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을 ‘지각’, ‘사유’, ‘상상’의 세가지로 나누고, 이전까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상상’을 중요한 의식 작용 중 하나로 인정한 초기 지식인 중 한 사람입니다. 과거에 ‘이미지-상상’은 감각을 통해 지각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사유의 대상 또는 사유의 재료 정도로 취급받았습니다. 감각되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이미지 역시 의식의 대상물로서 존재할 뿐,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각과 이미지는 다른 존재이지만, 지각된 감각 정보와 지각의 결과물로 구성된 이미지는 본질적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지각과 이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분명 우리는 어떤 한 대상에 대한 ‘지각 자료(시,청,촉,후,미로 구성된 감각에 의한 정보)’와 그 대상에 대한 ‘이미지’가 서로 다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감각은 대상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얻어나가는 현실의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이미지는 대상에 대해 의식 속에서 떠올리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현실에서 대상에 대한 완벽한 지각이란 불가능합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컵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모든 시간과 모든 차원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컵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1초 전의 컵과 1초 후의 컵에 일렁이는 빛의 그림자 하나만 달라도, 과거의 컵에 관련된 정보는 새롭게 갱신됩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지각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지-상상을 통해 대상의 불완전한 정보를 메우는 방식으로 대상을 이해합니다. ? 예를 들어 코끼리를 보는 순간의 ‘지각 자료’는 우리가 평소에 ‘떠올리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코끼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지각과 이미지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죠. 하지만 코끼리를 우리 머리 속에서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코끼리에 대한 ‘지각’과 ‘이미지’가 구분됨을 알고 있습니다. 코끼리의 숨결을 느끼는 것과, 코끼리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은 다른 행위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빌려옵니다. ‘노에마(사고 작용에 의해 구성된 의미)’와 ‘노에시스(의미를 부여하는 사고작용’으로 설명되는 지향성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의식할 때 서로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지각을 할 때는 대상에 대해 지각의 지향성을, 이미지를 떠올릴 때는 대상에 대해 이미지로서의 지향성을 갖는 ‘노에시스’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대상에 대해 어떤 지향성을 갖느냐에 따라 대상은 ‘지각’되기도 하고, ‘이미지’화하기도 합니다. tv에서 이름모를 아이돌들을 보면서 그 화려함에 눈과 귀를 집중하는 순간 우리의 지향성은 ‘지각’을 향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아이돌을 특별하게 생각(털털하다, 귀엽다, 짐승돌이다…)하고 있다면, 아이돌의 외양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지향하는 사고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지향성의 구분은 나중에 상상력과 인식이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대상을 바라보면서 지각을 지향하는 사유와, 이미지를 지향하는 상상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지각은 대상의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점점 더 풍부해지지만, 이미지는 내가 갖고 있는 대상에 대한 한정된 정보 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지각에 비해 ‘빈곤’합니다. 또한 사유는 현실에서 부딪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서 비롯되는 무한한 관계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상상은 자기 안의 의식 속에 있는 이미지들의 한정된 관계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유하는 동안은 상상을 할 수 없고, 상상하는 동안은 사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끝없이 던져지는 ‘세계와의 관계’를 지각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지쳐버립니다. 현실을 올바르게 지각하고 사유하려면 끝없이 노력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상은 자기 안에 있는 이미 확정된 이미지만을 갖고 이루어지는 안정된 의식작용입니다. 이미지는 지각만큼 새롭게 갱신되지도 않고, 무수히 관계 맺어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들 속에서, 한정된 결과만을 낳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힘겨운 사람들은 이미지의 세계로 도피합니다.? 내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어떤 지향적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대상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지향성 개념은 ‘피투’와 ‘기투’ 개념에도 맞닿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목적 없이 던져진 자(피투)이고,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기투)”는 사르트르의 ‘실존’ 개념은 사물을 인식하는 지향성에 따라 다른 의식 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유’와 ‘상상’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세상의 정보가 다르게 구성되어 내 안에 쌓이고, 다시 활용되어 의식 작용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나의 주체성이 중요한 것이죠.? 사유와 상상이 반드시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대립적이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지각과 이미지의 구분을 위해 지향성의 개념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상상을 의식작용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견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철학자들처럼 ‘상상(이미지)’을 ‘이성(사유)’이라는 의식에 비해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의식 안에 놓여 있는 이미지들 속에서 상상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발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비해 빈곤한 ‘완결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현실에 비해 낮은 층위의 사고 작용처럼 보이게도 하지요. 저는 현실에서 부딪치고 성장해가는 ‘지각’과 ‘사유’의 의식이 전제되어야 ‘상상’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상과 사유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우리들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이성의 불완전성’을 이유로 직관과 상상을 올바른 해결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유와 상상 같은 주관적 관념들은 사람들 개개인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그 생각을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을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답이 분명하지 않은 철학을 우리는 왜 해야만 할까요? 철학은 현미경과 같은 학문입니다. 현미경의 배율을 높일 수록 세상을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철학적 사유는 지성인들의 사고 능력을 발전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주제를 사유의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훈련을 하면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는 분석력과 사고력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철학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도로 발달한 사고력을 갖춘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반복하면 우리 역시 보다 명료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보다 현명하게 주어진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하 책의 내용 요약은 생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