요. 죽기 않고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요. 구원이란 이상이고 꿈이고 그래서 영원히 남는 것 같아요. 현대에 신화가 없는 것은 구원이 없기 때문이에요. 나도 연극에서 구원을 모색해 보는 거죠. 땅과 하늘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찾아다니는 거죠.”(p212)
 
그는 국민학교 때 찹쌀떡 두 개를 받기 위해 천황 참배를 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종교를 못 갖는다고 말했다. 1·4 후퇴 때 제주도에서 빨치산 소탕 비극도 목도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세상의 비극을 다 안 것 같았다.’
 
동물과 인간이 무엇이 다른가? 문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죠. 그 체험으로 잃었다면 잃었고 개발되었다면 개발되었죠. 역사가 내게 리얼리티를 확장시켜 주었어요. 인간이 변할 수 있으면 얼마나 변할 수 있는가? 이데올로기도 고급스러운 얘기예요. 그 이전의 문제가 있어요.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예술로 순화하는가? 우리가 부족한 지점을 어떻게 채워가면서 미래를 발견하는가? 예술의 인간 순화, 사회 순화와 마주치게 돼요. 그런 일이 없도록.”
 
자신을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라면서 균형을 말하고 공력을 쌓으려는 그. 이기적인 충족으로 끝나지 않는 예술가들 특성은 대체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조각가 문신(1923~1995)
그때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중 눈물겹지 않은 이가 거의 없겠지만 문신 선생의 어린 시절은 가슴 아리게 했다. 가난한 한국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탄광 노역으로 자주 일본으로 떠났고 어미도 고향의 향수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숙부 점포에서 일하며 외롭게 자라난 터라 일찍부터 독립된 생활을 할 줄 알았다. 우연한 기회에 화방을 얻게 됐고 이 계기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61년엔 파리로 가 목수, 석공 일을 하며 조각가 공부를 하게 됐다.
 
숫자적으로 캐내는 것이 예술이 아닌데 사람들은 따지고 들어요. 나는 의식적으로 무엇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어요. 내 작품은 본질적으로 추상입니다. 삼각의 하나의 초점이 위를 보고 있으면 산이 됩니다. 화가가 을 산이라 의식하고 그렸다면 그것은 이미 추상작품이 아니죠.
유형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무형은 정신을 보여줘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로 하늘을 로 상징해서 국기로도 쓰고 있습니다. 그 단순화한 형체 자체가 나라의 상징은 아니고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그 형체를 제시하는 겁니다. 형체를 봄으로써 그 정신이 전달되는 거죠.”
그러면 추상작품 제작 행위의 특성은 의식적인 것을 배제하면서 의식, 즉 정신을 표출한다는 것이군요.”
의식해서는 구속을 받아요. 무아의 경지에서 순수한 자신의 형체를 창조하는 것이죠.”(p231)
 
"낙천적인 제작 행위란 있을 수 없다란 신조로 언제 죽을지 몰라 매일 밤마다 속옷을 갈아입고 잤다는 그. 이런 팽팽한 긴장 속의 삶을 유지하는 정신을 잃지 않는 것도 예술가의 삶이겠다. 그럼에도 프랑스 영주권도 마다하고 고국의 그리움 때문에 그는 1979년 귀국했다. 그의 작품들이 흑단 빛인 건 아버지가 캐던 석탄 빛깔의 영향도 있었을까. 그러나 과거의 절망이 아니라 끝없이 노력하는 예술의 과정이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분명하다. 결국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나 없었나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다.

 

 

 

 

작곡가 백병동(1936~)
졸업한 지 팔 년이 지난 70년도, 독일 정부 장학금으로 하노버로 갔다. 하노버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이론과 기술보다 음악 전통을 이어받은 독특한 분위기에 젖을 수 있었던 점이었다. “음악의 실상을 볼 수 있었어요. 음악을 왜 하느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풀렸고요. 살고 싶어서죠. 나를 나타내는 방법은 음악밖에 없다, 내 말이고 내 분신이며”(p244)
 
그의 저서 소리 혹은 속삭임에서 인용하면, “소리 하나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서양의 외형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 우리의 소리는 내부에서 요해되는 정서 또는 여운에서 우러나는 감성의 미묘하고도 섬세한 울림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p245)
 
그가 전하는 음악은 배우는 것이 아니고 깨우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모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백병동作 해금독주곡 '뒤틀림에서 초연超然의 피안彼岸으로'

https://youtu.be/xsFDe-NzRuw

 

 

 

 

 

화가 박생광(1904~1985)
어려서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림일기를 그렸다는 박생광 선생. 당시 많이 그랬듯 그도 재능을 인정받아 일본인 선생을 통해 일본 유학을 가게 됐다. 그의 그림 특색인 송()의 휘종·이적에 이어지는 북종화(北宗畵), 색채 기법이나 물감에 아교를 섞는 재료 쓰는 법은 이때 습득했다.

