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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결산][꽁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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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4. 수. 시인동네의 60번째 시집으로 1941년생인 강우식시인의 [꽁치]가 2016년 여름에 발간되었다. 대놓고 강우식 음식시집이라며 표지에 적어 놓았고, 시집 속의 시 제목들 역시 대부분 음식이름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다. 시집의 제목부터 <꽁치>라서 살짝 고소한 듯 비린 듯한 생각이 들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과 더불어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음식들에 얽힌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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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4. 수.

 

시인동네의 60번째 시집으로 1941년생인 강우식시인의 [꽁치]가 2016년 여름에 발간되었다. 대놓고 강우식 음식시집이라며 표지에 적어 놓았고, 시집 속의 시 제목들 역시 대부분 음식이름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다. 시집의 제목부터 <꽁치>라서 살짝 고소한 듯 비린 듯한 생각이 들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과 더불어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음식들에 얽힌 각각의 사연들과 시인의 감상, 표현들이 애틋하게도 다가오고 얄궂게도 다가온다. 연로하셔서 그런지 은근하게 눙치는 글들은 야한 듯 하면서 왠지 슬픈 느낌도 든다. 먼저 사모님을 보내고 혼자 먹거리를 해결하는 모습과 누군가 보내온 음식들을 차려서 드시는 모습들에서 안쓰러움도 느껴지지만 거기서 장난처럼 짓궂은 생각을 하시고 시를 얻는 시인의 모습은 어쩔수 없이 시인이구나...하는 생각에 무릎을 치게도 한다. 

 

 

초코파이

 

예전에 죽은 아내가

한 통씩 사서는 심심한 때면

가끔 하나씩 먹던 것이다.

 

초코파이가

러시아, 중국은 물론 동남아

심지어 개성공단의 간식으로 주어지더니만

마침내 북한의 암시장에서도

인기 품목이라는 말을 듣고도

 

나는 아내가 먹으며

혼자 먹기 심심해선지 더러

입에 대보라 해도 꿈적 안 했다.

 

오늘은 한때 철수했던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예전에 주었던 초코파이 간식도

하루에 한 개인가 두 개로 줄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새삼 초코파이를 즐기던

아내 생각 간절해

생전에 입에 안 댄 것을 먹어보기로 했다.

 

이름대로 초코 맛 나는 파이.

살림살이가 너무 고되고 쓰디써서

이 단맛으로 나 몰래

아내는 인생을 위로 받으려 했구나.

 

새삼 초코파이 하나 물고

울컥 눈물이 홍수 져 삼키지 못하고

그냥 울었다.

 

먼저 간 부인을 생각하며 생전 처음 "초코파이"를 먹다가 눈물이 홍수지는 시인의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살림살이가 너무 고되고 쓰디써서 / 이 단맛으로 나 몰래 / 아내는 인생을 위로 받으려 했"을 거라는 시인의 생각이 정말 맞을지, 틀릴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아내의 습관을 똑같이 해보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아내 생각에 젖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다. 같이 먹어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초코파이" 하나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와닿는 시다.    

 

 

꽁치

 

이놈의 꽁치 굽는 냄새가

무슨 점령군의 최루탄 냄새처럼

온통 운동장을 덮은 옛날 국민학교 동창회다.

 

팔도 어디서나 흔히 먹는

어물 중에서도 그중 만만한 이놈을

동창회에서는

'고향의 맛 즐기기'라고 내놓는다.

 

꽁치가 꽁지가 되어버린 자투리 나이의

할배 할매들이 죽기 전에

일 년에 한 번 보는 만남이 너무 반가워

석쇠를 걸어놓고

 

그들의 늙다리 인생만큼 짠 막소금을

툭 툭 뿌려가며 구워서는

마수워 마수워 영동 사투리를 뱉으며

서로의 입에 넣어주기도 한다.

