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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에 대한 도슨팅 준비를 하면서 본 책인데, 대한제국기부터 시작되는 근대의 여명기의 미술상황, 일제 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목적과 그 결과, 근대적인 전통화의 성립과 그 성격, 근대 서양화의 도입과 창작상황에 대해 박사논문 수준의 심층 분석이 담겨 있다. 우선 김홍도,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풍속화는 눈앞에 전개되는 신변의 세계와 당대 보통사람의 삶의 현장을 그렸기에 사실적인 표현이 중심이 되었고, 이러한 사실적 표현은 먹을 사용하더라도 묵기를 가급적 억제하고 세선에 의한 정밀한 묘사가 특징인 선묘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물의 형태뿐만 아니라 색깔까지도 닮게 표현하려는 의지로 발전하여 김홍도는 세선묘사에, 신윤복은 채색묘사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화는 이 시기 새로운 문화를 주도한 중인층과 신흥 부민층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상품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이해타산적 가치관에 경도되면서 자아발전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각성이 풍속화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전통적인 산수화는 인간세상과 절연된 은둔의 도가적 표현을 극대화시킨 것인데, 조선 후반기 풍속화는 이 시기 경치 좋은 산수를 찾아 거기서 유흥을 즐기는 유산풍속이 유행했기에 산수자연을 유흥적 공간으로 묘사하였다고 말한다. 이어서 대한제국 시기에 현실적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한 데는 외래 회화보다 사진이 한발 앞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830년대부터 한국에서도 천주교 전래가 본격화되어 서양문물과의 접촉이 일어났는데, 서양 선교사들은 전도 활동을 위해서 시각적으로 확인 가능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서양화로 그린 성모자상이나 사진, 시계 등의 과학적 서양문물을 항상 휴대했다고 한다. 또한 1900년 전후부터 일본인들의 사진관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이 정착되는 1900년 전후로 전통 초상화는 실제 인물처럼 닮게 그리는 게 1차적 목적이었으나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그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격의 표현이라는 큰 목적에 의해 인물 특징과 더불어 근엄함이나 고매함이 발현되도록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진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필법인 선묘 위주 묘사가 점차 명암의 차이를 살려 얼굴의 입체감을 적극 표현하려는 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경향은 전통 초상화의 격식을 이으면서 가급적 입체적인 실재감을 내도록 하는데 있었는데, 1920년대 들어가면 옷주름, 눈동자 등에 하이라이트가 가해지면서 사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동작 표현을 위주로 한 일반 인물화의 표현으로 확대되어갔다고 언급한다. 그 당시 초상화의 대가였던 김은호도 1916년 실제 사진을 보고 순종의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그가 그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부터 사진을 이용한 초상화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초상화가 아닌 인물화도 사진을 참고로 제작했다고 한다. 김은호의 근대 인물화 제작 방향은 그 전범을 일본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짙은 채색, 세밀묘사, 정돈된 인위적 구성이 바로 그 영향이라 한다. 참고로 1920년대부터 사진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여가 행위로 자연 풍경을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산수화도 사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말기에 활약한 조석진, 안중식 화풍의 고전적 시각에 의한 심산유곡이 소재가 되었지만 급속히 현실적 화풍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양화나 일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이전의 대한제국 시기에 사진은 새로운 세계와 안목을 일깨워준 일종의 시각 혁명을 일으킨 도구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우리 근대미술 교육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1945년에 해방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이와 동시에 좌우익 이념 대립과 6.25 전쟁이 뒤따랐기에 해방 무렵부터 10여년간 우리 자주적 힘으로 체계화된 미술 교육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근대의 굴절된 상황 속에서 미술계는 역사상 보기 드문 일대 변혁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질적인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 수묵화 위주의 전통회화에 새로운 조형의식이 무비판으로 밀려들어온 것, 장르를 초월한 미술계 전반에 일본미술이라는 특정 양식의 이식과 세례를 받은 점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일제가 1919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그전의 철저한 무단적 식민정책에서 소위 문화정치로 전환하여 인심을 회유하려고 하면서 그 가시적 증거로 조선미전을 창설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되어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좀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1910년 무렵부터 국내에서 주로 일본인에 의한 미술활동이 왕성하게 펼쳐진 것을 근거로, 조선미전 개설 목적은 당시 몇 명뿐인 국내인 서양화가나 동양화가들을 의식하거나 견제하기 위해 개설된 것이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대다수 일본 미술 애호인 내지 작가들을 위해 개설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 내선일체와 같은 일본 통치자들의 조선 식민지화의 방향과도 일치했다는 것이다. 조선미전은 전통의 봉건 미의식에서 근대 미의식으로 교체되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다. 