 

한국화는 조선조 이래 남종 수묵화가 대세여서 그의 화풍은 독특하고 이색적이었다.’ “그는 사실적 소재를 정교하게 그려 그것을 평면화로 재구성, 추상주의 경향을 보인다. 살포시 들어올린 한국 건축의 처마 곡선, 창살, 나전칠기의 문양, 고구려의 고분벽화, 불화, 신들린 무당의 세계가 펼쳐진 무속화 등 전통예술과 민속에서 딴 것, 여기에다 원근법 무시를 통해 현대적 조형의 시도를 했다. 그의 그림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강렬한 단청 채색이다. ‘원초적 색감의 복귀로서 색채는 선이나 표현의 종속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구성이 된다. 이것이 화면 전체를 누비는 철선(鐵線) 같은 윤곽선들과 함께 종래 한국화의 정적 세계를 깨뜨리고 생명력을 가져온다. 그 동감(動感)으로 작품은 새로운 민화같이 느껴진다.”(p262~263)
 
"한국적인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색일까요?”
색동과 흰색이라 할 수 있지. 가장 원색인데 국민성이 억제되면서도 담백해. 일본 사람들은 곤색과 중간색을 좋아해요. 마음이 약하니까. 색깔은 국민성뿐만 아니라 그 나라 자연조건과도 연관이 있어요. 중국 둔황에 있는 동굴벽화를 보면 비취 가루가 많이 채색돼 있어요. 중국에 옥이 많이 나오니까. 한국엔 흙이 좋아 적토, 황토색이 잘 나와요. 일본에서도 한국 흙을 사 가요. 고구려 벽화는 빛깔뿐 아니라 구도 등으로도 심미적이에요. 제일 좋은 경지의 회화지. 그것을 부수려고 하지만 많이 배우고 인용하고 있어요.”
"고구려 벽화뿐 아니라 선생님은 우리 전통예술이나 민속에서 소재를 찾는데 그건 의식적으로 택한 것입니까?“
내 나라 것을 의식하면서 나온 거지. 한국적인 것을 좋아하니까. 종묘의 건축선은 기가 막힌 겁니다. 집을 짓는다면 종묘를 본떠 짓고 싶어요. 이런 애착이 소재로 나타났을 뿐 한국적이기 위해 쓴 건 아니야. 그런 일은 없어요.”(p263~264) 
  
기록화가 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그림에 가져올 때도 유미에 더 신경썼다는 그.
   
  
이틀 동안 한국 예술가들의 깊은 예술 세계를 탐독했더니 애국심이 고취되려고 한다나라 사랑, 사람 사랑, 문화 사랑이 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책이 많이 나오도록 관심 가지고 많이 읽어 주시라.

g******i 2017.09.05. 신고 공감 1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우리 시대 예술가들과의 향기로운 만남
"우리 시대 예술가들과의 향기로운 만남" 내용보기
[일하는 예술가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일과 예술가의 대치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로인 예술가에겐 그들의 예술이 곧 일인데, 우리가 사회 통념상으로 익혀온 예술가와 일은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온 것이 현실이다. 일을 통해 생활의 일용한 양식을 얻고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예술가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허공에 붕 뜬 발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우리 시대 예술가들과의 향기로운 만남" 내용보기
[일하는 예술가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일과 예술가의 대치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로인 예술가에겐 그들의 예술이 곧 일인데, 우리가 사회 통념상으로 익혀온 예술가와 일은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온 것이 현실이다. 일을 통해 생활의 일용한 양식을 얻고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예술가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허공에 붕 뜬 발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일하는 예술가들]이란 제목은 그들의 예술로써 밥을 먹고 사는 철저히 프로인 예술가들을 탐구했다는데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인터뷰는 흔히 기싸움이라고 한다. 선문답처럼 툭툭 내뱉는 원로 예술가들을 상대로 기사를 쓴다는 것은 대단한 긴장감을 요하는 일이리라. 늘 단아하고 정돈된 한 마리 학과 같은 글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 강석경이지만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면 기괴하기까지 한 그들의 말을 정리하고 그들의 인생을 또다시 한 편의 글로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 글이 씌어진 것이 20년이 다 되어 오기 때문에 생존하고 있지 않은 분들도 있고, 대부분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가야금 작곡가 황병기 선생 정도나 알까, 대부분은 흑백 사진처럼 기억의 저편으로 숨어버린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글을 읽다 보면 하나같이 독특한 예술혼을 뿜어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들의 전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강석경님의 다른 소설 작품에서 보이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이 책에서 근원했다는 것도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인상깊은구절]
예술엔 박사가 없다. 한도 끝도 없다. 춤도 할수록 어렵다. 무궁무진하다. 그 진미는 오십이 넘어야 나온다. 인정, 눈물, 쓰라림이 있어야 하고 산전수전 다 겪어야 나온다. "호강하고 사회적 지위나 누리면서 언제 남의 가슴을 울리는 춤을 추어?" 삶의 관록에서 예술의 극치가 나올 수 있다.
i****3 2002.08.18. 신고 공감 0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