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분에 사로잡혀 병란을 부르다’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조선의 16대 왕으로 재위했던 ‘인조실록’에 해당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을 의식해 집권 내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에서는 ‘바른 것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칭하지만, 광해군과 그의 아들인 세자까지 장성한 상태에서 쿠데타로 등극했다는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멸망해가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실시했기에,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청나라와의 대립으로 두 차례에 걸쳐 그들의 침략을 초래하기도 했다. 결국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병자호란(1636)이 발생하자,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다가 한강변의 삼전도에서 항목 의식을 해야만 했던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는 점이 정통성의 한계로 지적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청나라와 우호적이었던 광해군을 신하들의 거센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명분을 중시하던 명나라에서조차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즉위한 지 22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써야만 했고,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의 행패를 온전히 견뎌야만 했다고 한다. 명나라에 기댄 이러한 처신으로 인해 청나라의 견제에 이은 침략을 초래했고,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고구두(三排九叩頭)’의 예를 시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이전에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부원수 이괄(李适)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려 하자,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피신해야만 했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인조 치세에는 ‘이괄의 난’(1624)이라는 내우(內憂)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두 차례나 청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외환(外患)이 이어졌다. 인조의 항복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맞서는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이들과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질로 가있던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그들이 발달된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무능한 인조에 의해서 소현세자가 살해되었다는 추정으로 이어졌고, 소현세자의 비와 그 아들들까지 유배되었다가 죽음으로써 그러한 추론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고, 1649년 26년의 재위를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역시 즉위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임진왜란이 종전된 지 30여년만에 다시 외침을 당한 조선왕조는 왕이 친히 나가 적장에게 머리를 땅에 박는, 치욕을 맛보며 항복하고 만다. 이 때의 임금이 인조였다. 가만히 보면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을 겪을 때 당시 왕들이 하필 찌질하고 권력에 집착하던 왕이었다. 그런 한심한 왕이 보위에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의 비극이자, 백성의 입장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두 왕 다 적통도 아니었고, 애초에 보위를 이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인물이라 그랬는지 권좌에 대한 집착은 유독 심했다. 그로 인해 세자로 이어지는 승통과정에서 불필요한 마찰과 잡음을 낳았으며 그 여파는 후대 왕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최악의 군주였다. 반정으로 군주가 된 인조는 아무래도 집권을 도와준 서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재위 초반에는 전 왕대의 유산을 처리하면서 진통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사대부들이 희생됐고,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후금이 힘을 키우고 조선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데도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다. 국제 정세를 읽은 안목이 결여됐을 뿐더러,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여념이 없었을 뿐이었다. 선조와 인조에 대해서는 정말 욕이 화수분처럼 멈추지 않게 된다. 어쩜 이렇게 찌질하기 이를데 없는건지. 권좌에 대한 욕심만 많고 자신의 보위를 지키는 이외에는 능력이라고는 약에 쓰려도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임금이었다. 선조야 인재를 보는 눈이라도 있었다 쳐도, 백성이야 청의 말발굽에 짓밟히든 말든, 명을 추종하는 인조의 중화적인 세계관은 조선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대부 사이에도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리고, 청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던 소현세자가 청에 기울어진다는 소식은 조선의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쳤다.
박시백은 인조는 친청(親淸)파 신하들도 기용했고, 세자로 친청의 색깔을 띠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청이 세자에게 보위를 양위하게 할까봐 소현세자를 경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소현세자의 사후, 소현세자의 일가는 하루 아침에 권력의 중심에서 목숨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유족에게 시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핏줄조차 내치는 냉혹한 군주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인조의 행보를 보면 반정 후 조선을 운영할 이렇다할 구상을 갖지 못했다는 박시백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통치자, 그것도 임기가 종신인 군주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현실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군주를 둔 백성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그런 형편없는 임금에게 인조(仁祖)라는 묘호라니, 이쯤되면 최고 수준의 반어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더욱 암담한 것은 최악의 군주에게 최상의 묘호를 붙여준 것에서, 두 차례에 걸친 전후 그 어려운 현실을 타개할 인재나 인식이 눈에 띄지 않는 조선의 상황일 것이다. |
|
만화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의 12번째 이야기.
