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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46
시와 아이와
(최종규 . 2014 - 시골 아재 시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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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위의 자작나무
자작나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돋아나고 있다, 가슴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한번도 채우지 못한 목마름의 샘을 자작나무가 틔우고 있다
자작나무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를 보고 있다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낳고 있다
구겨져서 납작하게 눌린 나무가 잎사귀에 피어서 주름들이 지워지고 있다
내가 자작나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놀아본 사람은 겪었을 것이다.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 한번도 채우지 못한 / 목마름의 샘을’ 틔우고 있는 어린 생명의 경이로움을. 작고 아름다운 자작나무가 된 아이를. 그러니 아비의 ‘구겨져서 납작하게 눌린’ 마음은 ‘잎사귀에 피어서 / 주름들이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비가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노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 ’자작나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그런데 왜 많은 나무 중에 하필 자작나무인가. 자작나무는 은백색의 피부를 가지고 쭉쭉 뻗어나가는 생명력의 나무가 아니던가. 은백색의 피부는 연하디연해 쉽게 벗겨지기조차 하지만 그 약한 피부로 끝내 늘씬하게 뻗어나가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리고 또 무리지어 자라는 모습은 얼마나 멋진 장관을 연출하는지. 그러니 아이의 하얀 피부와 생명의 경이로움은 쉽게 자작나무의 연하디연한 피부와 생명력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아비의 소망도 담아서.
늦본 딸아이’(「시인의 말」)와 지내는 생명의 경이로움만으로 우리의 생이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딸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조차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를테면 ‘네가 와서 / 삼촌이 가셨구나 / 너를 마중하느라고 엄마가 피를 대야로 쏟았구나’(「소주를 먹다」)에서 보는 것처럼 아이의 탄생 뒤에는 너무 일찍 간 형의 죽음이 있고 엄마의 피 쏟음이 있다. 그리하여 ‘똥 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앉아서 / 파래지는 바깥을 보는 시간 / 아이를 향해 희게 웃으며’ (「똥 누는 시간」) 행복한 시간을 즐기기도 하지만 일찍 죽은 형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형이 가슴 어디엔가 통신회로를 묻어두’고서 ‘가끔 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니 ‘나도 가끔은 그 회선으로 전화를 건다’(「수신자 요금부담은 비싸다」). 죽은 형과 통화를 한다. 탄생과 죽음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 경계 없음은 ‘툭, 트’(「오서산」)이기도 하여 다음과 같은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참외 꼭지
여러 날 따지 못했다 때를 놓쳤다 우리 부부는 싸웠고, 참외는 개미가 먹었다 포식을 했다 줄줄 흘러내린 과즙은 까마중이 먹었다 물관과 체관을 지나고 흰 꽃을 지났다 아까 날아오른 두엇은 씨앗 도둑이다 내장으로 가서 곧 항문을 지난 것이다
내 참외를 천지가 먹었다
도둑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