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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의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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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는 철학의 역사가 아니다. 철학사가 단지 중요한 철학자들의 삶, 저작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철학사는 형해화된 지식들의 집적과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자체이다.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철학사를 들여다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철학사가 철학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철학사가 곧 "문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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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는 철학의 역사가 아니다. 철학사가 단지 중요한 철학자들의 삶, 저작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철학사는 형해화된 지식들의 집적과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자체이다.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철학사를 들여다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철학사가 철학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철학사가 곧 "문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던져지지 않았다면 철학이라는 행위자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없는 문제를 만들어 던지고 그 문제는 미해결인 채로 후대로 넘어가 계속 연구되면서 동시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문제가 문제를 낳는 철학사속에서 우리는 "철학함"을 배운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 저마다 다른 사고방식을 통한 해결에의 노력을 보면서 "철학함"을 익히게 된다. "철학함을 배운다 함은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함을 배운다는 뜻이다."(칸트) 이성을 스스로 사용한다는 것. 제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 속박의 굴레와 억압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 선입견과 편견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 자연과 세상과 사물과 인간을 새롭게 보는 것. "참된" 어른이 된다는 것. 철학으로 가는 데는 몇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철학의 각 분과를 공부하는 것. 존재론(형이상학)/인식론/윤리학/미학 등등의 굵직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요 철학자들의 주요 저서를 직접 읽는 것이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그리고 비판의 어려움으로 인한 맹목적인 추수의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철학함을 배우는데 썩 좋은 방법이다. 이른바 철학자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철학사를 읽는 방법이 있다. 철학사만큼 생생하게 철학함의 현장을 보여주는 곳은 없다.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철학자들이 무슨 문제로 고민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아니 남이 뭐 하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자신의 잠자고 있는 이성을 한번쯤 흔들어 깨워 계발시키고 싶다면, 철학사속으로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있게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철학사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자 한다면, <서양철학의 파노라마="">를 권한다. 이 책을 붙들고 있으면, 미끄러지기는 하되 적어도 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의 편집장인 저자 앤소니 고틀립은 방대한 철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작업에서 흔히들 빠지기 쉬운 산만성과 애매성을 적절히 극복하고서 거기다 철학이 본질적으로 결하기 쉬운 재미까지 부가하고 있다. 저자도 저자지만, 이 책은 역자가 주는 신뢰감으로 인해 더욱 믿음이 간다. 고대희랍철학에서 현대프랑스철학까지, 서양철학에서 기철학, 불교철학 등의 동양철학까지 광대한 사유의 폭을 보여주고 있는 성실한 철학자 이정우의 번역은 원서를 완벽하게 "장악"한 데서 오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번역서는 역자를 잘 만날때 좋은 책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인 특유의 명쾌한 설명과 역자의 깔끔한 번역이 가장 빛나는 대목은 철학사 공부에서 항상 첫 고비로 다가오는 "무서운 사람"인 파르메니데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일천한 견문탓이겠지만, 이 책만큼 파르메니데스를 명쾌하고 또 게다가 정확하게 설명한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파르메니데스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어 버린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한, 사유다운 사유를 최초로 시작한 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케(세상만물의 근원, 시초 혹은 본질)가 무엇인가?"라는 고대 밀레토스의 철학자 탈레스의 물음과 함께 힘찬 날개짓을 시작한 철학의 역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는 아테네의 등에 소크라테스의 전환적 질문을 만나기 전까지 고공비행을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아르케에 대한 탐구가 끝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제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 사유의 장 안에 인간과 그 사회까지도 포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탈레스의 질문은 계속 살아남아 많은 철학자들으로 하여금 저마다 다른 다양한 답을 말하게 한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다양한 대답들은 세상을 다양한 모습을 빛나게 한다. 철학과 더불어 이 세계는 입체성을 획득한 것이다. 이 입체성속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강렬한 생명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생명감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철학사는 결코 평온하지 않다. 철학사는 단적으로 말해서 세계관 투쟁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보이는 철학사의 장면장면마다 구석에 숨어 있을 정리를 거부하는 저항의 몸짓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세에 눌린 다원론자들은 자신들의 선구적 통찰이 복권되기 위해서 진화론자 찰스 다윈을 만나기까지 무려 2천여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기다림은 결코 묵종이 아니다.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잠언투의 수수께끼로 가득 찬 말들을 들을 수 있는 부분과 파르메니데스가 남긴 유산을 그 나름의 수용과 재창조를 통해서 극복하기 위해 다원론자, 원자론자들 그리고 플라톤이 저마다의 전략과 기획을 제시하는 부분을 좋아한다. 탈레스에서 시작된 자연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여러 대답들 그리고 소피스트, 소크라테스에게 그 업적을 돌려야 할 인간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여러 대답들이 플라톤에게서 나름의 정리된 형태로 제시될 때(여전히 불완전하지만! 불완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는 언제나 거친 흥분뒤의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철학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는 뚜렷한 하나의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자신을 낳아준 철학자를 괴롭히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다른 문제를 낳고, 여러가지 다양한 대답을 잉태하게 한다. 따라서 철학은 쉽사리 (일상적인 의미의) 진보를 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늘 제자리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철학의 탄생시부터 지금까지 철학은 자신이 제기한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준 적은 없다. (명쾌한 해답은 역설적으로 철학의 죽음을 낳는다.) 문제의 반복과 대답의 잉태가 바로 이 "문제"의 소명이다. 결코 완료되지 않을 소명이다. 이러한 운명은 곧 철학 또한 결코 소멸하지 않을 운명임을 암시한다. 문제가 있는 한 철학은 있다. 총 2권인 <서양철학의 파노라마="">는 1권에서 탈레스부터 플라톤까지, 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르네상스기까지(데카르트 이전)를 다룬다.