그 이름도 유명한 조선의 왕, 인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선대 왕들처럼 평범하지 않았다. 직전의 왕이었던 광해군을 신하들과 함을 모아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광해군의 정신줄 놓은 정치 행위를 바로 잡고, 신하와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한다는 이유로. 그러나 왕이 된 후에 인조는 늘 불안했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혹 다른 무리들이 자신을 왕위에서 끌어내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더욱이 광해군이 살아 있는 상태였기에 언제든지 신하들이 광해군을 다시 왕위에 앉히겠다는 목적으로 반역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광해군 뿐이었겠는가. 궁궐 내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불안감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왕위에 앉혀준 신하들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래저래 몸을 낮춰야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늘 조심했다. 그러나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각종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우선은 이괄의 난. 인조반정에 커다란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괄은 1등 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더욱이 아들이 역모 죄로 잡혀가게 되자 그는 난을 일으켰다. 쉽사리 제압할 수 있을거라 여겼던 이괄의 난은 생각보다 커다란 위협이 되었고 왕은 궁을 버리고 호남으로 피신을 해야 했다. 가까스로 이괄의 난을 제압하고 난 후 정묘호란이 터진다. 역시나 터부시 여겼던 후금이기에 제압이 가능할 줄 알았지만 이번에도 왕은 궁을 떠나 강화도로 파천을 해야 했다. 겨우 화친을 하고 전쟁은 종료되었지만 또 다시 후금과 전쟁이 터진다. 아무런 대책 없이 세월만 보내던 왕은 결국 또 다시 궁을 떠나 파천을 해야 했다. 처음이 아닌 전쟁이었기에 후금의 요구는 강력했다. 전과 다르게 화친이 쉽지 않았던 것. 결국 왕은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삼전도의 굴욕은 삼배구고두라 하여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인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그의 아들 소현세자. 험한 시절을 만나 세자의 신분으로 후금으로 건너가 긴 세월을 살아야했던 불우한 사람.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그는 현명하게 행동하며 새로운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어이없게 죽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선조편을 볼 때도 못난 왕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화가 났었는데 인조편은 그 결정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말 그대로 막장 드라마의 표본 같았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며 선대왕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왕이었으면서도 그 보다 못한 왕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우선은 그가 백성을 내세우며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 여겼다는 것. 왕위에 올라 백성을 두루 살펴야 하는 중요한 사람이니 몸을 귀하게 여겨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것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이 침입할 때마다 번번히 궁을 버리고 파천을 하는 장면에선 절로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러면서 왜그리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손주까지 해할 정도였으니 요즘 흔한 막장 드라마는 오히려 나은 편이라 해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막장 오브 더 막장의 시기였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넘는 기간을 왕위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만족스러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어이없음에 한 숨만 풀풀 쉬던 인조의 시대. 다음은 그의 아들인 효종이었다. 역시나 편치 않던 세자 생활을 보냈던 효종. 과연 그가 어떠한 정치를 했는지 조금은 기대를 해본다. 그래도 인조보다는 낫겠지 하고. |
|
임진왜란과 더불어 양대 외란이라고 불리우는 병자호란.
그런 병자호란은 비단 백성들을 더욱더 암흑 속에 빠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중립외교를 외치던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인조. 하지만 그런 인조 또한 신하들, 사림의 꼭두각시일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의 영향력은 점점 낮아져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뿐이었다.
이런 국내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북방에서는 새롭게 청을 세운 청태종을 중심으로 국가 경쟁력을 재고시키지만, 아직 명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사림 때문에 결국 인조는 큰 실수를 하게 된다. 그렇게 인조의 실수로 병자호란은 일어났다.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던 인조보다는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짖밟혔던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났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는 왜침의 연속이라는 말이 더욱더 실감나는 책이었고 현재의 우리나라가 안쓰러워지고, 과거의 역사 속에서 배우지 못하고 소모적인 정쟁만을 자행하는 국회와 국가 수반들이 원망스러워진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단어는 용납되지 않지만, 만약 인조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밤새도록 고민하게 만드는 조선왕조실록 12 인조편 이었다. |
|
한겨레신문의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통해 촌철살인의 사회인식을 보여주었던 박시백화백이 조선시대 사관의 입장으로 글로 된 역사를 만화로 풀어쓰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몇년에 걸쳐 집필해 오고 있으며, 2008년 7월에 그 12번째 작품 <인조실록>이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도저히 객관적일 수 없는 실록의 내용을 최대한 최근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려운 실록의 내용을 대중들이 알기쉽게 만화로 구성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인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이번 작품의 작가 후기에서 작가의 고민처럼 ",,,글이 더 많아진 것 같아서 독자들이 지레 질리지나 않을까 걱정된다,,,"는 언급은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우리시대 최고의 만화가 허영만의 "식객"이 20권이 넘는 방대한 시리즈를 만들어 내면서 일반 독자들의 큰 불만 중 하나는 더이상 만화가 만화같지 않고 복잡한 요리서적과 같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그 자체가 역사서이므로 어쩌면 그 방대한 분량을 좀 더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작가의 욕심때문일 것이고 그래도 역사책 들여다 보는 것 보단 낫지 않느냐는 위안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 같다.
