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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정 시집 『바보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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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벌이는 놀이의 향연     시인은 불모의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달무리 같이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차고 난생 처음으로 낙타를 타본다. 사막 한가운데 이르면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 “사막은 가도 가도 사막”이다.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는 사막의 여행은 사막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계속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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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벌이는 놀이의 향연

 

 

시인은 불모의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달무리 같이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차고 난생 처음으로 낙타를 타본다. 사막 한가운데 이르면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 “사막은 가도 가도 사막이다.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는 사막의 여행은 사막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계속될 수 없는 죽음의 여정을 항상 동반하고 있다. 사막을 여행하는 존재는 따라서 죽음의 욕망과 끝없이 대면한다. 죽음을 욕망하지 않으면 사막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죽음을 유희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에게만 사막은 자신의 속내를 열어 보이는 셈이다. “모래 위의 향연”(바보사막)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사막으로의 여행은 죽음과 유희의 대립적인 욕망으로 끝없이 넘쳐나고 있다. 신현정의 『바보사막』(랜덤하우스, 2008)은 이처럼 사물과의 놀이(모든 놀이는 근본적으로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에서 샘솟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존재의 형상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목이 없는 부처와 놀고, 토끼의 두 귀를 매단 기차를 타고 달로 가는 여행을 상상한다. 오리를 만나면 오리와 놀고, 해태를 만나면 해태와 논다. 시인에게 세상은 놀이의 감각으로 빚어진 세상이고, 그 놀이로 하여 살만한 세상이다.

 

눈물이 마르도록에서 시인은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새를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래도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악어를 상상하세요 // 그래도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버지를 상상하세요 // 그래도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미래를 상상하세요라는 시구들을 덧붙이기도 한다. 상상력이 없으면 세상살이는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모든 상황을 합리적 이성으로 해결해야만 안심하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생각한다면, 시인의 상상력은 합리적 이성의 외부로 나아가 사물들의 세상과 만나는 열쇠가 된다.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상상의 힘과 한번쯤은 놀아보라고 권유한다. 즐겁지 않은가.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놓은 일상의 벽을 허물고 상상의 세계로 넘나들이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토끼에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 토끼에게로의 추억전문

 

 

토끼에 대한 추억은 시인을 동화(童話) 속의 세계로 이끈다. 동화는 말 그대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합리적 이성의 저편을 바라보며 사물들과 놀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아이들은 모든 사물과 함께 놀이하며 즐길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함께 놀면 즐거운데, 사람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유치하다고 판단한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은 마음은 실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상상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시소를 타고 싶으면 타면 되고, 토끼와 줄행랑을 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것이 상상의 힘이다. ()가 추구하는 상상의 세계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어낸다. 상상은 시적 변용을 허용한다. 신발끈이 나비가 되고, 그것은 다시 두루미가 되고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네(길 위에서)가 된다. 길 위에서 벌이는 상상의 유희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비유적 차원에서 하나의 관계망으로 연결한다.

 

고로쇠나무가 있는 곳이라는 시를 보자. 시인은 고로쇠나무는 좋구나라는 시구로 시를 시작한다. “좋구나라는 시어가 각 연마다 반복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물을 먹고 살아가는 생명들의 관계망을 시화하고 있다. 새들은 부리를 꼬부리고 마시고, 오소리들은 젖꼭지를 찾아 쭉쭉 빨고 가며, 방아깨비 사마귀는 핥고 간다. 사람이 빠질 수 있는가. “우리 인간은 물통을 놓아두고간다. 고로쇠나무가 있어 생명들은 생명의 물을 얻는다. 고로쇠나무 한 그루가 피워내는 생명의 관계망은 저마다의 생명들이 하나로 묶여 펼쳐지는 시적 세계의 형상을 구현한다. 고로쇠나무만 있고, 주변의 생명들이 없다면 어떤 세상이 나타날까? 고로쇠나무는 주변의 사물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고로쇠나무로서의 본성을 지킨다. 고로쇠나무는 생명의 물을 타자들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좋다’. 신현정 시의 정서적 흐름을 따라가자면, 고로쇠나무는 그 상황을 즐기고있다. 놀이의 즐거움을 유유하게 즐기는 시인만큼이나 고로쇠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본성)을 자연스럽게 즐기고 있는 셈이다.

