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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씨 책 왜 이제야 읽었을까 걸작이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가 있을까 가슴을 찌른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해준다 가슴이 아프다. 돈이 없으니 나라의 치안이 엉망이되고 개인의 삶도 엉망이된다. 세상물정을 모르면 당하는건 한순간이다.♡♡ 북조선에선 충심이 중국에선 메이나나 소소 남한에선 은미로 살아야만했던 험한 인생을 산 우리동포 하지만 한국에선 이분들에 대한 차별이 외국인노동자들보다 더 심하다. (나에 살던 북한은) 보다 더 와닿고 차별과 냉대의 모습은 똑같았다.(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새터민분들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먼저온 귀한 손님일수도 있다.☆☆ 초여름에 자미원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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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처절한 탈북자들의 이야기..
충심이.. 잠깐 중국으로 넘어가 식당에 가서 돈 좀 벌어올 욕심으로 두만강을 건넜다가, 인신매매에 넘어가, 해림시, 예전에 김좌진 장군, 청산리 대첩을 벌이던 그곳에서 얼마 안떨어진, 광명촌, 신흥촌, 금산촌..
90년대 초반까지는 분명, 가을이면, 추수할 벼로 황금 물결을 이루며, 윗어른 공경하고, 이웃간에 내남없이, 모두 친척들처럼 지내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행복하고, 부지런히 살던 조선족 마을..
지금은 아녀자들은 다 한국으로, 북경, 상해, 청도 등등 중국의 대도시로 떠나 버리고, 노인과 지지리도 못난 술과 약에 찌들어 버린 젊은 놈들 몇이 뒹굴고 있는.. 그래서, 심지어는 인륜도 구별 못하는 인간 군상들이 생겨나는 더러운 동네로 변해 버렸다.
충심이는 그런, 앞이빨도 깨지고, 이를 얼마나 안닦았는지, 옷도, 집안의 이불에서도 돼지우리 냄새가 날 정도의 그러한 자기가 살던, 북한의 남양보다 못한 곳으로 팔려 간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중국 개혁 개방에 이은, 천민 자본주의의 한국, 한국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개방에 준비되지 못한 조선족 마을이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졌다는데에 책을 읽으면서 한숨이 다 나왔다.
5년전 중국에 있으면서 보았던, 민공(시골에서 올라온 막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 스토리가 겹쳐지면서, 충분히 상상이 갔다. 너무나 리얼한 이야기들.. 중국, 저 동북지역, KTV, 안마, 다방.. 이세상 끝.. 갈데까지 간 사람들.. 그들을 또 등쳐먹는 비열한 조선족, 한국놈들.. 실패한 인간 군상들의 어우러짐..
정말, 누군가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어쩌자고 저런 처참히 미쳐 버린 미향이는 또 아기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진정 신은 있는 것인가? 지금 이렇게 내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는 이 세상의 어느 한켠에서 수없이 많은 어쩔 수 없이.. 정말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이 처절한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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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언, 《찔레꽃》. 오늘에 안녕(安寧)을 묻다
소설은 재현한 현실이고, 현실 같은 허구다. 따라서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성격 때문이다. 그런데 《찔레꽃》은 너무 비극적이어서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이 세상에서 ‘탈북자’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목숨을 경각에 달고 살얼음을 딛는 채 가깝거나 먼 곳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 생각하면 나는 그만 죄인이 된다.
별로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이내 삶도, 계절 별로 유행하는 옷을 사고, 냉장고에는 사두고 유통기한 지날 때까지 먹지도 못해 썩어서 버리는 일은 예사, 친구들과 놀다가 차 끊기면 택시타고, 가끔 기분 전환으로 조금 비싼 유명한 맛집 문을 두드린다. 나는 서민의 자식이고 역시 대를 이어 서민으로 살고 있다. 가끔 울화가 치밀 때면, 이 자본주의 사회가, 남산같이 높은데서 내려다보기엔 아름답지만 낮은 데서 빌딩을 올려다보기엔 한없이 캄캄하고 어지러운 불공평하고 천박한 곳이라고 비판할 줄도 안다. 그러면서도 막상 진중한 문제, 예를 들어 통일이나 전쟁·신자유주의 이렇게 머리 아픈 건 깊이 보거나 관심 두기 싫다. 지나는 길에 ‘불쌍한 사람’을 보면 기부하는 정도로 부채의식을 씻으려 민망한 손을 위로하는 정도. 딱 이정도면 내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 등쳐먹지 않고 내가 번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이정도 ‘평화’를 누리는 게 뭐 그리 잘못이냐고 감히 당당하게 말할 수 없다. ‘오늘이 누군가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듯, 엄마와 수다 떨고, 휴일엔 빈둥빈둥 텔레비전을 보며, 웬수같은 애인과 가끔 티격태격하는 내 일상은 주인공 충심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풍경화고, 동시에 도달하고 싶어 한 평화다.