1. 집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서인들과 인조
집권 주도세력이 몇몇 무신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미한 직책에 있거나 유생신분이었던 점과 무조건 광해군의 실패를 본받지 않겠다는 명분에 그의 성과를 모두 부정한점, 그리고 당시의 국제정세가 이러한 명분에 사로잡히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급박하게 돌아갔다는 점 등등 결론적으로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점이 일단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어중이 떠중이 같았던 반정세력들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었기에 집권하자 마자 공신이었던 "이괄"의 반격을 받아 도성을 비우고 도망가기에 이르렀고 (인조2년) 후금의 침입으로 인해 또다시 도성을 비우게 된다 (인조 5년)
2. 리더십이 부족했던 인조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을 어떻게 끌고 가야겠다는 전략적 구상이 없었다. 다만 "광해군과 반대로"라는 캐치 프레이즈만 있었을 뿐이었다. 백성에 대한 배려 등과 같은 기본적인 자질이 부족했으며 이순신을 끊임없이 시기했던 선조와 마찬가지로 자기 대신 인질이 되어 담담하게 끌려갔던 세자 (소현세자)를 질투하고 미워했다.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의 패륜을 명분으로 반정했지만, 세자를 죽게 하고 (교사 혹은 방조) 며느리를 죽게 했으며 어린 친손자를 둘이나 죽게 하는 등 광해군을 능가 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시호는 인조(仁祖)였다.
인조시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사는 되풀이 되며 이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면 선조 이후 무너져 갔던 조선왕조처럼 발전하기 어려울 것임을 알 수 있다. |
|
광해군 임금이 인사에 실패한 임금이고 개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인조 임금은 선조보다도 더 찌질하고, 광해군보다 훨씬 도덕적이지 못한 무능하고 무서운 왕이었다. 특히 대외 외교에 실패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가져온 부분도 크고, 장자 계승의 원칙인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생각하고 살해했다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임금에게 역사에서는 인조(仁)라고 이름 붙여주는 것은 참 어이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그 후를 보면서, 화친을 할 것이냐, 대의 명분을 따를 것이냐의 논의가 있어왔고, 대표적인 두 사람인 최명길과 김상헌의 인연을 보면 드라마틱하다. 아마 라이벌이라는 형태의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아주 옛날 생각에는 사나이하면 의리이지 이런 관념이 있어 김상헌에 대해서는 좋게, 최명길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또 이 책을 보면서 힘 없이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것은 만용이고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점점 현실주의자가 되어가며, 현실에 맞는 최선의 선택만이 나와 주위사람들을 가장 안전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최명길이 훨씬 훌룡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다.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병자호란은 전쟁 영웅도 없는 허망한 전쟁이었고, 압도적인 우위의 청군이 우리 나라를 봐준 전쟁으로 보인다. 왕만 굴복시키면 조선 전체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적게 희생해서 많은 이익을 취하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5일의 항쟁밖에 안 될 정도로 짧게 끝난 전쟁이었다.
임경업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 조선에서 명으로 다시 청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이렇게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질 수 있다니, 큰 미래와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역시 명분의 나라이고, 왕권이 무척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조 역시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종하려고 했고, 명분에 밀려 반대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도 복식문제가 되겠지만, 왕의 어머니의 상에 3년 복식이 제한당했다.