 

하긴 아카시아 꽃 필 무렵에

고향 주문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생물 꽁치회에 굳이 침 흘려가며

입맛 다실 필요 뭐 있으랴.

서로 한물간 팔자인데 냉동이면 좀 어떠랴.

 

우리 모두 한때는

산란기의 꽁치떼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죽어도 좋아

온몸을 내던졌던

그러면서도 꽃바람 속의 홍도를 닮은

푸르른 등을 가진

어물들이 아니었느냐.

 

"꽁치가 꽁지가 되어버린 자투리 나이"에 만난 동창들이 국민학교 동창회를 하며 꽁치를 구워 먹는다. 그들의 대화 속에 맛있다는 뜻의 "마수워 마수워"라는 영동사투리가 어쩜 이렇게 정겨울까. 그들만이 추억으로 한때의 어렸던 시절과 젊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먹는 꽁치의 맛은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하고 끝내주는 맛일 것 같다. 이들이 먹는 꽁치는 이미 꽁치가 아니라 추억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 죽어도 좋아 / 온몸을 내던졌던" 겁없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고, 돌아갈 수 없는 "푸르른 등을 가진 / 어물들"의 시절에 대한 아쉬움을 나누는 이제는 "한물간 팔자"의 할배 할매들의 정겨운 모습이 눈물겹도록 짠해진다. 

 

 

밴댕이 무침

 

젊은 날에는 좀 거칠고 터프한 몸짓으로

여자들에게 다가서듯이

때로는 맵고 달콤하며 새콤한

밴댕이무침을 무작정 먹는다.

 

좀 당기는 먹거리 앞에서는 모두가

남녀 혼숙하듯이 떼로 앉아서

입술이건 혓바닥이건 벌겋게 불타오른다.

 

광란의 섹스 같은 인사불성

먹는 거 너무 밝혀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년이라면

너무 심한 언사겠지.

 

인천 앞바다의 짠맛이

살 속 깊이까지 배인 여자들은

밴댕이 살점과 무채와 고춧가루와

모두가 바라는 새콤한 식초의

혼숙 같은 무침에 매몰된다.

 

인천 앞바다 조수간만의 차가

지금 썰물일까 밀물일까도 모르면서

황홀은 아니더라도 땀이 나는

밴댕이 맛으로 나는 늘 여자들을

가늠하려 했을까.

 

<밴댕이 무침>을 읽으니 매콤새콤한 밴댕이 무침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시인은 "먹는 거 너무 밝혀 /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년" 이라고 했는데, 이게 정말 맞는 말인지 궁금하다. 속이 좁아서 밴댕이 소갈머리라고 하는 줄 여태껏 알고 있었는데... 

입맛 당기는 먹거리 앞에서 떼로 모여서 입술과 혓바닥이 벌겋게 되는 것에 "남녀 혼숙 하듯이"라고 표현해 놓고, "황홀은 아니더라도 땀이 나는 / 밴댕이 맛으로 나는 늘 여자들을 / 가늠하려" 했을 것 같다는 시인의 고백이 참 능청맞다. 이 시 역시 젊은 날을 그리워하는 아쉬움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시다.   

 

 

이면수 구이

 

바닷가에서 여자와 한밤을 새운 날에는

하늘의 별보다는 이상하게 파도가 꺽이는 것이

명절날 떡치는 소리로 들렸다.

밀려드는 시장기로 아침밥을 했다.

 

껍데기가 고소한 이면수구이였다.

비릿하면서도 벗겨 먹는

입맛 댕기는 거로는 이만한 게 없어서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맛에는 빈부가 없고 고금이 다르지 않아서

강릉 최씨 부자도 이 껍데기로

쌈 싸다가 알거지가 됐다.

 

하지만 맛에 죽고 살아온 나도

내 고향에서 부르는 이면수의

다른 이름인 새치에 대하여서는

애인 있는 여자를 새치기해 자고서

아침에 이면수 구이를 먹는 것처럼

어찌 그리 같은지 요상해진다.

