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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학교에서 서평쓰기 작업을 통해 작성된 글이다.
헨델에서 헨드릭스까지 [난 아직 책을 덮지 않았다.] “마이클 채넌 정말 이러기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금 단서를 하나씩 흘리고만 있군. 속 시원히 말 좀 해봐 애태우지 말고!” 저자는 수다쟁이며 한량이다. 이 책은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급행열차이기보다는 간이역조차도 다 서는 1박2일 완행열차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불친절한 금자씨 애인해도 되겠다. 영미권 화법을 완전히 뒤집는다. 영어는 두괄식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혹시 한국인?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거참 쉽죠잉~) 엎치락뒤치락하는 역사 , 그 소용돌이 속에 독자를 던져놓고 미끼를 하나씩 던져 주는 저자는 1장을 ‘작곡가와 대중 : 문제제기’라 명했다. 그리고 이 장은 4가지의 생각들로 이루어져있다. 이 생각들은 연관되어있다. 소제목이 맘에 든다고 결코 순서를 지키지 않고 읽어서는 안 된다.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책이다. 첫 번째 ‘대중공간의 탄생과 부르주아 음악 생활의 기원’에서는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장의 형성배경과 과정에 대하여 설명한다.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쉽게 현재의 작곡가위치를 말해주고 작곡가의 대중적 기능, 쉴러가 제시한 두 종류 예술가를 언급한다. 또한 작곡가의 위상은 기보법과 인쇄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명백히 밝히는데 이는 월터 J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맥락과 함께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중 하나가 음악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사이의 상사(相似)관계라고 그리 멀지 않은 지면에서 밝힌다. ‘예술은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며 취미의 대상이다’는 생각이 공론장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된다. 이것은 음악이 더 이상 귀족들의 장신구로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며 공공연주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상징적인 행위이다. 개인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집단적이기도 한 다양한 주관성개념이라고 한 ‘헨델 시대에 있었던 음악비평의 탄생’인 다음 장에서는 결국 1장에서 생긴 인간 주체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공론장이 ‘심미적 취향이 비평의제도화’에 의해 가늠되기 시작하면서 이율배반적인 공론장(잘못된 공론장)을 양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이나 문인들은 대중을 대변함과 동시에 계몽을 해야 했기에 특히 헨델은 그의 적들이 보기엔 잘못된 공론장을 양산시킨 사람이겠지만 결국 다양한 공론장을 생기게 한 사람이며 대중을 대변했다. 결국 저자는 이런 질문을 은근히 던진다. 네가 지금 명곡이라고 듣는 음악이 옳은 음악이 아니라면? 명곡이라는 게 네 생각이니? 사실은 이런 의미가 있는데 어떠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며 이후의 장에서 언급을 한다. 책을 한번 읽고는 명쾌한 생각을 끌어 낼 순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바흐와 샤이베’에 관한 제3장은 결국 바흐가 남고 샤이베는 잊혀진 이유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다시 2장의 문제제기로 돌아가서, 사회의 고정적이고 확정된 생각들이 항상 옳은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지금의 나의 생각들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그 당시 뒤떨어진 작곡가로 취급받았던 바흐는 라이프치히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중세경향의 작곡방식과 근대부르주아 음악의 유행을 흡수한 화성적인 언어로 음악을 만들어, 역사적 시간을 뛰어넘었다. 그리하여 국제적이고 진보적인 작곡가로 오늘날에 남아있다. 결국 제4장 ‘루소와 어릿광대 논쟁’에서 ‘루소는 유럽전체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절대주의를 배격’하고 있다고 추론 할 수 있다. 프랑스 오페라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쉽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감정을 자극(결국 감정을 자극 한다는 것은 자유 여론을 형성 할 수 있는 행동의 원동력이며 절대왕정을 위협 하는 것이다.)하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옹호한다. 절대왕정에 대한 반기, 1789년의 그 태동이 루소가 그리도 옹호했던 것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싶다. 글은 감정을 언급하며 이후 뒷장에서 무엇을 도마에 올릴 것인지 은근히 속내를 비친다. 빛깔이 다른 구슬들을 하나씩 모아 마침내 해가 비추면 프리즘처럼 빛을 발산할 때 만들어지는 그 영상이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 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가지치기를 많이 해서 자칫 큰 줄기를 못 따라 갈 수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천천히 생각하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을 다시 메모해가면서 꼼꼼히 읽는다면 어느새 나무속에서 빠져 나와 건너편 산에서 저자가 있는 숲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책속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책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책이다. 여기저기 흘려 놓은 단서를 주워서 아직 다 찾지 못한 보물 찾으러 이만 가봐야겠다. 아직 나의 책이 열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