비자발적인 불행
세상에 불행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인생에서 불행은 절대 앞으로는 오지 않는다. 꼭 뒤에서 사르르 다가와 뒤통수를 후려치는 법이다. 다가온 불행이, 알고 보니 내 선택이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그렇게까지 될 줄 모르고 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불법체류자가 돼 개 끌려가듯 붙잡혀가 ‘보호소’에서 불 타 죽은 이주노동자, 아르바이트 구하러 갔다 팔려간 여대생, 2년 후엔 정규직이 된다고 해서 묵묵히 일했는데 이 취업난 속에 대뜸 해고통지서를 받고 망연자실한 비정규직, 그리고 살길이 막막한 많은 사람들 모두 그러할 테다. 그런데도 세상은 때린 놈보다 당한 놈을 나무라는 풍조다. 넌 뭐하고 맞기만 했느냐고. 미련하다고. 그러게 왜 너희 나라를 떠나왔니? 잘 알아보지도 않고 덥석 따라가면 어떡하니? 명문대 나오지 못한 네 탓이야…….
소설에서 격랑의 폭풍에 휘말리는 주인공 충심의 인생도 그러하다. 그녀는 친구들과 까르르 수다 떨고 시험 성적을 걱정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의 고민은, 반듯한 우등생 충성오빠가 괜찮은데 자꾸만 날라리 재춘오빠에게 마음이 쏠린다는 것. 이렇게 푸르른 십대소녀는 ‘탈북’을 생각한 적 없음에도 ‘탈북자’가 되고 만다. 바로 두만강 건너 방학동안만 아르바이트를 해보라는 조선족 아낙네에게 속아 웬 시골청년과 강제로 결혼 하게 된 것. 그곳을 탈출해서 조금씩 돈을 벌지만 다시 사기를 당해 돈을 뺏기고 추방당한다. 이렇게 호적이 없는 비(非)시민인 상태로는 사람답게 살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달은 그녀는 결국 한국행을 결심한다. 그 길 역시 억센 가시밭길인데, 지키고 싶었던 어린 아이 영수를 잃으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상처투성이 몸뚱어리로 한국에 당도해 합법적 테두리 안에 들어왔다. 이제야 ‘시민’이 되었지만 그녀의 몸은 한국에 들어올 때 중개인의 소개비로 저당 잡혀 몸을 팔아 힘겹게 하루하루 갚아가는 처지에 놓인다. 합법적 시민이지만 온전한 시민이 못 된 그녀에겐 눈물조차 사치스럽다. 누가 봐도 불행해보일 만큼 어려운 처지에서 웃음을 잃고, 그야말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사람’에게, 몹시 안타깝더라도 ‘도대체 당신, 왜 그렇게 되었냐’고 절대 묻지 말 지어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원인은 단답형 대답이 될 수 없다. 짧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되겠고, 길면 이 《찔레꽃》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사람답게, 나이에 어울리게 살고 싶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저녁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하고, 동무들과 밤마실을 다니며 수다 떨고 남의 흉도 보면서, 어린 시절 꿈꾸던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살며, 무엇보다도 신분증 없이 떠돌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삶을 충심은 간절히 소망했다. -<소소, 눈사람이 되다>,《찔레꽃》
개체에 생명을 주다
충심의 탈북은 능동적 탈북이 아닌 수동적 결과물이다. 그 후에 당한 온갖 사기와 폭력들도 충심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세상의 거센 풍랑에 휩쓸리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주기만 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웠을 터. 소설가는 소설에서만큼은 전지전능하다. 소설 속 인물의 생사여탈권을 쥔 염라대왕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작가는, 모진 바람에 휩쓸리고, 무심한 발걸음에 짓밟히는 한낱 몸뚱어리로 전락한 충심에게 생명력(力)을 준다. 충심은 한성안마에서 나와 눈사람에게로 갔다. 맨손으로 눈을 길게 뭉쳐 눈사람의 다리를 만들었다. 이어서 발도 만들어 다리에 붙인 뒤 그 위에 눈사람을 두 팔로 껴안아 올려놓았다. 아주 짧은 다리지만 보기가 참 좋았다. 다리를 만들어줬으니 녹아 사라지지 말고 어디로든 갔으면 싶었다. 더구나 그곳이 진정 원하는 곳이기를 짧게 기도했다. 충심은 시린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눈사람에게 짧게 입을 맞추곤 돌아섰다. -<소소, 눈사람이 되다>,《찔레꽃》 그녀는 노래방이나 안마소에서 일하며 성(性)을 파는 여자다. 더럽다고 손가락질 받기 예사인 그녀지만 시린 손을 녹이며 눈사람에게 입맞추는 장면으로 그녀의 순정이 아직 빛을 잃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홀로 호호거리며 눈사람에게 입맞출 줄 아는 사람치고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웃음을 잃었던 그녀의 마음에 꿈틀거리는 그 빛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밥을 굶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끄응, 몸에 힘을 주었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한 달 전쯤 친구들과 함께 구워먹고 남은 삼겹살을 찾아 굽다가 신김치를 보시기째 엎어넣고 밥을 비볐다. …(중략) 엄마의 말대로 절대로 밥을 굶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찔레꽃>,《찔레꽃》 향긋한 차도, 좋은 레스토랑 식사도 아닌, 별로 차린 것 없는 ‘집 밥’을 잘 먹는 모습이어서 다행이면서도 가슴이 아릿해져왔다. 