 

바로 오늘 그런 날이다. 이면수를 먹다가

새치 생각이 나서 혼자 키득대니까

그녀는 밤새 쌓은 만리성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덩달아 웃었다.

 

새치는 새치기한 여자와 먹는 것이

어쨌든 제일 맛 좋다. 말뜻 알랑가 몰라.

 

거친 듯, 야한 듯한 시 <이면수 구이>는 나도 어렸을 적에 엄마가 해줘서 참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근데 언제부터인지 다른 생선들은 먹어도 이면수는 잘 안먹게 되었다. 맛있었던 어렴풋한 기억만 있다. 얼마나 맛있으면 부자가 이면수 껍질로 쌈싸 먹다가 망했을까. 이면수는 실제로 껍질이 두꺼워서 잘 구워 먹으면 껍질의 고소한 맛으로 밥 한그릇을 뚝딱 할 수 있을 정도란다. 그 이면수를 시인은 고향에서 부르는 다른 이름 "새치"를 거론하며 "애인 있는 여자를 새치기해 자고서 / 아침에 이면수 구이를 먹는 것처럼" 요상한 이름이라도 한다. "이면수를 먹다가 / 새치 생각이 나서 혼자 키득대니까 / 그녀는 밤새 쌓은 만리성 때문인지 / 뭣 때문인지" 같이 웃는 그녀는 누굴까. 정말 새치기한 여자는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마지막 연에서 "말뜻 알랑가 몰라"라는 표현이 장난스럽기도 하면서 요상한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시인. 나하고야 상관없는 얘기지만, 어째 짓궂음의 수위가 너무 높은 듯 하다.   

 

 

닭백숙

 

능구렁이를 잡아 벌레를 내고

그 벌레를 쪼아 먹은

닭의 등이 털 뽑혀 맨살이 드러나면

잡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그 사이 어머니는 물을 덥히고

뜨거운 물이 나오면

나는 물에 젖은 닭털을 뽑았다.

 

집의 장닭 한 마리가 사라지니

닭장이 텅텅 빈 듯 서운하고

새벽마다 시끄럽던 온 동네가 조용해졌다.

 

내가 오뉴월 개도 안 걸린다는

고뿔로 죽도록 앓고 나서

보신한다고 푹 고아

온 가족이 두레밥상에 앉아 뜯었다.

 

특히 나에겐 뒷다리 하나가 차례로 와

그 덕분인지 비실비실 앓던 여름의

무더위를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뱀닭을 먹으면 뱀눈을 닮는다는

말을 들은 나는 가족들 몰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뱀닭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얘기는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게 궁하던 시절, 식구들이 몸보신을 하기 위해 고안해 낸 음식이 아닐까 한다. 뱀닭을 먹고 "비실비실 앓던 여름의 / 무더위를 무사히 넘겼"다는 걸 보면, 마음으로 오는 플라시보 효과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흔히 여름에 삼계탕을 먹듯이 이열치열로 땀흘리며 먹은 닭고기 덕분에 보신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뱀닭을 먹으면 뱀눈을 닮는다는" 것은 아마도 그마저도 먹지 못하는 훨씬 더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일 것으로 보인다. 먹지 못하니 지어낸 말로 심통을 부렸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지천에 깔린 영양제와 보신음식들이 있으니, 굳이 뱀닭을 찾지 않아도 되건만, 아직도 찾는 어르신들이 있고 파는 곳도 있다니... 어린 시절의 믿음은 여간해서 꺾을 수는 없나보다. 

