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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바라볼 수 있는 밀밭을 누군가에게 그려줄 수 있다면
"여우가 바라볼 수 있는 밀밭을 누군가에게 그려줄 수 있다면" 내용보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니 저녁의 황혼빛 속에 구름이 서서히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들판은 영원히 어두워지지 않을 빛으로 환했다. 이 고장에서는 마치 겨울이 지나도 오래 눈이 남아 있듯이 평야의 황금물결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생 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은 저렇게 매혹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생 텍쥐페리의 황금색은 어린왕자의 머리카락이
"여우가 바라볼 수 있는 밀밭을 누군가에게 그려줄 수 있다면" 내용보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니 저녁의 황혼빛 속에 구름이 서서히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들판은 영원히 어두워지지 않을 빛으로 환했다. 이 고장에서는 마치 겨울이 지나도 오래 눈이 남아 있듯이 평야의 황금물결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생 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은 저렇게 매혹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생 텍쥐페리의 황금색은 어린왕자의 머리카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황혼 무렵의 들판이 되었다.

 

  물론 그 들판은 내가 모르는 들판일 것이다. 나는 생 텍쥐페리가 비행을 했던 고장엘 가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들판의 이미지가, 내게 익숙한 고도 위로 펼쳐질 뿐이다.  

 

  그런데 저 문장을 읽고 눈을 감으면 내가 떠올린 들판의 빛이 새로워진다. 고도도 높아진다. 어린왕자의 머리카락을 상상하는 일도 더 쉬워진다. 밀밭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오후 세 시부터 행복해지는 여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꼭 체온을 가진 존재하고만 나눌 수 있는 경험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날 길들인 이 문장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생 텍쥐페리 그 자신이 실제로 비행기 조종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이 문장을 쓰기 전에 눈을 감고 자신이 보았던 고장의 들판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영원히 어두워지지 않을 빛으로 환했던 금빛 들판. 눈 속에 각인된 그 아름다운 들판을 저런 문장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던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내게도 눈꺼풀 속에 각인된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와 간절히 나누고 싶음에도 문장이 부끄러워 차마 꺼내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문장을 만날 때면 불쑥 용기를 내고 싶어진다. 욕심이다.

 

  어린왕자의 쌍둥이 형을 여우 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문장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여우가 바라보며 행복해할 수 있는 왕자의 머리칼 색깔과 닮은 밀밭이라도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 

 

  오후 네 시. 어린왕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불행하지 않을 여우와 그 모든 것을 나누고 싶다

p***i 2008.05.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