우선 처음부터 끝까지 한일 양국 작가가 공동으로 참가한 미술 발표의 장이었으며, 그래서 두 나라의 전통과 미의식이 혼용되고 교차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가 통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설립했으니 총독부는 한국미술가들을 대거 동원했고, 거국적 미술잔치처럼 대대적인 선전을 하여 매년 입, 특선자의 명단이 언론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의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미전을 통해 미술이 개인적 감상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즐기는 대중 감상물로 확대되었고, 공예, 조소가 주요 예술로서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근대 미술 장르가 형성되었으며, 작품성에서는 전체적으로 현실성과 기본기량에 충실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미전에 입선된 작품들을 통해 바라본 그 당시 미술 경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군자 같은 경우 실제 식물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사라져 갔으며, 공예의 경우 군비조달을 위해 국가적으로 장려되어 일본 작가의 작품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급격히 동화되었다고 한다. 원래 조선시대 공예품의 주류를 이루었던 백자기나 목공예는 인위적 장식이나 정교함을 거부했는데, 근대시기 공예품은 지나치게 화려한 문양구성, 섬세 정교함, 형태와 문양의 인위적인 도안 등을 특징으로 했다는 것이다. 한국화의 일본화풍 추종 경향도 두드러졌는데, 전통 선묘가 사라진 몰선법, 무감정의 무표정함, 세밀 묘사, 농후한 장식성, 작위성이 강한 구성과 정돈미가 특징이었다고 한다. 산수화의 경우 19세기 후반 청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종속성을 인정하여 청나라에 대한 사대론이 전개되고, 이를 통해 문풍 복고책에 의해 문인사대부의 문화가 자리를 잡고 중국을 모델로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중국풍의 관념적 산수화가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조는 김정희, 조희룡, 허유 등을 거쳐 조선말의 장승업, 조석진, 안중식 등에 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중식, 조석진이 조선미전 개설 직전인 1920년경에 모두 타계하였고, 그 제자들이 이어가기는 했지만 새로운 현실적 시각에는 익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10년 사이에 한국인이 그린 산수화는 상하로 긴 종축 화면의 거대 산수가 점차 횡축의 화면 형식으로 바뀌고, 심산유곡을 멀리서 바라다보고 그린 초기 산수화가 와해되어 세속의 가옥과 농토가 있는 친근한 주변 환경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주제는 탈속경지에서 안개 쌓인 시정으로 바뀌었는데, 자연에서 받은 전체 분위기 묘사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나라는 주체의 마음에 비친 대상에서 받은 정감적 인상을 묘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근대적 대상 파악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속에 있는 나무, 바위, 촌락 등 각 객체의 특성이나 형체미의 포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현실경관 속에서 찾아낸 것이 과거 이념과 상통하는 문학적 시정 세계였고, 그것이 바로 안개나 운무가 자욱한 모습의 경관이었으며, 이것은 일본화의 몽롱체의 영향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전통 인물화의 경우 김홍도와 신윤복으로 대표되는 조선말기 풍속화가 19세기 중엽에 이미 단절되어 있었기에 일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조선 미전에 출품된 인물화는 동양화이면서도 선묘 위주의 묘사가 전무하지만, 인체를 완전히 서구적인 시각에 의해 양감이나 비례, 균형 등의 요소에 입각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특히 얼굴 표현이 무표정과 무감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의 시각이나 작화자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 풍물이나 한국인을 그릴 때는 자기들과 무관한 한국인을 제3자적 입장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그렸으며, 이러한 제3자 입장에서의 대상 파악법을 한국화가들이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미인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식 인물화는 미의식 면에서 감정이나 행위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인물의 풍기는 맛의 표출에 비중이 놓여있다고 한다. 이어서 대표적인 한국화 작가인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의 그림 세계를 분석하고 있다. 이상범의 경우 토산 묘사, 암산 묘사, 토산과 암산을 섞은 묘사를 거쳐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한국적 풍토감을 확립했는데, 단순히 실경을 자세히 그린다는 사실성을 능가하여 한국의 자연성을 통괄한 보다 고차원의 정서적 표현세계를 이룩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그림 속에 꼭 등장하는 촌락과 촌부는 자연 속에 묻힌 삶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관식의 경우 조석진의 외손자였는데, 금강산 기행으로 얻어진 금강산 묘사, 좌우로 펼쳐진 장대한 설경적 경관 묘사, 세부적인 섬세성, 구도의 역동성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노수현의 경우 바위산만을 등장시킨 단일 소재 위주로 이상적 절경의 모습을 묘사했다고 언급한다. 전통산수화는 주로 원경에 비중이 놓여 있어서 전체를 조망적으로 바라본 모습이지만, 사실묘사는 눈앞에 가까운 근경 사물에 비중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관람자를 경관에 근접시키는 현상이 일어나기에 근대 산수화가들의 작품에는 사실 묘사 수준을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하는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한다. 