 

 

담배

 

  나뿐 아니라 5,60년대만 해도 어지간한 골초들은 머리맡에 담배 곽을 놓고 살았다. 새벽에 눈떠서도 이불 밖으로 나오려면 마누라 엉덩이 한 번 더 만지기보다 담배를 한두 개비쯤 피운 후에야 기신했다. 세월이 같은 세월이 아니다. 세월호처럼 뒤집어졌다. 세상이 바다 속인 양 숨 막혀서라도 담배연기를 낼 법한데 심심초 한 대 댕기는 데도 온통 난리들이다. 너무하다. 머리맡이 아니라 거실로, 거실에서 이동해 베란다로 패잔병처럼 피워도 아파트 한 동이 담배 냄새로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마냥 엄살궂은 나라는 없다. 옛날에는 기침 전에 새벽담배 피워도 그러려니 하며 살던 여편네들이 심지어 내 마누라도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궁금하다. 속 보인다. 속 보여.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식후 불연이면 즉사는 물론 어른티를 내며 계집을 품고 싶어서라도 입에 가져가던 담배. 지금은 법원 발품 팔 거 없이 이혼감이다. 세상 모두들 좋아졌다고 이구동성이지만 인심은 조석변이듯이 언제 또 개벽할지 모른다.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시원하게 연기를 내뿜어본다. 상상해도 즐거운 그 연기는 구름처럼 흩어져 하늘로 가 비를 뿌리고 파초 잎에 떨어져 빗방울 듣는 소리에 저절로 장단 맞춘다. 먹고 피우고 마시고 하는 일 중에 우리 마음을 짚어 대신해 주는 것이 무엇 있으랴. 속상해서 기뻐서 무료해서 피우고 씹는 담배. 그래서 우리는 그 향기와 맛에 지독하게 인이 박인다. 너무 괄시를 말아라. 장미도 가시 없는 장미가 있듯이 언제 또 담배 못 피우는 사람이 사람 축에 못 끼는 날도 있으리라.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주위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이 없기에 담배 때문에 말씨름 할일은 없다. 솔직히 길 가다가 담배를 피는 사람을 스칠 때의 그 냄새와 옷에 배인 담배냄새가 역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지날 때는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근데 생각해 보니, 점점 흡연구역이 줄어들고, 금연이 어느 정도 일상화 되다보니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갈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답답한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시인은 아마도 애연가이리라. 그러기에 담배를 피우는 게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먹고 피우고 마시고 하는 일 중에 / 우리 마음을 짚어 대신해 주는 것"을 담배 피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애연가들은 특히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담배를 피우면 그 연기에 속상한 일까지 날려보낸다고 착각을 한단다. 하지만, 그런다고 속상한 일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담배를 빌어서 잠시 마음의 위안을 받았을 뿐이다. 시인은 "담배 못 피우는 사람이 사람 축에 못 끼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절대 그럴 날은 없을 것같다. 담배갑에 끔찍한 경고그림을 그려서 내놓는 세상인데 천지가 개벽한들 시인이 원하는 날이 어찌 올까. 세상 일에 장담은 못하는 거지만, 이 일만은 내가 감히 장담한다. ㅎㅎ

 

 

소박한 밥상

 

회혼까지 가자던 아내의 시간이 멈췄다.

죽지 못해서

혼자 차려 먹는 밥상

 

밥과 국

누군가 혼자 산다고 보내준 김치.

멸치꽈리고추볶음

생일처럼 더해 먹는 가지나 호박 무침.

 

밥 한술 입에 떠 넣고

오물거리는 내 몰골 너무 빈티 나

숟가락 탁 놓고 연극처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면

박사보다 더 높은 게 밥사라며

곡기 끊으면 죽는다고 걱정해주면

그래 내 일찍 죽어

마누라 곁에 가려고 그런다

불경 읽듯이 되뇌다가도

하기야 그 말이 옳긴 옳지.

 

차라리 무슨 교회의

천사무료급식소에나 가 밥을 빌까.

그 짓도 죽는 날까지 못할 거 같고

 

고작 위로 아닌 위로는

멸치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남해 죽방림 멸치인데 하며

젓가락을 넣었다 뺐다 한다.