역사의 가정이란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어떠하였을까 기대를 해 보게된다. 작가의 예상처럼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왕권이 미약해서 어쩌면 크게 성공할 수 없었겠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래도 뭔가 방향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조선이 계속 암울하다고 느껴지고 이제 송시열의 시대를 기다려야 하나. 선조,광해군,인조 찌질한 왕들의 연속이다. 이런면에서 소현세자는 우리 역사에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
남한산성을 읽으려고 펼쳤더니, 인조가 후금 황제에게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항복(삼배고구두례)을 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역사적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진심으로 존경한다.) 마침 "언젠가는 읽겠지, 암암...한국인으로서 꼭 알아야지. 틈틈이 읽게 되지 않을까? " 라는 마음으로 사서 쟁여 두었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조실록을 뽑아왔다. (스스로 대견해했다. 이럴 때를 위해서 조선왕조실록 전집이 필요한 거야!) 그런데, 인조실록을 읽고 나니까 답답하고 신경질 나서 남한산성은 꼴도 보기 싫어졌다. 에잇!!! 이렇게 무능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이 임금이었다니! 처음엔 패기있게 반정을 준비하여 광해군을 몰아냈으나, 반정공신들의 권력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였고, 정당한 계승권자가 아니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후금에 포로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뜻밖에 후금에서 신뢰와 인덕을 쌓자 질투와 불안과 열등감에 소현세자의 죽음을 방치(방조)하였다. 인조실록을 읽어보면 병자호란은 막을 수도 있었을 전쟁이었던 것 같다. 쓸데 없는 명분과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후금의 병사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고, 남한산성으로 도망가 벌벌 떨다가 결국엔 나와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에 김훈이라는 뛰어난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이 더해지면.. 상상만 해도 괴로워지는 것이다. 에휴...남한산성은 한참 후에 다시 시도해야 겠다. |
|
무리해서 잡은 정권은 아무리 잘해도 나중에 좋은 평가 힘든데 인조의 반정은 시작부터 반정의 '명분'이 나라에 파국을 가져 올 명분이었다. 광해군의 '폐모'죄는 그렇다치더라도 떠오르는 "청"의 세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척사로 가다가 하마터면 나라가 망할 뻔 했다. 평화 시대에 왕이 된 선조는 전쟁의 위험을 미처 보지 못했다쳐도 왜란의 다음 세대인 인조는 또 다시 같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설마 징조를 눈치챘다하더라도 본인의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왜란을 겪고도 왕조를 지켰기에 조선의 이씨 왕조는 어떤 경우에도 견고하다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었을까?
지난번에 읽은 책에서 저자는 인조를 최악의 군주로 평가했는데 나도 거기에 동의 한다. |
|
12권의 주요인물들
왼쪽 : 인조, 이귀와 김류, 이괄, 인성군과 흥안군 모문룡, 원숭환,정충신, 유해, 아민 오른쪽 : 김상헌과 최명길, 청태종(홍타이지), 예친왕 도르곤, 용골대와 마무대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후궁 조씨, 봉림대군, 임경업, 정명수, 김자점 12권은 인조실록이다. 인조에 대한 나의 선입감은 극히 부정적이었다. 그는 내게는 망국의 길로 이끈 무능한 세(선조·인조·고종) 임금 중에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었고, 특히 아들인 소현세자 내외는 물론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정한 인물이었다. 또한 국가적으로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외적 앞에 3배구고두를 하는 5천년 역사의 제왕 중에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행적을 보인 인물에 대해 읽어야 하니 답답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인조실록을 읽은 뒤에 느낀 마음을 몇 가지만 적겠다. 첫째, 인조는 선조와 판박이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평소에 인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해도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했다. 저자는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등 폭군이나 비정한 군주로 알려진 인물에 대해서도 그의 공과는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등 시비를 가리는 면모를 보였다. 그것을 통해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하면섯 평가를 유도하는 것이 이 책들의 장점이다. 나 역시 저자가 들려주는 단서를 보면서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간혹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립할 수 있었다. 나는 인조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어떤 긍정적인 서술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점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의 침입에 대해서는 선조에게는 책임을 묻기 곤란할 수도 있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야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아닌가? 그러나 병자호란의 경우는 청의 욕심이라기보다 인조가 자초한 면이 더 강하다. 또한 아들에 대한 질투마저 어쩌면 이리도 같단 말인가? 선조는 임란 중에 백성과 조정에 신망을 얻은 광해군에 대해 질시하면서 16년간 온갖 압박을 하며 견제를 했다. 그러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뿐만 아니라 며느리인 강빈과 손자들의 목숨도 빼앗았다. 역적에 연루되더라도 부녀자는 노비로 삼을지언정 목숨까지 빼앗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며느리와 어린 손자들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신동준 저자는 『조선왕 성적표』에서 조선의 3대 암군으로 선조·인조·고종을 꼽았는데, 나는 그중에 최악의 제왕으로 인조를 꼽고 싶다. 선조는 파천의 굴욕은 겪었지만 항복은 하지 않았고, 고종은 퇴위는 당했지만 치욕스런 모습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인조는 한반도 유사이래 가장 비참한 항복을 하였다. 또한 선조와 고종은 자식을 죽이는 패륜을 범하지는 않았다.