극도로 불행하고 불안정한 그녀가, 살아야겠다고 밥을 급히 퍼 먹는 모습은 자못 생명력이 솟는다. 그러나 작가는 생명력은 주었을지언정 충심이 그토록 원하는 시민권은 주지 못했다. 아니 줄 수 없었다. 길에서, 텔레비전에서, 식당에서, 화려한 밤거리에서, 어두운 지하셋방에서, 그리고 낯설고 익숙한 수많은 경계에서 질린 두 눈 동그랗게 뜬 채 이방인으로 서성이는 수많은 주변인들이 허덕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찌 충심에게만 호의를 베풀 수 있으랴. 그것은 작가가 아픈 마음 진정시키고 단 꿈 꾸려고 마시는 술 한 잔처럼 마취에 불과한 일일 것이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까운 탈북자의 이야기를 읽었으니 탈북자들이 잘 살아서 남으로 오길 기도하면 되는 걸까? 차라리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다. 소설은 충심을 매개로 수많은 공식적·비공식적 비시민자들을 마주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보고 또 보고, 아파하고 약 발라주기를. 곪아터진 상처에서 자신과 닮은 상처를 찾고, 동정을 넘어 연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으라고 전하는 것이리라. 분위기 좋은 카페나 맛집을 찾아 기분을 푸는 요즘 젊은 사람들과, 한 달 전 먹다 남은 삽겹살과 신김치로 급작스레 무엇에 홀린 듯 밥을 비벼, 삶을 치열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충심과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남한과 북한의 거리처럼 닿을 수 없고 멀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가 낳은, 극도로 불행한 군상들이라는 점이 똑 닮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한 부속품으로, 아니 그보다 못한 일회용 소모품이 되어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이 그네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착각일 테다. 충심이 찔레꽃을 찾았듯 독자들도 실존하기 위한 보석을 찾으라고 주문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내게 찔레꽃은 무엇일까? 또, 당신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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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이별을 강요하는 어떤 구조 천륜의 정을 강제로 끊어버리는 구조, 그 속에 갇혀서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 흘린다. 마치 지척에 있다는 느낌을 주듯 가끔은 전화통화를 할 수 있다면... 물론 그 한 통화를 위해서 얼마나 가슴 졸여야 하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몇마디 나눈다. 그러나 만날 수는 없다. 언제 다시 통화할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기만 하다. 아니 전화 한 통화의 결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한 순간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더 사무친다.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엄마의 마음은 어떨 것이며, 자식의 마음은 어떨 것인가? 애간장이 녹고, 심장이 멎으며, 그러다가 결국 억장이 무너지고 마침내 천지가 시꺼멓게 되는 느낌일 게다. 도대체 무엇이 부모와 자식을 이런 관계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인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 별만 세며 그리워하는 친구, 친척, 연인이 있다. 그리운 모든 사람들을 곁에서 앗아가 버렸다. 별을 보며 위안 삼고 싶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그들과 도란도란 살며 행복을 나누기에도 충분하지 않는데, 잔혹한 세상의 구조는 그들과 영원한 이별을 강요했다. 탈북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이중성 찔레꽃은 탈북자 이야기이다. 정도상이 그리는 탈북자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탈북자에 대해서 매우 다층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 동북3성 일대를 떠도는 탈북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국내로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국내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그들에 대한 관심은 식는다. 그들은 우리사회 내부에 새롭게 형성된 수직적인 계층질서에서 아래 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이런 이중성이 탈북자들의 비극의 씨앗이다. 동북3성을 유랑하는 탈북자들을 국내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은 탈북자들의 상품가치를 높인다. 여기에 어김없이 이 상품 가치를 노린 브로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 들어오면 이들은 차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정도상은 찔레꽃에서 이런 이중성을 파헤친다. 여주인공 충심은 엄밀히 말하면 탈북자가 아니다. 