 

회혼이라면 결혼 60주년을 일컫는데, 아마도 60주년을 앞두고 부인께서 가셨나보다. 50년은 넘기셨다는 것이니 이 정도면 어쨌든 천생연분이신 것 같다. 천생연분의 부인을 먼저 보내고 혼자서 사는 늙은 홀아비가 밥상을 차리고 살기 위해서 먹으려니 얼마나 처량하고 입맛이 없을까. 그래도 김치를 보내주는 누군가가 있고, "곡기 끊으면 죽는다고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으니 시인은 마냥 외롭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는 / 남해 죽방림 멸치"로 위로하며 "젓가락을 넣었다 뺐다"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쓸쓸한 웃음과 함께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양두구육이란 한자 성어를

깨친 것이 중학교 2,3학년쯤일까.

어쩌면 대학 들어와서일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먹어보지도 않고

고사성어부터 알은 것이요,

양 대가리가 얼마나 맛있으면

개고기를 팔면서 양 머리를 판다고

간판을 걸었느냐는 거였다.

그 양 머리를 몽골에서 시식한다.

입에 대기는 해야겠는데

도마 위에 통째로 나온 대갈통을

어찌 먹어야 하는지? 입에 가기 전에

짧은 기도가 필요한 건 아닌지?

이 양 머리는 참수되면서

칼의 날카로운 위로를

숨 거두는 순간까지 편안히 받았는지?

칼 쥔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세상의 푸른 들판을 보며 살던 눈은

부드럽게 감게 해주었는지?

양 머리는 순하기로 죽어서도

마호메트의 머리 같다.

울란바타르에서 테르지로 어디로

나를 안내하며 다닌 안내원이

한참 쩔쩔매는 내 꼴을 보더니

칼을 들어 먹는 길을 안내해준다.

양두구육이 아닌 양두를

몽골의 들판을 헤매는 피비린내 나는

이리의 이빨로 뜯어봤다.

맛을 묻지를 마라.

일생 처음 뜯는 이빨에

하자(瑕疵)와 같은 야생의 피가 묻었다.

 

"양두구육"이란 한자성어를 나도 중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고깃집에서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라는 한자 그대로를 해석한 뒤에, 숨겨진 의미로는 겉으로 그럴싸한척 하지만 실제는 볼품없는 것을 팔 때를 비유한 것으롤 배웠었다. 근데 시인의 시를 읽고 보니, 양머리가 엄청 맛있고 귀한 요리인가 보다. 우리나라에서 고사 지낼 때, 돼지머리를 삶아서 내놓거나, 잔칫날에 돼지머리나 소머리의 고기를 삶아서 편육으로 내놓는 것처럼 중국이나 몽골 같은 대륙쪽에서는 양머리를 그냥 통째로 놓고 먹나보다. 시인이 양머리를 앞에 두고 쩔쩔 매며 "짧은 기도"와 "날카로운 위로"와 두 눈은 "부드럽게 감"겼는지를 궁금해 하는 모습은 마치 양에게 미안해 하면서 마음으로 애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 식탁 위에 양의 머리가 통째로 덜렁 와서 앉아 있는지... 그래도 거절하지 않고 안내원의 안내대로 "이리의 이빨로 뜯어봤"으니 미식가라고 해야하나,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시인은 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보다. "하자(瑕疵)와 같은 야생의 피"가 이빨에 묻었다고 표현한 것은 그냥 고기가 아닌 양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을까. 맛은 나도 묻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시인 또한 얼떨결에 "일생 처음 뜯어" 본거니 맛을 느낄 겨를은 없었을 것 같다.

 

 

풀밭 위의 식사

 

밥상은 때에 따라 차리고 받지만

늘 그린 필드에 있는 듯하다.

쑥갓, 당근, 양배추, 상치와

이름 모를 잡다한 풀들이 나열돼 있다.

망아지처럼

먼 산 구름 한번 보고 풀잎을 씹는다.

