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시집을 구입할 때, 가장 먼저 살피는 일이 시집의 제목을 어디서 뽑았는가 이다. 보통은 수록된 한 편의 시가 그 시집의 제목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땅치 않을 때는 수록된 시의 일부 문장을 제목으로 뽑기도 한다. 표제시는 또한 그 시인의 시 가운데서 그래도 빼어난 작품이리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 시인의 그 시집에 수록된 시세계를 대표한다, 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2]1981년 신춘문예(세계일보)에 당선된 시인의 이력을 감안하면 2008년까지 첫시집이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수록된 시의 편수가 많지 않고(총 3부에 42편, 간신히 100페이지를 넘겼을 만큼 전반적으로 시 한 편마다 말을 아낀 편), 정갈하게 다듬은 혹은 가공하기 보다는 관점을 달리함으로써 보이는 것들을 잘 포착해내고 군더더기를 버림으로써 명료한 것들만 남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3]앞의 [1]에서 언급한 기준에 따라, 가장 먼저 살피게 된 시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무서운 속도>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빠른 속도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속도의 느림이 더 무섭다. 다큐멘터리에서 흰수염고래가 서서히 가라앉는 장면을 보며, <서서히 죽어가는 고래가/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지듯 가 닿는 시간과/한번의 호흡으로도 30분을 견딜 수 있는 한 호흡의 길이/사이에서, 저 한없이 느린 속도는/무서운 속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70여 미터의 빗길을 미끄러지는 자동차 조수석에서 사고를 맞이하는 화자의 느낌을 오버랩하고 있다.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순간의 '무서운 속도'에 대책없이 실린 상태에서. 물리적 시간으로는 아주 짧은, 시속으로 따지면 대단히 빠른 속도이지만 화자가 느끼는 속도는 아주 느리고 또 느린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 호흡이 30분도 넘을 것 같은 가라앉는 고래의 그것처럼.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 <천국에서의 5분간>(Five Minutes Of Heaven)을 떠올렸다(영화 얘기는 별도의 자리에서 하기로 하고).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이지만 아주 중요한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순간순간의 디테일이 선명하게 포착될 만큼 느린 것이고, 그래서 그 절대적인 시간은 속도의 느림으로 하여 무서운 기억으로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교통사고 등을 당해본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리적인 시간에서의 속도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느낌으로는 느린 속도의 대비가 이 시를 빛나게 하는 게 아닐까.
[4]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마치 시집에 해설을 하듯, 제목부터 뽑아놓았다. <절묘하게 포착한 선(線)의 아름다움> 이 그것이다. 시가 워낙 짧아서 전편을 인용하는 무례를 용서한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렇하다.
개구리밥 가득한 수면
늪은
--------------68면 <악어> 전문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이 오고 세계는 조금씩 녹슬어간다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거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48면 <시월> 초반의 4행
너무 멀리 왔다, 생각했을 때 나는
-----------------84면 <태백행> 첫연.
물뱀이 지나간 흔적을 악어의 실눈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구리밥으로 뒤덮힌 늪 전체가 악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초음속비행기가 지나간 이후에 생기는 하늘의 얼룩처럼 새가 날아가는 것을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고 순간을 포착한다. 이런 선(線)의 발견은 <태백행>에서 절정에 이른다. 정선 지나 태백 가는 길, 꼭 그곳이 아니라도 강원도의 길을 여행해본 이라면 참 절묘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산들 사이로 가르마같이 난 길을 타고 새벽 한시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늘어선 차량의 불빛밖에 없는 그 길 위에서 화자는 자신이 식도(食道)에 이미 들어와 버린 음식물처럼 돌아갈 길이 없다고 얘기한다. 음식을 먹는 것은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입력, 그리고 프린트 곧 출력에 이르기까지 소화의 길이 있다. 입에서 직장에 이르기까지의 식도와 위와 소장과 대장에 이르는 긴 선으로 이어지는 길..
인용한 세 편의 시들에서 두드러지는 것들은 선, 마음으로 읽고 발견해낸 선이 참 아름답고 명징하게 다가온다. 신경림 시인이 뒷표지에 "시가 읽히지 않는다고 한탄들을 하는 터에 이 시집의 탄생은 우리 시단의 경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추천사를 썼는데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러한 잘 읽히는 시를 이 시집은 수록하고 있다.
등단 이후에 첫 시집을 내면서, 상당수의 작품이 있을 듯한데 참 적은 편수의 시들만을 노출(?)하고 있는데, 시인의 시를 쓰는 속도 또한 제목처럼 느림에 기반한 <무서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속도가 빗길을 70미터씩 미끄러지는 질주의 그것이라면 장만호 시인이 읽고 시로 아로새기는 세상은 무서운 속도의 그 순간들의 포착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