그녀는 생활고 때문에 인신매매단에 속아서 인생을 유랑하기 시작한다. 조중국경지대에서 납치되어 동북3성으로 강제로 팔려가고, 다시 목숨을 건 탈출 끝에 심양, 고비사막을 거쳐 마침에 한국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연명하고 있다. 노래방 도우미는 인생 유랑의 끝이 아니다. 충심의 인생유랑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는 어떤 지독한 구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의 인생유랑이란 손톱만큼의 낭만도 없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길 그 자체이다. 유랑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사무침과 고향땅 함흥에 살고 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명분으로 포장된 기획입국 충심의 인생유랑은 인신매매단에 의해 촉발된다. 이들을 국내로 들여보냈을 때 인도주의라는 명분과 몇분의 정착금을 뺏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종교집단은 충심의 인생유랑의 연출자들이다. 탈북자들을 국내로 들여오기만 하면 이떤 형식이든지 이익이 발생한다. 그 이익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서 충심의 끝없는 인생유랑이 시작된 것이다. 생사람 잡기나 다름없다. 그녀의 유랑길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은 어찌할 것이며, 엄마와 헤어져서 날마다 눈물바다를 이루는 비극은 또 어찌할 것인가? 한국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겠지.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한국에 가면 그녀의 인생유랑은 막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한국에서 그녀의 삶은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삶이다. 그녀에게 남은 희망이라곤 이 사회에 적응해서 돈 벌어 함흥의 엄마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 과정속에서 수수료를 챙기는 브로커들도 불법이기 때문에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도 없다. 그래도 그 희망이 삶을 유지시킨다. 언제 꺼져버릴지 알 수 없는 희망에 자기 삶을 걸고 있다는데서 충심의 비극적인 삶은 종말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중성의 극복과 소수자에 대한 관용 정도상은 함흠의 꿈 많은 소녀 충심이 탈북자가 되어 한국에서까지 유랑하는 과정을 매우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묘사하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서, 또 시점을 달리하면서 전개되는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사이 여러 시각과 다른 시점이 하나로 모아진다. 그때부터 찔레꽃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작가는 찔레꽃을 통해 천륜까지 단절시키는 이 지독하고 야만적인 구조를 고발하고 있다. 심양이나 고비사막을 여행하면서 작가가 목격한 것은 21세기 유랑민들의 삶의 온전성을 파괴하는 구조였다. 그는 21세기 유랑민들의 삶의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한 번 잡은 책 눈물을 훔쳐가며 끝까지 읽었다. 충심과 함흥의 엄마가 통화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에 흐느낌까지 더해졌다. 충심은 엄마와 통화 후 메인 목구멍으로 보시기에 비빈 밥을 집어넣는다. 살기 위해서... 충심을 한국으로 보낸 사람들, 탈북자들의 입국을 환영하는 민심은 다 어디로 갔는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른 것이 야박한 민심이던가. 이런 이중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통일은 접어두고 대한민국의 선진화도 있을 수 없다. 인신매매와 기획입국을 탈북자에 대한 인도주의로 치장하는 것을 묵인해서는 안된다. 탈북자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해 관용하고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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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눈물이 해픈것 같다.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고, 소설을 봐도 눈물이 흐른다, 계절탓도 있지만, 마음의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 도상의 찔레꽃을 처음 접한건 "kbs tv책을 말하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메인 책으로 선정된 도서이고, 전에 보았던 영화 차인표 주연의 탈북영화 "크로싱"의 아우라 때문이다. 탈북자들을 통해 숭고한 우리의 생명의 형식을 탐색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처럼 현실은 소설보다 더 비참하다. 이 소설은 현실이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에 비해 소설은 순수와 휴머니즘을 담고 있다.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믿음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말 하고자 한 것같다.