누군가 우리 집 식탁을

풀밭 위의 식사라 칭하듯이

큰 야외 연회장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풀밭 위의 망아지 뒷발질처럼 상쾌하다.

안경 때문이다.

돋보기를 써야만 노안을 극복하고

밥상 위의 풀들의 고유명사와

색이 제대로 보인다.

스무 살 무렵 여자들을 만나듯

풀잎을 보고 식감이 당겨야 먹는다.

식감이 중요한 입이 모텔이다.

색이 없으면 맛이 나지를 않는다.

햇볕 속에서 깔깔대던 소녀 애들의

웃음 결 같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엿보이던

스커트 자락 속 흰 허벅지의 탄력과

풀잎들의 싱싱함이 닮았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불경 한 구절 아는 것이 여기서 빛난다.

 

제목은 인상파 화가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라는 그림이 연상되며 참 낭만적인데, 시ㄹ의 내용을 보면 온통 풀밭식탁이라는 말그대로 "그린필드"를 표현한 시다. 게다가 그것도 잘 안보여서 노안 극복을 위해 돋보기를 쓰고 밥상의 풀들의 색을 제대로 보는 노시인의 모습이 자못 애처롭다. 그런데로 노시인은 여기서도 젊은 여자들을 생각하며 식감을 생각한다. "입이 모텔", "흰 허벅지의 탄력과 / 풀잎들의 싱싱함이 닮았"다는 시인의 능청이 다들 표현하는 얘기임에도 쓸쓸하게 와닿는다. 그것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미련과 더불어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고 "불경 한 구절"을 외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는 무언가에 집착하려는 것을 애써 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시인의 오래 단련된 내공이라면 알고 있는 불경 한 구절 정도만 외우는 것으로도 당분간 왠만한 잡념 쯤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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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서 먹지만, 먹는 것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음식이 음식으로만 끝나게 하질 않는다. 추억이 담긴 음식이나,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에서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즐기기도 하고, 또 하루를 살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한다. 먹는 것에 집착하면 추해 보이기도 하지만, 점점 인간성이 메말라 가고 환경도 오염되면서 갈수록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먹거리는 예전보다 풍부하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 같지만 함부로 사먹을 수는 없으며, 이제는 주린 배를 위한 양식의 개념은 뛰어넘은 것 같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리고, 손님이 오실 때 정성껏 주안상을 마련하던 그 시절은 지금보다 궁핍하고 먹거리가 부족했지만 나눔의 정은 훨씬 가득하게 넘쳐났던 시절이었다. 밖에 나가면 조미료를 듬뿍 넣은 음식들을 파는 식당들이 넘쳐나고, 화학성분의 향료와 색소범벅의 스낵류 등의 먹거리를 파는 편의점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며 이대로 괜찮은 건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한 밥 한그릇에 기도를 올리던 시절, 장사를 해도 내 식구들 먹인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팔던 시절, 먹는 음식으로 장난치면 하늘의 벌을 받는다고 철썩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정을 나누던 시절...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풍요속의 빈곤, 그 자체다. 

모름지기 우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음식을 먹지만, 먹기 전에 가져야 할 태도가 있다. 음식의 재료, 예를 들면 소, 돼지, 닭 등의 동물들과 각종 식물들에 대해서 일차적인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한끼 한끼마다 거기에 속한 생명들에게 일차적인 감사를 가진 후에는, 키우고 가꾼 이들의 땀과 정성에 이차적인 감사를 갖고, 다듬고 볶고 무치고 끓이는 손길의 애틋한 사랑에 다시 삼차적으로 무한 감사를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다면 건강한 살과 피가 되어 하루를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 같다. 또한 시인이 마지막 장에서 당부한 것처럼 음식에 대해, 씹고 먹는 것에 대해 잊고 살았던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면 음식시집에 실린 이 시들이 좀 더 맛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c*****p 2017.01.05. 신고 공감 6 댓글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