h*******r 2003.03.1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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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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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원전 6세기 이래 전통적으로 철학자라고 뭉뚱그려 불리던 사람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헬레니즘 시대의 지적 의사들에로, 고대 말기의 비술주의자로부터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들, 논리학에 사로잡힌 초기 중세의 수도승들, 중세의 과학자와 신학자들, 르네상스의 마법사, 몽상가, 문법학자, 기술자들, 그리고 근세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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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원전 6세기 이래 전통적으로 철학자라고 뭉뚱그려 불리던 사람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헬레니즘 시대의 지적 의사들에로, 고대 말기의 비술주의자로부터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들, 논리학에 사로잡힌 초기 중세의 수도승들, 중세의 과학자와 신학자들, 르네상스의 마법사, 몽상가, 문법학자, 기술자들, 그리고 근세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한 인물들을 힘겹게 헤쳐나갔을 때 철학이라는 가장 오래된 학문은 내 눈앞에서 해체되었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물리학, 수학, 사회과학, 인문학으로부터 구분하고자 했던 전통적인 역사들은 심하게 단순화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대학의 구조 내에서 매끈하게 분절될 수 있는 하나의 주제로 한정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그 이유들 중 하나는 그러한 구조 자체가 변해왔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철학은 사실상 신학을 제외한 이론적 지식의 모든 분야들을 포괄했다. 뉴턴의 주제는 ‘자연철학’이었으며, 이 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와 철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폭넓게 포괄했다. 철학적 사유로 불리는 것은 본성상 관례적인 울타리들을 벗어나 유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구 과학은 최초의 철학자들로 알려져 있는 일련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신들에 관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무시하고 대신 사건들의 자연적 원인들을 찾으려는 전복적인 태도를 가졌을 때 창조되었다. 훨씬 후에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이 상당 부분 당시 철학자들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작품들로부터 생겨났다. 똑같은 창조과정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컴퓨터 언어는 오랫동안 철학자들의 가장 지루한 발명품으로 여겨져 왔던 것, 즉 형식 논리학에서 유래했다. 사실 철학의 역사는 정확히 정의된 한 분야의 역사가 아니라 가장 높게 비상했던 인간 정신의 역사이다. 철학에 덧씌워진 이미지, 즉 다른 주제들로부터 고립된 순수 사유의 일종의 명상적인 과학이라는 이미지는 역사적 시각이 불러온 오해이다. 그런 오해는 우리가 과거라는 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의해서, 특히 지식들에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고 파기되고 다시 붙여지는 방식을 통해 형성된다. 철학적 작업은 늘 다른 곳으로 확산되며 다른 분야들에 의해 원용된다. 어제의 도덕철학이 오늘날의 사법적 담론이나 복지경제학이 되고, 어제의 심리철학이 오늘날의 인지과학이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양방향적이다. 다른 분야들에서의 새로운 탐구성과들 역시 철학적 물음의 흥미로운 재료들로서 철학으로 흡수되곤 하는 것이다. 이런 역동적인 경계 이동들이 가져오는 하나의 결과는 철학적 사유가 자칫 무용한 것으로 비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철학적 탐구에 있어 유용하게 된 부분들은 곧 철학이기를 그친다는 사실이다. 철학적 탐구의 어떤 부분이 과학적 정확성과 실용적 가치를 가지게 되면, 그것은 곧 철학적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철학은 늘 사유의 극한에서 형성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철학에는 진전이 없다는 엉뚱한 오해가 생겨난다. - 서양철학의 파노라마 서문, 앤소니 코틀립 철학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모든 철학을 흡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주관적인 견해에 대하여,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던 가정과 전제들을 없애는 작업을 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철학사를 공부하는 목표는 당연히 이러한 방향을 취해야만 한다. 철학적 사유는 늘 사유의 극한을 달린다는 견해. "철학적 탐구에 있어 유용하게 된 부분들은 곧 철학이기를 그친다는 사실... 철학은 늘 사유의 극한에서 형성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은 언제나 사유의 변방에서, 아방가르드적인 탐험정신이 깃든 행위일것이다. 이 책은 고대 철학자들을 서술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위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현대와의 관련은 물론이고 사유가 내포하고 있던 여러 갈래의 가능성에 대하여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다. 철학의 초심자 혹은 전공자라 해도 새로운 측면들을 깨달을 수 있는 도서이다. ..... “기술자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인간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사람이고“

[인상깊은구절]
"철학적 탐구에 있어 유용하게 된 부분들은 곧 철학이기를 그친다는 사실... 철학은 늘 사유의 극한에서 형성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y****0 2005.07.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