산다는 건 언제나 간단치 않다는 현실의 냉혹함, 내지는 냉절함, 그런것이 작품에 녹아나 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탓할 상대가 있다해도 책임을 묻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힘들고 서러워도 울음과 눈물을 참아내야만 인간의 위신을 지킬 수 있는데,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비극적인 자신의 운명, 주인공 충심은 우연찮게 중국 인신매매단에 걸려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시작하게 된다. 선택하고 싶지 않은 원치않은 선택,결국 중국 말단농촌의 나이많은 농부에게 팔려가는 충심, 이대목을 읽으면서 한국 농촌의 외국인과의 결혼이 생각났다. 소설은 현실을 말하고 있다, 비참한 현실을 말이다, 결국,원치않는 결혼이기에 인신매매꾼 갑봉의 도움아닌 도움으로 탈출하고, 중국에 정착하는 충심
중국에서 서울까지는 손가락 하나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그 짧은 거리를 가기위해 주인공 충심은 몇해를 중국을 떠돌았다. 중국에서의 갖은 고생,안마를 생계 수단으로 삼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충심,그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자신의 희망을 찾기위해 한국에 기획입국하지만,그곳은 주인공 충심을 더욱더 힘들게 만드는 맹수이 정글로 뛰어든 샘이 되었다. 주인공 춘심을 납치한 인신 매매꾼 조선족 갑봉과 춘구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가치도 위엄도 없는듯하다. 먹이다툼에서 이기기위한 인간적인감정을 배제한 냉혹한 정글의 규칙을 따르는 그들, 하지만 그들도 심장을 단 인간이기에 결국, 충심을 돕게 된다. 소설의 개연성이지만 말이다. 주인공 충심을 통해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비교 허영심을 비추는 사람이라면 그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정말 행복하니?" 산다는 자체가 공포이고 고난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공 충심의 삶에 슬퍼하고, 위안을 얻는 아이러니에 빠지지만, 결국 우리의 삶도 충심의 비극적 삶과 비교해도 그리 낳은 삶은 아닐것이다.
사람답게,나이에 어울리게 살고 싶은 충심,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저녁을 먹고,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하고,동무들과 밤마실을 다니며 수다떨고 남의 흉도 보면서, 어린시절 부터 꿈꾸던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살며, 무엇보다도 신분증 없이 떠돌지 않으며,아무리 늦어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삶을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충심의 그 작은 소망은 모조리 금기에 속했다.(p.157) 그녀가 목숨을 걸고,한국에 와서 얻은 신분증은 휴지조각에 불구하다. 국가 권력과 법질서에 살아있다는 민주국가 한국에서 그것은 한낯 치장에 불과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세상은 상대방의 불우한 처지를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인간들로 가득차다. 충심이 한국에 와서 결국 선택한 직업은 노래방 도우미 돈을위해 가끔 2차를 나가 몸을 판다. 그건 사는게 아니라 죽지 못하는 것뿐이다. 열흘 쯤 굶어본 사람만이 굶는 사람의 그 간절한 허기를 몸으로 알지 않을가? 허기에 인간의 존엄은 산산조각 나고 사나운 짐승으로 변해 간다. 충심이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없는 일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메인다. 그럴 때이면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 "찔레꽃" 이 노래를 들으며,충심의 애절한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찔레꽃 붉게 피이인 북쪽나라 내고향, 언덕위에 초간 삼간 그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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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음에 <찔레꽃>을 읽었다. 정도상의 다른 소설도 그랬지만 이번 연작소설은 매우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행동선이 빠르게 전개되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가지를 펴나가기 때문에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어렵다. 사실적 묘사도 묘사이지만 주인공의 운명이 어떤 길로 들어설까, 소설 속의 상황에 금방 몰입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충심, 미나, 소소, 은미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그 이름이 상징하듯 자신의 전 존재가 출렁이게 되는 '팔자 센' 북한 처녀의 유랑은 소설책을 내려놓고도 한동안 가슴 깊은 곳을 멍멍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주변을 돌아볼 틈 없는 한국사회 바로 옆에서 여러 번 잔혹한 운명의 나락에 떨어졌다가, 그래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생명력으로 다시 길을 걸어가는 우리 어린 누이들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탈북 이후 영국으로 밀항하면서 현실감을 잃고 설화 속으로 아련하게 사라져버리는 것과는 달리 정도상의 <찔레꽃>은 머나먼 길을 돌아 바로 우리 옆의 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탈북자(새터민이라고 한다죠)들의 신산어린 삶이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실감나게 말해준다.
갖가지 블록버스터와 환타지가 사람들의 내면을 장악하는 요즘,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처럼 가장 현실적인 우리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차분하게 주변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닫힌 가슴을 찌르는 소설-찔레꽃.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