둘째, ‘선조=인조=이승만 ’의 공통점을 느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선조=인조=이승만’의 공통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세 사람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 권력을 잡은 부분이 석연치 않다 : 선조는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명종 생전에 말을 잘했다는 이유 하나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니 정상적인 권력 승계는 아니었다. 이승만의 경우는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당시 신망이 두텁던 여운형 등을 제치고 권력을 잡았으니 그 역시 명쾌한 집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세 사람은 외침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파천을 하는 수모를 겪었다. : 선조는 의주까지 파천을 해야 했고, 인조는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두 번이나 서울을 내줘야 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때 부산까지 밀려갔으니 더 할 말이 없지 않은가? - 세 사람은 도주에는 용감했다.: 끝까지 서울을 사수한다고 외친 뒤 국민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누구보다 먼저 도주했다. 특히 인조의 척화선언을 보면 웃음밖에 나지 않는다. “이기고 짐은 병가지상! 저놈들이 강하다고 해도 때마다 이기지는 못할 것이고, 우리가 약하다지만 싸움마다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랑캐가 침략하면 과인이 앞길에 진주해 장수를 격려하고 군민을 위로하겠노라.” 그러던 인조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주를 했다. 마치 한국전쟁 때 끝까지 서울을 사수할 것이고, 전쟁이 나면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들며, 만찬은 신의주에서 즐기겠다던 호언장담을 하다가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고 도주했던 어떤 고관이 연상되었다. - 세 사람은 아들을 불행하게 잃었다. : 선조는 광해군을 질투하다가 친자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비명에 갔으며,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질시로 아들 부부와 손자들까지 목숨을 빼앗았다. 친자가 없던 이승만은 자신의 실각으로 양자의 온 가족이 자살을 했다. - 세 사람은 외침에는 무능했으나 권력에 대한 집착과 유지에는 기민했다. : 선조는 여러 번의 선위파동으로 권력을 공고히 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권력을 강화했다. 이승만의 경우 사월혁명으로 망명을 하기까지 사사오입개헌과 부정선거 등으로 12년이나 권좌를 유지했다. 셋째, 국민정신과 교육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처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고, 특히 서산대사·사명당·영규대사 등 승장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의병활동은 미미하다시피 했고, 승병들의 활동은 전무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 의병들의 활동이 미미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용맹을 떨친 장수와 의병장들에 대한 홀대가 아니었나 싶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선조의 질시를 비롯하여 김덕령·정문부 의병장은 역모로 연루시켜 죽였고, 곽재우 장군은 재야에 묻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목숨을 바쳐 조국의 위기를 구하겠는가? 승병들의 경우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선과를 실시하고 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 호불정책을 실시했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승병들은 그 영향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전후에 승병들에 대한 보상 역시 미흡했다. 승병을 조직할 힘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었으리라. 작품을 읽는 내내 인조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을 때는 울분보다는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왕은 무능했지만, 최명길·김상헌·임경업 등 인재는 발굴되었다. 그런 이들이 있었기에 나라는 이어졌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덮었다. 13권은 효종실록이다. 실속 없는 북벌논란 속에 세월만 보낸 시대이다. 그리 유쾌한 독서는 아닐 것이라는 마음이다. |
|
야심가 능양군 주도의 반정 이후의 인조 시대를 그린 조선왕조실록 12권은, 아마 조선왕조사 전체적으로도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어둡고, 내부적인 권력 싸움과 정치 논리에 매몰되어 2차례의 병란을 부르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이 과연 명분이 있는 옳은 행동이었나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저자는 철저히 관찰자적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그리면서도, 날카롭게 비평의 시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