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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일에 치여 시간의 여유도 잃고, 마음의 여유도 잃고, 무척이나 빡빡하다 싶은 생활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최악이다 싶게도, 책 읽을 시간이 없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이럴 때 컴퓨터 책상 바로 옆 책장에 꽂혀있는 시집들은 나에게 많은 양식을 제공해주고,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준다. 작업 중에 짬짬이 한 편 씩 시를 읽노라면, 한창 땡볕에 헥헥 거리다가 시원한 그늘을 발견하고 그 아래로 뛰어들어간 느낌, 혹은 아주 긴긴 목마름 끝에 얻어 마신 시원한 얼음물 같은 청량함이 있다. 요즘 그렇게 내 영혼의 목마름을 위해 틈틈이 마셔준 물이 바로 <계백의 칼>이다.
2008 천상병 시문학상 수상작에 관한 뉴스를 통해 <계백의 칼>이라는 어딘가 장엄한 듯,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한 이 시집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자신의 처자까지 죽여버리고 비장한 결의로 전투에 나갔던 계백의 일화가 떠오르며, 불현듯 그의 칼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을까, 시인은 계백의 칼을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려내었을까, 궁금해졌다. 일단 그 제목으로 인한 호기심에 접하게 된 시집이었는데, 막상 시집을 읽으면서 정작 빠져들었던 것은 책 속에서 이따금 맡아지는 자연의 냄새였다.
풀냄새, 나무냄새, 꽃냄새,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자연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여건상 자연의 품에 자주 안기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이 시집에서 만난 자연의 냄새가 나는 시들 덕분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명상에라도 잠긴 듯 자연을 자주 떠올릴 수 있었다. '패랭이꽃'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많은 시들을 읽으며, 지난해 등하교길에 감상했던 지천으로 깔린 패랭이꽃이 떠올라 한참을 그리움 속을 해메기도 했다. 참 아름다운 꽃들이었는데...어딘가 저장해둔 직접찍은 사진들을 감상해볼까 생각했으나, 지난 번에 컴퓨터 고장으로 하드를 포맷시키며 다 날려버린 기억이 나서 가슴이 아팠다.
제일 앞 부분에 실린 '백제시'들은 불교적인 색채가 짙어, 요즘 안 그래도 계속 가보고 싶다 생각하는 고즈넉한 산사가 더욱 그리워졌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요즘들어 어쩐지 산 속에 자리잡은 절의 모습,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 절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반드시 존재할 것 같은 파아란 하늘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지며, 짬이 나면 꼭 절 나들이를 한 번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요즘 번역하고 있는 것이 불교미술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일 하다 펼쳐든 책에서 다시 부처님을 만나는 구나, 싶은 생각에 이것도 '인연'인가 하였다.
일 하다 지치면 이 시집 펼쳐 읽고 기운을 충전하였던 까닭인지, 이 시집의 표지만 봐도 가슴이 시원해진다.(표지 자체는 깔끔한 흰색-이런 걸 무슨 색이라 하나...미술 감각이 영 꽝인지라 잘 모르겠다-에다 보라색 세로줄 하나 있을 뿐이지만.) 참 좋은 시집을 만났다.
그리고 이 여름에 시원한 귤 한 알 까먹고 싶게 만들었던 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겨울에 만나야 제 맛인 귤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달이 나무에 온다/와서 알을 낳는다//나무의 가지를 붙잡고/산통을 한다//비릿한 양수가 터지면서/달 달 달 달......//달이 땅에 내려와/알을 낳는다.' - '달'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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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한국일보>>에 시 <사색>, <<서울신문>>에 시 <바람 속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한 중견시인으로 문효치 시인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인 문 시인은 시문학상, 동국문학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으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기여해 오고 있다. 그동안 시집 '무령왕의 나무새', '남내리 엽서' 등과 산문집 '시가 있는 길' 등 3권을 냈으니 이번 시집' 계백의 칼' 은 시인의 시집으로는 세번째 이다. 그동안 시인이 살아오면서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들의 흔적들을 시적 언어들로 표현한 시들로 역사시에서 여행시까지의 긴 여정이 담겨있는 시집으로 특히 올해의 천상병 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시집이기도 하다. 10편의 백제시 연작을 비롯한 70여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특히 ‘백제시’의 대가답게 맨 앞에 백제시 10편이 눈에 뛴다.
"그 풀의/그늘에 들어 쉬네//네가 날려 보낸 /편지 속의 작은 새/아직 따뜻한 체온으로/그 그늘 덥히고 있네//가지런한 손등에서/언제나 발돋움으로 서 있던 광택/그 그늘 밝히고 있네//때론 먼 바다 보길도쯤에서 담아온/푸른 파도 한 보자기 풀어 놓고 있네//내 핏줄에 흐르고 있는/서늘함/그 풀의 그늘에 들어 쉬네//"(‘그 풀’)
문효치 시인의 발길은 전국 곳곳에 자취를 남긴다. 그 자취는 단순히 그곳에 가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왔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시인의 작은 사물에 감응하는 능력과 그것이 진정한 즐거움이며 생의 공력임을 일깨워 주는 시로 시인이 추구하는 현실의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 '그 풀’이다. .
"그가 벤 것은 / 적의 목이 아니다 // 햇빛 속에도 피가 있어 / 해 속의 피를 잘라내어 / 하늘과 땅 사이 / 황산벌 위에 물들이고 // 스러져가는 / 하루의 목숨을 / 꽃수 놓듯 그려 놓았으니 // 일몰하였으되 / 그 하늘 언제나 / 꽃수의 꽃물로 가득하여 밝은데 / 이를 어찌 칼이라 하랴."('계백의 칼')
그의 시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황산벌에서의 처절한 결전 끝에 아스라이 사라진 계백장군. 계백의 칼날을 생각나게 한다. 패한 전쟁에 자신의 식솔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계백의 그 칼 말이다. 신경림 시인은 추천사에서 "그의 시들을 읽고 있으면 문득 현실의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가 이 세상과 사물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 시는 기행시이면서도 상투적인 기행으로 떨어지지 않고, 시인의 상상력과 불교 체험의 깊이가 어우러진 '백제시'의 향연"이라면서 "한국시의 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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