이어서 초기 서양화 수용의 주체와 그 시기에 대해 논의가 계속 된다. 1920년 이전에 귀국한 초기 대표적인 유학파 화가는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네 명에 불과하며, 이들 초기 유학파들은 나혜석을 제외하고는 기껏 10년도 안되어 절필하다시피 하여 화단에 미친 영향이 미미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근대 시기 서양화 발판이 특정 중심화가의 화풍으로 집약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아마추어 수준을 겨우 넘긴 국내 거주 일본화가들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조선미전을 통해 외부인 심사로부터 다소간 영향 받고 조정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영향 중 하나가 인체 묘사라고 한다. 일본 동경 미술학교의 경우 인체 학습이야 말로 기본이라면서 평소 인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의 대부분의 작품이 인상주의의 아류에 속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철저하게 빛을 의식한 색채의 시각화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견고한 대상 파악력을 가진 사실적 작품들, 고전파적 요소가 대부분의 경향이었다고 언급하면서, 일본 근대 서양화의 기반이 된 것은 대상 파악에서 엄격하고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이었으며, 이것이 그대로 초기 서양화가 수용되는 조선미전에서 심사라는 형태로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대 서양화가로 이인성, 박수근,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대구 출신인 이인성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수채화가 서동진의 가르침을 받아 18세의 약관으로 당시 조선미전에 첫 입선한 이후, 1944년 최종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해서 조선미전 최고의 서양화가로 발돋움 했다고 설명한다. 이인성의 작품은 수채화로 출발하여 유화로 진행되었는데, 유화 습득은 일본 유학 중에 얻은 것이며, 수채 사용은 주로 소품의 풍경화를 그리는데, 유채는 대작이나 인물묘사를 하는데 활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인성은 유난히 붉은 흑색과 곡선적 형태감으로 향토색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박수근의 경우 겉보기에 서양화적 화풍보다는 동양화적 화취가 느껴지는데, 이것은 인정이 배어 있는 정감이 담긴 농촌사람 위주의 소재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딱히 농촌 사람을 대상으로 정한 의도는 없으며 그 시대 일상의 작가 주변 사람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친근하게 바라보면서 수없이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형을 매우 간략화하여 단순화한 것, 선적인 묘사, 색채 비중이 약한 반면 형체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라 언급한다. 특히 두툼하며 우둘두둘한 화면 질감은 195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작가 스스로도 우리나라 옛 석물의 조형화를 주장했고,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농촌마을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박수근의 그림은 화면을 단순히 평면화하여 사물을 등가로 배치한 것이 동양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대상은 조선시대 풍속화처럼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초기 서양화 도입기인 일제 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서양화 지망생들은 서구화풍 흡수에 골몰했으며, 존재하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을 따라 했는데, 이러한 시대조류 속에서 박수근은 서양적 미의식보다는 자기 내부로 향한 전통적 동양의 미의식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중섭의 경우 그의 예술은 곧 그의 삶 전체와 동일시되며, 그의 예술의 근원이 전통성에 뿌리박고 있으나 조형성의 특질은 서구 현대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중섭의 일본 유학 시절 주된 활동무대는 일본 추상미술의 거점이었던 자유미협 이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 유학한 시기인 1930년대의 일본화단 상황은 그전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아카데믹한 사실 표현의 시기를 지나고 난 뒤 새로운 개성과 신감각 표현이 부상했던 시기라 한다. 특히 1930년대 전반기 일본화단은 개성구가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서구 후기 인상파에서 야수파에 이르기까지 인상파 이후 갖가지 다양한 이즘과 유파를 개성적으로 흡수했다고 한다. 이중섭 화업에서 특히 초기에는 입체파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 것은 이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이중섭은 시를 좋아했고 시인과 소설가를 좋아했으며, 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많고 문학적 요소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상징성이 매우 강한 상징화를 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른이든 아이든 한결같이 생의 즐거움에 젖어있는 표정인데, 이것은 가족과 이별하여 자력으로 회생이 불가능하리만큼 극단의 고독과 가난의 수렁에 빠져있었던 현실에서 유일하게 그가 잡을 수 있었던 것이 그림이라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의 선묘 위주의 묘법과 필치의 속도감 및 활달성은 고구려 벽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견고한 구성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풍부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사물의 골간을 파악하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꽉 짜인 강력한 구성력이 매우 딱딱한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은 종횡무진의 화면 공간활용과 힘찬 필선 구사로 인한 것이며, 이로 인해 그림이 매우 자유스럽게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을 통해 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시점까지의 한국 근대 미술에 대한 매우 세세한 분석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우리 미술에 대해서도 비슷한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근대 미술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듯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