 

 

, 집에 가다가

 

해태를 돌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돌다

 

가방을 옆구리에서 내리고 보통 걸음으로 돌다

 

해태의 뒤를 돌아가면서는 어서 오십시오를 중얼거리며 돌고

 

해태의 앞으로 돌아 나오면서는

 

안녕희 가십시오를 중얼거리며 돌다

 

한 바퀴 더 돌다

 

안녕희 주무십시오를 중얼거리며 돌다

- 해태를 돌다전문

 

 

인용한 시는 신현정의 시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놀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해태상의 주변을 돌며 놀고 있다. “집에 가다가펼쳐지는 유희의 세계는 일상의 늪에 빠져들지 않은 존재의 순수함을 쾌활하게 드러낸다. 해태의 삶은 어서 오십시오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두 상황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가고 오는 인간의 눈에는 이러한 두 가지 삶이 해태의 모든 삶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안녕히 주무십시오를 중얼거리며 해태의 주변을 다시 한 번 돌고 있다. 이미 주어진 놀이의 규칙과 어긋나는 상황을 해태의 삶에 부여하는 것이다. 해태상을 다룬 또 다른 시 해태를 돌려놓다에 드러나듯, 시인은 아예 해태상의 방향을 돌려놓음으로써 인간세상이 만들어놓은 놀이의 규칙을 뒤바꿔버린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상황을 상상하는 시인의 행보는 여기서 일상인의 시선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상상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봉황을 업고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그 상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조의 힘에서 뻗어나온다. 관조는 자신의 내면을 사물에 비추는 것이다. 사물을 이해하지 못하면, 놀이의 규칙은 놀이를 정한 자의 주관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고슴도치에 대한 서정을 읊고 있는 고슴도치는 함함하다에서도 시인은 고슴도치의 시선으로 새로운 놀이를 마련하는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나는 고슴도치가 슬프다고 시인은 운을 뗀다. “온몸에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을 보면 슬프, “저 바늘들에도 밤이슬 맺힐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 무엇보다도 그 몸으로 제 새끼를 끌어안기도 한다니 슬프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고슴도치를 바라보는(관조가 아니라 관찰이다) 동일자의 시선은 그 속에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 인간의 몸에는 바늘이 없다는 사실이 고슴도치의 불행을 이끌어내는 단서가 될 수는 없다. 동일자의 시선은 타자의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차이의 역학을 외면한다. 동일자의 시선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사물들의 세상을 직관하는 눈을 시인은 얻을 수 없다. “제 새끼를 포근히 껴안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니 // 나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는 구절에는 이러한 동일자의 시선과 거리를 두려는 시인의 시선이 분명히 나타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타자의 입장에 서는 것과 다를 수 없다. 상상의 밑자리에 스며들어 있는 차이의 역학은 실로 시인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시심(詩心)의 근원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신현정 시는 이처럼 놀이의 단순한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놀이는 놀이대로 즐겁지만 그 놀이는 항상 사물의 본성을 따르는, 요컨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놀이라는 점에서 즐거운 놀이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본성을 억제하고 합리적 이성의 원리를 신봉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인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현실을 모르는 유아적 치기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유아적 치기로 바라보고 있기에 사물들은 저마다의 본성을 시적 세계에서나마 활짝 펼쳐낼 수 있다. 일상과 시가 갈라지는 이 지점에서 신현정 시에 나타나는 놀이의 시학은 의미를 얻게 된다. 여보세요라는 시에 드러나는 것처럼 시인은 사물들을 끊임없이 부르고 싶어 한다. 부른다는 것은 사물의 심연으로 들어가고 싶은시인의 마음을 나타낸다. 부르고 또 부르면 언젠가는 사물도 자신의 심연을 내보이는 순간이 있지 않겠는가.

 

놀이의 상상력은 그러므로 시적 직관이 아니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없다. 오동나무 한 그루를 보며 시인은 저걸 베어 집을 만들까 배를 만들어 머얼리 띄울까 하다가 // 하다가 // 그만 손 얼른 뒤로 돌려 뒷짐 지고 바라보기로 한다”(봉황을 업고). 오동나무를 베면 그 순간 상상력은 사라진다. 사물을 그대로 두고 관조하려는 시인의 마음이 있기에 단숨에 구만 리 창공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시인의 상상이 힘을 얻는다. 뒷짐을 진 채 편안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사물들도 뒷짐 지고 시인을 바라본다. 사물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합리적 이성이 망쳐버린 자연세계가 다시 시인의 앞으로 다가온다. 병든 자연과 놀 수 있을까. 상상 속의 자연은 병들지 않는다. 병들지 않은 자연을 향한 꿈이 신현정의 놀이 정신을 잉태하는 시적 세계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o*****s 2017.08.2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